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를 속으로 단단히 욕한 민재는 이 말을 뒤로 방을 나섰다.“의사 불러올게요.’그러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윤아는 민재가 그렇게 떠난 줄 알았지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서 수현을 불렀다.고개를 돌린 수현이 민재의 표정을 보고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윤아에게 말했다.“나갔다 올게. 잠깐만.”윤아는 이불속에 숨어 고개를 끄덕였다.“응.”방에서 나온 수현을 보고 민재는 방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자고 했다.민재의 요구에 수현이 미간을 찌푸렸다.“할 말 있으면 해요. 뭘 그렇게 멀리까지 가요?”이를 들은 민재가 수현의 뒤쪽을 힐끔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대표님, 아무래도 좀 떨어진 곳에서 말씀 드리는게 좋은 것 같아요. 여기서 말씀드리면 윤아 님이 들을 수도 있어서요.”민재의 말에 수현은 살짝 언짢아졌다.윤아를 얼마나 힘들게 데려왔는데 멀리 나갔다가 중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가 이를 배상할 수 있을까?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표정이 차가워졌다.“윤아가 듣는게 싫으면 네가 목소리를 낮추면 되잖아요. 아니면 문자로 하든지.”민재가 더 설득하려는데 수현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이에 민재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목소리를 낮췄다.“대표님, 윤아 님 곁을 꽤 오래 지키셨는데 윤아 님이 안 깨어나시면 몰라도 지금은 깨어나셨으니 일단 먼저 상처부터 치료하시는 게 어때요? 의사 선생님께서 계속 기다리고 계세요. 혹시나 염증으로 다른 문제가 생길까 봐요.”수현은 자신이 다쳤다는 사실을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민재가 이 말을 꺼낼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수현은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한참이 지나서야 수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요. 조금 있다 갈게요.”하지만 민재는 이를 믿지 않았다.“대표님, 이 말 지금 몇 번째 하고 계시는지 아세요? 항상 말씀만 하시고 안 가시잖아요. 의사 선생님께서 그러셨어요. 치료받으러 못 오겠다면 직접 찾아간다고요.”“...”
“응. 의사가 그때 직접 처치해 주셨거든. 아니면 내가 어떻게 멀쩡히 여기 앉아 있겠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너를 보호해야 되는데 내가 어떻게 소홀히 해.”수현의 대답이 그럴듯했기에 윤아도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하지만 선우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다.“그... 내가 가고 나서 선우 쪽에 무슨 일 없었어?”“그건 왜 물어? 걱정하는 거야?”질투가 잔뜩 묻어나는 수현의 말에 윤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 일이 떠오르지 않는 건 사실이었지만 왠지 수현은 소유욕이 강한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윤아가 먼저 선우 얘기를 꺼내면 수현이 언짢아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일이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기에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걱정하는 건 아니고 그냥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거야. 앞으로 어떻게 해결할지도.”“기억을 잃었어도 선우가 다치는 건 싫은 거구나.”수현의 말에서 질투가 점점 세게 느껴졌다.“...”윤아는 말문이 막혔다.“윤아야. 내 몸에 난 상처는 괜찮다 쳐. 예전 일을 청산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근데 네가 받은 고통과 상처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윤아의 앞이라 수현은 말을 돌려서 했지만 그래도 윤아는 그 말에서 매서움을 느낄 수 있었다.윤아는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밖에서 민재가 의사를 데리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대표님, 윤아 님, 의사 선생님 오셨습니다.”순간 수현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손으로 윤아의 뒤통수를 살살 어루만졌다.“착하지. 일단 걱정하지 말고 검사부터 받아. 난 일단 나가 있다가 검사 끝나면 다시 올게.”윤아는 수현이 무엇을 하러 가는지 바로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수현이 나가기 전 민재에게 앞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 이에 민재가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윤아 님은 지켜낼 거예요.’그럴싸한 민재의 대답에 수현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번에 윤아를 구해내면서 힘을 제일 많이 보탠
“대표님을 다시 만났을 때는 많이 다친 상태였어요. 외상을 제외하고도 응급 처치를 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요. 사실 깨어나서 48시간 정도는 관찰을 해야 하는 거였어요.”민재는 이렇게 말하며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하지만 저희 중 그 누구도 대표님을 말릴 사람은 없었어요.”수현은 그를 말리는 사람과 목숨이라도 걸 것처럼 눈동자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윤아를 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겠다는 기세였다.그러니 수현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수현이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말을 들은 윤아는 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전에 수현이 그녀에게 상황이 괜찮았다고 했던 건 다 거짓말이었다. 그저 사람들이 그를 말리지 못했을 뿐이다.그때 수현에게서 왜 그렇게 피비린내가 진동했는지 알 것 같았다.윤아는 뭔가 생각난 듯 얼른 덧붙였다.“아까 말한 내상? 내상도 있었어요? 후유증은요?”윤아가 전에 제일 걱정했던 것도 이 부분이었다.민재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윤아 님, 일단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윤아 님이 기억을 잃은게 대표님 지금 상태보다 훨씬 심각하거든요. 대표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윤아 님을 구해내긴 했지만 다행히 지금은 치료받고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하지만 윤아는 아직도 근심을 떨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이를 본 민재가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윤아 님, 만약 아직도 걱정되신다면...”민재는 원래 윤아에게 아직도 수현이 걱정된다면 그가 돌아오고 직접 눈으로 괜찮은지 확인하면 된다고 말하려 했다.하지만 윤아는 민재의 말뜻을 오해했는지 민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이렇게 덧붙였다.“내가 그쪽으로 가봐도 된다는 거죠?”민재가 넋을 잃었다.“아, 그게...”윤아가 의사에게 말했다.“선생님, 검사 끝났나요?”의사는 검사에 협조적이면서 목소리도 부드러운 윤아를 꽤 좋아하던 터라 웃으며 대답했다.“아직 십여 분 정도 남아 있어요. 그래도 대표님이 돌아오
“왜?”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기에 수현은 윤아가 너무 보고 싶었다. 게다가 사안이 사인인지라 수현은 정말 하루 종일 그녀를 끌어안고 있고 싶었다.이래야만 수현이 느끼는 공허함과 죄책감, 그리고 황송함과 불안감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다쳤잖아. 안을 때 힘쓰다가 상처 또 덧나면 어떡해.”“안 그래. 네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안 그렇다고?”윤아는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럼 전에 외국에 있을 때 왜 상처에서 그렇게 피가 줄줄 흐른 거야? 나를 안고 달리다가 흘린 거 아니야?”“아니야. 원래 상처가 찢어졌을 뿐.”그녀를 안는 바람에 상처가 덧났다고 생각할까 봐 수현은 바로 부정했다.“음.”윤아가 수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그러니 네 말은 상처가 찢어졌을 때 제때 치료하지 않았다는 거네.”이 말에 수현이 멈칫하더니 이내 자신이 윤아의 말재간에 휘둘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수현은 못 알아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뭐가?”하지만 윤아의 다음 질문은 또 다른 화제였다.“내가 탄 차를 따라오던 까만색 세단에 너도 있었어?”분명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수현은 자기도 모르게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모범 답안일지 고민하고 있었다.“왜 그래?”고민에 빠진 듯한 수현의 모습에 윤아가 더 바짝 다가가며 캐물었다.“이 질문이 대답하기 어렵나? 차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곰곰이 생각해야 해?”상처가 아파서 정신이 흐릿해질 때도 수현은 이렇게 괴롭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윤아의 질문을 듣고 있노라니 입을 떼기가 힘들었다.“수현아?”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의 숨결이 수현을 맴돌았다. 하얀 피부에 까만 머리를 가진 윤아를 보고 있자니 수현은 품지 말아야 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전에도 잠깐 있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민재가 이를 방해했다.민재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윤아도 분명 아직 불편한 데가 있을 텐데 이런 마음을 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수현은 들끓어 오르는 욕정
윤아는 기억을 잃기 전 자신이 어떤 성격인지, 이런 일을 부딪치면 어떻게 처리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수현에게 잔소리하고 싶었다.지금은 다행히 괜찮아서 다들 웃고 넘어가지만 만약이라는게 얼마나 무서운데? 정말 잘못하면 어쩐단 말인가.수현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윤아도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하면 자극을 받을 수도 있어 수현도 더는 입씨름을 하지 않고 사과했다.“내 잘못이야. 고칠게. 다음이 없다고 약속해. 그러니 화내지 마. 응?”윤아는 원래 더 따지려 했지만 수현이 이렇게 빨리 사과할 줄은 몰랐다.의심의 끈을 놓지 못한 윤아가 수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이렇게 빨리 인정한다고? 진심이야, 아니면 내가 화낼까 봐 그러는 거야? 다음에 또 이러는 거 아니지?”“내가 약속할게. 절대 다음은 없어.”다시는 그녀를 뺏기지 않을 것이니 자연스럽게 이런 상황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었다. 이러면 그녀를 속였다고 할 수도 없다.수현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약속까지 했는데 더 물고 늘어지면 그녀가 오히려 막무가내 같아 보였다.윤아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깬 지 좀 지났는데 불편한 데는 없어?”그녀가 안정을 되찾자 수현이 먼저 물었다.윤아가 고개를 저었다.“없어.”선우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아까 얘기를 꺼냈을 때 수현의 안색이 바로 굳었던 게 떠올라 하는 수 없이 충동을 꾹꾹 누르고 다른 일을 물었다.“아참, 묻고 싶은 일이 있어.”아니나 다를까 윤아의 의미심장한 말에 수현이 웃음이 옅어지더니 말투도 덩달아 차분해졌다.“묻고 싶은 게 뭔데?”그런 수현의 모습에 윤아는 수현이 또 그쪽으로 생각했다는 걸 눈치채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전에 진 비서님이 나한테 애가 두 명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 어디 있어?”기억을 잃었다기에 이 일을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예상 밖으로 윤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윤아의 질문을 들은 수현
“내 상처는 별거 아니야. 제때 약 바꿔주고 잘 휴식하면 돼. 어디 가는 데는 문제 없어. 게다가 이번에는 너 안고 달릴 필요도 없잖아.”마지막 한마디는 윤아를 놀리는 게 틀림없었다.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수현을 힐끔 노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그런 말 하면 낯 간지럽지 않아?”“됐어 어디 불편한 데 없지? 그럼 일단 뭐 좀 먹고 이따가 보고서 볼래?”“그래.”윤아도 사실 조금 배고팠다.수현은 얼른 주방에 음식을 준비하라고 했다. 윤아가 요즘 식욕이 확 떨어졌다는 사실을 수현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금방 깬 윤아를 배려해 전부 소화하기 쉬운 음식으로 준비했다.윤아도 수현에게 들키기 싫었다. 이제 삶의 의미를 되찾았으니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완전히 회복할 일만 남았기에 수현에게 말해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윤아는 조심스럽게 꼭꼭 씹어서 먹었다. 혹시나 급하게 먹거나 많이 먹었다가 체하기라도 할 것 같아서였다.윤아는 포만감이 들자 자제하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수현이 얼른 손을 내밀어 사발을 받았다.“다 먹었어?”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금방 깨서 그런지 입맛이 별로 없네. 다음에 더 먹을게.”이에 수현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도우미에게 남은 음식들을 치워달라고 했다.검사 결과가 나왔고 의사는 윤아에게 별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기억은 치료할 방법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그러면서 수현에게 윤아가 아직 영양실조 상태라고 말해줬다.결과를 들은 수현은 보고서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원래도 가늘었던 윤아의 손목이 이번에 더 가늘어진 걸 발견했다.게다가 영양실조라고?시간이 고작 얼마나 지났다고 영양실조란 말인가? 수현은 윤아가 최근에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기억을 잃고 영양실조까지 걸린 것일까?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주먹을 불끈 쥐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선우 이 빌어먹을 놈, 윤아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수현과 자신이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수현이 화내는 것도 이해가 갔다.“이 일은 더는 물어보지 마. 지금은 기억을 잃었으니 일단 몸조리부터 잘하자.”“하지만...”윤아는 그래도 조금 망설여졌다.“내가 잘 처리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그건 아닌데...”윤아는 수현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원래는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수현의 눈빛에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켰다.상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기억을 잃긴 했지만 자신이 선택한 남자니 그가 처리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윤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좌석에 몸을 기대고 쉬려고 했지만 수현이 이를 보더니 바로 윤아를 자신의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윤아는 어쩔 수 없이 수현의 품에 기댔다.“잠깐 쉬어.”수현의 품에서 느껴지는 향기가 윤아의 심신을 안정되게 해주었다. 윤아도 수현을 밀어내지는 않았고 오히려 손을 내밀어 수현의 튼실한 어깨를 휘감고 완전히 수현의 품속에 기댔다.수현은 멈칫하더니 자기도 모르게 윤아를 더 꽉 껴안았다. 그래야만 그녀를 잃었다 다시 얻었다는 느낌이 확실해지는 것만 같았다.처음엔 가는 길이 꽤 순탄했는데 점점 더 깊은 시골로 내려갈수록 길은 울퉁불퉁해졌고 덕분에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산과 가까운 도로라 카메라가 없는 건 둘째 치고 낙석의 위험도 있었다.다행히 차를 운전한 기사님이 운전 경험이 풍부했기에 그 길을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그 길을 완전히 떠나고 나서야 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아까 그 길 진짜 무섭긴 하다.”수현은 품속에 윤아를 꼭 끌어안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아까 길이 흔들릴 때 윤아는 수현의 품에서 이리저리 부딪혔다. 처음엔 그녀를 보호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녀가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수현의 숨결이 점점 흐트러졌다.한참을 진정하고 나서야 수현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내일 이쪽에 사람 보내서 길 좀 고치라고 할게.”길을 고치는 건 작은 비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현은 전혀 신경
기사님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차는 도로와 연결되지 않은 위치에 멈춰 섰다. 행인들의 시선이 그 차에 쏠렸다. 가끔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차가 시골에 나타난 게 신기한 듯 보였다.“이 시골에 요즘 고급 세단이 자주 보이네?”“명인 댁 사람들이라던데. 저번에 온 건 딸이래. 딸이 손자를 데리고 놀러 왔나 보더라고. 아이고, 애들이 얼마나 뽀얗고 말캉한지, 시내에서 자란 애들은 달라도 뭐가 다르다니까.”“그러게. 그날 그 명인 댁 마당 지나가다가 봤어. 애들 좋으라고 나무에 그네까지 만들었더라고.”행인들이 지나가며 토론했다.명인 댁의 팔자가 좋다느니, 복이 많다느니, 딸을 잘 낳았다느니, 손자도 대단해서 유명인이라느니, 정말 이것저것 끝도 없이 말했다.그러다 또 명인 댁도 대단한 사람인데 나이가 많아서 산 좋고 물 좋은 이곳에서 노년 생활을 즐기러 왔다고도 했다.자신이 사는 동네가 산 좋고 물 좋다는 말에 동네 주민들이 우쭐대며 동네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수현은 창문을 조금 내리고 그 토론을 조용히 들었다.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위해 그네를 만들어줬다는 말에 수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두 아이가 조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는 생각에 기뻤다.하긴 총명하고 똘똘한 아이들이었기에 직계 가족이 아니라 친척들, 외부인도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들어 했다.사람은 결국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동물이다.사색에 잠겨 있는데 품속에서 자고 있던 윤아가 살짝 움직였다. 고개를 숙여보니 윤아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수현의 품에서 눈을 뜬 윤아는 한 몇초 있다가 고개를 들어 수현을 올려다봤다.“나 잠들었어?”“응.”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윤아의 볼을 어루만지며 살짝 헝클어진 윤아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윤아도 그제야 차가 멈춰 섰음을 알아채고는 얼른 창밖을 바라봤고 시야에 들어온 풍경에 눈이 번쩍 뜨였다.“도착한 거야?”그런 윤아의 모습에 수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응, 도착했어.”“왜 깨우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