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우리 이제 어디로 갈까요?”이선우는 상대방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어디 가는지도 물어봐야 하는거야?”라고 하는 것 같았다.그의 시선을 느낀 운전기사는 당황해 침을 삼켰고 잠시 후 이선우가 말을 꺼냈다.“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네, 알겠습니다.”자신이 가려는 목적을 들은 운전기사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차를 몰았다.하지만 심윤아가 있어 운전기사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최대한 천천히 운전했다.몇 분 후, 이선우는 손을 올려 안경을 고쳐 쓰더니 아무 감정 없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계속 이렇게 운전하다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윤아 몸의 상처가 지체된다면 책임질 수 있어?”말을 듣고 운전기사의 안색이 변하고 등에 식은땀이 났다.“네네, 속도를 낼게요.”10분 후, 차는 가장 가까운 병원 입구에 세워졌고 이선우는 안고 차에서 내렸다.그가 간 후에야 운전기사는 손을 뻗어 자신의 이마를 만졌다.만지지 않으면 다행인데 만지니 손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오늘 이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온몸의 차가운 기운이 그를 매우 두렵게 만들었다.다행히 그의 임무는 끝났으니 이제 병원 의사에게 맡기기만 하면 되었다.-얼마나 오랫동안 잤는지 심윤아가 깨어났을 때 창밖은 이미 어두컴컴했다.머리가 여전히 무거웠고 뭔가에 맞은 듯이 괴로웠다.그녀는 처음에는 표정이 멍했지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침대에서 내려오려다가 실수로 손에 링거를 맞은 주삿바늘을 잡아당겨 아파서 숨을 들이마셨다.소란스러운 인기척에 소파에서 편안히 앉아 지키던 이선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심윤아를 일으켜 세운 뒤 간호사를 불렀다.이후 간호사는 손에 쥔 주삿바늘을 다시 처리해 줬다.심윤아는 처리 과정에서 간호사에게 물었다.“이거 먼저 빼도 돼요? 저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그건...” 간호사는 옆에 서 있던 이선우를 힐끗 쳐다보았다.이선우는 싱긋 웃으며 심윤아에게 말했다.“뽑으면 안 돼. 넌
금테 안경 너머로 심윤아는 그 두 눈 속에 짙은 안개가 감춰져 있는 것 같아 종잡을 수 없었다.하지만 이선우의 겉모습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그녀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이선우가 가볍게 눈썹을 치켜세웠다.“왜 그래?”심윤아는 눈을 내리깔고 이선우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할머님의 병문안을 가야 한다는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간호사에게 다시 침을 놓으라고 했다. 미세한 통증이 손에 전해져 심윤아가 정신이 들게 했다.간호사가 떠나고 나면 병실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는데 이때 어떤 말을 해도 되었다.심윤아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던 중, 이선우가 갑자기 그녀 앞에 주저앉아 손에 하얀 손수건을 들고 그녀의 상처에서 새어 나온 이전의 핏자국을 살며시 닦아주고 있었다.간호사는 사실 이미 그녀를 대신해 처리했고, 남은 피는 이미 그녀의 소매에 스며들어 이미 깨끗하게 닦이지 않았다.그러나 이선우는 일종의 강박증이나 결벽증이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천천히 그 핏빛들을 닦아내고 있었다.그렇게 십여 초 가까이 이어지던 중 심윤아가 갑자기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됐어, 그만해. 안 지워져.”말을 듣고 이선우는 놀라더니 동작을 멈추고 잠시 후 말을 꺼냈다.“조금 있다가 누군가가 옷을 가져올 거야. 그럼 그때 이 옷을 갈아입어.”심윤아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이선우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틀림없이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간호사가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그는 조금도 이 일을 언급할 생각이 없었다.‘그와 진수현은 절친인데, 진수현에게 알려줬을지 안 알려줬을지...’심윤아가 제멋대로 생각하는 사이에 마침내 이선우가 입을 열었다.“말하려다 멈추는 모습을 보니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야?”심윤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이선우는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몇년동안의 우정인데 나한테 말을 하려면 앞뒤를 생각해야 해? 너무 서먹하게
그는 지금 또...윤아는 잔깐동안 자신이 뭘 말하려 했든지 잊어버렸다. 그저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이 말을 듣자,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윤아는 작은 얼굴을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날 돕는다고?”선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널 돕는 김에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진수현과 강소영 두 사람 이어주려고.”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리에 윤아는 가슴 속이 찌릿 아파 났다. 너무 아픈 나머지 더 이상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비록 머릿속은 아직도 엉망진창이었으나 선우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소리를 듣자 마음이 놓였다.“너희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공동의 목적을 달성한 후, 선우는 드디어 윤아에게 상황에 관해 물어볼 기회가 생겼다.“수현이 매일 너랑 함께 지내면서 어떻게 네가 임신했다는 사실조차 몰라?”윤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꼭 쥐었다.“알고 있어.”이 말을 듣자, 안경 뒤에 숨겨진 선우의 눈동자엔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심지어 말투도 차갑게 변했다.“알고 있다고?”“응.”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에게 보낸 후 아무 답장도 없던 메시지를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귓가에 있던 잔머리를 쓸어내리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이 아이를 원하지 않거든.”여기까지 듣자, 선우는 알만 했다.수현은 윤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고 또 이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아는 그와 달랐다. 그녀는 이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래서 수현이 몰래 지금까지 아이를 숨겨온 것이다.어쩐지 윤아가 식당에 갈 때 조심스러운 기색이더라니.“그래서 진수현은 지금 네가 유산했다고 여긴 거야?”“아마도.”윤아의 창백한 안색과 간신히 자리 잡은 웃음을 보자 선우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는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왜 이렇게 바보 같아...너 정말 혼자 애 키울 생각한 거야?”“안 돼?”윤아는 고개를 들어 선우와 눈을 맞췄다.“혼자
머리카락은 예전의 단정함은 어디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헝클어졌고 얼굴엔 긴장하고 초조했다는 흔적이 가득 남아있었으며 몸 주위엔 한기가 맴돌았다. 지금 수현의 모습이었다.겉으로 보기엔 자신을 위해 달려온 것 같았지만 윤아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오기 전 아마 오랫동안 밖에서 소영을 찾아다녔다는 것을.심지어 자신의 전화를 받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받을 상황이 되지 않았겠지.그 이유에 대해서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그러기 때문에 달려온 수현을 봤을 때 윤아는 별로 감동하지 않았다.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도 겉으로 드러나는 균형이 필요했기에 윤아는 속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하게 고개를 흔들었다.“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그녀의 말투는 매우 침착했는데 마치 이번 일로 하여 조금도 놀라지 않았고 또 수현이 전화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해 추호의 실망도 하지 않은 듯했다.하지만 지금의 수현도 이런 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재빨리 허리를 굽혀 윤아를 안았다.순간 느껴지는 무중력감에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수현의 목을 끌어안으려 했으나 손을 움직인 순간 링거 바늘이 당겨지면서 찌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는 움직이려는 동작을 멈췄다.윤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선우가 먼저 말을 걸었다.“진수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수현은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검사받으러.”“이미 다 받았어.”침착하게 입을 여는 선우.“전신 검사 받을 거야.”선우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윤아 손에 꽂은 링거 바늘 못 봤어?”이 말을 듣자, 수현은 멈칫했다. 급한 마음에 윤아가 아직 링거를 맞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정신을 차린 후, 아까 그녀를 들어 올릴 때 아팠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 수현은 윤아를 재빨리 침대에 눕혔다.“다쳤어?”그는 부드럽게 물었다.다시 병실 침대로 돌아간 윤아는 귓가에서 울리는 수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이 없을 정도 웃겼다. 필요할 땐 전화 한 통도 받지 않으면서 지금
사건의 경과가 알고 싶었던 수현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선우가 말을 끝내자,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이번 일 저지른 놈은?”“잡았어.”“누구야?”수현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원수도 없는 윤아에게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누구냐고 묻는 수현의 말에 선우는 오히려 침묵했다.이를 본 수현은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이선우?”그러자 선우는 다시 수현과 눈을 맞추며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정말 알고 싶어?”이 물음에 수현은 어리둥절했다.겉으로 보기엔 윤아에게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지만 납치와 같은 엄중한 사건이 발생했고 더욱이 그녀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도 있는데 그가 어떻게 손 놓고 지켜보고만 있을까.선우는 다시 안경을 끼고는 정색하며 말했다.“아마 네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일 거야. 그러니까 우선 먼저 마음의 준비부터 해. 누굴 포기하고 선택할지는 네가 잘 생각해 둬.”마지막 말을 듣자, 수현의 마음속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솟아올랐다.아니나 다를까, 그가 다시 묻기 전에 선우는 먼저 입을 열었다.“강소영 쪽 사람이야.”이 말에 수현의 표정은 순간 차가워졌다.“이름은 이미 알아냈어. 직접 봐.”선우는 핸드폰은 수현에게 건넸다.핸드폰을 받은 수현은 그 속의 사진을 훑어보았는데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번 환영식에서 윤아와 다투다가 다시는 강소영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그에게 한 소리 들은 사람이었다.그리고 그 옆에 양아치 모습을 하고 있던 남자는 제법 생소했다.“소영이랑 아는 사이야?”그는 준태의 사진을 짚으며 물었다.“자료에 따르면 예전에 강소영과 같은 학교 친구였대. 그리고 강소영 구애자기도 했지. 왜, 서로에게 마음 있으면서 네 사랑 구애자도 몰라?”서로에게 마음 있다는 소리를 듣자, 수현은 내키지 않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그는 선우를 보았다. 마치 어떤 상황에도 화를 내지 않는 듯한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그와 함께 이렇게 오랫동안 밖에 서 있었으면서 선우의 입가엔 계속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분명 예
순간,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어릴 때부터 선우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윤아랑 가깝게 지냈고 또 그녀의 머리를 만지기 좋아하면서 땅꼬맹이라고 불렀다.하지만 선우는 늘 윤아가 아직 어린애 같다고 했다.그래서 그는 선우가 윤아를 동생으로만 여긴다고 생각했다.비록 이렇게 생각하고는 있으나 마음속 깊은 곳은 조금 수상하다 느꼈다.이런 수상함은 선우가 출국하면서 연락을 끊었을 때 사라졌다.하지만 오늘...선우가 인정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빠르게 말이다.“어, 그렇게 놀라운 일이야?”선우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윤아 좋아하는 거 어릴 때부터 티 나지 않았어? 난 네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수현은 입술을 꾹 다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금방 알았나 보네. 괜찮아, 늦지 않았으니까.”뭘 떠올린 듯 선우는 말을 이었다.“강소영 쪽은 어떻게 처리할 셈이야?”“뭐?”수현의 머릿속엔 온통 선우가 윤아를 좋아한다는 것뿐이었다. 다른 일은 지금 생각할 기분이 아니었다.선우는 완곡하게 말했다.“내가 들은데 의하면 누가 너에게 소영이가 사라졌다고 메시지를 보냈다며? 그래서 네가 중도에 병원을 떠났던 거고.”둘은 머리가 좋았다. 선우가 이렇게 말하자 수현은 순간 그 뜻을 알아챘다.의심스러울 정도로 지나치게 우연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목숨을 걸고 강에 뛰어들어 자신을 구한 소영을 떠올리면 이번 일이 그녀가 사주한 거라고 믿기지 않았다.침묵한 수현을 보자 선우는 답을 알 것 같았다.“우리 생각은 좀 다른가 봐. 그렇다면 친구로서 미리 말해둘게. 난 땅꼬맹이를 괴롭힌 거 절대 용납 못해. 만약 이번 일이 소영과 연관이 있다면 난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야.”수현은 눈썹을 추켜세웠다.“무슨 소리야? 소영이가 사주한 거라고 벌써 확신했냐?”“결과를 기다릴 뿐이야. 넌 알고 싶지 않아? 네가 소영이에게 이만저만한 검정이 아니니 먼저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만약 정말 걔와 연관이 있다면 어떻게 할지.”-윤아가 입원한 병원을
“내버려두라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화낸다고 바뀌는 건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해요.”“천천히 해라고요? 이 지경이 됐는데 어떻게 천천히 해요? 당신 아들은 당신이 직접 말리면 되겠네요. 난 앞으로 관여하지 않을게요.”태범은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여보, 알잖아요. 난 당신 말만 따른다는 거. 그리고 수현이 문제는... 만약 당신이 수현이라면 어쩌겠어요. 생명의 은인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수술실에서 가만히 기다릴 수 있어요?”선희는 침묵했다.“이렇게 어려운 일을 수현이더러 어떻게 선택하라겠어요.”“찾으러 가지 말라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가야겠어요? 윤아도... 선우가 발견해서 다행이에요. 아니면 윤아 정말 어떻게 됐을지도 몰라요. 아무리 선택하기 어렵다 해도 뭐 어쩌겠어요.”“그러게요. 선우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당신도 수현이를 그만 나무라요. 저 녀석도 속으론 힘들 거예요.”“힘들어야죠. 진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기 전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걸 알아차려야 해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까 뺨을 맞은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소 가버린 아들을 생각하니 그래도 마음이 조금 아팠다.저 녀석도 괴로울 것이다.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누굴 택하든 그에겐 고통일 것이다.어휴... 부모인 그들도 소영을 함부러 뭐라 하지 못했다. 자칫하면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될 테니까.인간으로 된 자로서 은혜는 꼭 명기해야 했다.많은 일은 동시에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으니, 윤아만 불쌍했다.이렇게 생각한 선희는 윤아가 너무 안쓰러워졌다. 오늘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다고 생각하면 정말 용납하기 어려웠다.그녀는 윤아가 어떻게 참았을지 생각하기 끔찍했다.수현은 병원 관찰실 밖에서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저 나갔다 올게요.”아까 선희에게 뺨을 맞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가기 전에 그들에게 알렸다.선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눈썹을 찌푸렸다.“이 시간에 나가는 거니?”“네. 처리해
그를 보자마자 소영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기쁨으로 가득찬 웃음을 지으며 병실 침대에서 내려가 수현을 향해 걸어갔다.“수현 씨, 왜 갑자기 찾아왔어? 할머님 병세는 어떻게 되셨어? 수술은 잘 됐지?”하지만 수현과 가까워질수록 그의 굳은 얼굴과 서늘한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주연과 준태 일을 떠올리자, 소영은 심장이 후들후들 떨렸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절대 당황하면 안 된다. 더 침착해져야만 빈틈없어 보일 것이다.절대 수현이 그 어떤 것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할머니는 괜찮으셔. 너는?”그의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다.“뭐?”잘못 들은 줄 알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날 물어본 거야?’“네 친구는?”수현은 병실을 한 바퀴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어디 갔는지 알아?”“모르겠어.”소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내가 아까 나간 바람에 날 찾으러 갔나 봐.”“그래?”소영은 수현이 도대체 뭘 말하려는지 잘 몰랐다. 폭로된 줄 알았지만, 수현은 아까 그 두 글자를 말한 후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시선은 소영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처음이었다. 전에 알던 그가 아닌 것 같은 적은.이렇게 의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줄 몰랐다.안돼...어떻게 이럴 수가...심장이 찌르는 듯 아파 났다.수현이 이런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게 너무 괴로웠던 소영은 어쩔 수 없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수현 씨,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미안해. 내가 몰래 할머님 뵈러 가서 화났어?”말을 마친 뒤, 그녀는 손을 뻗어 수현의 옷자락을 가볍게 끌어당기면서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수현 씨, 화내지 마. 응?”수현은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의 옷자락에 닿은 손을 보고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손이 허전해진 것이 느껴지자, 소영은 비틀거리며 하마터면 제대로 서 있지 못 할 뻔했다.“다시 물을게. 너 정말 네 친구들이 어디 갔는지 몰라?”“정말 몰라.”소영은 고개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