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는 들었던 다리를 천천히 거두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유지태를 바라봤다.“오늘은 왜 이렇게 오래 걸렸죠?”아무런 진척이 없는데 들어가서 20분이나 있었다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대표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시네요? 윤아 씨에게 진척이 있다면 기뻐하셔야 하는거 아닌가요?” 선우는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유지태를 바라봤다.“그럼 말씀해 보세요, 그 진척에 대해서.”“뭐 특별한 진척은 아닙니다. 이제는 저를 무시하지 않으니 그냥 몇 마디 더 나눈 것뿐이에요.”이를 들은 선우가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혹시 가능하다면 대표님도 상담해 드리고 싶은데.”“무슨 말이죠?”“현재 윤아 씨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 대표님 아니신가요? 윤아 씨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과 소통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선우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지만 윤아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 아니냐는 질문에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켰다.“네, 우리 다 해야 하는 거죠?”유지태는 그들을 한번 쭉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대표님과 정윤 씨면 되겠네요.”유지태가 손으로 선우와 정윤을 가리켰다.둘은 유지태와 함께 떠났다.우진은 거기에 남아 있다가 사람들이 떠나자 노크했다.“윤아 님.”인기척이 없자 우진이 다시 말했다.“잠깐 들어가도 될까요?”“들어오세요.”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윤아는 우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부터 대꾸하고 싶었지만 아직 선우가 밖에 있을까 봐 소리를 내지 않았다. 우진이 한마디 덧붙이고 나서야 윤아는 선우가 밖에 없음을 확인했다.우진이 방에 들어가자 윤아는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오셨어요? 사람들은 다 갔나요?”“네.”우진은 윤아가 좋아하는 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다들 유 선생님과 같이 갔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신 거예요? 오늘은 좀 오래 나누시는 것 같던데.”“음, 어떤 일에 대해서요.”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진을 향해 다가왔다.“비서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말씀해 보세요.”“어제 저한테
우진은 바깥을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잠깐 망설이는 듯 보였다.“괜찮아요.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말씀하세요. 그들이 돌아오면 돌아오는 거죠. 어떻게 대처할지 제게도 생각이 있거든요.”사실 어제 우진과 얘기를 나누고 나서 윤아도 생각을 정리했다. 만약 정말 선우를 설득해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나가야지 너무 수동적으로만 있으면 안 된다.수동적으로 있으면 영원히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테고 우진의 심리적인 문제도 치료되지 않을 것이다.윤아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눈빛이 밝았다. 아마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찾은 듯했다. 본인이 마음을 다잡고 힘을 내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우진은 살아만 있다면 이 모든 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네, 윤아 님이 이미 결정했다면 윤아 님 뜻을 따르겠습니다.”선우와 정윤이 오기 전 우진은 계속 윤아에게 두 아이에 대한 일을 말해줬다.윤아와 수현의 서사에 대해서는 우진도 잘 몰랐다. 하지만 지난 5년간 윤아가 두 아이와 어떻게 지내는지 우진은 종종 옆에서 보았기에 아이에 대해서는 우진도 할말이 많았다.윤아는 아이에 관한 얘기에 큰 흥미를 보였다. 우진이 말주변이 없다고 해도 윤아는 우진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열심히 들었다.윤아는 우진이 들려주는 얘기로 아이들의 성격과 표정과 생김새를 상상했다.생각하면 할수록 윤아의 눈동자는 점점 더 부드러워졌다.우진은 많은 말을 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선우가 돌아오지 않자 우진이 윤아에게 이렇게 말했다.“윤아 님,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할까요. 너무 오래 있은 것 같아요.”우진이 벌써 간다는 말에 윤아는 실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렸다. 조금 더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아쉽긴 했지만 자신과 있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는 생각에 윤아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우진이 가고 윤아는 소파에 앉아 아까 우진이 들려준 두 아이의 소식을 떠올리며 기분이 더 좋아졌다.얼마나 지났을까, 정윤이 돌아왔다.정윤이 들어오는 걸 느끼지 못했던 윤아는 입
하지만 그녀와 함께 하면서 매우 잘 보살펴줬다. 분명 월급을 주는 건 선우인데 정윤은 그녀를 더 향해 있었다.“아참, 윤아 님. 요 며칠 밥 잘 드시고 계신다는 거 아직 대표님께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조금 더 마음 졸이게 하려고요.”마치 윤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사람처럼 정윤이 한마디 보충했다.윤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고마워요.”정윤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윤아가 진짜 웃은 것이다. 정윤은 그 미소에 따라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만 나간다면 윤아 님은 앞으로 문제없겠지?“별말씀을요. 앞으로도 잘 챙겨드릴게요. 매일매일 지금처럼요.”매일?윤아는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린 채 대꾸하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정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여기를 떠나면 이곳에 있는 사람도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다.윤아는 정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윤이 재잘재잘 계속 떠들어댔다.“윤아 님, 처음엔 밥을 계속 안 드시니까 너무 걱정됐어요.”며칠 전 얘기가 나오자 윤아는 할 말이 없었다. 만약 우진이 윤아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으면 정말 계속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두 아이는 어떡할까?생각만 해도 무서웠다.살고 싶은 의지가 없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윤아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가볍게 물었다.“얼마나 얘기한대요? 선우한테 알려줘요. 내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요.”이를 들은 정윤이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윤아 님, 드디어 대표님을 만나주시는 거예요? 전에는 대표님이 오시면 상대하기 싫어하셨잖아요.”낡은 것을 파괴하지 않으면 새것을 세울 수 없다고 여기를 떠나려면 선우를 만나야 했다.정윤이 방을 나섰다. 선우와 유지태의 상담이 끝나면 윤아에게 가보라고 할 생각에 계속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선우는 나오지 않았다. 정윤은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유지태와 뭘 그렇게 오래 얘기하는 거지?약 한 시간을 기다린 정윤은 더
“선우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요?”정윤은 방으로 돌아와 윤아에게 소식을 전했다.“네, 근데 대표님 안색이 조금 이상해 보였어요.”윤아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정윤의 말에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안색이 이상하다고요”정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전체적인 느낌과 표정이 전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았어요.”이를 들은 윤아가 입을 앙다물었다.정윤의 말도 일리가 없지는 않았다. 며칠간 선우를 보지 못했고 윤아도 그런 선우를 신경 쓰지 않았다.대부분 자고 있었기에 선우가 몇 번 찾아와도 못 본 척하기가 일쑤였고 그러면 선우는 가만히 침대맡에 서 있었다.어떤 때는 반 시간, 어떤 때는 한 시간, 또 어떤 때는 오전 내내 서 있었다.하지만 윤아는 모르고 있었고 윤아가 잠에서 깨면 정윤이 알려줬다.그런 선우가 지금 갑자기 윤아를 만나겠다고 한다.설마 요즘 버티다가 지겨워서 끝장을 보려는 건가?...정윤은 윤아에게 새로운 옷을 가져다주었다.윤아의 옷차림은 꽤 캐주얼했다. 하얀 터틀넥 니트에 기모가 있는 바지를 입고 밖엔 회색 코트를 걸쳤다. 긴 머리까지 묶으니 전체적으로 정신이 나 보였다.비록 요 며칠 음식을 조금 먹긴 했어도 몸은 아직 허약했고 날씨가 추운 까닭에 윤아의 얼굴과 입술엔 아직 핏기가 없었다. 아직 완전히 낫지 못한 게 뻔했다.윤아는 걸어가고 싶었지만 선우가 어디서 휠체어를 가지고 왔는지 올라타게 하고는 정윤에게 밀라고 했다.처음에는 내키지 않았다. 멀쩡한데 휠체어가 웬 말인가.하지만 정윤이 이렇게 말했다.“윤아 님, 아마 요 며칠 잘 먹지 못하는 바람에 몸이 허약해져서 걷기엔 힘들까 봐 휠체어를 보낸 것 같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가면 체력을 보존할 수 있을 거예요.” 윤아는 순간 선우의 뜻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윤아는 휠체어에 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 서 있으면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아직 후유증이 채 낫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 휠체어가 있으니 확실히 더 편했다.약속은 저녁이었기에
그러다 우연히 백미러를 본 윤아의 미간이 구겨졌다.뒤를 따라는 까만 세단이 보였다. 윤아가 탄 차를 오랫동안 미행하고 있었다.달리는 차가 많고 도로 상황이 복잡한 데다 밤이라 일반적으로 이를 신경 쓰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하지만 윤아는 섬세했기에 백미러로 여러 번 확인했고 그 차가 계속 따라오고 있음을 발견했다.바짝 따라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따라왔다.윤아는 차 안에 앉은 이들을 힐끔 쳐다봤다. 정윤은 아직도 창가에 기대 별을 올려다보았고 우진도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하고 있었다. 기사님은 운전에 집중했다.차 안에 이 상황을 발견한 사람은 윤아밖에 없었다.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기사님과 정윤은 몰라도 정상인데 우진까지 모른다는 게 이상했다.윤아는 입을 앙다물고 우진에게 알려줄까 생각했지만 차가 길을 또 바꿨다.다시 한번 백미러를 확인했지만 따라오던 차가 사라졌음을 발견했다.윤아는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놓쳐버렸다고? 설마 너무 예민했던 건가?이때 정윤이 말했다.“윤아 님, 도착했어요.”도착했다고?고개를 돌려보니 차는 한 고급 호텔 앞에 멈춰 섰다.우진도 그제야 눈을 떴다.차 문이 열리고 안에 탄 사람들이 내렸다. 기사님은 내리지 않고 주차하러 갔다.윤아는 정윤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앞에 놓인 휠체어를 본 윤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딱히 휠체어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윤아는 입을 앙다물더니 말했다.“이 휠체어…”“윤아 님, 걱정하지 마세요. 옥상에 도착하면 의자가 있으니 그때는 휠체어를 치울 거예요. 그냥 윤아 님 체력 보존을 위해 옥상까지 가는 데에만 사용할 예정입니다.”정윤과 우진의 설득하에 윤아는 다시 휠체어에 올랐고 그들이 밀어주는 대로 움직였다.가는 길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도 윤아는 애써 모른척했다.우진과 정윤은 윤아를 중간에 보호한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윤아는 주변을 빙 들러보더니 창백한 입술을 오므렸다. 너무 이상했다. 아까 들어올 때까지만
이를 들은 우진이 여러 버튼을 눌렀지만 엘리베이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윤아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뒤에 가려져 있었기에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자 무슨 상황인지 대략 알게 되었다.“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거 같은데? 계단으로 가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옆에 다른 엘리베이터가 있나요?”꽤 비싼 호텔 같아 보이는데 엘리베이터가 여러 개 있어야 마땅했다.윤아의 말에 정윤이 대답했다.“안 돼요. 윤아 님. 지금 문이 안 열려서 나갈 수도 없어요.”이렇게 말한 정윤은 혹시나 윤아가 놀랄까 봐 몸을 돌려 이렇게 다독였다.“근데 걱정하지 마세요. 겨우 두 층 전도 올라왔고 요즘 엘리베이터에는 추락 방지 설계가 추가되어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윤아는 정윤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그녀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대도시에 살면서 고층 건물이 많으니 엘리베이터는 꼭 필요한 설비였다.매일 엘리베이터를 타는 윤아는 고장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요즘 엘리베이터의 안전 조치는 꽤 발전했기에 위험할 거라는 걱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요.”윤아가 정윤을 다독였다.“옆에 구조용 엘리베이터가 있으니 한번 연락해 볼게요.”옆에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이렇게 말하더니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남자는 서구적인 외모를 가졌지만 한국어를 구사했고 이에 다른 세 사람이 놀랐다. 우진은 그 남자가 어디론가 전화해 엘리베이터에 고장이 났다고 하자 입술을 오므리더니 그 남자를 몇 번 더 쳐다봤다.“곧 사람을 보내 수리하러 온다며 침착하라고 하네요.”전화를 끊고 남자는 세 사람이 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웃었다.“제가 한국어를 하니 신기한 모양이군요. 전에 한국에서 교환 생으로 있을 때 한국어를 배울 수 있게 되었죠.”윤아는 그 말을 듣고도 별생각이 없었지만 정윤이 흥분하며 그 남자와 얘기를 나누었다.약 2분이 지나자 엘리베이터를 수리하러 온 사람들의
“고마워요.”윤아는 오늘 정말 기력이 별로 없었기에 부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우진은 그 남자와 함께 윤아를 들어 올렸다. 위에 닿을 때쯤 그녀를 향해 내민 큰 손 하나가 보였다.그 손은 뼈마디가 선명했고 손가락도 길었다. 손에 낀 은색 반지가 눈에 띄었다.호텔 직원의 손이 이 정도로 예쁘다고?기억은 없지만 전에 탄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을 때 수리공의 손이 이 정도로 예뻤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이상하다고 생각한 윤아는 손을 내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뭔가에 홀린 듯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하지만 손이 닿은 찰나 자신을 향해 내밀었던 큰 손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고 뜨거운 체온이 아무 예고 없이 윤아의 손에 전달됐다.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 손은 힘이 매우 셌고 냉큼 그녀의 손목을 잡아 위로 끌어올렸다.윤아는 그 힘을 빌려 올라가면서도 자꾸만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올라간 다음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는 가느다란 윤아의 허리를 휘감더니 그녀를 안아서 들어 올렸다.그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뭔가를 잡으려고 손을 위로 올렸다.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하고 나서야 윤아는 자신이 상대의 목을 휘감고 얼굴을 그의 품속에 파묻고 있음을 발견했다.낯설지만 익숙한 냄새가 윤아의 코를 자극했다.윤아가 고개를 들어 누군지 확인하려 했지만 그 남자는 윤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가자!”냉정한 말투가 윤아의 귀청을 때렸다. 목소리가 익숙했다.윤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상대가 안고 달리는 바람에 상대의 목을 감고 있던 손을 내리지 못했다.익숙한 상황이 여러 개 겹치자 윤아는 뭔가 집히는 게 있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시야에 들어온 건 조각 같은 턱이었다. 그 턱에는 조급하게 한 면도로 채 깎이지 않은 수염이 보였다. 곧이어 오뚝한 코와 차가운 눈매, 깔끔하게 정리한 짧은 머리가 보였다.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윤아는 심장이 떨려왔다.전에 핸드폰으로 사진을 검색할 때 멀리서 찍은 사진 한 장밖에 찾지 못했고 그
수현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중에는 민재도 보였다.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윤아에게 물었다.“윤아 님, 혹시 다리를 다치신 건가요?”이를 들은 수현이 윤아의 다리를 한번 쓱 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그녀를 안고 달리면서 길도 봐야 하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일단 이 얘기는 넣어두고 여기에서 벗어나면 병원에 가보자.”수현은 이렇게 말하더니 윤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마치 그녀를 품속에 묶으려는 것 같았다.윤아는 수현에게 잠깐만이라고 몇 번이나 외쳤지만 수현은 마치 듣지 못한 듯 그녀를 안고 성큼성큼 걸어갈 뿐이었다.그녀가 여기 나타날 것이라는 걸 사전에 알기라도 한 것처럼 호텔의 다른 쪽 길도 마련해 놓았기에 가는 길에 막는 사람이 없었고 그녀는 그렇게 순조롭게 차에 올라탔다.역시 아까 윤아가 봤던 그 까만 세단이 맞았다.하지만 아까 길목을 건너올 때 이 차는 분명 다른 길로 갔는데 언제 다시 돌아온 거지? 속도가 이렇게 빠르다고?차에 오른 수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가자.”엔진소리와 함께 차에 시동이 걸렸고 그 뒤로 차가 가로로 줄을 지어 달려왔다.자리에 앉아 있는 윤아는 정윤과 우진을 거기에 놓고 온 게 생각나 자기도 모르게 뒤로 고개를 돌렸다.수현은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윤아의 어깨를 으스러지게 꽉 끌어안았다.“너만 무사하면 돼.”윤아는 턱을 수현의 어깨에 기댔다. 수현이 속삭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수현의 손은 마치 넝쿨처럼 윤아를 단단히 자기 몸에 묶었다.한평생 놓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윤아는 왠지 코가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수현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몸은 절대 속일 수가 없다.그의 손길에도 윤아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그녀가 기억을 잃었을 때 선우는 자신을 그녀의 약혼자라고 소개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무의식중에 선우와의 스킨십을 거부했다.하지만 수현은 아니다.그의 숨결, 포옹, 그리고 체온까지 다 그녀가 그리던 것이었다.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