최연준은 나석진에게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나석진은 처음에는 사양하는 척하다가 이내 캐리어를 들고 그의 별장으로 들어왔다.두 남자는 카펫 위에 앉아서 한잔했고 강서연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태교 음악을 들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이었는데 선율이 웅장하면서도 고상하고 역동적이었다.하지만 나석진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머리에는 온통 그 광장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집시들은 제대로 된 악기가 없어 교향곡 같은 걸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단지 탬버린 하나와 건반 하나로 커다란 광장을 파티 현장으로 만들었고 주변에 놀라움을 선사했다.‘그 계집애가 롱 원피스를 입고 하늘하늘 춤추는 모습은 어떨까? 목소리가 밤꾀꼬리 같아 노래를 부르면 아주 듣기 좋겠지? 그러면 주변에 보는 남자들도 많을 텐데...’그 생각에 마음이 움찔한 나석진은 저도 모르게 술잔을 꽉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정도였다.“뭐 해요?”최연준이 귀띔했다.“형님 차례예요.”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나석진은 최연준이 조롱 섞인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 카드를 내지 않아도 이미 진 상황이었다.“그만 놀아요.”그는 카드를 휙 던지며 툴툴거렸다. 최연준은 웃으며 강서연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 모두 나석진이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그렇게 걱정되면 가서 보면 되잖아요.”강서연이 피식 웃었다.“손발이 멀쩡하고 잡는 사람도 없는데 왜 안 가요?”“서연이 너 지금 날 내쫓는 거야?”나석진은 그녀를 째려보고는 최연준에게 시선을 옮겼다.“와이프 좀 단속해요.”하지만 최연준은 아예 강서연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와이프 말이 맞아요.”“당신...”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에 외로운 건 솔로뿐이다. 나석진은 약이 바싹 올랐다.“매제는 정말 도움이 안 돼요.”최연준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석진은 술잔을 내려놓더니 피식 웃었다.“아내 바보가 따로 없다니까요.”“네...”최연준은 진지한 척했다
최연준은 순간 흠칫하며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무엇인가?남의 음모 때문에 항공기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고 어릴 적부터 남이 해칠까 늘 경계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옆에 똑똑한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그녀가 매번 이런 목숨이 달린 문제를 낼 때마다 최연준은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얼른 대답해요.”강서연은 작은 얼굴을 그에게 들이밀고 눈을 깜빡이며 웃을 듯 말 듯 했다.“그런 생각 해본 적 있어요, 없어요?”잠깐 생각하던 최연준은 적절히 대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강서연의 손을 덥석 잡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말했다.“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 바로 사라졌어. 왜냐하면... 당신을 사랑하게 된 속도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거든. 그때 내 머릿속에 군대가 들어있었는지 그 생각이 들자마자 군대들이 바로 진압해 버렸어.”최연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러다가 나중에 그 군대가 왜 그리 강했는지 알게 되었어. 군대의 이름이 바로 ‘사랑해’ 였거든.”강서연의 두 볼이 발그스름해졌고 쑥스러워하며 그에게 기댔다. 전에는 한 손으로도 강서연을 안을 수 있었지만 배가 불러오면서 이젠 두 손으로 안아야 했다.최연준이 그녀를 끌어안자 아이가 갑자기 움직였다. 너무나도 신기한 태동에 최연준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여보, 아들이 방금 나에게 인사한 거야?”“네.”갑자기 마음이 울컥하고 코끝이 찡한 강서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아들이 그러는데 나중에 태어난 후에도 당신의 군대를 영원히 머릿속에 남겨둬야 한대요.”“당연하지.”최연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임신한 후로 살이 많이 올라서 볼도 통통해졌다.“여보, 아들이 태어나면 세 식구가 돼.”최연준의 한마디 한마디에 그녀에 대한 사랑이 넘쳐흘렀다.“나중에 아이가 더 생기면 네 식구, 다섯 식구가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아이가 몇 명이든 당신과의 세상을 따로 남겨둘 거야. 그 세상에는
강서연이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지 알 리가 없었던 서지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서지현이 멋쩍게 웃으며 떠보듯 물었다.“언니, 왜 그래요?”강서연은 대답할 새도 없이 그녀를 덥석 잡아당겼다. 곧바로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타일리스트들이 일제히 그녀를 둘러쌌다.“저 짧은 치마를 가져와요.”강서연은 서지현을 자세히 살펴보며 지휘했다.“음... 키가 좀 작네요. 하이힐을 신어도 모델보다 작아요. 그럼 런웨이에 서지 말고 꽃마차에 앉아서 현장을 한 바퀴 돌게 하죠.”“좋은 생각이에요, 사모님.”“그리고 메이크업은 너무 진하게 하지 말아요.”서지현의 미모 자체가 한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 얼굴이라 메이크업이 진하면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덮어버릴 수 있다.메이크업 아티스트는 강서연의 분부대로 바로 움직였다. 스타일리스트도 옷을 가져와 서지현의 몸에 대고 어림잡아 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서지현의 키가 크진 않았지만 몸매는 좋았다. 글래머한 가슴에 가느다란 허리, 그리고 다리가 길어서 비율이 아주 완벽했다. 심지어 전문 모델보다도 더 나은 것 같았다.디자이너의 눈에 그녀는 걸어 다니는 옷걸이와도 같았다. 다만 사이즈가 좀 작을 뿐.“사모님, 이분이 일어서지만 않는다면 런칭쇼는 계속할 수 있어요. 이 짧은 드레스를 원래는 다른 모델에게 입히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모델이 입으면 너무 노출이 심해서 런칭쇼 주제와 어울리지 않을까 봐 망설였었는데 지금 그 문제가 해결됐네요.”강서연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이번 런칭쇼의 주제는 낭만과 감미로움이기에 노출이 너무 심해선 안 된다. 서지현이 꽃마차에 앉아 맨 마지막에 등장했다가 현장을 한 바퀴 돌면 완벽하게 막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강서연과 달리 서지현이 긴장해 하기 시작했다.“언... 언니, 대체 뭘 어쩌려는 거예요? 저...”“뭘 어쩌려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강서연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를 거울 앞으로 데려가 앉히고는 거울 속의 그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다른 모델을 찾을 수 없다면 아쉽지만 마지막 코너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강서연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스태프가 필요 없는 도구가 담긴 박스 하나를 옮기고 있었다. 그 순간 강서연의 눈에 마침 펀칭 가면 하나가 들어왔다.“그건 뭐예요?”강서연이 다가가 가면을 꺼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이었는데 펀칭 무늬가 복고적이면서도 우아했고 쓰면 얼굴을 절반 정도 가릴 수 있었다.“극단에서 빌려온 도구들이에요.”이효연이 설명했다.“배우들이 셰익스피어 연극을 할 때 쓰던 거래요. 그리고 이 가면도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이에요.”이효연은 상자에서 다른 가면을 꺼냈다.“사모님, 이 두 개가 한 쌍인데 남녀 주인공이 쓰는 거예요. 엄청 예쁘죠? 위에 보석도 박혀있어요.”두 가면을 손에 쥔 강서연은 심장이 터져 나올 듯이 쿵쾅거렸다.아주 생동감이 넘치는 가면이었고 박힌 보석들이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거기에 사파이어까지 더해지니 한껏 더 우아해 보였다.강서연이 서지현에게 가면을 씌워주자 주변의 디자이너들이 일제히 감탄을 쏟아냈다.그때 마침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석진은 가면은 쓴 서지현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왜 그래요?”강서연이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웃었다.“왜 넋이 나간 표정이에요?”나석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예쁘지 않아요?”강서연이 서지현의 옆으로 다가갔다.“내 눈에는 너무 예뻐요. 가면으로 살짝 가리면 남들이 지현 씨가 누군지 모르니까 신비함이 배가 돼서 더 좋은 것 같아요. 지현 씨가 가면을 쓰고 꽃이 가득한 꽃마차에 앉아있으면 낭만과 감미로움이라는 런칭쇼의 주제와도 어울리고요.”서지현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면을 쓴다면 강서연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의 표정이...그녀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강서연을 쳐다보았다. 강서연도 어이없어하며 나석진을 꽉 꼬집었다.“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곧 무대에 올라가는데!”“쟤를 그냥 이렇게... 내보내려고?”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나석진은 입술만 적실 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서지현은 곧 무대에 오를 생각에 떨리면서도 설렜다. 가면을 쓰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비춰보곤 했다.런칭쇼 시작까지 10분 남짓 남았다.강서연은 서지현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가볍게 웃었다.“무서워하지 말아요. 맨 마지막 등장이고 꽃마차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면 돼요.”“네.”“나도 꽃마차에 탈래.”나석진이 불쑥 한마디 했다. 그러고는 놀란 강서연을 뒤로 한 채 도구 상자에서 서지현이 쓴 가면과 커플인 다른 가면을 꺼내 얼굴에 썼다.“장난 그만 해요.”강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꽃마차 코너에 남자 모델을 앉힐 계획이 없었다고요...”“지금이라도 더 추가하면 되지.”“오빠...”나석진은 꽃마차에 타고 싶은 게 아니라 꽃마차를 타야 하는 그 사람이 걱정돼서였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는 걸 막으려는 속셈인 게 분명했다.나석진이 다짜고짜 서지현을 끌고 가자 강서연은 손에 식은땀을 쥐었다.꽃마차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 곱슬머리의 소녀가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꽃마차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녀 뒤로 훤칠한 키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절대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가 얼굴에 선명했다.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중세기 유럽의 공주와 충성심이 넘치는 기사 같았다. 게다가 가면과 치마의 자수가 한데 어우러져 신비감을 더했다.이 코너는 생각지도 못한 효과를 이루었다.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고 저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런칭쇼의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강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최연준에게 전화하여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여보, 런칭쇼를 성공적으로 마쳤어요.”휴대 전화 너머로 최연준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여보가 해낼 줄 알았다니까.”“당신 쪽은 어떻게 됐어요? 다 조사했어요?”“당연하지. 난 슈퍼맨이잖아. 슈퍼맨이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어?”“그럼 난 잠깐 쉬어도 되겠죠?”강서연이 익살스럽게 웃었다.“나머지 일은 우리 슈퍼맨에게 전부
“이 데이터들은 이번 패션 위크 오더 통계표와 런칭쇼의 현황을 기록한 것들입니다.”최연준이 진중하게 말했다.“같은 업계 경쟁 상대와 비교하면 우리 회사 방직품과 패션 영역의 이윤이 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이 브랜드들은 연예인들에게 드레스를 협찬할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 황실의 맞춤 제작도 맡고 있어요.”이사들이 저마다 환하게 웃으며 최연준을 칭찬했다.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김씨 가문 영감에게 아부하기 위해서였다.김자옥이 잊지 않고 두어 마디 했다.“이게 연준이의 공로만은 아니에요. 우리 연준이가 팔자가 좋아서 내조 잘하는 아내를 만나서 그래요. 하하... 이번 패션 프로젝트는 서연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나서서 진행한 거예요.”“맞아요, 맞아요.”눈치 빠른 한 이사가 바로 맞장구를 쳤다.“저희도 사모님을 만났었는데 다정하면서도 대범했고 일도 분별 있게 잘 처리하시더라고요. 김 대표님의 모습과 아주 많이 닮았어요.”“맞아요. 김 대표님이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며느리가 아니라 친딸인 줄 알았을걸요?”“하하...”김자옥의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최연준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 어머니를 쳐다보았다.‘나 지금 중요한 일을 얘기하고 있잖아요. 아직 손미현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왜 방해나 하고 그래요?’“콜록콜록!”최연준이 기침하며 눈치를 주자 김자옥은 바로 웃음을 거두어들이고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를 취했다.“데이터는 다들 보셨죠?”최연준은 위엄이 넘치는 모습으로 다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사실 패션 프로젝트가 오늘 같은 성과를 이루는 과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어요. 저희 아내가 임신 6개월이 넘은 몸을 이끌고 직접 프로젝트를 준비했고 디테일 하나하나 꼼꼼하게 신경 썼어요. 누군가 중간에서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겁니다.”최연준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손미현을 힐끔거렸다.“외숙모.”최연준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싸늘하게 웃었다.“제 말이 맞죠?”“뭐?”손미현의
손미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김유정이 런칭쇼를 망치겠다고 할 때 손미현은 동의하지 않았다. 김씨 가문에 시집온 지 오래되었기에 최연준의 성격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요행을 바란 건 사실이다. 어쨌거나 그녀의 손에 김성주라는 카드가 있으니까. 하여 김유정이 무엇을 하든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그런데 김유정의 계획이 성공하기는커녕 되레 강서연이 기선을 제압하게 했다. 기상천외한 런칭쇼를 통하여 김중 그룹은 패션계에서 입지를 굳혔고 모든 공로가 강서연에게로 돌아갔다.손미현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눈알을 굴리더니 웃는 낯으로 최연준에게 말했다.“연준아,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허... 외숙모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 봐. 젊은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걸 보면. 그 뭐야, 네 삼촌이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가 볼게. 우린...”손미현이 김성주를 잡아끌고 일어나려던 그때 최연준이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자 회의실 주변에 있던 흑인 경호원들이 손미현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경호원은 두툼하고 커다란 손으로 손미현의 어깨를 꾹 눌렀다. 겁에 질린 그녀는 꼼짝달싹도 못 했다.“연준아, 이게 지금...”“더 까발려야 인정하겠어요?”최연준이 차가운 눈빛으로 테이블 위의 서류를 흘겨보았다.“이 증거로도 부족하다면 증인도 있어요.”회의실 대문이 열리자 우람한 체격의 경호원들 뒤로 두 남자가 벌벌 떨며 들어왔다.이사회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두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은 CCTV 속 가위로 드레스를 자르던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모 유명 브랜드의 전속 모델이었다가 런칭쇼 당일에 갑자기 계약을 해지한 사람이었다.손미현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핏기라곤 없었고 옆에 있는 김성주를 미친 듯이 잡아당겼다.최연준이 씩 웃자 비서는 그의 뜻을 바로 알아채고 손을 흔들었다. 겁에 질린 두 사람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사실을 곧이곧대로 실토했다.김씨 가문 영감의 낯빛
그런데 어른이 된 지금은 왜... 모든 게 다 바뀐 걸까?“연준아.”김성주가 안절부절못했다.“미현이에게 이러지 마. 미현이는... 네 외숙모야. 좋게 좋게 말로 하면 안 돼? 네 외숙모도 저 두 사람에게 모함당했을 거야.”최연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두 눈에 그늘이 스쳤다.김자옥은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 외할아버지가 마음이 약해지지 않더라고 어머니가 어릴 적의 사고 때문에 김성주에게 죄책감이 들어 망설일 것이다.손미현은 김성주에게 기댄 채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울었다.“난 몰라. 아무튼... 아무튼 우리 와이프 괴롭히지 마!”김성주가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최연준, 네 외숙모의 화를 계속 돋우었다간 절대 가만 안 둬.”최연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은 여전히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삼촌, 정말 죄송해요.”최연준이 김성주를 보며 말했다.“삼촌은 저 여자 때문에 우리 엄마와 여러 번이나 싸웠어요. 그리고 매번 싸울 때마다 엄마는 항상 삼촌에게 져줬죠. 하지만 이번 일은 엄마가 간섭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삼촌이 아내를 감싸고 도는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예요.”최연준의 눈빛이 매우 날카로웠다.“감히 우리 와이프를 건드렸다간 그 누가 됐든 평생 하루도 편한 날이 없게 만들 겁니다.”“너...”“가만히 서서 뭐 해?”최연준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흑인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이사회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은 당장 내쫓아. 그리고 다시는 이 건물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해!”...“아가야, 이 노래 듣기 좋아? 이건 집시들의 노래야. 하하, 내가 부를 줄 아는 노래가 얼마 없지만 이 노래는 그래도 가장 자신 있게 부를 수 있어. 왜 움직이지 않아? 음... 내가 춤추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래? 문제없어. 지금 바로 춤춰줄게.”서지현은 망설임 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이 없어도 마치 꽃밭에서 나풀나풀 춤을 추는 나비처럼 너무도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강서연은 정원에 앉아 까르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