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할머니의 지팡이에 맞을까 봐 더는 감히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다. 그는 좀 전에 할머니가 비꼬신 말을 기억하고 나지막이 말했다.“할머니, 나 예정이 아니어도 잘 산다는 말 안 했어요.”그가 어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겠는가.그는 하예정이여야만 하는데, 그녀 아니면 아무도 안 되는데 말이다!!“진짜 안 했어?”전태윤은 순간 말문이 막혀 한참 후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꿈에서 그런 것 같은데... 할머니가 어떻게 아세요?”설마 꿈이 아니었나?진짜 하예정과 심하게 다투고 홧김에 그런 말을 한 걸까? 게다가 그녀와 뜨겁게 몸을 뒹굴려 했다고...“할머니, 나, 나 술 마시고 예정이한테 무슨 짓 했어요?”술에 취해 그녀를 강제로...맙소사!전태윤은 감히 더는 생각할 엄두가 안 났다.술 마시면 실수를 하는 법!심지어 그는 만취 상태였다.할머니는 지팡이를 내리고 그에게 말했다.“네가 예정이한테 무슨 짓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술을 몇 병 마시고는 허튼소리만 해대는데 인제 그만 깨야지. 어때? 정신이 좀 들어?”전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네.”할머니는 그런 방식으로 전태윤을 술 깨게 했다. 만약 안 깨면 그대로 익사할 것이다.“술 마신다고 문제가 해결돼?”전태윤이 머리를 내저었다.“하지만 잠시 동안은 고민을 잊게 해주죠.”“인제 정신이 드니 좀 어때? 일이 더 커질 뻔했잖아! 술에 취하면 무슨 말이나 다 하고 무슨 일이나 다 할 수 있어. 네가 꿈이라고 생각했던 거, 어쩌면 술김에 한 일일 수도 있다고.”전태윤은 사색이 되어 긴장한 말투로 물었다.“할머니, 예정이 어떻게 됐어요?”“몰라, 난.”할머니는 그를 혼낼 뿐 하예정이 어찌 됐는지는 정말 모르신다. 어젯밤에 술 취한 손자를 데려온 사람은 손주며느리가 아닌 소정남이었으니까.전태윤은 자리를 뜨려 했다.“이리 와. 지금이 몇 시인데 예정이 찾아가려고 해? 자는 애 깨우면 널 예뻐나 하겠다!”현재 시각 새벽 다섯 시, 너무
말인즉슨 그녀가 전태윤의 삶에 스며들지 못하면 둘은 곧장 이혼하고 서로에게 자유를 돌려준다는 뜻이다.결혼은 꼭 서로 조건이 맞아야 할까?그와 그의 가족은 단 한 번도 하예정을 꺼린 적이 없는데 왜 그녀는 스스로 그렇게 큰 압박감을 주면서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걸까?‘내가 우리 둘 사이에 조건 차이가 없다면 없는 거야! 내 말이 곧 법이라고!’“기억 안 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아 참, 이 말은 밤새 하데? ‘예정아, 나 너 아니어도 얼마든지 잘 살아.’ 혹시 취중 진담이라도 한 거야? 날 밝으면 예정이한테 가서 직접 전해. 우리 앞에서 센 척해야 무슨 소용인데.”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할머니, 예정이가 나한테 엄청 많은 말을 했어요. 내가 키우는 카나리아가 되고 싶지 않다느니, 나랑 어깨를 견주고 나란히 걷는 여자가 되고 싶다느니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나랑 공통 화제가 있고 싶다는데 우린 원래 공통 화제가 있거든요. 난 예정이를 반려동물로 키우는 게 아니에요. 예정이가 내 아내인데 평생 책임지고 키워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왜 기어코 본인한테 의지하겠다는 거죠? 나한테 시집와서 평생 호강하고 싶어 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난 그런 여자들 다 싫고 예정이만 원해요. 그런데 왜 예정이는 딴 사람들처럼 나한테 시집와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지 않는 거냐고요?”“...”“내가 능력이 달려서 가정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모를까, 아니 충분히 잘 먹고 잘살게 해줄 수 있는데 왜 한사코 독립을 고집하냐고요? 예정이는 지금 가게도 운영하고 수입도 있는데 뭐가 성에 안 찬 거죠? 내가 가게 관두고 집에서 가정주부로 지내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준 자유가 아직도 부족한 걸까요? 예정이는 나 전태윤의 아내인데 누가 감히 얕잡아보고 함부로 대하겠어요? 내가 있는 한 예정이는 관성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어요. 분명 성소현 씨가 무슨 말을 해서 나한테 이런 제안을 한 걸 거예
소정남을 보더니 두 셰퍼드는 짖지 않고 그에게 꼬리까지 흔들었다.그가 한때 심서준을 핑계로 자주 찾아오면서 심서준의 엄마가 그와 제 아들의 관계를 오해한 줄도 모른 채 셰퍼드 두 마리와 친하게 지냈다.심서준이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나 찾아온 건 아니죠?”소정남이 웃으며 답했다.“효진 씨 보러 왔어요. 서준 씨가 아니라.”심서준도 가볍게 웃었다.“나도 어제 알았어요. 엄마가 글쎄 정남 씨가 날 좋아하는 줄로 여기다니, 하하, 웃겨 죽겠어요!”“그러게요. 아주머니가 그렇게 오해하실 줄은 전혀 몰랐어요.”“그러게 누가 올 때마다 나 보러 왔다고 말하래요? 누나도 매번 위층에서 옷 갈아입으면서 겉으론 정남 씨를 신경 쓰지 않는 척해도 실은 일어나자마자 옷방에서 옷을 골랐다니까요. 여자는 참 말과 행동이 달라요.”소정남이 그를 질책했다.“내 앞에서 효진 씨 험담하지 말아 줄래요?”심서준이 말했다.“벌써 한배 탔다고요?”“서준아, 정남이 왔어? 어머, 진짜 정남이네. 어서 안으로 들어와.”심효진의 엄마가 집 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소정남은 사 온 선물을 심효진 엄마에게 드리며 환하게 웃었다.“아주머니랑 아저씨가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제가 직접 골라봤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뭘 또 이런 것까지 사와. 너만 와도 나랑 네 아저씨는 너무 기뻐.”중요한 건 두 분 모두 한시름 놓았다.아직 남자친구가 없는 딸아이에게 이렇게 훌륭한 남자가 대시하고 있으니 그들은 시름이 놓였고, 둘째는 제 아들이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다고 여겼는데 오해인 걸 알고 한시름 놓았다.방에 들어간 후 심효진의 아빠를 보자 소정남은 또다시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심효진 아빠도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다 온화해졌다.오해가 풀리자 그녀의 부모님은 소정남을 마냥 흐뭇하게 바라보았다.그를 자리에 앉힌 후 심효진의 엄마가 아들에게 분부했다.“누나더러 내려오라고 해. 정남이가 왔으니 우리 인제 고모네 댁으로 가야지.”심서준이 머리를 끄덕이고 위층
소정남이 웃으며 말했다.“저 그럼 분발해야겠네요. 아주머니가 준비하신 돈 봉투 하루빨리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듣자 하니 너희 집안이 정보통이라며?”심효진의 아빠가 물었다.“네... 그렇긴 한데 아저씨 정보에 관심 있으신가 봐요?”소정남의 물음에 심효진의 아빠가 진지하게 답했다.“이 나이에 정보는 무슨, 다만 심심할 때 나한테 말하는 것도 괜찮아.”심효진의 엄마가 곧장 남편을 흉봤다.“효진이는 제 아빠를 쏙 빼닮았다니까.”심효진이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고 가십거리에 관심이 많은 것은 아빠 성격을 닮아서였다.소정남도 마침 이런 성향이니 그야말로 하늘이 정한 한집 식구였다.심효진은 본인이 없는 틈에 부모님이 소정남 앞에서 제 흉을 볼까 봐 아침 내내 못 고르던 옷도 냉큼 고르고 허둥지둥 갈아입고서는 휴대폰을 챙기고 아래층으로 달려갔다.“누나, 이미지 신경 써야지. 정남 형이 아래에 와 있어.”심서준은 누나에게 달려가지 말고 단아하게 있으라고 했다.어쩌다가 훌륭한 남자가 누나에게 홀딱 반했는데 이미지에 신경 안 써 이사님이 식겁하여 도망가 버린다면 심서준이 평생 돈 벌어 누나를 책임져야 한다.그는 누나보다 몇 살 어리지만 누나의 결혼을 걱정해야 했다.심효진이 고개 돌려 그에게 말했다.“그 사람 앞에서 우리 모두 발가벗겨진 몸인데 뭘 더 신경 쓰겠어?”심서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소정남의 진짜 신분을 떠올리자 심서준은 불쑥 긴장해졌다. 정남 형이 설마 그의 밑천까지 다 털어낸 걸까?다만 소정남은 심효진한테만 관심 가질 뿐 그는 전혀 안물안궁이다.기껏해서 심서준의 성향과 취미를 알아내고 그에게 맞춰가며 제 편으로 만들 뿐이다.미래의 처남만 공략하면 미래 장모님의 마음도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으니까.어느덧 미래의 장모님도 그를 엄청 마음에 들어 하신다.소정남은 일찌감치 태도를 표했더라면 지금쯤 그녀와 결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정남은 심효진의 남자친구 신분으로 그녀와 함께 심미란의 집에 밥 먹으러 갔다.더는 심
전태윤은 한 주 동안 필사적으로 일에 몰입해 회사 사람들을 모질게 괴롭힌 것도 모른 채 7일간 마음을 가라앉히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자 곧바로 하예정에게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일주일 동안 푹 휴식한 덕에 하예정의 손에 난 상처도 많이 치유되어 적어도 운전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전태윤은 그녀와 관성 호텔 로얄 스위트룸에서 만나기로 했다.하예정은 주우빈을 데리고 왔다.우빈이는 오늘 이모와 함께해야 한다. 하예진의 가게 인테리어가 마무리 단계라 요 며칠 쭉 바삐 돌아쳐서 아들을 돌볼 시간이 없어 동생 예정에게 맡겼다.“사모님.”강일구가 동료들을 거느리고 호텔 입구에 서서 하예정을 기다렸다. 그녀가 주우빈을 안고 차에서 내리자 강일구는 재빨리 마중 나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그 댁 도련님은 어디 있어요?”“도련님은 지금 맨 위층에서 사모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면 돼요.”강일구 일행은 깍듯하게 하예정을 호텔 안으로 모셨다.몇 분 후.그녀는 주우빈을 안고 화려하게 꾸며진 로얄 스위트룸으로 들어갔다.전태윤은 문을 등진 채 창가에 서 있었고 방안에는 짙은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별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전태윤인데 대체 얼마나 피운 걸까?하예정은 테이블 위의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가득 버려져 있는 걸 보았고 그 옆에는 노란색 서류 봉투가 있었는데 안에 뭐가 들었는지 봉투가 불룩하게 부풀어 올랐다.일주일 못 본 사이로 그녀는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이모부.”주우빈이 먼저 방안의 정적을 깨트렸다.우빈의 목소리에 전태윤은 그제야 몸을 돌리고 다 피우지 못한 담배를 냉큼 재떨이에 버렸다.하예정이 들어온 건 알고 있었지만 마침 담배를 피우느라 몸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담배 피우는 남자를 싫어해서 자신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주우빈을 데려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아이에게 간접흡연을 시킬 순 없으니 재빨리 재떨이를 멀리 치우고 문을 활짝 열어 방안에 가득 찬 담배 냄새를 환기시켰다.하예정은 그
전태윤은 그가 전씨 그룹에서 차지한 지분과 주식 양도서 및 은행카드와 그의 명의로 된 모든 부동산, 상가 등 증명 서류를 정리해서 봉투에 넣었다. 무릇 그의 개인재산은 남김없이 봉투에 담아두었다.“내가 주식을 양도해도 넌 회사를 신경 안 써도 돼. 전씨 그룹은 내가 계속 운영하고 벌어들인 수입은 전부 네 거야. 난 그저 널 위해 일하는 직원일 뿐이야. 네가 얼마나 원하던, 재산을 얼마만큼 소유한 여자 갑부가 되고 싶던 내가 분발해서 꼭 네가 원하는 목표를 이뤄줄게. 너만 허락한다면 바로 나랑 함께 수속 밟으러 가자. 이 재산들 모두 네 명의로 이체할 거야. 난 요만큼도 남기지 않아. 매달 내게 용돈만 주면 돼. 애초에 네가 내 돈을 노릴까 봐 경계했지만 이젠 내가 선뜻 전 재산을 넘겨줄게. 이렇게 해서라도 너에 대한 내 믿음을 인정받고 싶고 또한 실제 행동으로 네게 사과하고 싶어. 맹세할게. 애초의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하예정은 그의 부동산 서류들을 더 보지 않고 싹 다 봉투에 넣고는 그를 빤히 쳐다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예정아, 뭐라고 말 좀 해봐. 된다, 안 된다 대답이라도 해줘. 응?”그녀의 침묵에 전태윤은 너무 불안했다.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뭘 어떻게 하려는지 알 길이 없었다.하예정은 서류 봉투를 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태윤 씨, 난 이런 제안 못 받아들이겠어요.”전태윤이 발끈하며 그녀의 손을 확 잡아채고 초조하게 물었다.“예정아, 내가 어떻게 해줄까? 말만 해. 네가 원하는 건 최선을 다해서 이뤄줄게. 우리 둘의 경제적 차이가 너무 크다고 했지? 그럼 내가 소유한 전 재산을 네 명의로 돌리면 네가 부자고 난 빈털터리야. 내가 열세에 처하는데 이래도 안심이 안 돼?”그는 진짜 전 재산을 털어 그녀에게 주려고 했다.“태윤 씨, 난 당신한테 증정받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단지 태윤 씨한테 기대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요. 알아들어요? 태윤 씨의 증정품이 되어 사사건건 태윤 씨한테 기대고 싶지 않아요.”감정이 깊
그는 하예정이 거절할 줄 알고 그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뜸 협박에 나섰다.“이 봉투 안 가지면 창문 밖으로 던져버릴 거야. 우리 집 세대주가 너인데 네가 집안 재산을 신경 쓰지 않으면 나도 신경 쓸 필요 없지! 난 오직 너만 신경 써.”하예정은 말문이 막혔다.일주일 만에 만나자고 약속을 잡으니 그녀는 전태윤이 드디어 그녀를 이해하고 욱한 성질도 고쳤을 줄 알았는데 지금 그의 협박을 들으면서 속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전태윤이 타고난 성격이 이런 걸 그녀는 혹시라도 본인이 예외라 그를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다.그는 변하지 않았고 그녀도 더는 바꾸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둘은 끊임없는 마찰로 서로를 갉아먹을 뿐이다.하예정은 그를 한참 쳐다보다가 다시 서류 봉투를 들고 안에서 블랙카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남자가 돼서 그것도 대표님이란 분이 블랙카드도 없이 어딜 나다니겠어요? 누가 알아봐 주겠냐고요? 이 카드는 태윤 씨 가져요. 나머지는 내가 일단 당신 위해 보관해둘게요.”안 그러면 그는 진짜 봉투째로 밖에 내던질 것이다.전태윤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하예정은 감히 내기할 엄두가 안 났다.전태윤도 그녀의 태도에 곧장 블랙카드를 받으며 말했다.“생활용 카드에 이미 많은 돈을 넣었으니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 절대 너 자신을 서운하게 대하진 마. 처형한테도 집을 또 살지 여쭤봐 봐. 둘이 함께 집 보러 다녀. 계속 월세방에서 지내면 내 집이 없다는 기분이 들어. 처형이 돈 모자라면 빌려줄지 그냥 줄지 네가 알아서 해. 아무튼 처형과 우빈이 모자에게 제집 마련을 해줘야 해.”일주일간 마음을 식히면서 전태윤은 전 재산을 하예정에게 돌리면서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처형을 도울 생각까지 했다. 실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결정이다. 왜냐하면 하예정이 제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바로 언니 하예진과 조카 우빈이니까.“언니는 가게에 돈을 투자해서 잠시 집 살 생각이 없어요.”하예정도 언니에게 말해보았다
“그럼 나랑 함께 우리 집들을 보러 갈래?”전태윤이 말한 집들은 자연스럽게 그가 결혼 전에 산 것을 의미한다.그가 산 집은 대부분 앞뒤 정원이 달린 별장이다.고층은 단 하나인데 장차 아이가 학교 다니는 걸 대비해서 사놓았다. 그 집을 살 때 전태윤은 솔로였지만 집안 어르신들이 평생 그를 독신으로 살게 할 리는 없으니 결혼하고 애 낳고 학구열에 뛰어들어 아이를 더 나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미리 학교 근처들에 집을 몇 채 사놓았다.그의 아이가 어느 학교에 다니던 근처에 모두 집이 마련돼있으니 시름 놓고 공부만 하면 된다.“회사일 안 바빠요?”“너와 함께하는 일이면 안 바빠.”하예정이 말했다.“집 보러 가도 주말에 가요. 태윤 씨도 출근 안 하고 나도 가게 안 나가니 그때 다시 봐요.”그녀는 전태윤의 업무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전태윤은 떠보듯이 그녀에게 물었고 이젠 해답을 들었으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예정은 그가 예전에 산 집들을 함께 보러 가기로 했으니 여전히 그를 남편으로 대하고 가족으로 여기고 있다.비록 지금도 떨어져 지내고 있지만 말이다.“그래, 그럼 토요일 아침에 처형네 집으로 데리러 갈게. 처형한테 내 아침밥도 만들어달라고 부탁드려.”“알았어요. 태윤 씨 오는데 언니가 설마 굶기겠어요?”하예정은 우빈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말했다.“나 이만 갈게요. 태윤 씨 계속 볼일 봐요.”전태윤도 잇따라 일어나며 기대에 찬 눈길로 그녀에게 물었다.“우리 함께 밥 먹을까?”시계를 들여다봤지만 고작 오전 열 시라 점심때가 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더 남았다.물론 그가 원하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아니요, 난 일단 우빈이를 언니네로 데려가야 해요. 태윤 씨 몸 봐가면서 일해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술도 적게 마셔요. 허튼소리 할라.”전태윤은 어안이 벙벙했다.누가 배신한 걸까? 술 취해서 홧김에 한 말을 대체 누가 그녀에게 알려준 걸까?실은 아무도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예전에 전태윤이 질투에 눈이 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