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그가 전씨 그룹에서 차지한 지분과 주식 양도서 및 은행카드와 그의 명의로 된 모든 부동산, 상가 등 증명 서류를 정리해서 봉투에 넣었다. 무릇 그의 개인재산은 남김없이 봉투에 담아두었다.“내가 주식을 양도해도 넌 회사를 신경 안 써도 돼. 전씨 그룹은 내가 계속 운영하고 벌어들인 수입은 전부 네 거야. 난 그저 널 위해 일하는 직원일 뿐이야. 네가 얼마나 원하던, 재산을 얼마만큼 소유한 여자 갑부가 되고 싶던 내가 분발해서 꼭 네가 원하는 목표를 이뤄줄게. 너만 허락한다면 바로 나랑 함께 수속 밟으러 가자. 이 재산들 모두 네 명의로 이체할 거야. 난 요만큼도 남기지 않아. 매달 내게 용돈만 주면 돼. 애초에 네가 내 돈을 노릴까 봐 경계했지만 이젠 내가 선뜻 전 재산을 넘겨줄게. 이렇게 해서라도 너에 대한 내 믿음을 인정받고 싶고 또한 실제 행동으로 네게 사과하고 싶어. 맹세할게. 애초의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하예정은 그의 부동산 서류들을 더 보지 않고 싹 다 봉투에 넣고는 그를 빤히 쳐다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예정아, 뭐라고 말 좀 해봐. 된다, 안 된다 대답이라도 해줘. 응?”그녀의 침묵에 전태윤은 너무 불안했다.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뭘 어떻게 하려는지 알 길이 없었다.하예정은 서류 봉투를 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태윤 씨, 난 이런 제안 못 받아들이겠어요.”전태윤이 발끈하며 그녀의 손을 확 잡아채고 초조하게 물었다.“예정아, 내가 어떻게 해줄까? 말만 해. 네가 원하는 건 최선을 다해서 이뤄줄게. 우리 둘의 경제적 차이가 너무 크다고 했지? 그럼 내가 소유한 전 재산을 네 명의로 돌리면 네가 부자고 난 빈털터리야. 내가 열세에 처하는데 이래도 안심이 안 돼?”그는 진짜 전 재산을 털어 그녀에게 주려고 했다.“태윤 씨, 난 당신한테 증정받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단지 태윤 씨한테 기대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요. 알아들어요? 태윤 씨의 증정품이 되어 사사건건 태윤 씨한테 기대고 싶지 않아요.”감정이 깊
그는 하예정이 거절할 줄 알고 그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뜸 협박에 나섰다.“이 봉투 안 가지면 창문 밖으로 던져버릴 거야. 우리 집 세대주가 너인데 네가 집안 재산을 신경 쓰지 않으면 나도 신경 쓸 필요 없지! 난 오직 너만 신경 써.”하예정은 말문이 막혔다.일주일 만에 만나자고 약속을 잡으니 그녀는 전태윤이 드디어 그녀를 이해하고 욱한 성질도 고쳤을 줄 알았는데 지금 그의 협박을 들으면서 속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전태윤이 타고난 성격이 이런 걸 그녀는 혹시라도 본인이 예외라 그를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다.그는 변하지 않았고 그녀도 더는 바꾸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둘은 끊임없는 마찰로 서로를 갉아먹을 뿐이다.하예정은 그를 한참 쳐다보다가 다시 서류 봉투를 들고 안에서 블랙카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남자가 돼서 그것도 대표님이란 분이 블랙카드도 없이 어딜 나다니겠어요? 누가 알아봐 주겠냐고요? 이 카드는 태윤 씨 가져요. 나머지는 내가 일단 당신 위해 보관해둘게요.”안 그러면 그는 진짜 봉투째로 밖에 내던질 것이다.전태윤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하예정은 감히 내기할 엄두가 안 났다.전태윤도 그녀의 태도에 곧장 블랙카드를 받으며 말했다.“생활용 카드에 이미 많은 돈을 넣었으니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 절대 너 자신을 서운하게 대하진 마. 처형한테도 집을 또 살지 여쭤봐 봐. 둘이 함께 집 보러 다녀. 계속 월세방에서 지내면 내 집이 없다는 기분이 들어. 처형이 돈 모자라면 빌려줄지 그냥 줄지 네가 알아서 해. 아무튼 처형과 우빈이 모자에게 제집 마련을 해줘야 해.”일주일간 마음을 식히면서 전태윤은 전 재산을 하예정에게 돌리면서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처형을 도울 생각까지 했다. 실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결정이다. 왜냐하면 하예정이 제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바로 언니 하예진과 조카 우빈이니까.“언니는 가게에 돈을 투자해서 잠시 집 살 생각이 없어요.”하예정도 언니에게 말해보았다
“그럼 나랑 함께 우리 집들을 보러 갈래?”전태윤이 말한 집들은 자연스럽게 그가 결혼 전에 산 것을 의미한다.그가 산 집은 대부분 앞뒤 정원이 달린 별장이다.고층은 단 하나인데 장차 아이가 학교 다니는 걸 대비해서 사놓았다. 그 집을 살 때 전태윤은 솔로였지만 집안 어르신들이 평생 그를 독신으로 살게 할 리는 없으니 결혼하고 애 낳고 학구열에 뛰어들어 아이를 더 나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미리 학교 근처들에 집을 몇 채 사놓았다.그의 아이가 어느 학교에 다니던 근처에 모두 집이 마련돼있으니 시름 놓고 공부만 하면 된다.“회사일 안 바빠요?”“너와 함께하는 일이면 안 바빠.”하예정이 말했다.“집 보러 가도 주말에 가요. 태윤 씨도 출근 안 하고 나도 가게 안 나가니 그때 다시 봐요.”그녀는 전태윤의 업무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전태윤은 떠보듯이 그녀에게 물었고 이젠 해답을 들었으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예정은 그가 예전에 산 집들을 함께 보러 가기로 했으니 여전히 그를 남편으로 대하고 가족으로 여기고 있다.비록 지금도 떨어져 지내고 있지만 말이다.“그래, 그럼 토요일 아침에 처형네 집으로 데리러 갈게. 처형한테 내 아침밥도 만들어달라고 부탁드려.”“알았어요. 태윤 씨 오는데 언니가 설마 굶기겠어요?”하예정은 우빈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말했다.“나 이만 갈게요. 태윤 씨 계속 볼일 봐요.”전태윤도 잇따라 일어나며 기대에 찬 눈길로 그녀에게 물었다.“우리 함께 밥 먹을까?”시계를 들여다봤지만 고작 오전 열 시라 점심때가 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더 남았다.물론 그가 원하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아니요, 난 일단 우빈이를 언니네로 데려가야 해요. 태윤 씨 몸 봐가면서 일해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술도 적게 마셔요. 허튼소리 할라.”전태윤은 어안이 벙벙했다.누가 배신한 걸까? 술 취해서 홧김에 한 말을 대체 누가 그녀에게 알려준 걸까?실은 아무도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예전에 전태윤이 질투에 눈이 멀어
전태윤은 문득 계급 차이의 실질을 깨달았다.만약 하예정이 출근하지 않으면 그녀는 곧 이혼 전의 하예진처럼 살아갈 것이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전태윤에게 손 내밀어야 하고 줄지 말지는 그의 기분에 달려있다. 이건 마치 은덕을 베푸는 셈이다. 어쩌면 전태윤은 돈 줄 때 그녀가 벌지도 못하면서 써대기만 한다고 푸념할지도 모른다.하예정이 만약 전태윤의 엄마처럼 재벌 가문에서 태어나 재벌가로 시집갔다면 출근하지 않아도 넉넉한 혼수가 뒷받침해주어 수익을 얻게 하고 시종일관 경제적 독립을 유지하게 해준다.전태윤의 엄마가 시집갈 때 전태윤의 아빠도 전씨 일가의 도련님이었다. 전태윤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제 딸이 시댁에서 괴롭힘을 당할까 봐 혼수를 어마어마하게 준비했는데 집, 차, 상가, 작은 회사 등등 없는 게 없었다.외할아버지가 혼수로 딸아이에게 줬던 작은 회사는 몇십 년이 지난 후 전태윤의 엄마가 진작 대기업으로 성장시켜 연 수입이 백억을 넘는다.전태윤은 드디어 깨달았다. 하예정이 원하는 독립이 무엇인지, 그에게 적응하고 그의 삶에 스며들 수 있도록 시간을 달라고 한 게 대체 무슨 뜻인지 드디어 알 것 같았다.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내 몸 잘 챙길 테니까 태윤 씨도 건강 챙겨요.”전태윤은 그녀의 이런 미소를 못 본 지 너무 오래됐다.그는 하예정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저도 몰래 손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뜨거운 눈길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했다.“예정아, 너의 미소가 햇살처럼 내 맘을 비춰서 차가웠던 내 가슴을 녹이고 있어.”엘리베이터 안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거침없이 팔을 벌려 그녀와 우빈을 품에 끌어안았다. 우빈은 중간에 끼여 머리가 전태윤의 가슴에 짓눌렸다. 전태윤은 재빨리 그녀의 빨간 입술에 키스했다.입술이 닿은 순간 전태윤은 저도 몰래 한숨이 새어 나왔다.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지만 더 깊게 빠져들기도 전에 우빈이가 분위기를 깼다.아이는 부부 사이에 끼여 너무 불편한 나머지 마구 몸부림쳤고
하예정은 우빈을 안고 차 앞으로 가서 차 키로 문을 열고 아이를 안전의자에 앉혔다. 그녀는 고개 돌려 뒤에 서 있는 전태윤에게 말했다.“먼저 갈게요.”전태윤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겨우 대답했다.“그래.”그는 하예정의 차 앞부분을 보더니 또다시 차를 바꾸라고 했다.하예정은 이미 차에 앉아 시동을 걸고 도어를 내리고는 그에게 말했다.“이건 태윤 씨가 준 첫차에요.”전태윤의 눈빛이 한없이 짙어졌다.그녀는 곧장 출발했고 전태윤은 제자리에 서서 멀어져가는 그녀의 차를 배웅했다.강일구는 경호팀을 거느리고 멀리 서 있을 뿐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도련님과 사모님이 더이상 다투진 않지만 부부 사이가 왠지 멀어지고 삭막해진 것 같았다. 예전 같은 알콩달콩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하예정의 차가 종적을 감춘 후에야 전태윤이 손짓하며 경호원들을 불러왔다.“회사로 돌아가.”그가 나지막이 말하자 강일구가 기사더러 얼른 차를 가져오라고 했다. 전태윤은 롤스로이스에 앉아 경호 차량의 보호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회사로 돌아갔다.한편 하예정은 곧게 언니네 토스트 가게로 갔다.하예진의 토스트 가게는 인테리어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필요한 물건도 거의 다 사놓았다. 그녀는 식탁과 의자를 내려놓고 깨끗이 청소하면서 개업 날짜만 기다렸다.자영업자들은 개업 날짜를 신중하게 고른다.가게 이름은 ‘하루 토스트’이다. 전혀 우아하지 않고 친근한 이름으로 정했다.이 거리에는 이미 수많은 패스트푸드 가게와 토스트 가게가 있다.하예진이 인테리어 할 때 이 거리의 음식점 주인들이 그녀가 무슨 가게를 열지, 자신들과 경쟁 상대가 되는 건 아닌지 모두 지켜보았다.또 일부 사람들은 진작 그녀를 찾아와 여쭤보았고 그녀도 토스트 가게라고 숨김없이 말해주었다.그 뒤로 토스트 가게 사장님들은 틈만 나면 하예진의 가게로 찾아와 지금 장사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이 거리에 토스트 가게만 반 이상 차지해서 경쟁이 매우 크다고 푸념했다.그때마다 하예진은 가볍게 웃을 뿐 아무 말도
그녀는 테이블 닦는 것을 멈추고 걸레를 들고 나오더니 아들을 안고 차에서 내리는 여동생을 미소 지으며 지켜보았다.“엄마.”주우빈은 엄마를 향해 달려갔다.아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엄마에게 달려가는 것을 보고 하예정은 웃으며 언니에게 말했다.“아무리 예뻐해줘도 엄마랑 더 친하네.”“그야 당연하지. 너랑 제부도 아이를 좋아하니, 하나 낳는 것도 고려해 보는 건 어때? ”하예진은 농담 조로 말하면서 동생의 안색을 살폈는데, 동생이 웃기만 하고 말을 받지 않자 아직 두 부부의 갈등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제부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부른 거야?”하예진은 아들을 안고 여동생과 함께 가게로 돌아가며 관심 조로 물었다.언니가 묻자, 하예정은 서둘러 차로 돌아가 서류 봉투를 꺼내 가져왔다. 여기 전태윤의 전 재산이 들어 있다.가게에 들어선 하예정은 인테리어 기사들이 안에 없는 것을 보고 언니에게 물었다.“벌써 끝났어?”“응, 방금 끝났어. 우선 청소부터 하려고, 하면서 더 손댈 곳이 있는지 확인하고, 만약 없으면 내일 임금 계산해 주겠다고 했어.”하예진은 아들을 내려놓고 가게에서 놀게 한 후 여동생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고 한 테이블에 앉았다.테이블은 몇 번이나 닦아 빛이 날 정도였다.“언니, 지금 기운이 넘치지?”“그럼, 미래를 위해서라도 꼭 열심히 노력할 거야. 언니의 목표는 이 가게를 관성 곳곳에 여는 거야.”“꼭 그렇게 될 거야.”하예정은 언니에게 서류 봉투를 건네주며 말했다.“이건 태윤 씨가 나에게 주려 했던 건데 내가 거절하자 자기 대신 보관해 달라고 했어. 태윤 씨는 아직도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하예진이 이게 뭐냐고 물으면서 서류 봉투에 들어있던 물건을 꺼내보았는데, 부동산 증명서, 가게와 차 키, 그리고 전씨 그룹의 주식 양도서도 보였다. 전씨 그룹의 주식은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다.“제부가 너한테 이걸 다 주겠다던?”하예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많은 부자는 결혼 전에 혼전
“서로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줘.”하예진은 동생의 손등을 툭툭 치더니 물품들을 다시 서류 봉투에 담아 넣었다.“이렇게 중요한 물건은 언니의 월세방에 놓지 마. 이 건물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안정성은 발렌시아 아파트보다 못할 거야. 이것들을 너와 제부의 집으로 가져가서 금고에 안전하게 넣어놔. 제부의 전 재산인데...”하예정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할머니께 전화를 걸어 이 물건들을 보관해 달라고 해야겠어. 그 집이 더 안전해.”“그래.”“점심은 여기서 같이 먹을래?”“성씨 집에 가서 이모를 찾고 싶어, 아마도 이모 집에서 밥을 먹게 될 것 같아.”“이모는 왜? 이모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친이모이자 성씨 사모님 이경혜는 관성에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자매는 이모를 찾은 후 한 번도 자신이 성씨 사모님의 조카딸이라고 입 밖에 낸 적이 없을 뿐더러 이모의 도움도 전부 사양했다.이경혜의 존재는 자매에게 있어 친척이 하나 더 생겼을 뿐이지, 그녀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변화도 주지 않았다.하예진의 전 시어머니는 찾아올 때마다 멍청한 그녀가 성씨 사모님에게 손을 내밀 줄도 모른다고 한다. 그 돈으로 더 큰 사업에 투자하여도 되는데 말이다.투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성씨 그룹에 취직하여 월급을 많이 받는 것도 좋은 길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주형인에게도 괜찮은 일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한다.하예진은 전 시어머니의 말을 항상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모를 통해 상류사회에 발을 들여놓고 내가 잘 적응할 수 있는지, 잘 어울릴 수 있는지 한번 보고 싶었서... 지난번에 소현 언니가 어떤 프로젝트에 투자하려 하는데 나한테 관심이 있냐고 물었어. 그래서 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소현 언니를 따라 그 프로젝트에 투자하기로 했어.”현재 그녀와 전태윤은 이혼이 불가능했다. 전태윤이 손을 놓지 않는 한 아예 떠날 수가 없었다.이혼할 수 없으니, 용감하게 맞설 수밖에.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녀는 반드시
식단도 잘 조절해서 고단백, 고지방의 음식은 되도록 피하고 있다.지금 그녀의 체중은 이미 75킬로까지 줄었는데 그녀의 목표는 50킬로이니 25킬로를 더 빼야 한다. 계속 견지하면 꼭 표준적인 몸매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몇십 킬로를 감량한 후 그녀는 훨씬 보기 좋아졌다.달리기를 마치고 가게에 돌아왔을 때 뜻밖에도 전남편이 가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주형인은 차를 가게 문 앞에 세워 놓았는데, 가게 문이 잠겨있어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차에 기대어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이따금 두 모금씩 들이켰다.하예진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녀는 전남편이 그녀 앞에 나타나는 것이 보기 싫었다.아들을 보러 온 것도 아니고, 우습기 그지없었다.아직 이혼하지 않았을 때, 주형인은 매일 일찍 나가고 늦게 돌아왔는데, 부부는 대화할 기회조차 없었고, 그도 그녀와 교류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예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모두 가정에 관한 사소한 일들 뿐이었고, 주형인이 보기에 그런 하찮은 이야기들은 듣기만 해도 짜증이 났다.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주식이나 프로젝트 등은 이미 직장을 떠난 지 오래된 그녀가 조언을 해줄 수 없는 화제였기에 그는 항상 그들 부부가 공통의 화제가 없다고 하면서 그녀를 보기 귀찮다고 말했다.지금 이혼한 후, 그녀는 스스로 그를 찾아간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는 오히려 자주 그녀 앞에 나타나고 있다.“도대체 어디 간 거야?”주형인은 하예진이 돌아온 것을 보고 몸을 곧게 펴더니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문도 잠그고 장사를 어떻게 해? 내 돈이나 다 탕진하지 마, 사업이란 게 그렇게 쉬울 것 같아? 사람마다 모두 사장질하게?”“뭐가 당신 돈이라는 거야? 내가 쓰는 것은 모두 내 돈이야.”하예진도 그에 맞추어 차가운 표정으로 답했다.“또 무슨 일로 왔어? 지금 이때 당신은 회사에 출근해 있을 시간 아니야? 주형인! 우리는 이미 이혼했으니, 제발 와서 내 평온한 생활 좀 방해하지 마. 당신 와이프가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