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선우가 늘 침묵으로 이 모든 걸 감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큰일을 겪을수록 선우는 더 침묵했고 그렇게 침묵하다 보니 오히려 성격은 부드러워지고 사람들을 향해 웃을 줄도 알게 되었다.모든 슬픔과 고통은 그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선우는 아버지의 무책임함과 그 속에서 자아를 잃은 엄마까지 원망했다.선우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 모든 걸 거부하면서도 조금씩 잠식당했고 동화되어 결국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정도까지 오게 되었다.윤아를 놓아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신경 쓰이는 사람이 윤아밖에 없는데 그녀까지 떠나보내면 선우는 아무것도 없었다.아침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지태가 찾아왔다.그는 늘 하던 대로 윤아의 방으로 찾아가 윤아와 얘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소통을 거부하는 환자를 만나면 치료하기 어렵긴 했지만 그래도 유지태는 그만큼 인내심이 있기에 조금씩 해결하기로 했다.고작 며칠이 더 지났을 뿐인데 유지태는 윤아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겼고 꼭 고쳐주고 싶었다.유지태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계속 말이 없던 윤아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유 선생님.”유지태는 아마 윤아가 자기를 부를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지 멈칫했다.“윤아 씨, 드디어 저랑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저한테서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 선우한테 가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네?”유지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저는 아프지 않거든요.”윤아가 한마디 덧붙였다.유지태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윤아 씨, 윤아 씨가 아프다는 게 아니니 긴장할 필요 없어요.”유지태는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그냥 편하게 대화를 나누면 돼요. 자신에게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제 말은 몸이든 정신이든 다 정상이라는 거예요.”유지태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봐 윤아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유지태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윤아를 지켜보며 윤아가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다.“그
선우는 들었던 다리를 천천히 거두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유지태를 바라봤다.“오늘은 왜 이렇게 오래 걸렸죠?”아무런 진척이 없는데 들어가서 20분이나 있었다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대표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시네요? 윤아 씨에게 진척이 있다면 기뻐하셔야 하는거 아닌가요?” 선우는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유지태를 바라봤다.“그럼 말씀해 보세요, 그 진척에 대해서.”“뭐 특별한 진척은 아닙니다. 이제는 저를 무시하지 않으니 그냥 몇 마디 더 나눈 것뿐이에요.”이를 들은 선우가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혹시 가능하다면 대표님도 상담해 드리고 싶은데.”“무슨 말이죠?”“현재 윤아 씨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 대표님 아니신가요? 윤아 씨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과 소통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선우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지만 윤아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 아니냐는 질문에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켰다.“네, 우리 다 해야 하는 거죠?”유지태는 그들을 한번 쭉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대표님과 정윤 씨면 되겠네요.”유지태가 손으로 선우와 정윤을 가리켰다.둘은 유지태와 함께 떠났다.우진은 거기에 남아 있다가 사람들이 떠나자 노크했다.“윤아 님.”인기척이 없자 우진이 다시 말했다.“잠깐 들어가도 될까요?”“들어오세요.”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윤아는 우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부터 대꾸하고 싶었지만 아직 선우가 밖에 있을까 봐 소리를 내지 않았다. 우진이 한마디 덧붙이고 나서야 윤아는 선우가 밖에 없음을 확인했다.우진이 방에 들어가자 윤아는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오셨어요? 사람들은 다 갔나요?”“네.”우진은 윤아가 좋아하는 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다들 유 선생님과 같이 갔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신 거예요? 오늘은 좀 오래 나누시는 것 같던데.”“음, 어떤 일에 대해서요.”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진을 향해 다가왔다.“비서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말씀해 보세요.”“어제 저한테
우진은 바깥을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잠깐 망설이는 듯 보였다.“괜찮아요.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말씀하세요. 그들이 돌아오면 돌아오는 거죠. 어떻게 대처할지 제게도 생각이 있거든요.”사실 어제 우진과 얘기를 나누고 나서 윤아도 생각을 정리했다. 만약 정말 선우를 설득해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나가야지 너무 수동적으로만 있으면 안 된다.수동적으로 있으면 영원히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테고 우진의 심리적인 문제도 치료되지 않을 것이다.윤아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눈빛이 밝았다. 아마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찾은 듯했다. 본인이 마음을 다잡고 힘을 내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우진은 살아만 있다면 이 모든 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네, 윤아 님이 이미 결정했다면 윤아 님 뜻을 따르겠습니다.”선우와 정윤이 오기 전 우진은 계속 윤아에게 두 아이에 대한 일을 말해줬다.윤아와 수현의 서사에 대해서는 우진도 잘 몰랐다. 하지만 지난 5년간 윤아가 두 아이와 어떻게 지내는지 우진은 종종 옆에서 보았기에 아이에 대해서는 우진도 할말이 많았다.윤아는 아이에 관한 얘기에 큰 흥미를 보였다. 우진이 말주변이 없다고 해도 윤아는 우진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열심히 들었다.윤아는 우진이 들려주는 얘기로 아이들의 성격과 표정과 생김새를 상상했다.생각하면 할수록 윤아의 눈동자는 점점 더 부드러워졌다.우진은 많은 말을 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선우가 돌아오지 않자 우진이 윤아에게 이렇게 말했다.“윤아 님,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할까요. 너무 오래 있은 것 같아요.”우진이 벌써 간다는 말에 윤아는 실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렸다. 조금 더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아쉽긴 했지만 자신과 있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는 생각에 윤아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우진이 가고 윤아는 소파에 앉아 아까 우진이 들려준 두 아이의 소식을 떠올리며 기분이 더 좋아졌다.얼마나 지났을까, 정윤이 돌아왔다.정윤이 들어오는 걸 느끼지 못했던 윤아는 입
하지만 그녀와 함께 하면서 매우 잘 보살펴줬다. 분명 월급을 주는 건 선우인데 정윤은 그녀를 더 향해 있었다.“아참, 윤아 님. 요 며칠 밥 잘 드시고 계신다는 거 아직 대표님께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조금 더 마음 졸이게 하려고요.”마치 윤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사람처럼 정윤이 한마디 보충했다.윤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고마워요.”정윤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윤아가 진짜 웃은 것이다. 정윤은 그 미소에 따라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만 나간다면 윤아 님은 앞으로 문제없겠지?“별말씀을요. 앞으로도 잘 챙겨드릴게요. 매일매일 지금처럼요.”매일?윤아는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린 채 대꾸하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정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여기를 떠나면 이곳에 있는 사람도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다.윤아는 정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윤이 재잘재잘 계속 떠들어댔다.“윤아 님, 처음엔 밥을 계속 안 드시니까 너무 걱정됐어요.”며칠 전 얘기가 나오자 윤아는 할 말이 없었다. 만약 우진이 윤아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으면 정말 계속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두 아이는 어떡할까?생각만 해도 무서웠다.살고 싶은 의지가 없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윤아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가볍게 물었다.“얼마나 얘기한대요? 선우한테 알려줘요. 내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요.”이를 들은 정윤이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윤아 님, 드디어 대표님을 만나주시는 거예요? 전에는 대표님이 오시면 상대하기 싫어하셨잖아요.”낡은 것을 파괴하지 않으면 새것을 세울 수 없다고 여기를 떠나려면 선우를 만나야 했다.정윤이 방을 나섰다. 선우와 유지태의 상담이 끝나면 윤아에게 가보라고 할 생각에 계속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선우는 나오지 않았다. 정윤은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유지태와 뭘 그렇게 오래 얘기하는 거지?약 한 시간을 기다린 정윤은 더
“선우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요?”정윤은 방으로 돌아와 윤아에게 소식을 전했다.“네, 근데 대표님 안색이 조금 이상해 보였어요.”윤아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정윤의 말에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안색이 이상하다고요”정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전체적인 느낌과 표정이 전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았어요.”이를 들은 윤아가 입을 앙다물었다.정윤의 말도 일리가 없지는 않았다. 며칠간 선우를 보지 못했고 윤아도 그런 선우를 신경 쓰지 않았다.대부분 자고 있었기에 선우가 몇 번 찾아와도 못 본 척하기가 일쑤였고 그러면 선우는 가만히 침대맡에 서 있었다.어떤 때는 반 시간, 어떤 때는 한 시간, 또 어떤 때는 오전 내내 서 있었다.하지만 윤아는 모르고 있었고 윤아가 잠에서 깨면 정윤이 알려줬다.그런 선우가 지금 갑자기 윤아를 만나겠다고 한다.설마 요즘 버티다가 지겨워서 끝장을 보려는 건가?...정윤은 윤아에게 새로운 옷을 가져다주었다.윤아의 옷차림은 꽤 캐주얼했다. 하얀 터틀넥 니트에 기모가 있는 바지를 입고 밖엔 회색 코트를 걸쳤다. 긴 머리까지 묶으니 전체적으로 정신이 나 보였다.비록 요 며칠 음식을 조금 먹긴 했어도 몸은 아직 허약했고 날씨가 추운 까닭에 윤아의 얼굴과 입술엔 아직 핏기가 없었다. 아직 완전히 낫지 못한 게 뻔했다.윤아는 걸어가고 싶었지만 선우가 어디서 휠체어를 가지고 왔는지 올라타게 하고는 정윤에게 밀라고 했다.처음에는 내키지 않았다. 멀쩡한데 휠체어가 웬 말인가.하지만 정윤이 이렇게 말했다.“윤아 님, 아마 요 며칠 잘 먹지 못하는 바람에 몸이 허약해져서 걷기엔 힘들까 봐 휠체어를 보낸 것 같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가면 체력을 보존할 수 있을 거예요.” 윤아는 순간 선우의 뜻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윤아는 휠체어에 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 서 있으면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아직 후유증이 채 낫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 휠체어가 있으니 확실히 더 편했다.약속은 저녁이었기에
그러다 우연히 백미러를 본 윤아의 미간이 구겨졌다.뒤를 따라는 까만 세단이 보였다. 윤아가 탄 차를 오랫동안 미행하고 있었다.달리는 차가 많고 도로 상황이 복잡한 데다 밤이라 일반적으로 이를 신경 쓰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하지만 윤아는 섬세했기에 백미러로 여러 번 확인했고 그 차가 계속 따라오고 있음을 발견했다.바짝 따라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따라왔다.윤아는 차 안에 앉은 이들을 힐끔 쳐다봤다. 정윤은 아직도 창가에 기대 별을 올려다보았고 우진도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하고 있었다. 기사님은 운전에 집중했다.차 안에 이 상황을 발견한 사람은 윤아밖에 없었다.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기사님과 정윤은 몰라도 정상인데 우진까지 모른다는 게 이상했다.윤아는 입을 앙다물고 우진에게 알려줄까 생각했지만 차가 길을 또 바꿨다.다시 한번 백미러를 확인했지만 따라오던 차가 사라졌음을 발견했다.윤아는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놓쳐버렸다고? 설마 너무 예민했던 건가?이때 정윤이 말했다.“윤아 님, 도착했어요.”도착했다고?고개를 돌려보니 차는 한 고급 호텔 앞에 멈춰 섰다.우진도 그제야 눈을 떴다.차 문이 열리고 안에 탄 사람들이 내렸다. 기사님은 내리지 않고 주차하러 갔다.윤아는 정윤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앞에 놓인 휠체어를 본 윤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딱히 휠체어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윤아는 입을 앙다물더니 말했다.“이 휠체어…”“윤아 님, 걱정하지 마세요. 옥상에 도착하면 의자가 있으니 그때는 휠체어를 치울 거예요. 그냥 윤아 님 체력 보존을 위해 옥상까지 가는 데에만 사용할 예정입니다.”정윤과 우진의 설득하에 윤아는 다시 휠체어에 올랐고 그들이 밀어주는 대로 움직였다.가는 길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도 윤아는 애써 모른척했다.우진과 정윤은 윤아를 중간에 보호한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윤아는 주변을 빙 들러보더니 창백한 입술을 오므렸다. 너무 이상했다. 아까 들어올 때까지만
이를 들은 우진이 여러 버튼을 눌렀지만 엘리베이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윤아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뒤에 가려져 있었기에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자 무슨 상황인지 대략 알게 되었다.“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거 같은데? 계단으로 가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옆에 다른 엘리베이터가 있나요?”꽤 비싼 호텔 같아 보이는데 엘리베이터가 여러 개 있어야 마땅했다.윤아의 말에 정윤이 대답했다.“안 돼요. 윤아 님. 지금 문이 안 열려서 나갈 수도 없어요.”이렇게 말한 정윤은 혹시나 윤아가 놀랄까 봐 몸을 돌려 이렇게 다독였다.“근데 걱정하지 마세요. 겨우 두 층 전도 올라왔고 요즘 엘리베이터에는 추락 방지 설계가 추가되어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윤아는 정윤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그녀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대도시에 살면서 고층 건물이 많으니 엘리베이터는 꼭 필요한 설비였다.매일 엘리베이터를 타는 윤아는 고장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요즘 엘리베이터의 안전 조치는 꽤 발전했기에 위험할 거라는 걱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요.”윤아가 정윤을 다독였다.“옆에 구조용 엘리베이터가 있으니 한번 연락해 볼게요.”옆에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이렇게 말하더니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남자는 서구적인 외모를 가졌지만 한국어를 구사했고 이에 다른 세 사람이 놀랐다. 우진은 그 남자가 어디론가 전화해 엘리베이터에 고장이 났다고 하자 입술을 오므리더니 그 남자를 몇 번 더 쳐다봤다.“곧 사람을 보내 수리하러 온다며 침착하라고 하네요.”전화를 끊고 남자는 세 사람이 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웃었다.“제가 한국어를 하니 신기한 모양이군요. 전에 한국에서 교환 생으로 있을 때 한국어를 배울 수 있게 되었죠.”윤아는 그 말을 듣고도 별생각이 없었지만 정윤이 흥분하며 그 남자와 얘기를 나누었다.약 2분이 지나자 엘리베이터를 수리하러 온 사람들의
“고마워요.”윤아는 오늘 정말 기력이 별로 없었기에 부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우진은 그 남자와 함께 윤아를 들어 올렸다. 위에 닿을 때쯤 그녀를 향해 내민 큰 손 하나가 보였다.그 손은 뼈마디가 선명했고 손가락도 길었다. 손에 낀 은색 반지가 눈에 띄었다.호텔 직원의 손이 이 정도로 예쁘다고?기억은 없지만 전에 탄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을 때 수리공의 손이 이 정도로 예뻤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이상하다고 생각한 윤아는 손을 내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뭔가에 홀린 듯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하지만 손이 닿은 찰나 자신을 향해 내밀었던 큰 손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고 뜨거운 체온이 아무 예고 없이 윤아의 손에 전달됐다.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 손은 힘이 매우 셌고 냉큼 그녀의 손목을 잡아 위로 끌어올렸다.윤아는 그 힘을 빌려 올라가면서도 자꾸만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올라간 다음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는 가느다란 윤아의 허리를 휘감더니 그녀를 안아서 들어 올렸다.그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뭔가를 잡으려고 손을 위로 올렸다.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하고 나서야 윤아는 자신이 상대의 목을 휘감고 얼굴을 그의 품속에 파묻고 있음을 발견했다.낯설지만 익숙한 냄새가 윤아의 코를 자극했다.윤아가 고개를 들어 누군지 확인하려 했지만 그 남자는 윤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가자!”냉정한 말투가 윤아의 귀청을 때렸다. 목소리가 익숙했다.윤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상대가 안고 달리는 바람에 상대의 목을 감고 있던 손을 내리지 못했다.익숙한 상황이 여러 개 겹치자 윤아는 뭔가 집히는 게 있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시야에 들어온 건 조각 같은 턱이었다. 그 턱에는 조급하게 한 면도로 채 깎이지 않은 수염이 보였다. 곧이어 오뚝한 코와 차가운 눈매, 깔끔하게 정리한 짧은 머리가 보였다.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윤아는 심장이 떨려왔다.전에 핸드폰으로 사진을 검색할 때 멀리서 찍은 사진 한 장밖에 찾지 못했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