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을 떠난 오민우는 자신이 사장님께서 만족할 만한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돌아가는 길에 조금 전 사무실에서 일어난 일을 줄곧 회상했다.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무실에 있을 때 사장님께서 물어본 그 몇 가지 질문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처음엔 심윤아가 화제를 돌리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사무실을 나서면서부터 뭔가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서라면 이야깃거리는 많고도 많았다. 그런데 그중에서 하필이면 그런 질문을 했다.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는 자신의 사무실로 가서 서명할 서류를 찾았다. 대표님의 사무실에 들러 엿들어볼 심산이었다.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걸음을 재빠르게 옮긴 오민우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노크했으나 응답은 없었다.오민우는 서두르지 않고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1분간 기다렸으나 여전히 소리가 나지 않자 오민우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대표님.”잠시 후 안에서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문밖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소리가 작지 않은 듯했다. 오민우는 두 사람이 부딪힌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어쨌거나 어딘가 이상했던 소리에 다급해진 오민우는 문을 힘껏 두드리기 시작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에요?”그러나 사무실 내부는 조용했고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대표님?”잠시 머뭇거리던 오민우는 결국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찰칵”문고리를 내려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그는 멍하니 문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문이... 잠겼어?때마침 문 안에서 누군가의 잠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입니까?”오민우는 진 대표의 목소리임을 금방 알아차렸고, 무언가를 느낀 것 같긴 했지만 마치 뇌가 마비된 듯 일시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오히려 그의 입이 뇌보다 반응이 빨랐다. 수현의 말을 들은 후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 서명하셔야 할 서류가 있습니다.”내부가 또다시 조용해졌다.“거기서 기다려요.”
곧이어 문이 열렸다.문이 열림과 동시에 오민우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비즈니스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미소는 소용이 없었다. 문을 열러 온 사람은 윤아가 아닌 흐린 표정의 수현이었다.“서류는요?”오민우는 그의 안색이 칙칙한 데다 옷깃이 지저분하고 셔츠 단추 두 개가 풀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넥타이는 진작부터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이를 본 오민우는 자신이 정말로 두 사람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했음을 알아차렸다.“...여기요.”오민우는 그저 무감각하게 손에 쥔 서류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확인하시고 사인만 하면 됩니다.”사실은 윤아가 사인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는 그저 대표님 사무실에 들르기 위해 핑계를 댄 것일 뿐이니까.수현은 서류를 받은 후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 문을 닫아버렸다.“쾅”문밖에 서 있던 오민우는 하마터면 문에 맞을 뻔했다.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같은 남자로서 그런 일을 할 때 방해받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너무 잘 아니까. 방해한 장본인을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을 것이다.그랬기에 수현이 아무리 그를 아니꼽게 보고 건방지게 굴더라도 그저 머쓱하게 그 자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무실 내부.수현은 오민우가 준 서류를 윤아에게 건넸다.“사인하래.”윤아가 자신의 옷을 단정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에서 목까지, 목에서 귀까지 모두 울긋불긋했으므로 옷에 가려진 곳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훤히 드러나 있었다.그녀는 황급히 단추를 채운 다음 수현이 들고 있던 서류를 받아 펜을 들었다.“어디?”그녀의 다급하고 황망한 모습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보니, 조금 전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힘껏 밀쳐낸 그녀가 생각나며 화를 참을 수 없어졌다.이 망할 놈의 오민우.아침에도 저녁에도 오지 않더니, 하필이면 그때 와서 좋은 일을 다 망쳐버렸다.요즘 수현의 부상 때문에 윤아는 상처가 벌어진다는 것을 이유로 스킨십을 꺼렸었다.결국 어렵게 기회를 찾아 마음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현이 또 한 페이지를 넘겼다.윤아가 무언가 말하려다가, 찡그린 그의 미간을 보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켰다.됐다, 됐어. 읽는 것도 빠른데 두 사람이 사는 것이 아무래도 혼자인 것보다는 나을 테지.윤아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그가 다 훑어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약 몇 분 만에 계약서를 다 훑은 그가 마지막 장의 윤아가 서명한 글씨체를 보고 웃음을 금치 못했다.그가 서류를 덮자 윤아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빨리 읽는다고? 자기도 자세히 읽어보진 못했으면서, 날 뭐라 해.”그 말을 들은 수현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세 번째 페이지 다섯 번째 줄 내용이 뭐였게? 기억해?”“뭐?”수현의 느닷없는 질문에 윤아가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수현이 느릿느릿하지만 조리 정연하게 알려주었다.윤아가 한바탕 투덜대며 서류를 펼쳐보았으나 내용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대로였다.윤아가 수현을 힐끗 바라보자, 수현이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남편 좀 대단한 것 같지 않아?”윤아는 침묵했다.수현이 그녀의 머리를 문질러주며 입을 열었다.“내가 갖다줄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말을 마친 수현이 서류를 건네주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때 윤아를 향하던 웃음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문을 열고 오민우에게 서류를 건네는 그의 모습은 차갑기에 그지없었다.오민우는 어색하게 서류를 받아서 들었다.“다시는 오지 마세요.”수현이 차갑게 말 한마디를 뱉었다.말을 안 했으면 오히려 나을 뻔했다. 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오민우는 더 난처해져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도 이제 별일 없으니 폐 끼치지 않을 겁니다.”말을 마친 오민우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모퉁이를 지난 후에야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에 서 있었다.전에 아무리 대기업 경영진에 익숙하더라도 수현처럼 카리스마가 강한 남자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역시 진씨 그룹의 진 대표님은 카리스마나 아우라가 다른 사람과는 다른 것 같다.
“누가 할 일이 없대?”“...”“이리 와봐.”윤아가 주저하며 여전히 제 자리에 서 있었다.“에이... 그냥 하지 말지?”“네가 안 오면 내가 간다?”2초간 고민하던 윤아는 조금 전의 일을 생각하고는 결국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순순히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윤아를 보며 수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윤아의 볼을 꼬집었다.“왜 갑자기 말을 이렇게 잘 들어?”“안 듣는다 해도 소용이 있어?”윤아는 방금 그에게 덜미를 잡힌 이후의 일을 잊지 않았다.“소용없긴 하지.”그녀의 뾰로통한 모습에 수현은 귀여움을 참지 못하고 말랑한 뺨을 만지작거렸다.“그러니까 이제 숨지 마. 네가 어딜 숨든지 내가 가장 먼저 찾아내서 잡아 올 거니까.”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숙이고 윤아의 작은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그의 입술이 다가오자 심윤아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촉촉하고 따뜻한 감촉이 이마에서 느껴졌다.그 부드러운 감촉이 끝난 후, 견디기 버거운 뽀뽀 세례가 몰아칠 거라는 생각과 달리 수현은 따스하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어리둥절한 윤아가 곧이어 눈을 떴다.앞에 서 있는 사람이 그저 조용히 안고만 있을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 오히려 기분이 이상했다.“너...”한 글자를 내뱉은 이후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왜 계속 안 해?...라고 묻는다면 일종의 격려처럼 들리겠지?“왜?”수현은 마치 그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것 같이 되물었다.“내가 계속 뽀뽀하지 않아서 아쉬워? 가기 싫어?”“아니.”윤아가 저도 모르게 반박했다.“이제 가자.”말을 마친 윤아는 바로 수현을 밀어내고 그의 팔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사무실에 계속 있다가는 그가 또 탐욕스러운 본색을 드러낼까 두려웠다.수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하얗고 보드라운 손이 자신을 잡아당기며 사무실을 나가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떠날 때 그는 윤아의 사무실 문을 닫는 것을 잊지 않았다.하도 기세등등하게 윤아의 회사로 오는 바람에
결국 그 역시 회사를 운영하고 자신의 사업이 있기 때문에 아무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다.하여 윤아 역시 그가 가끔 컴퓨터로 급한 일을 처리하는 것 정도는 개의치 않아 했다.하지만 부상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휴식이 필요했다.하지만 만약 수현을 데리고 있지 않고 혼자 집에 남겨두었다면 분명 지금처럼 순종적으로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을 것이다.심각한 부상을 입은 와중에도 윤아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간 사람이다.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당사자 아닌 사람들이 두려워할 정도였다.손으로부터 느껴지는 큰 힘에 윤아가 정신을 차렸다.수현이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왜 말이 없어? 그래도 싫어?”정신을 차린 윤아는 눈앞에 있는 끔찍하리만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숨만 내쉬었다.“어쩔 수 없지. 네가 원하면 같이 가. 하지만 미리 말해두건대 앞으로 사무실에서 다시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돼.”“어?”그 일에 대해 언급하자 수현은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능청스럽게 물었다.“그런 일? 무슨 일?”“...”윤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수현을 응시했다.“알면서 뭘 물어.”이에 수현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네가 직접 네 입으로 말한 거잖아. 네가 알려주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수현이 뻔뻔한 사람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진씨 그룹의 어엿한 대표라는 사람이 이렇게 자기 앞에서 능청스럽게 말할 줄은 몰랐다.심지어 그는 이를 낙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윤아는 마침내 깨달은 듯했다. 수현은 자신을 대할 때마다 조롱하려 했다.윤아도 질 수 없어 맞받아쳤다.“모르겠으면 잘 생각해 봐. 언젠가 알게 될 때 나랑 회사 같이 갈 수 있는 거야.”그러나 수현은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다.“나 협박하는 거야?”“이러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내가 모른다고 널 따라 회사로 안 갈까?”말을 마친 그가 윤아를 더 꽉 껴안았다.“꿈 깨. 네가
요즘 그는 하루 24시간을 종일 윤아와 함께 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윤아 역시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고 그저 수현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상관없었다.그의 부상이 다 나으면 이제 귀찮게 할 시간적 여유도 없을 것이며 그때쯤이면 윤아 역시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윤아는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그러나 그녀가 생각지 못한 점은 수현이 이 행동에 질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일 점점 더 달라붙으며 성가시게 군다는 것이었다.시간이 흐를 수록 회사 사람들 역시 수현의 등장에도 술렁이지 않게 되었고 더 이상 처음 만났을 때처럼 흥분하지 않게 되었다.게다가 그들은 수현이 윤아에 대한 태도를 알아차린 후, 회사가 이제 막 발돋움을 시작했을 때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중에 회사가 발전을 이룩한 이후 그들이 오려고 하면 쉽지 않을 것이다.수현은 매일 윤아와 함께 왔지만 두 사람은 회사에 오래 있지는 않았다.때로는 아침만, 때로는 오후만 몇 시간 동안만 머물렀다.근무시간이더라도 윤아가 회사의 대표였기에 직원들도 별 의견 없이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윤아는 월급을 주는 입장이니까,이렇게 시간은 물 흐르듯 흘렀고 날씨는 점점 추워져 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었다.도시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분위기가 잘 보이지 않았다. 연말이 다가오면 도시에서 일하는 수많은 청년은 속속 각종 교통수단을 타고 친가로 돌아간다.떠들썩하던 도시가 점차 한산해졌다.윤아의 회사 사람들도 여기저기 집으로 돌아갔기에 회사가 텅 비게 되었다.설날에 회사를 어떻게 꾸며야 할지 고민하던 윤아는 직원들이 거의 다 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걱정을 덜게 되었다.윤아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꾸밀 것들을 집에 가져와서 수현에게 붙여달라고 했다. 진씨 회사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아랫사람을 시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귀한 사람이 집에서는 윤아의 지휘 아래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세배하는 그림을 예쁘게 붙여주었다.그의 부상은 진작 다 나은 상태였다. 재진할 때 의사도 잘 회복했다며 칭
윤아는 휴대폰을 들고 바로 자리를 떴고, 감정이 불타오를 때 갑자기 밀쳐진 수현은 쓸쓸하고 외롭게 자리에 남았다.“...”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진정하고서야 무너져 내릴 뻔한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를 수 있었다. 그제야 뜨거운 숨결과 짙은 갈증도 점차 가라앉는 듯했다.그 후 수현은 윤아가 떠난 빈 자리를 어이없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못된 사람, 밀 때 좀 살살 밀지.수현은 속으론 윤아를 원망했지만 좋아하는 사람을 탓하기는 미안해 애꿎은 전화한 사람을 원망했다.누가 이렇게 눈치 없이 중요한 타이밍에 전화를 거는 걸까.같은 시각, 윤아는 침실에서 ‘눈치 없는’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연말이었기에 전화를 받은 윤아는 신이 났다.“현아?”아직 기억이 전부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최근 자주 전화 통화를 하며 우정이 생긴 상태였다.어릴 적부터 좋은 자매였던 사람은 기억을 잃어도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의존하기 마련이다.그 사이에 윤아는 또 다른 한 명의 친구, 앨리스를 알게 되었다.앨리스 역시 그녀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다만 앨리스는 외국에서 만났으며 두 사람은 국내에서 학교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들었다.윤아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잠재의식은 여전히 주현아를 의존하고 있었다.그러나 주현아는 질투하는 건지 가끔 그녀에게 말하곤 했다.“네 곁에서 가장 오래 함께 한 친구는 나야. 다른 친구가 있다고 해서 날 잊으면 안 돼.”“내가 잊을 리가.”그럴 때마다 윤아는 위안했다.“지금도 봐. 기억을 잃었어도 넌 잊지 않았잖아.”이에 주현아는 뾰로통하며 대답했다.“잊은 게 분명한데. 내가 전화하지 않았다면 누군지 전혀 기억도 못 했을 텐데.”“아, 됐어. 어차피 이제 예전 기억도 없을 텐데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다 무슨 소용이야.”두 사람은 몇 마디 잡담을 나누다가 빠르게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윤아는 주현아와 이야기하며 일상의 에피소드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오늘은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좋아.”무언가 떠올린 주현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근데 오늘은 안 돼. 도착하면 밤일 테니까.”국제선 비행기는 비행시간이 길기 때문에 주현아도 오늘 윤아를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가 도착할 때쯤은 아마 한밤중일 것이기에 공항 근처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윤아와 가족을 만날 계획이었다.“밤이라고?”주현아게게 항공편 번호를 물은 뒤 검색해 보았다.“그럼 밤에 내가 데리러 갈게.”“에이, 괜찮아.”주현아는 즉시 윤아의 제안을 거절했다.“도착하면 한밤중이야. 네가 푹 자고 있을 때란 말이지. 우린 내일 보자.”윤아는 그녀의 다급해하는 모습에 피식 웃고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나 이제 탑승 준비해야 하니까 내일 전화할게.”“알겠어. 조심히 와.”전화를 끊자 곁에 있던 허연우가 다가와 물었다.“현아 씨, 친구예요?”주현아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네. 오래전부터 친했던 친구요.”“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냈어요?”“네.”허연우가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좋겠어요. 전 학창 시절 때 친했던 친구들이랑 이제 연락도 잘 안 하고 지내요.”주현아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다 그렇죠. 저도 연락은 끊긴 지 오래고 이 한 명뿐이에요.”너도나도 사회에 들어서고 직장을 찾은 후엔 누가 옛날 학창 시절 친구를 여태 기억하고 있겠는가. 특히 결혼하고 나면 주변 친구들도 바쁜 일들로 만날 시간도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가끔 기억하거나 명절에 덕담 한마디씩 건네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두 사람은 이어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탑승수속을 밟은 이후에는 각자의 길로 갔다.같은 좌석을 사지 않은 데다 목적지가 달랐다. 주현아는 인근 호텔에서 자고 허연우는 가족들이 데리러 올 예정이었다.하여 두 사람은 함께 있지 않기로 했고 주현아는 비행기에서 내리면 바로 근처 호텔에서 샤워 후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이번 비행기는 좌석이 불편한 데다 장기 비행이었다. 환승할 때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기내식이 입에 맞지 않았기에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