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이 뭘 어쩌겠는가?그는 술에 취해 자면서도 꿈을 꾸었다.꿈에서 하예정과 엄청 심하게 다투다가 그녀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하예정, 나 너 아니어도 돼. 언제든지 널 바꿀 수 있다고. 내가 자세 낮출 때 적당히 하고 받아들이지!”하예정은 꿈에서 그를 차갑게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리고 떠나가려 했다.“하예정, 나 떠날 생각 하지 마! 넌 내 거야! 난 꼭 너여야만 한다고!”그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꼭 붙잡고 못 떠나게 했다.전태윤은 그녀를 잡아당겨 오더니 품에 꼭 끌어안고 머리 숙여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와 뜨겁게 사랑도 몇 번 나누고 싶었다...“철퍼덕...”전태윤은 꿈에서 격렬하게 하예정을 파고들더니 몸을 뒤집는 순간 의자에서 떨어져 수영장에 첨벙 빠지고 말았다.차가운 물이 순식간에 그를 통째로 삼켰다.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활활 타오르던 불씨도 수영장에 빠진 순간 꺼져버렸다.‘헐! 너무 추워! 물이 왜 이렇게 많아? 내가 왜 물속에 있지?!’그는 예고 없이 수영장에 빠져 사레에 걸려 물을 두어 모금 마시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어서 허겁지겁 반대편으로 헤엄쳐 가서 다시 일어났다.전태윤은 욕설을 퍼부었다.“어떻게 된 거야? 누가 날 수영장에 떨어트렸어?”그는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고함을 질렀다.수영장 주변의 가로등이 은은한 불빛을 내뿜으며 고요할 따름이었다.그의 고함에 대꾸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수영장 주변에 사람이 아예 없었으니까.그저 맞은편에 침대식 의자가 하나 있고 담요가 바닥에 떨어진 채 반은 물에 잠기고 반은 언덕 위에 있었다.전태윤은 또다시 욕설을 퍼부었다.이곳은 영락없는 전씨 일가 저택이다. 그날 할머니를 더이상 꾀병 부리지 못하게 하려고 전태윤이 바로 이 수영장에서 수영했다.감히 그를 수영장에 내버리는 사람은 할머니 말고 더는 없다!단지 마음이 갑갑해서 술 마신 것뿐인데 할머니가 이런 식으로 혼쭐을 내다니!전태윤은 물에 빠진 순간 술이 다 깼다.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수영장을 반 바퀴
전태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할머니의 지팡이에 맞을까 봐 더는 감히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다. 그는 좀 전에 할머니가 비꼬신 말을 기억하고 나지막이 말했다.“할머니, 나 예정이 아니어도 잘 산다는 말 안 했어요.”그가 어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겠는가.그는 하예정이여야만 하는데, 그녀 아니면 아무도 안 되는데 말이다!!“진짜 안 했어?”전태윤은 순간 말문이 막혀 한참 후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꿈에서 그런 것 같은데... 할머니가 어떻게 아세요?”설마 꿈이 아니었나?진짜 하예정과 심하게 다투고 홧김에 그런 말을 한 걸까? 게다가 그녀와 뜨겁게 몸을 뒹굴려 했다고...“할머니, 나, 나 술 마시고 예정이한테 무슨 짓 했어요?”술에 취해 그녀를 강제로...맙소사!전태윤은 감히 더는 생각할 엄두가 안 났다.술 마시면 실수를 하는 법!심지어 그는 만취 상태였다.할머니는 지팡이를 내리고 그에게 말했다.“네가 예정이한테 무슨 짓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술을 몇 병 마시고는 허튼소리만 해대는데 인제 그만 깨야지. 어때? 정신이 좀 들어?”전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네.”할머니는 그런 방식으로 전태윤을 술 깨게 했다. 만약 안 깨면 그대로 익사할 것이다.“술 마신다고 문제가 해결돼?”전태윤이 머리를 내저었다.“하지만 잠시 동안은 고민을 잊게 해주죠.”“인제 정신이 드니 좀 어때? 일이 더 커질 뻔했잖아! 술에 취하면 무슨 말이나 다 하고 무슨 일이나 다 할 수 있어. 네가 꿈이라고 생각했던 거, 어쩌면 술김에 한 일일 수도 있다고.”전태윤은 사색이 되어 긴장한 말투로 물었다.“할머니, 예정이 어떻게 됐어요?”“몰라, 난.”할머니는 그를 혼낼 뿐 하예정이 어찌 됐는지는 정말 모르신다. 어젯밤에 술 취한 손자를 데려온 사람은 손주며느리가 아닌 소정남이었으니까.전태윤은 자리를 뜨려 했다.“이리 와. 지금이 몇 시인데 예정이 찾아가려고 해? 자는 애 깨우면 널 예뻐나 하겠다!”현재 시각 새벽 다섯 시, 너무
말인즉슨 그녀가 전태윤의 삶에 스며들지 못하면 둘은 곧장 이혼하고 서로에게 자유를 돌려준다는 뜻이다.결혼은 꼭 서로 조건이 맞아야 할까?그와 그의 가족은 단 한 번도 하예정을 꺼린 적이 없는데 왜 그녀는 스스로 그렇게 큰 압박감을 주면서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걸까?‘내가 우리 둘 사이에 조건 차이가 없다면 없는 거야! 내 말이 곧 법이라고!’“기억 안 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아 참, 이 말은 밤새 하데? ‘예정아, 나 너 아니어도 얼마든지 잘 살아.’ 혹시 취중 진담이라도 한 거야? 날 밝으면 예정이한테 가서 직접 전해. 우리 앞에서 센 척해야 무슨 소용인데.”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할머니, 예정이가 나한테 엄청 많은 말을 했어요. 내가 키우는 카나리아가 되고 싶지 않다느니, 나랑 어깨를 견주고 나란히 걷는 여자가 되고 싶다느니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나랑 공통 화제가 있고 싶다는데 우린 원래 공통 화제가 있거든요. 난 예정이를 반려동물로 키우는 게 아니에요. 예정이가 내 아내인데 평생 책임지고 키워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왜 기어코 본인한테 의지하겠다는 거죠? 나한테 시집와서 평생 호강하고 싶어 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난 그런 여자들 다 싫고 예정이만 원해요. 그런데 왜 예정이는 딴 사람들처럼 나한테 시집와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지 않는 거냐고요?”“...”“내가 능력이 달려서 가정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모를까, 아니 충분히 잘 먹고 잘살게 해줄 수 있는데 왜 한사코 독립을 고집하냐고요? 예정이는 지금 가게도 운영하고 수입도 있는데 뭐가 성에 안 찬 거죠? 내가 가게 관두고 집에서 가정주부로 지내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준 자유가 아직도 부족한 걸까요? 예정이는 나 전태윤의 아내인데 누가 감히 얕잡아보고 함부로 대하겠어요? 내가 있는 한 예정이는 관성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어요. 분명 성소현 씨가 무슨 말을 해서 나한테 이런 제안을 한 걸 거예
소정남을 보더니 두 셰퍼드는 짖지 않고 그에게 꼬리까지 흔들었다.그가 한때 심서준을 핑계로 자주 찾아오면서 심서준의 엄마가 그와 제 아들의 관계를 오해한 줄도 모른 채 셰퍼드 두 마리와 친하게 지냈다.심서준이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나 찾아온 건 아니죠?”소정남이 웃으며 답했다.“효진 씨 보러 왔어요. 서준 씨가 아니라.”심서준도 가볍게 웃었다.“나도 어제 알았어요. 엄마가 글쎄 정남 씨가 날 좋아하는 줄로 여기다니, 하하, 웃겨 죽겠어요!”“그러게요. 아주머니가 그렇게 오해하실 줄은 전혀 몰랐어요.”“그러게 누가 올 때마다 나 보러 왔다고 말하래요? 누나도 매번 위층에서 옷 갈아입으면서 겉으론 정남 씨를 신경 쓰지 않는 척해도 실은 일어나자마자 옷방에서 옷을 골랐다니까요. 여자는 참 말과 행동이 달라요.”소정남이 그를 질책했다.“내 앞에서 효진 씨 험담하지 말아 줄래요?”심서준이 말했다.“벌써 한배 탔다고요?”“서준아, 정남이 왔어? 어머, 진짜 정남이네. 어서 안으로 들어와.”심효진의 엄마가 집 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소정남은 사 온 선물을 심효진 엄마에게 드리며 환하게 웃었다.“아주머니랑 아저씨가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제가 직접 골라봤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뭘 또 이런 것까지 사와. 너만 와도 나랑 네 아저씨는 너무 기뻐.”중요한 건 두 분 모두 한시름 놓았다.아직 남자친구가 없는 딸아이에게 이렇게 훌륭한 남자가 대시하고 있으니 그들은 시름이 놓였고, 둘째는 제 아들이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다고 여겼는데 오해인 걸 알고 한시름 놓았다.방에 들어간 후 심효진의 아빠를 보자 소정남은 또다시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심효진 아빠도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다 온화해졌다.오해가 풀리자 그녀의 부모님은 소정남을 마냥 흐뭇하게 바라보았다.그를 자리에 앉힌 후 심효진의 엄마가 아들에게 분부했다.“누나더러 내려오라고 해. 정남이가 왔으니 우리 인제 고모네 댁으로 가야지.”심서준이 머리를 끄덕이고 위층
소정남이 웃으며 말했다.“저 그럼 분발해야겠네요. 아주머니가 준비하신 돈 봉투 하루빨리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듣자 하니 너희 집안이 정보통이라며?”심효진의 아빠가 물었다.“네... 그렇긴 한데 아저씨 정보에 관심 있으신가 봐요?”소정남의 물음에 심효진의 아빠가 진지하게 답했다.“이 나이에 정보는 무슨, 다만 심심할 때 나한테 말하는 것도 괜찮아.”심효진의 엄마가 곧장 남편을 흉봤다.“효진이는 제 아빠를 쏙 빼닮았다니까.”심효진이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고 가십거리에 관심이 많은 것은 아빠 성격을 닮아서였다.소정남도 마침 이런 성향이니 그야말로 하늘이 정한 한집 식구였다.심효진은 본인이 없는 틈에 부모님이 소정남 앞에서 제 흉을 볼까 봐 아침 내내 못 고르던 옷도 냉큼 고르고 허둥지둥 갈아입고서는 휴대폰을 챙기고 아래층으로 달려갔다.“누나, 이미지 신경 써야지. 정남 형이 아래에 와 있어.”심서준은 누나에게 달려가지 말고 단아하게 있으라고 했다.어쩌다가 훌륭한 남자가 누나에게 홀딱 반했는데 이미지에 신경 안 써 이사님이 식겁하여 도망가 버린다면 심서준이 평생 돈 벌어 누나를 책임져야 한다.그는 누나보다 몇 살 어리지만 누나의 결혼을 걱정해야 했다.심효진이 고개 돌려 그에게 말했다.“그 사람 앞에서 우리 모두 발가벗겨진 몸인데 뭘 더 신경 쓰겠어?”심서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소정남의 진짜 신분을 떠올리자 심서준은 불쑥 긴장해졌다. 정남 형이 설마 그의 밑천까지 다 털어낸 걸까?다만 소정남은 심효진한테만 관심 가질 뿐 그는 전혀 안물안궁이다.기껏해서 심서준의 성향과 취미를 알아내고 그에게 맞춰가며 제 편으로 만들 뿐이다.미래의 처남만 공략하면 미래 장모님의 마음도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으니까.어느덧 미래의 장모님도 그를 엄청 마음에 들어 하신다.소정남은 일찌감치 태도를 표했더라면 지금쯤 그녀와 결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정남은 심효진의 남자친구 신분으로 그녀와 함께 심미란의 집에 밥 먹으러 갔다.더는 심
전태윤은 한 주 동안 필사적으로 일에 몰입해 회사 사람들을 모질게 괴롭힌 것도 모른 채 7일간 마음을 가라앉히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자 곧바로 하예정에게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일주일 동안 푹 휴식한 덕에 하예정의 손에 난 상처도 많이 치유되어 적어도 운전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전태윤은 그녀와 관성 호텔 로얄 스위트룸에서 만나기로 했다.하예정은 주우빈을 데리고 왔다.우빈이는 오늘 이모와 함께해야 한다. 하예진의 가게 인테리어가 마무리 단계라 요 며칠 쭉 바삐 돌아쳐서 아들을 돌볼 시간이 없어 동생 예정에게 맡겼다.“사모님.”강일구가 동료들을 거느리고 호텔 입구에 서서 하예정을 기다렸다. 그녀가 주우빈을 안고 차에서 내리자 강일구는 재빨리 마중 나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그 댁 도련님은 어디 있어요?”“도련님은 지금 맨 위층에서 사모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면 돼요.”강일구 일행은 깍듯하게 하예정을 호텔 안으로 모셨다.몇 분 후.그녀는 주우빈을 안고 화려하게 꾸며진 로얄 스위트룸으로 들어갔다.전태윤은 문을 등진 채 창가에 서 있었고 방안에는 짙은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별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전태윤인데 대체 얼마나 피운 걸까?하예정은 테이블 위의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가득 버려져 있는 걸 보았고 그 옆에는 노란색 서류 봉투가 있었는데 안에 뭐가 들었는지 봉투가 불룩하게 부풀어 올랐다.일주일 못 본 사이로 그녀는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이모부.”주우빈이 먼저 방안의 정적을 깨트렸다.우빈의 목소리에 전태윤은 그제야 몸을 돌리고 다 피우지 못한 담배를 냉큼 재떨이에 버렸다.하예정이 들어온 건 알고 있었지만 마침 담배를 피우느라 몸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담배 피우는 남자를 싫어해서 자신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주우빈을 데려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아이에게 간접흡연을 시킬 순 없으니 재빨리 재떨이를 멀리 치우고 문을 활짝 열어 방안에 가득 찬 담배 냄새를 환기시켰다.하예정은 그
전태윤은 그가 전씨 그룹에서 차지한 지분과 주식 양도서 및 은행카드와 그의 명의로 된 모든 부동산, 상가 등 증명 서류를 정리해서 봉투에 넣었다. 무릇 그의 개인재산은 남김없이 봉투에 담아두었다.“내가 주식을 양도해도 넌 회사를 신경 안 써도 돼. 전씨 그룹은 내가 계속 운영하고 벌어들인 수입은 전부 네 거야. 난 그저 널 위해 일하는 직원일 뿐이야. 네가 얼마나 원하던, 재산을 얼마만큼 소유한 여자 갑부가 되고 싶던 내가 분발해서 꼭 네가 원하는 목표를 이뤄줄게. 너만 허락한다면 바로 나랑 함께 수속 밟으러 가자. 이 재산들 모두 네 명의로 이체할 거야. 난 요만큼도 남기지 않아. 매달 내게 용돈만 주면 돼. 애초에 네가 내 돈을 노릴까 봐 경계했지만 이젠 내가 선뜻 전 재산을 넘겨줄게. 이렇게 해서라도 너에 대한 내 믿음을 인정받고 싶고 또한 실제 행동으로 네게 사과하고 싶어. 맹세할게. 애초의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하예정은 그의 부동산 서류들을 더 보지 않고 싹 다 봉투에 넣고는 그를 빤히 쳐다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예정아, 뭐라고 말 좀 해봐. 된다, 안 된다 대답이라도 해줘. 응?”그녀의 침묵에 전태윤은 너무 불안했다.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뭘 어떻게 하려는지 알 길이 없었다.하예정은 서류 봉투를 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태윤 씨, 난 이런 제안 못 받아들이겠어요.”전태윤이 발끈하며 그녀의 손을 확 잡아채고 초조하게 물었다.“예정아, 내가 어떻게 해줄까? 말만 해. 네가 원하는 건 최선을 다해서 이뤄줄게. 우리 둘의 경제적 차이가 너무 크다고 했지? 그럼 내가 소유한 전 재산을 네 명의로 돌리면 네가 부자고 난 빈털터리야. 내가 열세에 처하는데 이래도 안심이 안 돼?”그는 진짜 전 재산을 털어 그녀에게 주려고 했다.“태윤 씨, 난 당신한테 증정받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단지 태윤 씨한테 기대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요. 알아들어요? 태윤 씨의 증정품이 되어 사사건건 태윤 씨한테 기대고 싶지 않아요.”감정이 깊
그는 하예정이 거절할 줄 알고 그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뜸 협박에 나섰다.“이 봉투 안 가지면 창문 밖으로 던져버릴 거야. 우리 집 세대주가 너인데 네가 집안 재산을 신경 쓰지 않으면 나도 신경 쓸 필요 없지! 난 오직 너만 신경 써.”하예정은 말문이 막혔다.일주일 만에 만나자고 약속을 잡으니 그녀는 전태윤이 드디어 그녀를 이해하고 욱한 성질도 고쳤을 줄 알았는데 지금 그의 협박을 들으면서 속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전태윤이 타고난 성격이 이런 걸 그녀는 혹시라도 본인이 예외라 그를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다.그는 변하지 않았고 그녀도 더는 바꾸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둘은 끊임없는 마찰로 서로를 갉아먹을 뿐이다.하예정은 그를 한참 쳐다보다가 다시 서류 봉투를 들고 안에서 블랙카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남자가 돼서 그것도 대표님이란 분이 블랙카드도 없이 어딜 나다니겠어요? 누가 알아봐 주겠냐고요? 이 카드는 태윤 씨 가져요. 나머지는 내가 일단 당신 위해 보관해둘게요.”안 그러면 그는 진짜 봉투째로 밖에 내던질 것이다.전태윤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하예정은 감히 내기할 엄두가 안 났다.전태윤도 그녀의 태도에 곧장 블랙카드를 받으며 말했다.“생활용 카드에 이미 많은 돈을 넣었으니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 절대 너 자신을 서운하게 대하진 마. 처형한테도 집을 또 살지 여쭤봐 봐. 둘이 함께 집 보러 다녀. 계속 월세방에서 지내면 내 집이 없다는 기분이 들어. 처형이 돈 모자라면 빌려줄지 그냥 줄지 네가 알아서 해. 아무튼 처형과 우빈이 모자에게 제집 마련을 해줘야 해.”일주일간 마음을 식히면서 전태윤은 전 재산을 하예정에게 돌리면서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처형을 도울 생각까지 했다. 실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결정이다. 왜냐하면 하예정이 제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바로 언니 하예진과 조카 우빈이니까.“언니는 가게에 돈을 투자해서 잠시 집 살 생각이 없어요.”하예정도 언니에게 말해보았다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