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시간도 늦었고 경계를 늦춘 틈에 해치워야죠.”“그래요. 빨리 돌아와요.”“여보, 올라가서 먼저 쉬고 있어요. 나 기다리지 말고.”짧은 인사를 끝으로 그는 집을 나섰다. 선희는 멀어져가는 태범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녀는 그저 수현과 윤아가 모두 무사히 돌아와 이 걱정이 가시길 바랄 뿐이다.선희는 이만 돌아가 자려고 했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생각 끝에 그녀는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태범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그가 기다리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선희는 아들과 윤아의 소식을 빨리 알고 싶어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렇게 선희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마침 민재 쪽도 급한 일을 마쳤다.그들이 수현을 데려왔을 때 그는 여전히 의식불명 상태였다. 원래 윤아의 행방에 관해 물으려 했으나 부하들이 그를 말렸다.“이선우라는 사람이 윤아 님을 좋아하니 윤아 님은 아마 무사할 겁니다. 지금 대표님이야말로 목숨이 위험한 상태이니 문제가 생기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윤아 님은 대표님을 구하려고 그곳으로 갔는데 이제 와서 그냥 가자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비서님.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이선우 그 자식은 윤아 님 좋아하고 대표님과는 원수지간이에요. 윤아 님도 그걸 알고 간 거고요. 그리고 보시다시피 그쪽에선 저희 대표님께 인정사정없습니다. 아직도 의식불명이잖습니까. 이미 저쪽에서 의식을 잃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누가 알아요. 서둘러 돌아가지 않아 그사이에 대표님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윤아 님의 노력도 모두 물거품이지 않습니까?”민재는 조금씩 설득을 당했지만당했지만 그래도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수현만 데려가고 윤아를 방치할 생각을 하니 죄책감이 들었다.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녀는 비행기에 오른 직후부터 그들과 연락이 끊겼고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 후 겨우 얻어낸 정보가 병원에 갔다는 소식이었다.윤아가 병원에 있을 때 민재는 원래 그녀와 만날
초인종 소리에 민재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그러나 문을 열어주러 나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는 민재. 생각해 보니 지금은 깊은 밤이고 이 집은 그가 혼자 사는 집이다. 이 시간에 이곳을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민재는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그는 문 쪽으로 다가가지 않고 서재로 돌아가 감시카메라를 확인했다.털이 쭈뼛 서서 복도를 확인한 민재는 문 앞의 누군가를 보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수현의 아버지.민재는 너무 놀라 심장이 벌렁댔다.‘이 야심한 밤에 왜 찾아오신 거지?’게다가 그의 뒤에는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두 명의 남자가 함께 따라왔다.어쩐지 그 통화 이후로 계속 불안하다 했더니 너무 허접한 거짓말이라 바로 들통이 난 모양이다.이제 집 앞까지 찾아왔으니 이를 어쩐담.기다리다 지쳤는지 태범이 짜증스럽게 초인종을 몇 번 더 눌렀다. 기세를 보아 문을 열어주기 전까진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늦은 밤에 계속 시끄럽게 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민재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그는 선 채로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수현과 윤아를 엮어 적당한 핑계를 생각해 낸 후 문열었다.다.그러고는 마치 미리 감시카메라를 확인하지 않은 것처럼 놀란 표정으로 태범을 맞이했다.“회장님. 이 밤에 여긴 어쩐 일로?”민재는 금방 잠에서 깬 것처럼 퉁명스럽게 하품도 한 번 해주면서 말을 건넸다.태범은 그런 민재를 날카롭게 쏘아보더니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말했다.“데려가.”그의 명령에 옆에 있던 남정네들이 다가오더니 민재의 양팔을 붙잡고 포박했다.졸린 척을 하려던 민재는 정신이 번쩍 들어 서둘러 말했다.“회장님. 무슨 일입니까? 왜 이러세요?”“모르는 척 하지 말고 말하게나. 도대체 무슨 일인가?”“아니 회장님.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물으시면 무슨 말씀이신지.”태범은 수현과 윤아의 일을 물으러 온 것이다. 그리고 이딴 실랑이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재가 말할 생각보이자 태범이 손을 휘적였다. 손을 휘적였다.“말할 수 없다 이건가?
이런 상황에 태범에게 붙잡혀가면 수현은 어떡하냔 말이다.민재는 고개를 숙이는 것 말고는 달리 할수있는 일이 없었다.‘대표님, 제가 괜히 걱정 끼쳐드리려는 게 아니라 회장님 내외분께서 정말이지 너무 지나치게 감이 좋으셔서 숨길 수가 없어요.’그는 마음속으로 수현에게 용서를 빈 후 최근 있었던 일은 모조리 태범에게 얘기해줬다.그의 말을 들은 태범은 급격히 표정이 굳더니 순식간에 어두운 기운을 뿜어냈다.“이런 큰일이 생길 때까지 말도 안 하고 뭐 했어!민재는 웃고 넘겨보려 했다.“사모님까지 걱정 끼쳐드릴까 봐 그랬죠. 그리고 원래는 대표님 깨어나신 이후에 대표님 지시대로 할 생각이었습니다. 대표님은 절대로 걱정 끼쳐드릴 얘기는 하지 않으시니까 저도...”“그래서 지금 어디 있는가?”“저와 함께 가시죠. 일단은 진정하시고요.”하지만 태범은 지금까지 그에게 이런 큰일을 숨기고 있었던 일이 분해 민재와 더는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도대체 일이 이렇게 되도록 숨기는 그들의 심리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걱정할까 봐?’‘그럼 진짜로 무슨 일이라도 나야 그때 가서 통보할 작정인가?’‘이미 일이 끝난 뒤에 알게 되면 걱정도 근심도 없을거라 생각하는 건가?’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인재는 불편함에 몸 둘 바를 몰라 했지만 혼이 날 걸 알면서도 그래도 말을 보탰다.“제가 정말 일부러 말씀 안 드린 게 아니거든요. 회장님께서도 이 일을 곧바로 사모님께 말씀드릴 겁니까?”그 말에 태범이 잠시 멈칫했다.그가 대답이 없자 민재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렇다니까요? 회장님도 사모님께 말씀드리기 싫으시잖아요. 이게 다 사랑이고 배려인 거죠. 걱정 할까 봐 말 못 하겠고 그런 거잖아요. 저도 똑같습니다. 대표님이 회장님 얼마나 근심하시는데 괜한 소리 했다가 깨어나절 탓할까봐 그런 거죠.”이 냉소를 터뜨렸다.“그러니까 탓하지 말아달라, 이 말인가?”“아뇨, 아뇨. 제가 어찌 감히. 전 그저 해명을 좀 하려고 했을 뿐
“윤아는?”태범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민재는 면목이 없었다.“윤아 님은... 못 돌아오셨어요.”“?”태범이 민재를 쳐다보며 물었다.“못 돌아오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그의 눈빛에 민재는 압도당하는 듯한 위압감을 느꼈다. 그가 쳐다볼 때면 심지어 벼락에 맞은 듯 몸을 굳어버리기까지 했다.“그게... 윤아 님은 아직 해외에 계십니다.”이렇게 된 이상 더 감출 것도 없었다. 민재는 그동안 윤아에게 있었던 일을 그에게 전부 말해주었다. 태범은 수현의 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윤아의 일까지 들으니 심장이 철렁했다.둘이 같이 있을 줄 알았다. 얼마나 다쳤든 이제 병원에 왔으니 치료를 받으면 모두 다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그런데 지금 돌아온 사람은 수현 한 명뿐이고이고 윤아는 돌아오지 못했다는 거 아닌가?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태범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애써 진정했다. 아직 몸이 멀쩡해서 다행이지, 지금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면 아마 쇼크로 기절했을지도 모른다.“회장님. 진정하세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지금 흥분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한시라도 빨리 해결 방법부터 찾아봐요.”그 말에 태범이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무슨 방법이라도 있나?”민재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아직 생각 중입니다.”그러나 돌아오는 건 태범의 냉소였다.“해결 방안도 없이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거군.”“...”‘됐어, 그냥 혼나지 뭐.’“네, 다 제 잘못입니다. 이제 어떡하면 좋죠?”태범은 아직 혼수상태인 수현을 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다친 거지? 두 쪽 다 사람을 썼을 텐데. 게다가 수현이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좀 했어서 어디 가서 이렇게까지 다치진 않는 아이였는데 말이야.”민재는 고개를 저었다.“저도 그 현장에 없었어서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그쪽 꼼수에 넘어간 것 같습니다.”그 말에 태범은 입을 다물었다.그의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의 비상한 머리 못지않게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선우는 윤아와 수현의 곁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태범도 점점 그 아이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어릴 때 함께 놀던 친구도 어른이 되어서는 각자 일이 바빠 자연스레 멀어지기 마련이다. 모두 다른 걱정거리를 짊어지고 사는 어른들에게 소년 시절의 그 천진난만함은 없으니까.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흐릿해지는 그런 관계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일로 흘러가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태범은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그때의 그 관계가 이런 비극으로 끝을 보게 되다니.태범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이 일은 내가 생각해 보지. 윤아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지?”민재는 그날 공항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얘기했다. 얼추 상황을 전해 들은 태범은 마음속에 판단이 섰다.그의 표정을 본 민재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참, 말씀드릴 일이 하나 더 있는데요.”“말해봐.”“그 거래를 할 때 윤아 님이 신고는 하지 말자고 하셨어요.”“...”“그래서 대표님도 경찰엔 알리지 않고 사적으로 해결하시려 한 거였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멍청한 것.”태범이 이를 악물었다.“이 멍청한 것들!”“저도 윤아 님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 이선우 대표가 저희 대표님께는 안 그래도 윤아 님한테만은 지극정성이었거든요. 도움도 많이 주던 사람이라 측은지심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요.”하지만 태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장사꾼이다. 장사꾼들에게는 이익을 제외하고는 오직 가족뿐이다.지금은 가족이 다쳤으니 더더욱 두고 볼 수만은 없때문에 민재가 그런 말을 말을 할 때도 태범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민재도 그의 낌새를 눈치채고 조심스레 물었다.“그러니 신고는 안 하는 게 좋겠죠?”“흥.”말도 안 된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그를 쳐다봤다.“일이 다 너희 뜻대로 흘러갈 줄 알았겠지? 그랬다면 지금 이 지경이 됐을까?”민재는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뭐라도 얘기하고 싶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태범은 선희의 전화를 받았다.“어떻게 됐어요? 간 지 꽤 오래됐는데 이 비서는 찾았어요? 뭐 좀 알아냈어요?”태범은 말이 없었다.그 순간 차에서 민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일을 알게 된 후에 그녀에게 말할 수 있겠냐던.그때도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다.그리고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자 그는 정말 그녀에게 이 일을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너무 큰 일이라 괜히 말했다가 마음 졸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기 싫었다.생각만 해도 너무 마음이 아프지 않은가.태범은 수현과 민재가 입 다물고 있었던 이유도 조금 짐작이 가는듯했다.‘어휴.’여기까지 생각한 태범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는 고심 끝에 이 일을 선희에게 얘기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전부 말하는 대신 조금만 덜어내기로 했다.“일이 좀 생겨서 내가 가서 처리해야 할 것 같아요. 나 없는 동안... 몸조심하고요.”그러나 선희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무슨 일이길래 당신이 직접 며칠씩이나 시간을 내서 처리한다는 거예요? 무슨 일인데요?”어느새 그녀의 말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여보, 일단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요. 일이 좀 까다롭긴 하지만 내가 잘 처리할 수 있으니 해결되면 그때 얘기해줄게요. 네?”그러나 선희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도대체 무슨 일인데 못 알려주는 거예요? 많이 심각한거예요?”“지금 당장 가서 처리해야 해서 당신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이 대답은 오히려 받아들일 수 있었다.정말 급한 일이라면 그 일을 처리하느라 자기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던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좋아요. 먼저 가서 처리하고 와요. 하지만 약속해요. 급한 일을 처리하고 나면 나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해준다고. 나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봐야겠어요.”“그래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전화를 끊은 후 태범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침내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했다. 당시 이민재 그 녀석이 전화를 끊
선희는 일어나 두 녀석의 방으로 향했다.두 꼬마가 자신의 작은 이불을 끌어안고 쿨쿨 자고, 심지어 자리까지 바꾸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애를 태우던 선희는 마음이 많이 따뜻해졌다.‘정말 귀엽네. 이 녀석들.’그녀는 새삼 윤아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두 명의 아이가 이렇게 잘 자랄 수 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이 두 아이를 혼자 5년 동안 키우며 힘든 상황이 분명 많았을 텐데 그래도 아이들을 이렇게 잘 가르쳤다니.선희는 두 아이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서훈의 눈매는 또렷하고 화려한 게 마치마치 어린 시절의 진야가 보이는 것 같았다정말 너무 닮아서 한 틀에 새겨진 것 같았다.수현이 어렸을 때 그녀의 어머니도 수현이 귀엽게 생겼다며 자주 안아주던 것을 떠올렸다.그때의 수현과 똑 닮은 서훈을 보고도 좋아하실지 모르겠다.그런 생각을 하면서 선희는 자신과 어머니도 오래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들과 함께 살지 않았고 심지어 이 도시에도 살지 않았다. 두 부부는 은퇴 후 도시 오염이 심각하다고 싫어했고 시골에 정원과 마당이 있는 넓은 층을 사서 노후를 보냈다. 마당에서는 각종 화초와 나무를 기르고 한쪽 구석에 야채와 과일, 참외를 조금 심었다. 부부는 해가 진 어느 날의 밤처럼 그렇게 평온하게 지낸다.선희는 일찍이 부모님을 한 번 뵈러 갔다가 두 사람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굳이 더 찾아가 방해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부부는 수현의 결혼에 관해 자주 물어댔고 그가 이혼한 후에는 오랫동안 그 일로 한숨을 쉬기도 했다.그 후 선희는 집에는 거의 내려가지 않았다.그러다 오늘 갑자기 두 아이를 데리고 시골로 그들을 찾아가고 싶어진 것이다. 어쨌든 윤아와 수현도 당분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그녀는 잠시 학교에 휴가를 내고 가서 일주일 동안 놀고 오면 좋겠다 싶었다.마음을 굳힌 후 선희는 기운차게 일어나 옷을 챙겼다.다음날, 훈이와 윤이가 막 일어나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선희가 그들에게 옷을 입히고
“그럼 일어나서 양치질하고 아침 먹고 할머니랑 같이 가자.”힘없이 있던 하윤은 기운이 다 나서 욕실로 가 이를 닦았다.서훈도 하윤의 뒤를 따라갔다.화장실에는 선희가 미리 준비해 둔 칫솔과 칫솔 컵이 있었고 치약까지 이미 짜놓았다.그러자 하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훈과 눈을 마주쳤고 들어오는 선희를 향해고개를 젖혔다.“할머니, 엄마가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앞으로 양치질하고 세수할 때 치약 짜주는 거 안 도와줘도 돼요.”선희는 고사리 같은 두 아이의 손을 보고 조금이나마 더 잘해주고 싶어서 치약을 짜준 거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겨우 보게 된 아이들인데 애지중지할 만도 하지.그런 생각을 할 줄은...“할머니가 잘못했네. 역시 너희 엄마 말이 맞아,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지.”“그래도 오늘은 도와준 거 감사해요.”서훈은 또 말을 바꿨다.그러자 하윤도 말했다.“할머니 감사합니다!”선희는 이 두 녀석이 너무 귀여워 심장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세수를 마치고 두 사람을 데리고 아침 식사를 한 뒤 선희는 하인에게서 차가 준비돼 있고 필요한 물건도 다 옮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두 녀석을 데리고 떠났다.그녀는 아주 빠르게 떠났고 그들이 간 후에 하인들은 집에 남아 멀어져 가는 차를 보고 있었다.“다들 나갔으니 좀 쉬엄쉬엄 일할 수 있겠네요?”“쉿! 이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사모님이 우리에게 주는 월급이 얼만데. 받는 만큼 일을 해야지. 네가 다른 곳에 가서 이것보다 몇 배 더 한다고 해도 월급의 절반도 못 받을 거야.”집주인이 다 떠나면 조금 게으름을 피우려던 하인은 그 말을 듣고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는 게으른 꾀를 부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차가 큰길에 올라서서 나갔을 때 맞은편에서 검은색 대형 승합차 한 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러나 선희는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렇게 두 차는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한편, 선희는 차에 앉아 자신이 특별히 가지고 온 사탕을 펼쳤다.“오늘 시골에 가야 하는데 조금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