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민은 손에 여러 장의 서류를 들고 사색이 된 얼굴을 하며 사무실에서 걸어 나갔다.그는 머리를 숙여 품에 든 서류를 보았다. 이건 앞으로 사흘 안에 완성해야 할 업무였다. 빙 둘러 비난한 덕분에 얻은 ‘성과’라 할 수 있겠다.에효... 참을 걸 그랬어...하지만 성민은 윤아가 임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현과 소영의 애매한 관계 때문에 수현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하면서 꾹꾹 눌러 참을 것만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심 비서님은 속으로 얼마나 힘드실까.그래서 성민은 결심했다. 수현이 앞으로 계속 이렇게 갑질한다고 해도 쓰레기 같은 남자라고 욕하겠다고 말이다.-윤아는 이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쌓인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그래서 컴퓨터 스크린에 대고 연거푸 하품했다.연수는 윤아에게 물을 가져다주려고 들어왔을 때 마침 이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빠른 걸음으로 윤아에게 다가가 정성스럽게 말했다.“윤아 님, 힘드시죠? 제가 할게요.”이런 연수의 모습에 윤아는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할 줄 알아요?”“윤아 님 요즘에 얼마나 공을 들여 절 가르치셨다고요. 그래서 저도 많이 배웠어요. 이 정도는 문제없을 거예요.”윤아가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것을 보자 연수는 직접 윤아를 부축해 일으켰다.“윤아 님, 저기 안에 들어가서 조금 쉬세요. 이건 저에게 맡기고요.”원래 거절하려고 했다. 출근 시간에 몰래 쉬는 건 아무래도 타당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러나 윤아는 지금 너무 피곤했다. 그래서 결국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전 십 분만 쉬고 올게요.”“알겠습니다.”그리고 윤아는 자신의 휴게실로 들어갔다. 사실 지금 그녀의 신분으로 여기서 하루 동안 쉰다고 해도 다들 뒤에서 불평만 토로할 뿐 그 어떤 짓도 할 수 없을 것이다.게다가 그녀는 다만 십 분만 쉴 생각이었다.휴게실에 들어간 후, 윤아는 아랫배를 살살 만지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
‘망했다. 설마 너무 오바했나? 이럴 줄 알았으면 너무 호들갑 떨지 말았을 걸.’하지만 윤아가 임신한 와중에 수현이 다른 여자와 얽혀있는 것을 알았을 때 연수는 그저 윤아가 안쓰러웠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다만 윤아를 돕고 싶었지 다른 생각은 없었다.“네?”연수가 눈을 피하는 것을 보자 윤아는 설마 들었을까 하는 마음에 심장이 덜컹했다.연수는 평소에 겁이 많기는 했지만 머리를 제법 빨리 굴렸다. 그래서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자마자 그녀는 빠르게 대처했다.“아, 사실은 어젯밤 일 때문에요.”연수는 머쓱한 듯 뒤통수를 쓱쓱 긁으면서 말을 이었다.“만약 저만 아니었어도 윤아 님이 이강훈 도련님에게 그런 소리를 듣는 일도 없었을 거잖아요. 그래서 되게 미안했거든요.”‘이렇게 말했으니 윤아 님께서 의심하지 않으시겠지?’역시나 연수의 말을 듣자 윤아의 안색은 조금 나아졌다.어젯밤 일 때문이었구나.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되었다.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옅게 웃음을 흘렸다.“어젯밤 일은 그냥 사고였어요. 교훈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잘 기억해 둬요.”“네.”연수는 힘껏 머리를 끄덕였다.“윤아 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 제대로 기억할게요. 다시는 그런 실수 하지 않을 거예요.”이렇게 장담한 후, 연수는 곧 화제를 돌렸다.“그래서 말인데요. 윤아 님, 점심에 뭘 드시겠어요? 제가 가서 사 올게요.”“됐어요.”윤아는 연수가 사 온 디저트를 들고 입을 열었다.“어제 일 때문이라면 이 케이크로 퉁 쳐요.”마침 배가 고팠는데 이 케이트면 족했다.연수는 윤아가 자기가 사 온 케이크를 먹는 것을 보자 속으로 아주 기뻤다. 윤아에게 어떤 것을 사주면 좋을지 몰라서 이 정교하고 예쁘게 만들어 진 케이크를 샀는데 마침 그녀의 입맛에 맞았다니, 제법 기분이 좋았다.점심을 사 오지 말라니 그러면 앞으론 윤아에게 작은 디저트나 준비하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말하기를 임신했을 때 맛있는 게 당긴다고 했으니까.아까 반응 빠르게 어젯밤 일을 언급해서 참 다행이었다.
오 년 전,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했던 선우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그는 더 듬직해졌고 사람들의 시선을 앗아가는 매력이 있었다.“이선우.”룸에 있던 사람들은 일어서서 그에게 인사했다.선우도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위를 훑어보았다. 보고 싶었던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살짝 허전했다.‘오늘 밤에 오지 않으려는 건가?’아닐 것이다. 수현도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선 수현과 함께 오겠지.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소영아!”여자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룸에서 어떤 사람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영은 그제야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선우는 고개를 돌리고는 섹시한 옷차림을 한 소영을 힐끗 보고는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소영의 눈동자엔 놀라움이 스쳤다. 그녀는 앞에 선 이 남자의 익숙한 눈매를 보자 누군지 금세 알아챘다.“이선우?”소영도 오래전부터 수현과 그의 친구들과 알고 지냈다. 약간 놀란 듯한 그녀의 물음에 선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을 들어 안경을 위로 밀고는 인사했다.“오랜만이야.”소영의 일행들은 이렇게 젠틀하고 우아한 선우를 보자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와... 너무 잘생겼잖아.소영도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정말 오랜만이네. 선우 너 되게 많이 변했다.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어.”이 말을 듣자, 선우는 잠시 멈칫했다. 안경 뒤의 눈동자엔 의아하다는 듯한 정서가 스쳤다. 그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많이 변했다고?”그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기분에 크게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금 그를 본 사람들의 표정은 매우 강렬했다. 수현의 여신님이라고 불리는 이 눈앞의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보니 몇 년간 많이 변한 듯싶었다.하지만 이렇게 많이 변했는데 누구는 그를 보면서 아무 반응도 없었다.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냥 나라는 사람을 아예 신경 쓰
룸에 있던 누군가가 물었다.“선우 환영식에 진수현 와?”“오겠지. 둘이 얼마나 사이가 좋았다고.”“그런데 왜 아직 안 온 거야?”그러게. 왜 아직 오지 않은 것일까?소영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한눈 보았다. 여기에 오기 전 수현에게 어디까지 왔냐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그래서 소영은 그가 운전하느라 답장하기 어려웠다고 추측했다.하지만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고 또 자신도 도착했는데 수현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고 답장도 없었다. 소영은 조금 걱정되었다.친구는 소영이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을 보자 좋은 꾐수가 생각났다. 그러고는 사람들 앞에서 높은 소리로 말했다.“소영아, 네가 한번 수현 씨에게 전화 걸어보지 않을래? 네 전화라면 분명 받을 거야.”이 말을 듣자, 소영은 저도 모르게 그 친구를 보았다. 친구는 그녀에게 눈짓을 건네며 빨리 전화 치라고 했다.사실 소영도 친구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녀와 수현의 관계를 증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하지만... 전에 보낸 메시지에도 답장하지 않았던 수현이 전화를 치면 받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수현이 받지 않는다면 사람들 앞에서 큰 창피를 당하는 일이었다.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됐어.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 수현 씨 아마 엘리베이터에 있지 않으면 운전하고 있을 거야. 전화 쳤다고 해도 받지 않을 수도 있어.”안타깝게도 룸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아 뭐 어때. 한번 쳐봐.”“그러게, 소영아. 네가 수현 씨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우린 다 알고 있어. 네 전화라면 운전하면서도 분명히 받을 거야.”이렇게 말하자 다들 떠들면서 소영더러 빨리 전화를 치라고 부추기고 있었다.소영은 조금 난처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저도 모르게 맞은 쪽에 있는 선우를 보았다.하지만 선우는 이 떠들고 있는 상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듯 머리를 숙인 채 핸드폰 스크린만 보고 있었다.“소영아, 한 번만 쳐
만약 둘이 정말 다른 감정이라도 있었으면 사귄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입고 나타났을 때 다들 살짝 안타까워하며 참지 못하고 소영을 바라보았다.소영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둘이 이렇게 입고 나타난 순간 그녀의 체면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이 쉽게 좌우지할 수 없게 되니 혼란스러움만 점점 커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뭘 어찌할 수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한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윤아의 곁으로 다가가 친밀하게 그녀의 팔짱을 끼었다.“괜찮아요. 안전하게 도착한 거면 돼요. 윤아 씨 저와 함께 앉을래요?”윤아는 소영의 진짜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는 연기하기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 때 윤아는 눈을 감았다 뜨고는 거절하는 대신 소영의 옆자리에 앉았다.이 장면을 보자 사람들은 놀라워했고 시선을 가끔 소영과 윤아의 얼굴에 두면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수현도 자연스럽게 선우의 옆자리에 앉았다.“왔어?”이 말은 수현이 앉은 후 한 거지만 선우의 시선은 줄곧 윤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응.”수현은 선우를 한눈 훑어보았다. 선우가 어디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뭔가 떠오른 듯 그 쪽에 시선을 돌렸는데 역시 윤아가 있었다. 순간 표정이 굳어졌고 눈동자엔 차가운 한기가 맴돌았다.서늘한 시선이 자신에게 닿은 것을 느낀 윤아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수현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멈칫하고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아끼는 여자 옆에 앉은 게 불만이라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다고 생각되었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사람들 앞에서 거절할 거 그랬다. 다만 수현이 그 장면을 보았다면 더 화낼 게 뻔했지만 말이다.소영도 수현을 보고 있었다. 그가 들어와서 자리에 앉자마자 처음으로 본 사람이 윤아인 것을 알아채자,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은 더 커져만 갔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는 입술을 깨물면서 손을 꽉 맞잡았다.네 사람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고 이
이 말을 할 때 소영은 수현의 마음을 시험해보려는 의도였다.요즘 수현의 행동이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윤아가 진 신세로 협박하지만 않았으면 윤아가 수현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더 웃긴 건 윤아가 그녀의 연적이라고 해도 약속을 지키는 점에선 믿을 만하다는 거였다. 그렇지 않으면 소영이 갖은 수단을 써가면서까지 윤아더러 신세 지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소영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룸안의 사람들은 더 떠들었다.“어떤 신분인데?”다들 웃으며 물었다.“소영아, 설마 유부남 신분이라고 말하는 거야?”“세상에, 저 둘 가짜 결혼이잖아. 쇼윈도라고. 수현 씨 마음속엔 너뿐이라는 거 누가 몰라.”“그러게. 저 두 사람이 소꿉친구잖아.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 그러니 둘 사이에 어떻게 사랑이 생기겠어.”한마디에 한마디를 이어 말하는 소리를 들은 수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윤아를 보았다.윤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과일 주스를 홀짝거렸다. 한입 마셔보니 제법 맛있자 기분이 좋은지 눈동자마저 반짝거렸다. 그리고는 또 한 모금 홀짝이더니 꿀꺽꿀꺽 마셨다.수현: “...”윤아는 임신하고 나서부터 입맛이 이렇게 바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전엔 이런 과일 주스를 즐겨 마시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너무 맛있었다.일 분도 지나지 않아 주스는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소영의 친구인 박나래도 이런 윤아를 발견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가 이렇게라도 민망함을 감추려 한다고 여겼다.오늘 저녁 이룸에서 대부분 사람은 술을 시켰고 술을 마실 수 없는 일부분의 사람들은 과일 주스를 시켰다. 그중에 윤아도 있었고, 소영도 술을 마실 수 없다며 우유를 시켰다. 윤아는 그 냄새가 별로였다.하지만 뜻밖인 것은 선우 앞에도 과일 주스가 놓여있었다. 술을 마시지 못한다며 웨이터를 불러 주스를 시켰다.윤아는 주스를 다 마시고는 컵을 손에 들고는 조금 아쉬워했다.민망하긴 했지만, 웨이터에게 한 잔 더 달라
“주연아...”소영은 친구의 팔을 끌어당기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그만 말해.”“소영아, 왜 날 끌어당기는 거야? 난 그저 윤아 씨와 사이좋게 얘기 나누고 있었을 뿐인데. 윤아 씨도 이런 거 신경 쓸 정도로 속 좁지 않죠?”황주연이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윤아는 저만치에 있는 와인잔을 들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와인잔 속 붉은색 액체는 불빛 아래에서 일렁이며 아름다운 빛깔을 내고 있었다.이러는 윤아를 보자 주연의 안색은 황급히 변했다.“어머, 뭐 하려는 거예요?”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의아한 눈빛으로 주연을 보았다. 잠깐 후 그녀는 알겠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왜요? 내가 뿌리기라도 할까 봐요? 걱정하지 말아요. 난 속 좁은 사람이 아니니까. 와인과 그쪽 얼굴이 사이좋게 부딪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윤아는 비록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비꼬아서 말한 덕분에 주연의 표정은 더 안 좋아졌다. 참지 못하고 화내려 했을 때 옆에 있던 소영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눈짓을 건넸다. 주연은 그제야 진정했지만 불쾌한 티를 팍팍 내며 입을 삐죽 내밀었고 눈엔 살기로 가득했다.“윤아 씨, 미안해요. 내가 주연이 대신해서 사과할게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용서해 주면 안 돼요?”이 말을 듣자, 윤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당연히 용서해야죠. 난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강소영: “...”쌍년!소영은 가만히 주먹을 꽉 주웠다.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소영 옆의 갈색 머리 여자가 비꼬면서 입을 열 때부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나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역시 그 여자는 그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상했던 만큼 스케일이 크지는 않아 조금 아쉬웠다. 본처인 윤아가 너무 담담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 갈색 머리 여자가 아무리 비꼬면서 윤아의 기를 채우려고 팔짝 뛰어도 상대방이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한마디에 철퍼덕 땅바닥에 엎어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다들 속으로 갈색 머리 여자를 멍청하다고 욕했
순간, 룸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차가운 공기로 가득했다.아까 떠들던 사람도, 강 건너 불구경하던 사람도 지금은 그저 침묵만 유지했다.수현은 자리에 앉아 갈색 머리 여자를 차갑게 쏘아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은 마치 날카로운 검처럼 사람을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그 갈색 머리 여자는 소영의 친구 황주연이었다. 수현의 눈빛에 주연의 거만한 기세는 순간 수그러들었고 목을 움츠리고 감히 고개를 들 엄두를 못냈다.아까 실수로 수현과 눈을 마주쳤는데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 주연은 너무 두려워서 소영의 뒤에 숨었다.지금 소영은 더 이상 웃음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자기 몸 뒤에 숨은 주연을 한눈 보고는 별수 없어 수현에게 사정했다.“수현 씨, 화내지 마. 주연은 그저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입바른 소리를 자주 해. 대신 나쁜 애가 아니라서 악의는 없어.”이렇게 말한 후, 그녀는 또 주연에게 사과하라고 말했다.“주연아, 빨리 윤아 씨에게 사과해. 얼른.”주연은 내키지 않았다. 윤아에게 사과하는 일은 그녀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하지만 수현의 그 사나운 눈빛을 떠올리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윤아를 보며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내가 잘못했어요.”“윤아 씨, 주연이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화 풀어요. 네?”윤아는 조용히 앉아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다.대신 수현이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쏘아붙였다.“사과만 하면 끝인가? 아까 뭐 하려 했지?”이 말에 주연은 황급히 변명했다.“아, 아무것도 안 하려고 했어요.”“손찌검하려고 했잖아. 아닌가?”“아니에요. 난 그저...”“수현 씨.”소영이 황급히 수현을 불렀다. 분명 사정까지 했는데 수현은 왜 아직도 주연을 물고 놔주지 않는 걸까.소영의 부름에 수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눈앞의 여자는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있었는데 당장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애초에 목숨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그를 구해준 사람이었다. 또한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