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영감 부부가 하예정의 집에서 지내는 건 괜찮지만 두 노인네가 하예정의 부모님이 남겨주신 이 집을 하지문에게 주려고 하니 하예정 자매도 소송하기로 결정했다.부모님이 지은 집이고 땅문서도 하예정 아빠의 명의로 되어 있어 상속법에 따라 상속하면 죽었다가 깨어나도 하지문에게 차려질 일은 없다.두 자매가 멀쩡하게 살아있으니까!“벽돌과 모래를 어디서 파는지는 알아?”이경혜가 관심 조로 물었다.“저번에 고향에 내려갔을 때 경옥 이모랑 연락이 닿아서 전화해서 여쭤봤더니 작년에 금방 집을 다시 지었대요. 경옥 이모한테서 벽돌을 실어주는 기사님 연락처를 받았어요. 주말에 벽돌 한 트럭 실어주기로 제가 다 얘기해놨어요.”하예정은 줄곧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전에는 두 자매가 그럴 능력이 없었다.이젠 드디어 여건이 좋아졌으니 바로 실천에 착수해야 한다. 두 자매는 원래 할머니, 할아버지가 지내시겠다고 해서 두 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내게 하고 나중에 자연스럽게 그 집을 돌려받을 줄 알았다.다만 그녀들이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녀들을 내쫓을 때 이미 그 집을 차지하고 아들과 손자에게 남겨줄 타산이었다.그해 할아버지가 막대기로 두 자매를 내쫓으며 으름장을 놓았다.“너희들 아빠는 내 아들이야. 아들이 죽었으니 걔가 남긴 모든 것이 아버지인 내 소유지. 아들로서 제 아비에게 드린 마지막 효도라고. 너희가 사내자식이었다면 내가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끝까지 길러줬을 거야. 너희들 아비의 집도 전부 너희에게 남겨줬을 테고. 그런데 이 계집년들이 내 아들 집을 상속받으려고? 어림도 없어! 계집년이 뭔 소용이야? 다 키워봤자 시집 보내면 남이잖아. 내 아들이 힘들게 지은 집인데 누구 좋자고 딴 사람한테 넘겨!”하 영감은 집안 재산이 딸들과 아무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셋째 아들은 딸만 둘일 뿐 아들을 낳지 못했다. 하여 셋째가 죽은 후 조카에게 집을 상속하면 적어도 하씨 집안 사람이니 다른 성씨인 남을 주는 것보단 낫다고 여겼다.
전태윤이 물었다.「왜 이제야 출발해? 그 킬힐은 감당할 수 있고?」하예정이 흠칫 놀라더니 문자로 그에게 물었다.「내가 킬힐 신은 건 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서점에서 나올 때 단화를 신고 있었다.전태윤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소현 누나가 너 힐 신고 걸어 다니는 영상을 내게 보냈어. 고마워, 예정아. 나 때문에 많이 힘들지.」그의 세상에 녹아들도록 노력하는 그녀가 너무 고마웠다.하예정은 원래 제멋대로인 사람이라 평상시 옷차림도 편안함 위주였다. 그런 그녀가 전태윤을 위해 변하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까. 전태윤은 안쓰러우면서도 감격할 따름이었다. 그는 평생 그녀를 사랑하리라 다짐했다.「소현 언니가 나를 팔았네요. 하이힐 신고 걷는 모습 되게 웃기죠?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하이힐 벗어 던지고 싶어요. 그래도 슬리퍼가 제일 편해요.」관성을 포함한 이 지역 사람들이 슬리퍼 한 켤레로 만천하를 누빈다는 것은 전국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예준하 씨를 만나서 집에 모시고 한참 얘기 나누다 보니 늦게 출발했어요.」하예정이 좀전의 남편의 물음에 대답했다.전태윤은 살짝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예준하 씨는 어떻게 만났어?」「이모네 옆집 그 별장을 예준하 씨가 샀어요. 마침 준하 씨가 풍수지리 전문가를 모시고 집 보러 왔다가 저희랑 마주쳤어요. 소현 언니가 준하 씨를 집으로 초대했고요. 앞으로 이웃으로 지내야 하잖아요.」부부가 서로 문자를 주고받아 하예정은 안심하고 대담하게 자신의 추측을 남편에게 털어놓았다.「태윤 씨, 난 왠지 준하 씨가 장씨 일가 별장을 산 게 꼭 소현 언니랑 이웃이 되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아요.」그녀가 손을 다쳐서 병원에서 수액을 맞을 때 성소현이 함께 있어 줬는데 그때 마침 예준하도 급성 위장염으로 병원에 갔다. 성소현은 아마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하예정은 똑똑히 지켜보았다.예준하는 성소현을 보자 배를 끌어안고 무기력하게 있다가 불쑥 허리를 곧추세우고 가슴을 쭉 펴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예준하는 성소현에게 다 죽어가는 모습을
동씨 가문에 도착하자 별장 대문이 활짝 열리고 본관 입구의 큰 잔디밭이 아주 예쁘게 꾸며졌다. 많은 손님들이 와인잔을 들고 삼삼오오 잔디밭에 모여서 담소를 나누었다.이경혜의 신분과 지위가 높다 보니 그녀의 차가 동씨 가문 입구에 도착하고 별장에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을 때 동씨 일가에서 이미 소식을 접했다.동 대표 부부는 즉시 자녀를 데리고 마중 나왔다.이경혜의 차는 동씨 일가 도우미들의 안내로 주차장에 주차했다. 동 대표는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와서 친히 이경혜의 차 문을 열어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오셨어요, 사모님.”이경혜가 우아하게 차에서 내렸다.“오랜만이에요, 대표님.”이경혜가 웃으며 인사했다.동 대표의 부인도 자녀들과 함께 이경혜에게 인사를 올렸다.동씨 가문은 1남 2녀인데 막내아들이 올해 막 여덟 살이 되어 새하얗고 통통한 얼굴에 나름대로 예의가 밝았다. 동 대표 부인이 아들을 조용히 가르친 후 꼬마 녀석은 예의 바르게 이경혜에게 인사를 올렸다.성소현과 하예정이 차에서 내려와 나란히 이경혜에게 걸어가 양옆에 서자 마치 친자매 같았다.성소현은 관성 상류층에서 아주 유명했다. 그녀의 성격뿐만 아니라 전태윤에게 공개 고백하고 적극적으로 대시한 유일한 여자이기 때문이다.전태윤을 짝사랑하는 여자가 실은 엄청 많지만 그녀들은 성소현 같은 용기가 없다.“소현 씨는 점점 더 예뻐지시네요.”동 대표 부인이 성소현을 칭찬했다.그녀는 이경혜가 하나뿐인 딸을 가장 아낀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성소현을 칭찬하며 이경혜의 환심을 사려했다.아니나 다를까 이경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사모님의 두 따님도 너무 예뻐요. 엄마, 아빠의 예쁜 점만 쏙 빼닮았네요. 저번에 큰따님을 볼 때까지만 해도 양 갈래머리를 한 어린아이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어여쁜 소녀가 되었대요. 사모님은 참 좋으시겠어요.”동씨 일가 큰딸이 이경혜의 칭찬을 듣고 얼굴이 빨개졌다.동 대표 부인은 하예정을 보면서 전에 만난 적 있는 얼굴인데 어디서 봤던지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
“실례합니다, 대표님.”동 대표 부인은 하예정에게 초대장을 보낸 적이 없다. 그녀는 이모의 명의를 빌려서 함께 왔다.동 대표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실례라니요, 아니에요. 전씨 사모님이 오신 것만으로도 저희에겐 영광인걸요.”하예정은 이경혜가 동씨 가문 큰 따님을 위해 준비한 생일선물을 손에 들고 있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이모한테 드렸다. 이경혜가 곧이어 동씨 일가 큰 따님에게 선물을 건네며 가볍게 웃었다.“아가씨, 생일 축하해요.”동 대표 부인이 황급히 말했다.“사모님, 그냥 진주라고 부르시면 돼요. 우리 진주 생일 파티에 참석해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게다가 이렇게 과분한 선물까지 준비해 오시다니, 정말 너무 감사드려요.”그녀는 진주에게 이경혜가 준 선물을 얼른 받으라고 곁눈질했다.이경혜는 진주 세트를 선물했다.진주는 이경혜가 준 선물을 받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이경혜가 딸과 조카만 데리고 올 뿐 성문철은 함께하지 않았다. 동 대표는 아내와 두 딸에게 사모님을 잘 모시라고 분부하고는 곧바로 다른 손님들을 맞이하러 갔다.동 대표 부인은 열정적으로 이경혜 일행을 반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동 대표 부인의 열정 속에 공손함이 담겨 있다는 걸 훤히 보아냈다. 이경혜의 옆에 있는 젊은 여인에게 유독 더 공손하게 대했다.많은 사람들이 하예정은 전태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동 대표 부인은 오히려 냉철하게 꿰뚫어 보았다. 하예정이 전태윤에게 어울리든 말든 그녀는 이미 전태윤의 합법적인 아내이고 전씨 일가의 사모님이다. 전태윤이 하예정의 신분을 공개할 때 애처가 타이틀을 위해 인터뷰를 받았다.전태윤이 이토록 사랑하는 여자이니 하예정의 사모님 자리가 얼마나 굳건한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전씨 일가 어르신들은 늘 생각이 깨어 있고 하예정도 전씨 할머니가 직접 고른 손주며느리 감이라고 한다. 어르신이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시는 한 하예정이 거지라 해도 감히 그녀에게 무례할 자가 없다.하여 동 대표 부인도 감히 그녀를 얕잡아보지 못하
여씨 사모님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성씨 사모님과 성소현 씨도 참 아량이 넓어요. 자신의 예비 사위를 외조카 딸에게 빼앗겼는데도 여전히 예정 씨를 데리고 여러 사모님께 소개해 주고 있잖아요.”그녀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조카가 아무리 좋아도 제 딸만 할까?누군가가 여씨 사모님에게 반박했다.“여씨 사모님, 말 좀 가려서 하세요. 전씨 도련님은 소현 씨의 마음을 받아준 적도 없고 무언가를 맹세한 적도 없어요. 단지 소현 씨가 일방적으로 좋아한 것뿐이에요. 다만 소현 씨도 아량이 넓은 건 사실이죠. 화끈하게 사랑했고 쿨하게 내려놨잖아요. 진실을 알게 된 후 두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해 줬어요. 저도 그때 소현 씨를 다시 보게 됐어요.”“사모님은 저희 앞에서만 얘기하고 이만 멈추세요. 전씨 사모님의 출신을 사방에 알리지 말고요. 전씨 도련님은 여씨 일가에서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여씨 사모님은 입을 벌려 뭐라 말하려 했지만 결국 꾹 삼키고 더는 그런 사모님들과 논쟁하지 않았다.그녀는 원래 이 사교권에서 남들의 웃음거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제수가 아주버님께 시집간 케이스니까.그녀의 원래 남편은 현재 남편의 친남동생이다. 부부가 딸을 낳고 두 살까지 키웠을 때 남편이 우울증으로 투신자살했고 나중에 그녀는 아주버님과 재혼했다.아주버님과 재혼한 후 그녀는 둘째 사모님에서 큰 사모님으로 거듭났고 시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남편이 세대주로 되었고 그녀는 여씨 일가의 안방마님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제수가 아주버님께 시집간 경우라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여씨 사모님은 아주버님과 재혼한 후 또 아들 하나, 딸 하나 더 낳았다. 한편 죽은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여운초는 여씨 일가에서 투명 인간처럼 지냈고 그 집안의 도우미들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게다가 16살 때 병을 앓아 시력을 잃었고 실명하니 더 미움받았다. 그녀의 친모인 여씨 사모님마저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혼자 알아서 살게
“방안에 30분 동안 있으면서 가장 큰 수확은 바로 명함이에요.”성소현이 가볍게 웃었다.“다 그래. 서로 이익 때문에 왕래하고 있지. 얻을 게 없는 사람은 아예 상대하지 않아! 뭐 먹을래? 내가 가져다줄게.”“아까 본 디저트들이 정교하고 예뻐서 맛있을 것 같아요. 그럼 디저트 좀 갖다줘요. 가게에서 조금 먹고 와서 너무 배고프진 않아요.”단 음식을 좋아하는 그녀는 정교한 디저트들을 보자 군침이 돌았다.전에 심효진과 심미란을 따라 연회에 참석할 땐 심효진과 둘이 구석에 숨어 실컷 먹기만 했다. 그녀는 디저트가 역시 제일 맛있었다. 밖에서 파는 디저트들보다 훨씬 맛있었다.“알았어.”성소현은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하예정을 위해 디저트를 챙기러 갔다.잠시 후 성소현은 빈손으로 돌아왔고 그녀 뒤에 동씨 일가의 도우미가 두 명 따라왔다. 도우미들은 손에 쟁반을 들고 있었고 쟁반 위엔 성소현이 자신과 하예정을 위해 고른 음식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여기 놔주시면 돼요. 고마워요.”두 도우미는 쟁반을 내려놓고 괜찮다고 말한 후 곧장 다른 사람들의 시중을 들러 갔다.두 자매는 구석에 숨어 실컷 먹었고 아무도 감히 그녀들을 방해하지 못했다. 성소현이 워낙 한 성격 하다 보니 그녀 마음에 안 드는 자가 가까이 오기만 하면 가차 없이 체면을 짓밟아 버린다. 그러니 누가 이런 장소에서 체면이 깎이고 싶겠는가?“예정아.”성소현이 갑자기 하예정을 툭툭 치며 똑같이 구석에 있는 여자아이를 보라고 곁눈질했다. 여자아이는 정교한 지갑에서 무언가를 한 팩 꺼내더니 자신의 술잔에 붓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돌려 인파들 속으로 들어갔다.여자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소현과 하예정을 발견하지 못했다. 자신의 꼼수가 누군가에게 적나라하게 들켰다는 걸 전혀 몰랐다.“술에 뭘 넣은 거죠?”성소현이 말했다.“아마도 약 가루인 것 같아. 술에 뿌리니 바로 녹아들고 술 냄새가 가려져 마시는 사람은 전혀 다른 맛을 못 느낄 거야. 과연 누가 타깃일까? 진주 씨 성인식이자 생
하예정은 줄곧 여운별만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약을 탄 술을 아무에게도 안 줬고 본인도 마시지 않았다. 하예정은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살짝 궁금했다!곧이어 하예정은 답을 얻었다.그 술을 다른 사람에게 안 준 게 아니라 술을 마실 사람이 이제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스쿠터 한 대가 동가네 별장으로 질주해 왔는데 정원을 가득 채운 고급 차들 사이에서 스쿠터가 유난히 돌출되어 보였다.스쿠터를 타고 온 사람은 스무 살 남짓한 여자아이였는데 중점은 그녀가 아니라 뒷좌석에 앉은 여자였다. 그녀는 품에 꽃다발을 안고 스쿠터에서 내린 후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서 길을 살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그녀는 맹인이었다!하예정은 술잔을 내려놓고 반듯하게 앉아 맹인 여자아이가 한 손에 꽃다발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맹인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잔디밭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할머니가 전이진에게 준 사진이자 그에게 정해준 신붓감이 바로 그녀였다. 할머니는 전이진에게 1년 안에 무조건 상대의 마음을 얻어 아내로 들여야 한다고 명령했다. 이행하지 못하면 뒷일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그랬다, 그 상대도 여씨 성이었다.여씨 그룹 오너 여 대표의 의붓딸이자 조카딸인 여운초였다.하예정은 동씨 가문의 연회에서 여운초를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여운초는 걸음이 매우 느렸다. 앞이 안 보이니까.주차한 곳은 여운별과 그리 멀지 않아 일반인들은 2분이면 걸어올 거리인데 여운초는 십여 분을 걸어서야 겨우 여운별 앞에 도착했다.“꽃 배달 좀 시켰더니 뭘 이렇게 늦게 와? 배달 속도가 이렇게 느린데 네 그 가게가 문을 안 닫는 게 기적이지 기적이야.”여운별은 여운초보다 여섯 살 어려 올해 갓 스무 살이다. 여씨 사모님이 제 아주버님과 재혼하고 낳은 첫 아이라 부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여씨 일가는 2천억 자산의 숨은 재벌 가문이다. 여운별은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 이기적이고 교활한 성격으로 돼버렸다.그녀가 가장
여씨 사모님은 가까운 곳에서 몇몇 사모님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두 딸아이의 인기척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대처 없이 여전히 딴사람들과 수다를 떨었다.여운초는 한참 침묵하다가 결국 동생이 준 술잔을 받으며 물었다.“이거 마시면 꽃값 줄 거야?”“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내가 번복하겠니? 이 술만 마시면 20만 원 전부, 한 장도 빠짐없이 다 너 줄게.”“알았어.”여운초가 잔을 들어 입가에 갖다 대고 막 마시려던 참인데 누군가가 불쑥 손 내밀어 그녀의 술잔을 뺏어갔다.“이 술 마시지 말아요.”낯선 이의 목소리였다.여운초는 상대의 목소리로 위치를 찾고는 고개 돌려 의아한 표정으로 마주했다.여운초의 술잔을 뺏어간 사람은 다름 아닌 하예정이다.다들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고 있을 때 하예정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그녀는 여운별이 여운초의 술잔에 가루를 탄 걸 알고 있다. 이는 누가 봐도 좋은 취지가 아닐 터이니 여운초가 마시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여운초는 할머니가 전이진에게 정해준 신붓감이다. 몰랐다면 모를까, 다 알게 된 판에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하예정은 선뜻 나서서 그녀를 지켜주었다.“하예정 씨, 이건 하예정 씨랑 상관없는 일이에요.”하예정을 본 여운별은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그녀는 하예정을 전씨 사모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부르고 나면 자신이 이 시골 여자만도 못하다고 느껴질까 봐.“좀 전에 여운별 씨가 이 술잔에 약 타는 걸 봤어요.”말을 건넨 사람은 하예정이 아닌 성소현이었다.그녀는 하예정이 왜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미 나선 바에 그녀도 뒤처질 수 없어 함께 끼어들었다. 여운별 같은 레벨은 성소현의 안중에도 없다.그녀는 여운별의 음모를 바로 까발렸다.“성소현 씨,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른대로 해야죠. 내가 술에 약 타는 거 어느 눈으로 봤어요?”성소현이 턱을 치키고 거만하게 말했다.“내 눈 보이죠?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