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설레는 말에 간호사는 순간 윤아가 부러워졌다.‘여자 친구도 아닌데 이렇게 잘해주는구나. 까야, 진짜 너무 부드러워. 말할 때 목소리도 너무 상냥하고 축하해준 거 고맙대. 세상에 어떻게 이 정도로 다정한 남자가 있지?’선우에게 정신이 팔려 멍하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병실 문이 열렸다.훤칠한 수현이 걸어들어왔다. 그의 주변엔 밖의 차가운 공기가 맴돌고 있었고 잘생긴 얼굴엔 거의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시선은 병상의 여자에게로 쏠렸다.한 바퀴 둘러본 후, 그는 선우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집으로 데려갈게.”집?이 단어를 들었을 때 간호사는 놀랐다.집이라고 하는 걸 보면 이 두 사람이 부부란 소리야?수현의 직설적인 말에 선우는 화내는 대신 여전히 부드럽게 말했다.“데려가는 건 괜찮은데 윤아가 깰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안색이 어두워진 수현.병실에 들어오기 전, 그는 선우가 간호사와 하는 소리를 들었다.지금 당장 윤아를 안고 집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이렇게 한다면 윤아의 휴식을 방해할 거라는 이성이 그를 말렸다.하지만 선우 곁에 계속 두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만약 이렇게 조용히 잠만 잔다면 깨어난 후 데리러 와도 되지만 중도에 깨어나서 선우가 한 헛소리를 들으면 어쩌나 걱정 되었다.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더는 주저하지 않고 의자를 끌어당겨 병상의 반대편으로 가서 선우와 마주 앉았다.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눈앞의 이 남자가 윤아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으므로.결국, 외모가 훤칠한 남자 둘은 이렇게 작은 병상에 둘러 앉아 있었다. 간호사는 링거 바늘을 빼주러 왔다가 이런 장면까지 보게 되어 은근히 짜릿했다.일 때문만 아니라면 이 병실에 계속 남아 어떤 전개가 이어질지 보고 싶었다.안타깝게도 근무 중이라서 얼른 일해야 했다. 그래서 간단하게 인사한 후 간호사는 병실을 떠났다.지금 병실엔 세 사람만 남아있었다.조용한 병실 안, 두 남자의 시선은 허공에서 얽혔
선우는 가볍게 웃었다.“수현아, 널 탓하는 게 아니야. 네가 소영일 위해 나서는 거 이해해. 좋아하니까 그런 거겠지. 지금 내가 윤아에게 마음 있는 것 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야.”수현은 눈썹을 찌푸리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알 것 같았다. 매 한마디마다 강소영을 떠나지 않으면서 외대한 자신과 소영을 함께 묵어두고 그와 윤아를 한편으로 몰고가는 선우의 말을.조용하게 윤아와 자신을 갈라놓는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눈동자에선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목소리도 더 차가워졌다.하지만 가장 힘 빠지는 일은 이때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다는 거다.한참이 지나서야 선우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어, 미안. 아까 너무 직설적이었나?”진수현: “...”오랜 세월동안 친구로 지내면서 처음으로 선우가 치가 떨리게 미웠고 괘씸했다.-윤아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수현과 선우가 병상 양쪽에 앉아 다투고 있었다.입이 열렸다 닫히는 건 똑똑히 보였는데 뭐라 말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그래서 입술 모양으로 대화 내용을 알아보려했으나 쓸모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후, 그녀는 꿈과 현실에 겹쳐진 것을 발견했다. 두 남자는 자신의 양 옆에 앉아있었다. 한명은 왼쪽에 다른 한명은 오른 쪽에 앉아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 두고 있었다.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너무 오래 꿈을 꾸다보니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웠다.분명 깼는데 자신에게 시선조차 닿지 않고 다시 눈을 감은 윤아를 보자 수현은 안색이 안좋아졌다.‘이 정도로 내가 보기 싫은 거야?’하지만 선우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땅꼬맹이, 깼으면 일어나. 자는 척 하지 말고.”수현은 이 친근한 말투와 애칭을 듣자 더 불쾌했다.하지만 예상밖으로 윤아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눈을 떴다.진수현: “...”눈앞에 펼쳐진 이 장면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발견한 후, 그녀는 머리를 감싸고 일어났다.“왜
하지만 수현은 금세 선우의 의도를 알아차렸다.물건을 건네온 후 윤아가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선우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었다.“응, 집에 가서 편히 쉬어.”“그럴게.”수현이 선우를 보는 시선 속엔 어이없다는 정서로 가득했다.왜 예전엔 선우가 이렇게 잘하는지 몰랐지?하지만 수현은 더는 선우를 상대하기 귀찮았다. 그래서 윤아의 외투를 들고 그녀 곁에 다가갔다.윤아는 원래 손을 뻗어 받으려 했었지만, 수현은 그녀의 손을 피했다.심윤아: “?”뜻밖에도 일 초 후, 수현은 이렇게 말했다.“내가 입혀줄게.”“...”‘아니, 왜 갑자기 옷을 입혀주겠다는 건데? 혼자 입으면 안 돼?’그녀가 반응하기 전에 수현인 이미 차갑게 말했다.“손 뻗어봐.”윤아는 거절하고 싶었다. 병실엔 그들 외에 선우만 있었고 그도 그들이 곧 이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선월의 수술도 성공적었고...이건 수현과의 사이가 이미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했다.그러니 이때까지 연기를 할 필요 없었다.하지만 수현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하니 윤아는 결국 거절하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두 남자의 시선 속에서 손을 들어 수현의 말을 따랐다. 그는 허리를 굽혀 윤아에게 외투를 입혀주었다.외투는 인간의 온기에서 떨어진 지 한참 되었기 때문에 지금 매우 차가웠다. 그래서 몸에 닿으니 순간 한기가 솟아올랐다.윤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이걸 본 수현은 멈칫하더니 다시 그녀에게 외투를 벗어주었다.심윤아: “?”‘왜 또 이래?’그 후, 수현은 그녀의 외투를 옆에 던져버리고는 자신의 코트를 벗기 시작했다.심윤아: “...”수현의 의도를 파악하기 전에 그는 벗어놓은 코트를 그녀에게 덮어주었다.옷에선 수현의 온기가 느껴져 매우 따뜻했다.수현이 뭘 했는지 눈치챈 윤아는 동작을 멈추고 멍해 있었다.‘아까 차가워서 떤 걸 보고 자신의 코트를 벗어 나에게 덮어줬단 말이야?’이런 생각을 하며 윤아는 침대에서 내려갔다.
윤아는 정신을 차린 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직도 수현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손을 내려놓았다.하지만 움직이자마자 수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안고 있어.”심윤아: “...”사실 듣고 싶지 않았다.수현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윤아가 손을 놓으려 할 때 그도 그녀를 안고 있던 손의 힘을 살짝 풀었다.반사적으로 윤아는 다시 수현의 목을 끌어안았다.유연하고 하얀 손목이 그의 목을 두르자 선명한 비교가 섰다.자신이 뭘 했는지 의식한 윤아는 안색이 급변했다.그러나 윤아의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진 수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떨어지지 않게 꽉 잡아.”윤아는 이번엔 손을 놀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사색에 잠기면서 가끔 고개를 들어 수현을 보았다.그녀를 안고 있는 수현은 걸을 때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았고 호흡이나 걸음걸이도 아주 안정적이었다.이 각도로 보았을 땐 수현의 매끄럽고 정교한 턱선도 보였다. 그리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얇은 입술도 눈에 들어왔다.알다가도 모르겠다.오늘 그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았을 때, 아니 더 일찍 이미 그에게 감정이 뚝 떨어졌다고 하면 지금의 수현아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곧 이혼할 사이에 이렇게 사람 마음을 간지럽히는 일을 왜 하는지, 도무지 이해 가지 않았다.성민은 물건을 가지고 뒤에서 따라가면서 수현이 윤아를 안고 가는 장면을 보며 얼굴에 웃음을 금치 못했다.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대표님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불러 물건을 들게 하고는 윤아를 안고 나오는 수현을 보니 성민은 앞으로 수현이 소영과 깔끔히 끝내기를 바랐다.미래 진 씨 그룹의 안주인이 바뀌기를 원하지 않았다.성민은 물건을 차에 놓고 수현이 윤아를 안고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는 손을 흔들어 작별했다.돌아가는 길.차에 에어컨을 켰기 때문에 온도는 실외보다 많이 높았다. 윤아는 수현의 코트를 걸치고 조용히 앉아있었다.차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
여기까지 듣자, 윤아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어쩐지 그가 오늘 선우 앞에서 이상하게 행동했더라니, 그녀가 선우를 좋아한다고 오해했었다.그렇구나...그녀에게 작업 건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김칫국 마신 거였다.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눈을 질끈 감고 사정없이 쏘아붙였다.“날 구해준 건 맞지만 고마운 마음 외엔 다른 감정 없어. 수현 씨도 걱정할 필요 없어. 수현 씨 같은 경우는 적은 편이니까.”이 말이 끝나자, 차 안은 순간 조용해졌다.윤아는 설마 너무 심하게 말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도 자신과 선우 사이를 헛다리 짚었는데 이 정도로 말해도 별문제 될 건 없었다.그가 화내든 말든 그녀와는 상관이 없었다.어차피 선월이 수술도 다 받았겠다, 그러니 더 이상 꺼릴 게 없었다.아니나 다를까, 수현은 돌아가는 길 내내 화를 내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현은 윤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주차한 후 윤아는 서둘러 차에서 내리지 않고 물었다.“할머님 지금 어떠셔?”한참 동안 조용히 있다가 입을 연 수현.“괜찮아.”“그런 다행이다. 어느 정도 지켜봐야 해?”“48시간.”이 숫자가 나온 후, 둘은 한동안 침묵했다.이때 모두 그 일을 떠올린 것이다.“그럼...”윤아는 수현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48시간이면 너무 빠듯하니까 사흘 후면 어때?”이 말이 끝나자 수현은 그녀를 보았다.그다지 밝지 않은 차에서 윤아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창백한 입술은 윤아에게 병약미를 가져다주었다.수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품에서 다정하게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지금도 그의 코트를 걸친 채 이혼 신고할 날짜를 상의하고 있다.응당 동의해야 했다.이미 오래전 약속한 일이었으니까. 선월의 수술이 끝나기만 하면 이 쇼윈도 결혼을 끝내자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이유 모를 감정이 마음속에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치 이혼하지 말라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이혼하기만 하면 그는 윤아를 완전
심장 부근이 순간 저려나면서 손끝까지 퍼져갔다.수현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면서 손으로 자기 가슴 부근을 눌렀다.그의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자, 윤아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수현이 창백한 얼굴로 핸들에 기대있는 것을 발견했다.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지내면서 수현은 늘 건강했고 별로 아픈 적도 없었다.처음이었다. 안색이 이렇게 안 좋은 것은.그래서 윤아는 깜짝 놀라 손을 뻗어 수현을 부축했다.“왜 그래? 어디 아파?”저릿한 아픔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윤아가 다가올 때 통증이 오히려 더 심해졌고 마음속의 공허함도 점차 확대되었다.하지만 윤아의 하얗고 작은 얼굴에 새긴 걱정을 보니 이 공허함은 또 다른 감정에 의해 천천히 차고 있었다.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마에는 계속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는데 보기만 해도 아주 괴로운 모습이었다. 윤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핸드폰을 찾으며 말했다.“구급차 부를게.”하지만 핸드폰을 만지기도 전에 그녀의 손목은 수현의 큰 손에 의해 단단히 잡혀 버렸다.그의 손바닥은 매우 뜨거웠고 힘셌는데 마치 불덩이처럼 그녀의 피부에 닿았다.수현은 윤아의 손목을 꽉 붙잡더니 갑자기 그녀에게로 몸을 가까이했다.윤아는 깜짝 놀랐다. 그가 너무 아파서 그녀 쪽으로 쓰러지는 줄 알고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부축했다.하지만 수현은 그녀의 입술과 조금의 거리가 남은 곳에서 멈추었다.어두컴컴한 환경 속에서 그녀는 수현의 그윽한 눈동자를 보았다.계속 통증을 느끼는지 그의 호흡은 매우 혼란했다.하지만 그래도 수현은 윤아의 손을 꽉 붙잡으며 그의 가슴 결에 가져가서 꽉 눌렀다. 마치 이렇게 하면 통증이 나아질 것처럼 말이다.윤아는 고개를 숙여 자신이 손이 닿은 곳을 한눈 보았다. 수현의 심장 부근이었다.그녀는 심지어 수현의 심장이 거세차게 율동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이러는 수현은...한 번도 보지 못했다.“도대체 왜 그래?”고통스러워 보이는데, 왜 또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건지 도무지 이해
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 기대있었다. 아까 통증 때문에 고통스러워한 그는 지금 어두컴컴한 환경 속에서 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윤아도 지금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잘 몰랐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까 수현의 모습에 꽤 놀랐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이토록 고통스러워한 적은 처음이었다.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수현을 훑어보았다.“너 도대체 왜 이래? 설마 불치병이라도 걸린 건 아니지?”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수현은 머리를 들고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윤아를 보았다.“불치병?”그는 피식 웃었다.“왜, 내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거야?”“그러면 왜 병원에 안 가?”분명 아파 보였는데 병원은 또 가기 싫단다. 본인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나?그의 대답을 듣지 못한 윤아는 계속 물어보려고 했지만, 이때 수현이 갑자기 차 문을 열고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가자.”더 말하려고 했지만, 지친 표정으로 한마디도 하기 싫다는 그의 모습을 보니 순간 하기 싫어졌다.하긴, 수현에게 정말 어떤 병세가 있다고 해도 그건 곧 이혼할 아내가 걱정할 게 아니었다.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마음을 굳히고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안전띠를 열고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잠깐만.”그러나 이때 수현이 그녀를 불렀다.이 말을 듣자, 윤아는 고개를 돌렸다.설마 후회했나, 병원에 가겠다고?수현은 차 키를 빼고는 차갑게 말했다.“데려다줄게.”말을 마치고 그는 차 문을 열고 나왔다.수현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는 윤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후, 수현은 윤아 쪽으로 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아를 도와 차 문을 닫은 후, 수현은 몸을 굽혀 윤아를 훌쩍 들어서 안았다.“됐어.”윤아는 무의식적으로 거절했다.“뭘 됐다고 하는데.”수현은 윤아를 힐끔 보더니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오늘 그런 일을 겪고도 혼자 올라 갈 수 있어?”윤아는 몇 걸음밖에 되지 않는데 당연히 혼자 올라
이 말을 끝낸 후, 수현은 속으로 또 한마디를 조용히 읊었다.‘앞으로 다른 사람이 널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하지만 윤아는 수현의 말을 들은 후, 오히려 담담하게 웃었다.“괜찮아. 너도 사람을 찾으려고 그랬던 거잖아. 만약 내가 너였어도 그랬을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이 말에 수현은 쓴웃음을 흘렸다,뭐라고 해야 할까?그의 아내는 참 속이 넓은 사람이었다. 이런 때마저 그가 난감하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걸 보니.하지만 그녀의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는 다른 것을 설명하기도 한다...“됐어. 나도 이제 쉴 거니까 수현 씨도 빨리 쉬어.”계속 이렇게 있다간 두 사람이 나누는 화젯거리가 더 어색해질 거 같아 윤아는 빨리 말을 돌렸다.쉬겠다고 말하는 윤아를 보자 수현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그래, 너 먼저 쉬어. 난 나갔다 올게.”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응. 조심해서 다녀와.”저택을 떠나서 다시 차에 앉았을 때 수현의 눈빛은 더는 숨김이 없었다.가슴 속엔 무언가가 꼭 막혀 있는 것 같았다.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는 담담한 느낌이었다.분명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담담하고 부드럽게 그와 대화하는 윤아. 마치 그에게 아무 원망도 없는 듯 그녀를 지키지 못한 그에게 변명까지 만들어주는 윤아.수현은 윤아가 오히려 예전처럼 자신에게 화라도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따지기를 원했다. 왜 하필 이때 나갔냐고 원망이라도 했으면 좋겠다.하지만 그녀는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한편, 수현이 간 후 소영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벌어진 일과 수현이 자신과 주연이 이 일을 저질렀다고 의심한 것을 알려주었다.오래전, 소영이 수현을 구해줘 진씨 집안의 은인으로 되었을 때부터 강씨 집안은 진 씨네에서 얼마나 많은 비즈니스 혜택을 받았는지 모른다.전에 어렵게 일궈 세운 강 씨네는 어느 순간부터 더 발전하지 못했다. 이 일로 소영의 아버지는 늘 골머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