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 보니 허름한 창고였다. 정신을 차린 심연우는 머리가 무겁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의 손발마저 꽁꽁 묶여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상자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고 곰팡내가 코를 찌르는 것을 보니 여긴 오래전 폐기된 창고 같았다. 이쯤 되니 심연우도 자기를 감금한 사람이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갔다. 몸에 상처가 나 있을까 걱정이 된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니 배에 통증은 느껴지지 않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문이 열리더니 어두웠던 창고 안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조은서는 어렴풋이 최준태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탕!” 문은 다시 닫혔고 창고 안은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최준태는 그녀 앞으로 다가가더니 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를 휙 던지고는 자리에 앉았다.심연우와 눈이 마주친 그가 입을 열었다. “입에 붙인 테이프를 뜯어줄 순 있지만, 소리내기만 하면 그냥 확 죽여버릴 수도 있어!” 최준태의 말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붙은 테이프가 없으니 숨쉬기가 한결 편했다. 이런 심연우의 모습을 본 최준태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당신, 안 무서워?” 심연우가 대답했다.“무섭다고 하면 보내줄 거야?”“아니.”최준태의 말을 들은 심연우는 벽에 기대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그의 하얀 얼굴은 유난히 초췌해 보였고 최준태는 조용히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눈앞의 여자는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마음씨는 예쁜 얼굴과는 달리 그렇지 못하였다. “널 어쩌면 좋을까? 네가 소영이를 다치게 한 복수는 해야겠는데 말이야. 근데 당신은 수많은 재벌 2세 중에서 처음으로 날 알아보고 나의 이름까지 기억해 준 사람이었어.” 최준태는 그 학교에 진학하면서 신분 차이로 많은 멸시와 천대를 받아왔었는데 오직 심연우 만이 자신을 알아보고 이름까지 기억해 주었기에 그녀를 납치한 후에도 감히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을 들은 심연우가 말
”나 강소영 좋아해. 그러니까 걔 일 때문에 널 이렇게 납치했지.” “그러니까 강소영 때문에 너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나한테 복수하겠다는 거야?” “뭐라고?” 심연우는 발끈해 하는 최준태를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네가 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너 같은 사람은 우리와 같은 재벌 앞에서 아무런 사회적 가치가 없다고.” 당황한 최준태를 뒤로하고 그녀는 계속해 말을 이어갔다. “네가 전에 나한테 한 질문들 기억나? 어떻게 하면 사회에 도움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냐고 물었었지? 이게 너의 대답인 거야?” 심연우의 말들은 비수처럼 날아와 그의 마음에 콕콕 꽂혔고 당황해하는 그를 보며 심연우는 조롱 섞인 말투로 또 말했다. “아니면 너 스스로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거야? 강소영 동료의 말만 듣고 그 사건의 진실을 조사해 보기나 했어?” “조사?” 최준태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심연우가 이렇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줄 줄을 몰랐다. 그의 이런 모습에 심연우는 더욱 비웃었다. “그러니까 넌 조사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날 납치 납치했다는 거네? 그럼 날 납치하고 나서는 어쩔 생각이었는데? 경찰이 이 일을 알게 되면 널 가만히 놔둘 것 같아?” 최준태가 대답했다. “CCTV 그러는 거야? 내가 아무런 준비도 안 했을까 봐?” 심운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거 말고.” 심윤아가 귀국한 뒤, 강소영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도중 심윤아는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오늘 수술실 앞에서 걸려 온 전화 이 역시도 강소영이 계획한 것이었다. 심윤아가 임신한 뒤로부터 강소영은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고 또, 자기 손에 피 묻히는 일은 하기 싫으니 이렇게 자신에게 진심인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하며 나쁜 짓을 저질렀다. 저번 환송회에서는 황주연이었고 이번에는 최준태였다. 심지어 진수현 마저도 강소영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강소영이 병원에 휴대폰만 남
김선월이 수술을 받고 있기에 진태범과 이선희는 며느리가 사라진 것을 알 수 없었다.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자리에서 떠날 수 없었다. 진수현도 실종되었다는 강소영을 찾으러 나섰으니 현재 심연우는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 최준태가 심연우에게 했던 조롱이 섞인 말과 오늘 그가 했던 말을 비교해 보면 사람들의 시선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심연우는 그의 이런 부분을 이용해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여기로 오기 전 최준태는 오로지 강소영을 위한 복수만 생각했지, 심연우가 말한 이런 문제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이 발생하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그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바로 최준태였다.최준태가 깊은 생각에 빠진 것을 본 심연우는 자신이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만 같았다.보아하니 최준태는 생각보다 자신의 명성을 중히 여겼다.“그럴 준비 되지 않은 거야?”심윤아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마력이 있는 것만 같았다.“넌 아직 젊은데, 강소영 때문에 너의 인생을 바칠 필요까진 없어.”그녀의 말을 듣고, 고민하던 최준태는 심윤아를 무섭게 노려보았다.“웃기고 있네, 그냥 나보고 널 풀어달라는 거 아니야?”최준태의 눈빛에 한껏 겁먹었지만, 심윤아는 곧바로 정신을 바로잡았다.“그래, 날 풀어줬으면 좋겠어. 다만 내가 제기한 요구는 나를 위한 것이지만, 그럼, 너의 요구는 뭔데?”“나의 요구? 네가 소영이를 다치게 했는데 나보고 풀어달라고?”심윤아는 되물었다.“조사는 해봤어?” 그녀의 말에 최준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러니까 너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내가 한 짓이라고 확정하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 나의 설명이 더 필요할까?”심윤아의 말을 들은 최준태는 믿음직스럽지 않은 눈빛으로 심윤아에게 물었다.“너... 진짜 소영이를 해치지 않았어?”실은 최준태는 자신의 이름을 여태 기억해
황주연은 최태준을 째려보았다. “내가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네가 소영이를 다치게 만든 범인을 풀어주었겠지?” 속내를 들킨 최준태는 발끈했다. “너랑 상관없잖아?” “왜 상관이 없어? 난 소영이의 친구인데. 너도 소영이의 복수를 하러 왔는데 난 오면 안 돼?” “복수하려면 내 손을 빌리지 말고 네가 직접 해. 꺼져.” “꺼지라고? 그건 안되지.” “퍽!” 말을 마친 황주연은 심윤아를 향해 발길질했고 다행히 그녀는 심윤아의 다리를 발로 찼다.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너 미쳤어?” 그의 말을 들은 황주연은 다시 발길질하려 했지만, 제지당했다.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사람까지 납치해 와서는 왜 착한 척하는데? 왜? 예쁘게 생겨서 그새 흔들렸냐?” 그녀의 말을 듣고 최준태가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 마음속엔 소영이밖에 없다고!’”“너의 마음속에 소영이밖에 없다면 어디 증명해 봐. 전에 네가 그랬었지, 소영이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되돌려 줄 것이라고. 그런 사람이 지금 너의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할 셈이야?” 황주연의 말에 최준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종이박스 더미에 웅크려 있는 심윤아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보아하니 황주연의 발길질에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 그가 머뭇거리자, 황주연은 비꼬며 말했다. “왜? 어떻게 할지 결정을 못 내린 거야 아니면 그새 마음이 변한 거야?” 어쩔 바를 모르는 최태준의 모습을 본 심윤아가 고통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최준태, 황주연은 그저 너의 손을 빌려 나한테 복수하고 싶은 거야. 네가 여기에서 떠나면 황주연은 나한테 아무 짓도 못 할 거야.” 그녀의 뜻을 최준태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만약 최준태가 간 뒤 심윤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황주연이 모든 책임을 물어야 하니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넌 최준태에게 납치당한 걸 다행으로 생각해. 아니면 이렇게 말할 기회조차도 없어.” 심윤아는 고통을 참으며 대답했다. “
심윤아가 듣자 눈썹을 찌푸렸다.강소영이 가지고 있는 걸 심윤아가 빼앗는다고? 분명 두 사람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확인을 하지 않았다면 심윤아가 어떻게 계속 진수현을 좋아하고 감히 그와 가짜 결혼을 할 수 있지?진수현과 강소영은 계속 아무 관계도 발생하지 않은 건가?여기까지 생각한 심윤아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진수현이 강소영 꺼라고요? 진수현이 직접 말하던가요”“그만 고집부려요, 윤아 씨. 진수현이 강소영껀지 아닌지는 곧 알려줄게요.”그렇게 말하고 황주연은 최준태의 손을 뿌리치고 심윤아 앞으로 다가갔다. “휴대폰 갖고 있어요?”그녀가 다가오자 심윤아는 경계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테스트만 하는 거예요.”말을 마치자 황주연은 그녀를 돌려 그녀의 주머니를 찾기 시작했다.심윤아는 자신의 배가 걱정되고 그녀가 무엇을 할지 몰라 두려움에 몸을 마구 움직였다. “가만있어요.”황주연은 곧바로 목소리를 낮추어 그녀에게 경고했다. “만약 당신이 다시 함부로 움직인다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그러자 심윤아는 안색이 달라져 물었다.“뭘 하려는 거죠?”“휴대전화를 가지고 재미있는 테스트를 해보려고 하는 것뿐인데 당신 뱃속의 그 짐승이 걱정되나요?”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낮아 최준태에게까지 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나는 소영이한테서 당신이 이 짐승을 지키고 싶어 한다고 들었어요. 왜요, 당신은 아기를 이용해서 영원히 진수현의 아내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짐승이라는 호칭에 눈빛이 사납게 변한 심윤아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로 힘껏 황주연의 머리와 세게 부딪쳤다.“아!”황주연은 순간 부딪혀 땅에 넘어졌고 따라서 비명을 질렀다.“그런 말 하지 마요!”심윤아가 이를 악물고 황주연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온화한 표정은매섭게 변해버렸고 눈빛은 다른 사람과 필사적으로 싸우려는 듯 날카로워졌다.황주연은 보기만 해도 무서웠다.이마에 부딪혔을 때부터 그녀가
심윤아는 황주연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상대할 생각도 하기 싫은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황주연은 분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당신은 아직도 자기가 고결한 선녀라고 생각해요? 분명진수현의 아내가 되고 싶으면서도 여전히 그런 척하잖아요. 조금 있다가 봐요.”“내가 진수현의 아내가 되고 싶든 말든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죠?”심윤아는 쌀쌀맞게 말했다.“아니면, 사실 당신도 진수현의 아내가 되고 싶은 건가요?”듣자 하니 황주연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당, 당신 무슨 헛소리예요?”“아무렇게 말한 건데 이렇게 감정이 격하게 반응하네요. 제 말이 맞았나요?”황주연의 얼굴은 화가 나서 일그러졌다.“윤아 씨, 후회하지 마요!”그러자 황주연은 진수현의 전화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면서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진수현이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는지, 윤아 씨는 말을 안 해도 알죠? 아내가 지금 그더러 구하러 오라고 해도 그가 올지 안 올지 모르겠네요.”여기까지 말하자 황주연은 잠시 멈추었다가 일부러 놀라는 척하며 자신의 입을 막았다. “아, 내가 말하는 것을 잊었네요. 진수현은 전화를 받지 않을 수도 있으니 윤아 씨가 도움을 청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네요. 그렇죠?”뚜뚜--핸드폰은 이미 수신음이 연결되었다.옆에 있던 최준태는 황주연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깨닫고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다른 사람을 불러올 생각이냐? 미쳤어?”“닥쳐! 불러오지 않아.”황주연은 짜증스럽다는 듯 말했다. “진수현은 지금 심윤아의 전화를 전혀 받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는 소영이와 함께 있으니까.”말을 들은 최준태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즉 그는 지금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이쪽에서 목숨을 걸고 있는데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심윤아가 한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사실 도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강소영은 그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그녀를 위해 자신을
창고 안의 세 사람은 모두 동시에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그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곧이어 황주연은 두 손이 붙잡혀 바닥에 눌러졌다.최준태도 똑같았다.사람이 많이 몰리자 가뜩이나 먼지가 많은 창고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심윤아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잡아서 데리고 나가!”“아, 뭐 하는 거야? 이거 놔!”눈을 감은 채로 심윤아는 황주연의 몸부림 소리와 비명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내가 구조됐나?’심윤아는 방금 그 무리들이 경찰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누가 나를 구해준 거지?’생각에 잠긴 사이 심윤아는 어지럽기도 하고 속이 메슥거리기도 했다.아까의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그 전의 혼미약 때문인지 몰랐다.당시 최준태의 손에 막 감싼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식을 잃었고 이것이 그녀의 몸에 해롭지는 않은지 알 수 없었다.생각하는 사이에 심윤아는 발자국 소리가 그녀 앞에 멈춰섰다는 것을 알아챘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누가 왔는지 보려고 애를 쓰다가 순간 의식을 잃었다.심윤아는 종이상자에 기대어 있었기 때문에 의식을 잃어도 넘어지지 않았고 머리만 축 늘어져 있을뿐이었다.몇 초 후,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받치고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심윤아는 남자의 품에 안겨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가슴을 스치자 남자의 눈빛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고 다만 자신의 부하를 바라볼 때는 눈빛과 목소리가 다시 싸늘하게 변했다.“가자.”말이 끝나고 그는 사람을 안고 나갔다.창고에서 막 나오자 차에 실려 있던 황주연과 최준태를 마주쳤다.최준태는 얼굴이 잿빛이 되어 무언가 후회하는 듯했고 황주연은 달갑지 않은 듯 욕설을 퍼부었다.“이놈들아,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이야? 빨리 날 놔줘, 날 이렇게 강제로 붙잡는 건 불법이야.”“불법?”맨 앞에 있던 사람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사람을 강제로 붙잡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구나?”이 말에 황주연은 목이 메어 잠시 후 그녀는 함께 차에
“도련님, 우리 이제 어디로 갈까요?”이선우는 상대방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어디 가는지도 물어봐야 하는거야?”라고 하는 것 같았다.그의 시선을 느낀 운전기사는 당황해 침을 삼켰고 잠시 후 이선우가 말을 꺼냈다.“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네, 알겠습니다.”자신이 가려는 목적을 들은 운전기사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차를 몰았다.하지만 심윤아가 있어 운전기사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최대한 천천히 운전했다.몇 분 후, 이선우는 손을 올려 안경을 고쳐 쓰더니 아무 감정 없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계속 이렇게 운전하다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윤아 몸의 상처가 지체된다면 책임질 수 있어?”말을 듣고 운전기사의 안색이 변하고 등에 식은땀이 났다.“네네, 속도를 낼게요.”10분 후, 차는 가장 가까운 병원 입구에 세워졌고 이선우는 안고 차에서 내렸다.그가 간 후에야 운전기사는 손을 뻗어 자신의 이마를 만졌다.만지지 않으면 다행인데 만지니 손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오늘 이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온몸의 차가운 기운이 그를 매우 두렵게 만들었다.다행히 그의 임무는 끝났으니 이제 병원 의사에게 맡기기만 하면 되었다.-얼마나 오랫동안 잤는지 심윤아가 깨어났을 때 창밖은 이미 어두컴컴했다.머리가 여전히 무거웠고 뭔가에 맞은 듯이 괴로웠다.그녀는 처음에는 표정이 멍했지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침대에서 내려오려다가 실수로 손에 링거를 맞은 주삿바늘을 잡아당겨 아파서 숨을 들이마셨다.소란스러운 인기척에 소파에서 편안히 앉아 지키던 이선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심윤아를 일으켜 세운 뒤 간호사를 불렀다.이후 간호사는 손에 쥔 주삿바늘을 다시 처리해 줬다.심윤아는 처리 과정에서 간호사에게 물었다.“이거 먼저 빼도 돼요? 저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그건...” 간호사는 옆에 서 있던 이선우를 힐끗 쳐다보았다.이선우는 싱긋 웃으며 심윤아에게 말했다.“뽑으면 안 돼. 넌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