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재는 조용히 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선이 점점 모호해졌다.너무 넋을 잃은 바람에 손에 쥐고 있던 캣 백팩이 땅에 떨어지면서 샴고양이가 몇 번 울부짖더니 발톱으로 백팩을 긁기 시작했다.이때 힘센 팔 하나가 나타나면서 윤정재를 부축했다.윤정재는 어안이 벙벙하여 고개를 돌려 최연준의 복잡한 눈빛과 마주쳤다.“너...”“회장님.”최연준이 백팩을 주워 들고 물었다.“안 들어가세요?”윤정재의 눈시울은 아직도 붉어 있었고 몇 번이나 심호흡하고서야 기분이 안정되었다.최연준은 왠지 모르게 그를 동정했다.사실 강서연이 이 일을 꾸밀 때부터 마음에 걸렸지만, 흥분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차마 방해할 수가 없었다.오늘은 윤정재와 윤문희가 만나는 날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여기서 지켜보고 있었다.방금 윤정재가 충격을 받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니 최연준의 마음속에는 오묘한 감정이 뒤섞였다.최연준이 항공 사고를 당한 후 윤정재는 그에게 특효약을 보내 치료해 주었다.입으로는 임씨 가문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임수정의 병을 치료해 줬다.할아버지가 쓰러지던 날에도 처음에는 모른 척하더니 또 바로 약상자를 들고 최씨 빌라로 달려왔다.강서연을 위해서였지만 최재원의 위기를 모면해 준 것도 사실이다.윤제 그룹이 매년 생산하는 그 값싸고 좋은 약품들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그러고 보니 윤정재는 좋은 사람이다.윤정재의 악행은 아마 윤문희만 몸소 겪었을 것이다.사람은 정말 복잡해서 한두 가지 일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딱지를 붙일 수 없다.어른들의 세계에는 원래 명확한 흑과 백이 존재하지 않으며 대부분은 회색이다.“나...”윤정재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이 메어 있었다.“나는 안 들어갈게. 서연이가 이 고양이를 좋아할 것 같은데.. 네가 대신 전해주렴.”“이 고양이를 좋아하는 건 서연이가 아니에요.”최연준은 의미심장하게 윤정재를 바라보았다.“고양이를 좋아하는 건 저의 장모님 윤문희예
“그래요...”강서연이 크게 실망했다.“회장님께서 다음에 만나자고 했어.”최연준은 장인어른을 대신해 말했다.“다음에 컨디션이 좋아지면 꼭 장모님이랑 만나서 고양이 키우는 법에 관해 얘기할 거야.”“알겠어요.”강서연은 입을 삐죽 내밀고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보며 곤혹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아저씨께서 안 오면 문자라도 보내줬어야지...”“아마 회장님께서 너무 바빠서 잠시 깜빡했을 수도 있어.”최연준은 갑자기 강서연을 품에 안고 그녀의 머리를 주물렀다.강서연은 남자의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공공장소에 있는 강서연은 조금은 민망한 듯 그를 째려보았다.“놔주세요!”“서연아.”“왜 그래요?”최연준은 마음이 짠해 왔다.강서연이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비바람 속에서 진흙탕 길을 걷는 모습을 떠올렸다.강서연이 판잣집에서 몸을 움츠리고 겁을 먹은 모습을 떠올렸다.강서연이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신 시집을 가겠다고 했다는 것, 혼수가 없어서 몰래 최연준의 가보를 팔려고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의연하게 되찾았다는 것...최연준은 강서연을 더 꽉 껴안았고 코끝이 시큰거리는 느낌이 들었다.“서연아.”최연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전에 못 받은 사랑, 앞으로 내가 다 보상해 줄게.”“뜬금없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강서연은 어안이 벙벙했다.최연준은 웃으며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최연준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고 그저 마음이 아플 뿐이다.멀지 않은 곳에 있던 윤문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윤문희는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는데 오늘따라 심장박동수가 매우 비정상적인 것 같다.모든 게 이상한 것 같다......첫 만남이 불발되자 강서연은 두 번째 만남을 계획했다.그러나 최근에 일이 바쁜 데다가 자질구레한 일이 많고 스트레스가 많았기 때문에 이 일을 잠시 뒤로 미뤘다.이날 어진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하 매니저가 강서연과 인사를 나누었다.“좋은 아침이에요.”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매니저님은 항
강서연은 얼마 전 김자옥이 건네준 리스트가 생각났다.위에 적힌 이름은 모두 어진 엔터테인먼트에서 잠재력이 있는 연예인들이고 아직 대스타로 이름을 날리지 않았지만 앞날을 기대할 수 있는 유망주들이다.강서연은 이번 오디션이 리스트에 적힌 연예인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단번에 알아차렸다.“네, 알겠습니다.”강서연이 하 매니저를 보며 말했다.“그런데 한 가지 더 여쭤볼 게 있습니다.”“말씀하세요.”“김 대표님께서 어떻게 이런 사람과 손을 잡을 생각을 했을까요?”강서연이 인상을 찌푸리자 하 매니저가 웃으며 설명했다.“김 대표님께서 같이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시장이 선택한 것이에요. 이번에 투자한 작품은 대작이기 때문에 국제에서 수상하려면 반드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감독을 써야 해요. 오승준이 찍은 영화는 볼품이 없지만 그래도 같은 말을 하고 싶어요... 이번에 운이 좋아서 대상을 한 번 받고 유명해졌어요. 오승준은 카메라 다루는 데에 있어 확실히 재기가 남보다 뛰어나서 곽보미 감독조차도 공개적으로 극찬을 했었어요.”“그렇군요...”강서연이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곽보미가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재능 면에서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그러나 문제는 대부분 사람은 덕망이 지위에 걸맞지 않은 것이다.“서연 씨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하 매니저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이 영화는 공동 제작이어서 감독 한 명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곽 감독도 참여했고 정섭 엔터테인먼트의 지분도 있어서 그쪽에서도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오승준은 그중 한 명일 뿐이지 큰 그림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그럼 다행입니다.”강서연이 웃었다.그녀는 이런 감독을 데려와서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하는 것은 사실이다.며칠 뒤면 연예인 오디션 사전미팅이 열리는데 강서연이 직접 사회를 본다.강서연은 일찌감치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워 사전미팅 당일에 전체 분위기를 컨트롤하고 차분하고 태연하게 오디션 절차부터 소개를 시작
회의는 곧 끝나갔다.심호흡하던 강서연은 갑자기 자신을 계속 지켜보는 이상한 눈빛을 느꼈고 주위를 둘러보던 중 오승준의 웃는 것 같기도, 웃지 않는 것 같기도 하는 표정과 눈이 마주쳤다.그 순간 강서연은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오승준은 강서연을 향해 웃었고 예의상 강서연도 억지로 웃으며 서류를 들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강서연...”오승준은 자리에 앉아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역시 어진 엔터테인먼트답게 실속이 있는 곳이다.오늘 본 여자 연예인은 전부 각자의 매력 포인트가 있지만 오승준이 보기에는 다들 강서연보다 눈부시지 않았다.여러 작품을 촬영하며 만난 미녀들도 불계기수지만 정작 강서연처럼 이목구비도 예쁘고 몸에는 잔잔한 소외감이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웃지 않을 때는 차갑고 도도하며 웃으면 겨울날의 부드러운 햇살 같다.오승준은 강서연의 이름이 귀에 익다고 생각했다.알아보니 강서연 역시 강주 출신이었다. 그제야 강명원에게 두 딸이 있었던 것 같고 그중 한 명이 바로 강서연이었다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오승준은 건물에서 나와 아무도 없는 빈터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형님.”오승준이 웃자 얼굴이 온통 살덩어리로 뒤덮였다.“요새 잘 지내고 있어요?”“대 감독님께서 저한테 연락을 해주다니?”오승준은 전화기 너머에서 히죽히죽 웃었다.오승준과 강명원은 예전부터 아는 사이다. 오승준이 아직 유명하지 않을 때 강명원이 몇 푼을 투자한 덕분에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비록 극장에서 상영되지는 않았지만 일부 성인 사이트에 올려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오승준이 유명해진 이후로는 강명원과 연락을 끊었고 한때 강명원에게 배은망덕이라고 욕을 먹기도 했다.이제 다시 강명원에게 전화를 걸자 오승준은 그의 목소리에서 비꼬아 말하는 것을 들었다.“형님,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오승준이 웃으며 말했다.“제가 요즘 좀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연락을 못 했어요.”“요건만 말하세요. 저랑 이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요
오승준은 회의 중 몰래 찍은 강서연의 사진을 강명원에게 보냈다.선명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강명원은 사진 속의 사람이 강서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금의 강서연은 못난 오리가 백조로 거듭난 것처럼 고귀하고 예쁜 모습으로 자랐다.강명원은 화가 나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고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꺼버렸다.“형님 딸 맞죠?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봐서요.”“맞아요.”강명원은 말투가 덤덤했다.“왜 물어보는 거예요?”“별일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흥.”강명원은 이 궁금함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고 있다.“서연이는 이미 시집갔어요. 요새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어요.”“네?”오승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렇게 젊은 나이에... 시집을 갔다고요? 어느 집안에 시집갔어요?”강명원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범죄자예요!”오승준은 그 말을 듣고 더욱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전화가 끊어질 때까지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오승준은 몇 년 동안 강명원과 왕래하는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예전에 술자리에서 강명원이 술에 취해 하소연했던 적이 기억난다. 어르신들끼리 혼약을 맺었는데 지금은 그 집안이 산산이 흩어져 버렸고 분발하지 않은 아들 하나만 남아 싸움질을 하다가 걸핏하면 감옥에 들어가곤 한다...오승준은 갑자기 마음속으로 기뻐했다.그는 진작부터 강명원이 이 혼외자식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싫어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자기 딸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걸 보고만 있다니!그렇다면 그 여자는 틀림없이 범죄자 남편 곁에서 탈출하기 위해 오성으로 도망쳐온 것이다.자신의 우월한 조건과 재능으로 어진 엔터테인먼트에 채용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강서연은 배경이 없고 심지어 친정집조차도 그저 장식에 불과하다.오승준이 강서연을 어떻게 해도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어쩌면 돈 때문에 굴욕을 참고 그를 따라갈지도 모른다.오승준은 강서연에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고 주름이 가득한
오승준은 갑자기 등 뒤가 으스스한 것을 느꼈다.뒤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었고 녹화 현장에는 질서가 정연했다.오승준은 심호흡을 하고 방금 최연준의 눈빛에 놀랐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멀리 있는 방에서는...“이 쓰레기야?”육경섭은 다리를 꼬고 양가죽 소파에 기대앉아 있다. 손에는 위스키를 반쯤 마신 술잔을 들고 있었고 입가에는 경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최연준이 물었다.“이 사람 아세요?”“오승준이죠?”육경섭이 웃으며 말했다.“전에 강주에 있을 때 아는 형제에게서 들은 적이 있어요.”최연준이 궁금해서 물었다.“어떤 사람이에요?”“그런 영화를 찍는 사람이 무슨 좋은 사람이겠어요!”육경섭은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말했다.“이 사람이 종종 감독의 신분으로 여대생들을 속였다고 들었어요. 많은 예술 학원 학생들이 오승준의 말에 넘어가서 돈도 뜯기고 노출도 당했대요. 그 일을 당한 여학생들은 사회의 여론에 못 이겨 경찰에 신고하지도 못하고 흐지부지됐대요.”“뭐라고요?”배경원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이렇게 역겨운 사람이 있다니! 경섭 형님은 왜 그런 사람을 그냥 놔뒀어요?”육경섭은 가볍게 웃으며 위스키를 가득 채웠다.“그 사람 영화 제작비 누가 대줬는지 알아요?”배경원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육경섭은 최연준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강명원이에요!”최연준은 눈빛이 어두워지고 순간 컵을 쥐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육경섭이 이 사람 이름을 말하지 않았더라면 최연준은 거의 그 존재를 잊어버렸을 것이다.“설마... 강명원이 서연이에게 또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최연준은 경각심을 가지고 말했다.“강명원이 오승준을 보낸 것일까?”“형은 걱정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유찬혁이 최연준을 보며 웃었다.“강명원이 최근에 경제적인 소송을 몇 개 치렀고 그 회사도 망해가서 곧 은행에 넘길 지경이라고 강주 쪽 로펌 사람들에게서 들었어요.”그제야 최연준의 긴장된 얼굴이 겨우 풀렸다.다른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강서연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머리가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여서 향기를 머금고 욕실에서 나왔다.강서연이 남자를 향해 한 번 웃자 최연준의 세상은 순식간에 현란하고 다채로워졌다.“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강서연은 사랑스럽게 최연준 옆에 다가가 두 팔을 그의 허리에 감쌌다.“내가 가서 야식을 만들어 줄게요!”“괜찮아. 지금 배고프지 않아.”최연준의 눈빛은 그윽했고 목소리는 낮고 매혹적이었다.홈웨어의 질감은 부드럽게 강서연의 몸에 밀착되어 있고 불빛 아래에서는 약간의 솜털 같은 질감도 있었다.최연준은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몸 안에 짐승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왜 그래요?”강서연이 물었다.최연준은 말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머리카락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자 욕실로 들어가 헤어드라이어를 꺼내 강서연을 편안하게 소파에 앉히고 자신은 뒤에 서서 머리카락을 말려줬다.최연준의 두 손은 평소에는 강인하고 힘이 세지만 그녀를 대할 때는 항상 부드러웠다.강서연은 따뜻한 바람에 약간 졸음이 몰려왔다.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고 헤어드라이어가 멈추자 최연준의 손이 어깨 위에 얹힌 것을 느꼈다.강서연은 웃으며 최연준의 손을 잡으러 갔고 서로 호흡이 맞게 깍지 손을 꼈다.최연준은 강서연을 끌어올려 품에 안았다.“졸려?”최연준은 총애한 눈빛으로 웃으며 그녀를 안고 침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동작은 부드럽게 큰 침대 위에 놓아 줬다.그다음엔 최연준은 그녀의 위로...강서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마치 잘 익은 복숭아처럼 최연준을 꼬드겼다.그러나 막 입맞춤을 하려던 찰나 강서연이 무언가를 떠올려 급히 최연준을 밀어냈다.최연준이 반응도 하기 전에 품에 안고 있던 사람이 달아났다.“서연아... ”“보여줄 게 있어요!”강서연의 정신은 다른 데에 팔려있는 게 분명했다.최연준은 한숨을 내쉬며 주먹으로 침대를 한 번 치고는 강서연이 돌아올 때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뭘 보여 준다고?”“이거예요!”강서연은 서류 한 장을 건네며 뿌듯하게 웃
“오승준이 이번에 또 이상한 장면을 찍어서 작품 전체에 영향을 미칠까 봐 조사해 봤어요!”강서연은 똘망똘망하게 최연준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우리가 이 영화에 투자한 돈이 얼만데요! 저런 사람 때문에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이름에 먹칠하면 안 돼요! 그래서 뒷조사를 해보고 싶었는데 정말 뭔가를 찾을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역시나 정직하지 않고 상까지도 속아서 받은 거예요!”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유찬혁도 핸드폰으로 자료를 보내왔다.대충 훑어보니 강서연이 알아본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상황이었다. 그 뒤에는 몇 가지가 더 있었는데 바로 그 젊은 감독들의 실명 제보가 통하지 않았던 이유가 적혀있다.당시 오승준은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소란을 피우지 않으려고 너도나도 암암리에 이 뉴스를 덮어버렸다.양심이 있는 극소수의 언론만 이 사실을 폭로했다.하지만 그 매체들은 소형 기업들이라 힘이 없어서 더 많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사실 최연준에게 있어서 이 사람의 표절 여부는 부차적이다.주요하게는 강서연을 바라보는 눈빛이 최연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그는 속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답안이 나왔다.최연준은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더니 손으로 끌어와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여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당신 참 대단해!”강서연은 먼저 멈칫하고는 바로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사업상의 성공은 그녀로 하여금 상당히 성취감을 느끼게 했다.그러나 최연준의 시시각각 쏟아지는 칭찬만이 그녀로 하여금 마음속 깊이 행복하게 만들었다.“당신 언제 이렇게 말을 잘하게 됐어요?”강서연은 두 손을 내밀어 최연준의 얼굴을 잡고 좌우를 보았다.남자는 변함없이 조각상같이 잘생겼고 미간에는 범상치 않은 포스가 풍겼다.이 입은 예전에 비해 많이 달아져서 매일 꿀을 바르고 말하는 것 같았다.“당신은 예전에 말수가 적었어요.”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그래?”“맞아요. 당신은 온종일 뾰로통하게 있었고 신혼 첫날부터 아침밥을 만들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