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신세희에게 말했다.“사모님, 6년 전 저한테 핫팩을 주셨던 거 기억나요?”신세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그게 언제적 일이라고요. 핫팩 하나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어요?”엄선우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니요! 사모님이 선물한 핫팩은 제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서 씨 어르신이 계속 사모님을 괴롭힌다면 저도 가만히 지켜만 보지 않을 거예요!”한참이 지난 뒤에야 신세희는 입을 열었다.“고마워요, 선우 씨.”“타세요. 공주님을 유치원에 모셔다드려야죠.”엄선우가 말했다.“그래요.”신유리를 유치원에 데려간 뒤, 신세희는 바로 부소경에게 전화를 걸었다.“소경 씨, 아버님은… 괜찮으신 거죠?”수화기 너머로 부소경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까요?”신세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부소경은 자상한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안 와도 괜찮아. 오고 싶으면 와도 돼.”“알았어요. 바로 갈게요.”아무리 그래도 부소경의 아버지였다. 시아버님이 자신 때문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는데 병원에 안 가보는 게 말이 안 된다.전화를 끊은 신세희는 고개를 돌려 엄선우에게 말했다.“선우 씨, 병원에 좀 데려다주세요.”“네, 사모님.”엄선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병원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신호등을 금방 지났는데 신세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부소경인 줄 알고 다급히 핸드폰을 꺼냈다.아파트 경비실 팀장에게서 온 전화였다.“네, 조 팀장님. 문 앞에 기자들이 또 찾아왔나요?”신세희는 이번에 기자들이 또 찾아오면 정면 돌파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기자들 앞에서 임 씨 가문에 살면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전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한편, 경비실 팀장의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사모님, 빨리 집으로 오셔야겠는데요. 그러니까….”신세희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경비실 직원들 난감하게 할 생각 없어요. 바로 갈
신세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저… 제가 뭘 잘못했나요?”불안한 예감에 고개를 숙였다.9년 전, 그녀가 대학생 2학년일 때 이런 식으로 경찰서에 끌려간 적 있었다.“9년 전 사건 때문에 왔습니다. 피해자 가족들이 다시 신세희 씨를 기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서요.”“저 여자야! 저기 있어! 이 망할 년, 너 때문에 우리 가정이 망했어! 여우 같은 년, 파렴치한 년이 이런 좋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니!”한 중년 여자가 신세희를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신세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어제 그녀의 차를 힐끔거리던 그 중년 여성이었다.“당신….”신세희는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9년 전에 우리 남편이 널 추행했다고 고발했잖아. 우리 남편 같이 착한 사람이, 네 아비뻘 되는 사람이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잖아! 우리 사이에 아이도 두 명이나 있다고!”9년 전 사건을 얘기하자 신세희는 살인 충동이 일었다.9년 전, 그녀는 고작 대학생이었다!한 번도 그녀에게 관심을 준 적 없던 임지강과 허영이 갑자기 그녀를 찾아오더니 새 옷을 사주며 생일 파티를 하자고 했다.임지강과 허영은 신세희를 사건 현장으로 끌고 간 뒤, 그녀에게 약을 탄 음료수를 먹였다. 음료수를 마신 신세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졌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살인자가 되어 있었다.살인 미수가 아닌 과실치사.현장에 남은 족적과 지문, 흉기에 남은 지문까지 신세희의 것과 일치했다.CCTV에 찍힌 범인도 신세희와 흡사했다.옷, 머리 스타일 전부 신세희였다.확실한 증거 앞에 신세희에게는 반박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그제야 신세희는 갑자기 찾아와서 옷을 사주고 생일 파티를 하자던 것이 전부 함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건 치밀하게 계획된 함정이었다.그들은 임서아의 죄를 신세희에게 뒤집어씌웠다.완벽한 범죄였고 다른 단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린 신세희는 자신을 위해 변호하는 방법도 몰랐고 이미 모든 걸 체념한 상태였
평소였다면 아침부터 이곳을 방문할 부성웅이 아니었다.게다가 요즘 따라 부쩍 아들 눈치를 많이 살피는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오늘의 태도는 평소보다 사뭇 달랐다. 왜 갑자기 저러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 이해가 갔다.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도 가짜가 아닐까?그들의 목적은 부소경과 그녀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유인책!신세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그녀를 괴롭히는 걸까?그녀는 어려서부터 착하게 살아왔다.그녀의 부모님 역시 본분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하지만 아빠가 병사하고 엄마는 감옥에 간 뒤로 여태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그녀도 정교하게 짜인 함정에 빠져 감옥에 들어가고 그 안에서조차 누군가에게 이용을 당하면서 미혼모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생부는 6년 동안 그녀를 죽이려고 쫓아다녔다.신유리와 안락한 생활을 한지 고작 반년이었다.신세희는 손에 칼이라도 들고 있었다면 자신을 모함하는 모두를 찔러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신세희에게 시비를 걸었던 중년 여자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다들 와서 이것 좀 보세요. 이 여자 이렇게 악랄한 여자에요. 전에 살인죄를 저질렀는데 출소해서 또 사람을 죽였어요. 피해자 중에는 곽세건이라는 노인도 있어요. 70세나 되신 노인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니까요. 이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사이코패스였어요.”50대의 시골 여인은 확신에 찬 말투로 신세희의 죄명을 하나하나 읊었다.구경꾼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신세희의 옆을 지키던 엄선우는 재빨리 부소경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일이야?”엄선우가 다급히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엄선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부름 소리와 잡음이 들렸다.“대표님, 아버님 상태가 갑자기….”엄선우는 조용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지금 부소경 쪽도 무척 정신이 없어 보였다. 비록 부소경과 부성웅이 화목한 부자 사이는 아니었지만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라면
서 씨 어르신은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그러더니 확신에 찬 어조로 신세희에게 말했다.“빌미를 제공한 사람은 너야. 옛말 그른 거 하나 없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피어 오르지 않아. 너한테 파고들 구멍이 많았을 뿐이지.”신세희는 고개를 돌려 임지강을 바라보며 물었다.“당신이… 내 아빠 맞아요? 내가 진짜 당신 핏줄이긴 한 건가요?”임지강은 냉랭한 눈빛으로 신세희를 쏘아보며 말했다.“난 너 같은 망나니 딸을 둔 적 없어!”신세희는 실소를 터뜨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병원에 누워 있는 당신 딸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요?”임지강이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핏줄인데 구해주는 건 당연하잖아? 그런데 너는 그 애가 죽어간다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했지! 매정한 년! 나한테 어찌 너 같은 쓰레기가 딸로 태어났는지 의문이야!”“쓰레기라고요!”신세희는 헛웃음을 지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억지로 눈물을 집어삼켰다.고개를 돌린 신세희는 서 씨 어르신을 바라보며 말했다.“어르신 말씀대로 옛날 말 그른 거 하나 없네요.”“그게 무슨 소리야?”노인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제가 졌어요. 어르신은 참 대단한 분이세요.”신세희가 말했다.“칭찬 고맙구나.”신세희가 다시 물었다.“저를 죽음으로 내몰면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셨나요?”“양심의 가책?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서 씨 어르신은 당당하게 되물었다.“서시언은 너 때문에 두 다리를 잃었어. 그 아이 부모한테 내가 죄책감을 가져야 하나? 아니면 너 때문에 죽을뻔한 조의찬? 그리고 가성섬에 있는 내 외손녀의 약혼자였던 반호경은 어떻고? 그게 다 내 잘못이니? 내가 너한테 미안함을 느껴야 해?”“그렇지 않나요?”“그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이익을 위해 너한테 좀 잘못을 한다고 해도 그게 뭐 어때서?”서 씨 어르신이 말했다.“게다가 내가 너한테 미안할 일은 없다. 그때 처벌이 너무 가벼웠던 건 사실이잖니. 출소한 뒤에도 너는 잘못을
“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아요! 조건 없이 기증할게요!”신세희가 단호하게 말했다.“아쉽지만 이미 늦었어!”어르신의 매정한 말에 신세희는 숨이 막혔다.노인은 점점 더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신장 두 쪽을 다 가져갈 수 있는데 내가 왜 하나만 가져가겠니?”신세희는 눈물을 삼키며 처연하게 물었다.“꼭 이러셔야겠어요?”“미안하지만 난 이미 결정했단다! 너한테는 나와 협상할 자격이 없어!”신세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갈라터진 입술에서 피가 스며 나왔다.매정하고 이기적인 노인 앞에 그녀는 또다시 깊은 절망을 느꼈다.신세희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그래요! 그냥 나를 죽여요! 임지강, 죽어서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를 이 세상에 데려왔으면서 왜 나한테 이런 못된 짓을 한 거야? 우리 엄마한테는 왜 그랬어? 당신 우리 모녀에게 관심이나 준 적 있어? 당신 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임지강, 내가 죽게 되면 당신을 지옥으로 끌고 갈 거야!”“그리고 영감, 잘 들어! 지금 당장 당신들한테 끌려가지는 않을 거야! 온갖 질병에 걸려서 장기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나 자신을 학대할 거야! 그렇게 해서 당신 외손녀가 내 장기를 탐내지 않도록 만들 거야!”“너….”“하하!”신세희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마음껏 해봐! 내 목숨 너희들한테 줄게! 나를 죽여! 당장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라고!”그녀를 바라보는 엄선우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할아버지!”사람들 틈에서 누군가가 비집고 들어왔다.“할아버지, 정말 너무하세요! 이러다가 천벌 받아요!”서 씨 어르신은 고개를 돌리고 서준명을 바라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서준명 넌 또 왜 왔어? 내가 왜 천벌을 받아? 저 여자는 죗값을 치르는 거야. 6년 전에 출소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곽세건을 평생 사람 구실하지 못하게 만들었잖아! 이건 사실이야!”“임 씨 가문에서 곽세건을 이용해서 세희
여자의 악에 받친 고함에 모두가 놀랐다.거칠고 증오에 찬 목소리는 야수가 울부짖는 느낌도 들었다.한 여자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왔다.여자라고 표현했지만 귀신처럼 산발에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남루한 옷차림을 한 노숙자였다.그녀는 커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신세희의 앞을 막아섰다.거리가 가까워서 상대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머리는 군데군데 떡 지고 흙도 묻어 있었다.그녀는 혼탁한 두 눈으로 서 씨 어르신을 노려보고 있었다.“영감! 내 딸 털끝이라도 건드려 봐! 당신 외손녀를 갈가리 찢어버릴 테니까!”서 씨 어르신은 인상을 찌푸리고 이 불청객을 쏘아보며 말했다.“넌 또 누구야? 누군데 우리 집안 일에 끼어들어?”등 뒤에서 신세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엄마… 엄마야? 엄마 맞아?”신세희에게 등을 돌리고 온몸으로 그녀를 가로막고 있던 노숙자는 엄마라는 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엄마지? 엄마 맞잖아!”신세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여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여자는 흠칫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렸다.신세희는 여자의 앞으로 다가가서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훑어 보았다. 먼지를 가득 뒤집어써서 이목구비가 보이지도 않았지만 신세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엄마, 우리 엄마 맞지?”여자의 혼탁한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엄마….”신세희는 목놓아 울며 여자의 품에 안겼다.여자의 손에 들렸던 나뭇가지가 바닥에 떨어졌다.“엄마… 미안해. 미안해, 엄마!”신세희가 울며 말했다.“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엄마!”“나… 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하게 살았어. 건축학과에 지원하려고. 그러면 나중에 우리도 돈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대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엄마,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나 믿어줘, 엄마. 임지강이랑 허영이 나를 모함한 거야.”“난 임지강이 내 아빠인 줄도 몰랐어. 엄마도, 임지강 본인도 나한테 아무 말 안 했잖아. 내가 그 집에서
“아이 아빠가 누군지도 몰랐어. 출소하고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어서 임지강을 찾아갔어. 왜 엄마를 살리지 않았냐고 임지강에게 따졌어.”“그때 임지강은 최선을 다했지만 엄마를 살리지 못했다고 나한테 말했어. 그리고 엄마를 고향에 묻었다고 했어.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는데 배도 점점 불러오고 돈이 없어서 갈 수가 없었어.”“미안해, 엄마. 엄마가 정말 살아 있을 줄은 몰랐어.”“엄마가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했어. 아빠와 같은 곳에 묻힌 줄 알았어. 돈을 벌어서 고향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임지강 가족들이 나를 죽이려고 사람을 보냈어.”“6년이나 도망생활을 했어. 어디를 가든 임지강과 허영에게 들켰어. 그래서 이름도 바꾸고 계속 이사를 했어….”“반년 전에 아이 아빠가 나를 찾아왔어. 그렇게 남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두 달 전에 엄마 제사를 지내러 고향에 갔었어. 아빠와 엄마의 무덤을 남성으로 옮기려고. 그때에야 알았어. 엄마가….”“임지강이 나한테 거짓말했던 거야. 엄마는 살아계셨는데 저 인간이 나를 속였어!”“그 뒤로 줄곧 엄마를 찾아 다녔어.”“고향에서 돌아온 뒤로 누군가가 멀리서 나와 유리를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멀리서 나를 바라보던 사람이 엄마 맞잖아.”“왜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어?”“내가 엄마를 지키지 못해서 화난 거야? 내가 병원비를 보내지 못해서 나한테 화났어? 아니면 몇 년 동안 엄마를 찾지 않아서 화났어?”“미안해, 엄마. 미안해!”신세희는 어린아이처럼 구슬피 울었다.“엄마, 미안해. 세희가 잘못했어….”이 모습을 지켜본 서준명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형사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시골에서 올라온 중년 여자의 신고로 일단 참고인 조사부터 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슬픈 사연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그들은 서 씨 어르신의 눈치를 살폈다.서 씨 어르신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가 알던 사실과 너무도 달랐다.임지강의 말로는 신세희의 엄마는 아이를 그에게 버리고 혼자 행복을 찾아
서준명은 고모를 부르며 노숙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여자는 움찔하며 혼탁한 눈으로 서준명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먼지투성이 얼굴은 눈물이 번져 더욱 볼품이 없었다.그녀는 핏발이 선 눈으로 서준명을 바라보며 처량한 목소리로 물었다.“젊은 청년, 방금 나를 뭐라고 불렀어?”서준명은 다가가서 노숙자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당신이 제 고모 맞죠? 당신은 작은할머니의 아이가 아니라 제 할머니의 핏줄이잖아요. 고모.”그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주절거렸다.“고모는 어렸을 때 작은할머니와 같이 생활했다고 들었어요. 두 분은 나중에 어쩔 수 없이 저택을 떠나 밖에서 생활했다고요. 고모가 열여덟 살이 되고 작은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할아버지에게 고모는 우리 할머니가 낳은 아이라고 실토하셨죠.”“작은할머니는 재능이 넘치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지금도 그분이 그린 그림을 간직하고 있어요.”말을 마친 서준명은 고모의 표정을 살폈다.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머리카락에 가려지지 않은 곳도 먼지가 껴서 본연의 피부색을 알아볼 수 없었다.혼탁하고 절망한 눈빛만 똑똑히 보였다.핏발이 선 눈에서는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그녀는 서준명을 잠시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우리 엄마를 여태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우리 엄마의 그림도….”“고모!”서준명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당신이 제 고모 맞군요….”놀란 서 씨 어르신이 뒤로 뒷걸음질 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네가… 내 딸이라고?”서준명은 고개를 들고 슬픈 표정으로 노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고모, 그거 알아요? 저희 부모님, 그리고 우리 형제들… 항상 고모를 그리워하고 찾으러 다녔어요. 형은 해외에서 고모의 소식을 수소문했고요. 우리 부모님은 전국 각지에 사람을 보내 고모를 찾았어요.”“우리 가족은 30년이 넘게 고모를 찾아 다녔어요.”“고모는 열여덟에 집을 떠났고 제가 벌써 서른이 넘었어요.”서준명은 계속해서 고모를 불렀다.노숙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