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하예진 자매가 정말 이경혜의 외조카라면...그녀는 두 조카가 겪은 모든 상황을 되새기더니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다.“엄마 곧 도착하니까 기다리고 있어. 우리 함께 우빈이 보러 가자.”이는 가장 희망적인 단서니까 그녀는 꼭 한번 동생을 닮은 아기를 만나보리라 다짐했다....임씨 일가.“아빠, 엄마, 이사하지 마. 나 예정이한테 손해배상 요구하지 않을게. 그럼 되잖아?”주서인은 아직도 부모님이 임씨 일가에서 나가는 걸 막고 있었다.어제 부모님이 돌아오시자마자 짐을 싸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울며불며 맹세한 덕에 하룻밤 묵게 되었다.다음 날이면 부모님의 화가 다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또다시 집을 나가려 하다니, 그녀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아빠가 유난히 화가 많이 나셨고 임수찬도 설득에 나섰다.“장인어른, 장모님, 서인이 말이 맞아요. 이사하시거든 아무도 두 분을 챙겨드릴 수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마음 놓겠어요? 그냥 여기서 지내세요. 한 가족이 오붓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장인어른, 요한이도 잘못한 걸 깨달았어요. 이따가 저랑 서인이가 요한이 데리고 우빈이한테 가서 사과할게요. 어제도 이미 요한이 따끔하게 혼냈어요.”주경진은 소파에 앉아 담배만 피울 뿐 아무 말이 없었다.그의 옆에는 이미 다 정리한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김은희는 남편을 쳐다보더니 하려던 말을 꾹 참았다.주형인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어제 누나의 집으로 와서 큰조카가 매형에게 심하게 혼나는 걸 보고 나서야 그도 화가 조금 풀렸다.“아빠.”“시끄러워.”주경진이 으름장을 놓으며 고개 들어 딸을 힐긋 째려봤다. 아들 녀석이 아무 말도 못 한 채 옆에 서 있기만 하는 모습에 그는 더욱 화가 났다. 임요한이 임수찬에게 혼난 것은 사실이지만 얼굴을 얼음찜질한 후에 부기가 싹 가라앉았다. 멍 자국이 아주 살짝 났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전혀 발견할 수 없다.벨트에 맞은 흉터 자국도 연고를 바르니 금세 나아졌다.그런데 정작 우빈이는 어떤가?주경진은 창피함도
“또 무슨 용건이 더 남았어요?”주서인이 쏘아붙였다.그녀는 하예정 일행을 문밖에 세워두려 했지만 홀로 힘에 부쳐 막으려야 막을 수 없었다.그녀의 남편은 도리어 깍듯하게 하예정 일행을 안으로 모셨다.임요한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하예정 일행을 째려봤다.임수찬은 그런 아들을 보자마자 가차 없이 살을 꼬집었다.“이따가 정중하게 사과드려.”임수찬이 나지막이 아들에게 말했다.“이 사람들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아.”임수찬의 집을 풍비박산 냈는데도 전혀 아무렇지 않았고 어제 경찰서 사람들도 임수찬 가족을 편들지 않았다.임수찬은 전씨 일가가 대단한 집안이란 걸 바로 알아채고 흔쾌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들에게도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말해주었다.다만 실은 임수찬이 생각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경찰서 사람들은 CCTV를 확인한 후 임요한의 행동이 너무 악랄하다고 생각되어 임씨 일가를 짓부순 일을 무시했을 뿐이다.아이를 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 때려놓았는데 집을 박살 낸 것쯤이야 뭐가 대수겠는가?자식이 없으면 덜 공감하겠지만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이런 일을 지켜봤을 때 분노가 저절로 차오를 것이다.임요한은 입을 삐죽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한이가 말하기를 주우빈이 먼저 손을 댔다고 했으니 정한의 형으로서 반드시 동생을 위해 앞장서야 했다.‘그러게 누가 우빈이더러 우리 정한이 때리라고 했어?! 내가 우빈이 때려죽인 것도 아닌데 왜 어른들은 날 대역죄인 취급하는 거야?’임요한의 막무가내는 그의 엄마 주서인을 쏙 빼닮았다.“예정 씨.”주경진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하예정에게 물었다.“우빈이는 좀 어때요?”“아빠, 요한이도 이젠 다 나았으니 우빈이도 틀림없이 회복됐을 거야.”주서인이 선뜻 말을 가로챘다.하예정은 싸늘한 눈길로 주서인을 째려봤다.주서인이 아니꼬운 듯 그녀에게 쏘아 붙였다.“뭘 째려봐요? 예정 씨, 어제 우리 집을 풍비박산 냈으니 이 금액은...”아빠의 싸늘한 눈빛과 남편의 극구 말림에
김은희가 버럭 고함을 지르더니 눈을 비비며 다시 임요한을 꾸짖었다.“요한아, 우빈이는 네 친사촌 동생이야. 어떻게 애를 그 지경으로 팰 수 있어?”“엄마, 요한이도 잘못한 거 알아. 아직 애라서 그래!”주서인이 아들을 대신해 변명을 늘어놓더니 또다시 하예정에게 쏘아붙였다.“예정 씨, 요한이가 우빈이 때린 건 정말 잘못했어요. 애 아빠도 어제 따끔하게 혼냈고요. 이따가 요한이 데리고 과일 좀 사서 우빈이 보러 갈게요. 가서 제대로 사과하면 될 거 아니에요. 어찌 됐든 친척이니 당신들이 우리 집을 짓부순 일은 더 따지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요한이도 인제 그만 다그쳐요. 애들이 장난치며 노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에요. 우리 어른들이 끼어들면 그때부터 변질되는 거죠. 게다가 정한이가 분명 주우빈이 먼저 손댔다고 했어요. 요한이는 형으로서 당연히 제 동생을 지키고 싶었겠죠. 예정 씨가 지금 언니 예진이를 지켜주는 것처럼 말이에요.”하예정이 쓴웃음을 지었다.“주서인 씨, 입이 삐뚤어도 말은 바른대로 해야죠. 대체 누가 먼저 손을 댔는지 이 댁 카메라에 똑똑히 찍혔어요. 눈 똑바로 뜨고 확인해보던가요!”주서인은 말문이 턱 막혔다.그녀는 또다시 속으로 남편의 무능함을 원망했다.‘진작 CCTV 영상을 지웠어야지 어떻게 경찰한테 넘어갈 때까지 내버려 두고 있어?’영상이 증거로 남아있는 한 그녀도 더는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이어갈 수 없다.“말해봐요, 오늘 온 용건이 무엇인지!”주우빈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 없게 되자 주서인은 화제를 돌려 하예정 일행에게 오늘 찾아온 의도를 물었다.그녀는 전씨 일가의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들은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그저 이렇게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압감을 주었다.주서인의 시댁 식구들은 하나같이 기가 죽어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온 집안에 쓸만한 인간이 없어!’주서인은 속으로 시댁 식구들을 욕했다.어르신과 눈이 마주친 주서인은 참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보긴 뭘 봐요? 왜 어딜 가나 당신이
주경진이 날카롭게 째려보자 주서인은 더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동생 주형인한테만 미친 듯이 곁눈질을 했다.주형인은 누나의 눈빛을 보더니 냉큼 목을 축이며 하예정에게 말했다.“처제, 그냥 우리 누나가 요한이 데리고 가서 사과하면 되지? 나도 우빈이 아빠라 보호자 중 한 명이니까 결정권이 있는 것 같은데.”하예정이 한심하다는 듯이 쏘아붙였다.“우빈이 아빠란 걸 알고는 있었네요? 다른 아빠들은 제 아들이 괴롭힘을 당하면 칼을 들고 가서라도 상대방을 때려죽일 기세던데 형부는 어쩜 이렇게 무덤덤할 수 있죠? 조카가 아들보다 더 소중하나 봐요?”이어서 그녀는 임수찬에게 말했다.“우빈이는 응급실에 실려 가서 겨우 살려냈어요. 전면 검진도 받았고요. 병원비용은 몇십만 원 정도 들었어요. 영수증 전부 가져왔으니 내가 막무가내로 돈을 요구한다고 뭐라 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오늘은 일단 당신들이 요한이를 데리고 직접 우빈이한테 찾아가 정중하게 사과하고, 앞으론 두 번 다시 우빈이를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세요. 두 번째는 배상에 관한 문제인데 우빈이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돈을 써야 치유가 되겠는지 모르겠네요.”“그 금액은 아직 가늠할 수 없어 지금 일단 병원비부터 배상하세요. 추후에 우빈이가 또다시 치료를 받는다면 그때도 모든 비용을 당신들이 부담해야 할 거예요. 영양제며 정신적인 손해배상이며 전부 다요. 우리도 너무 많이 요구하진 않아요. 어제 병원비까지 다해서 일단 천만 원만 배상하세요.”주서인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예정 씨, 아예 은행을 털지 그래요? 우빈이가 고작 몇 살인데 영양제, 정신적 손해배상이 웬 말이냐고요? 그럼 우리 요한이도 맞았는데 당신들이 배상해줄래요?”하예정이 되물었다.“당신 아들이 누구한테 맞았죠?”주서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그녀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형인이랑 예정 씨 언니가 곧 이혼하게 되니 일부러 이러는 거죠? 그 돈이면 예진이한테도 어마어마한 액수일 텐데요. 두 살짜리 애가
하예정이 곧바로 돈을 하예진에게 이체하자 주경진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외부인이 아닌 며느리에게 돈이 들어갔으니 이 돈은 무조건 손자가 쓰게 될 것이다.만약 아들에게 돈이 넘어가면 곧바로 딸의 주머니로 돌아가게 된다.임씨 일가에서 나온 후 아홉째가 기어코 큰형의 차에 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승차한 후 그는 하예정에게 말했다.“형수님, 어제 한바탕 싸우러 왔을 때 왜 저를 안 불렀어요? 아홉 형제 중에 유독 저만 빼놓았잖아요.”하예정은 고개 돌려 가장 어린 도련님을 쳐다보며 말했다.“도련님은 아직 미성년자라 우리가 지켜줘야 해요.”“사실 저랑 임요한 둘 다 미성년자라서 우리가 싸우면 두 미성년자의 다툼이 되잖아요.”“우리가 손 쓸 필요 없이 그 애 아빠가 이미 따끔하게 혼냈어요. 임요한의 엄마가 하는 말 같지도 않은 말 못 들었어요? 우리더러 배상금을 물어내라고 하잖아요. 제 아빠한테 맞았는데 무슨 수로 우리한테 배상금을 요구하겠어요?”“할머니가 나한테 머릿수 챙기라고 하더니.”전지율이 입을 삐죽거렸다.“정말 머릿수만 챙겼네요.”전태윤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그럼 뭘 더 어쩌려고?”전지율은 금세 입을 꾹 다물었다.사실 그들은 오늘 큰형수님을 뒷받침해주기 위해 함께 왔다.상의를 하는 일도 전부 형수님이 직접 알아서 했다. 큰형조차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형수님은 주우빈의 이모라 그들 누구보다 우빈을 지켜줄 자격이 있었다.하예정은 전지율이 남편의 말에 주눅 들자 얼른 편들어줬다.“태윤 씨, 도련님 놀라겠어요. 도련님도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잖아요.”“맞아요. 형은 나만 겁줘요. 형수님은 모르실 거예요. 우리 형은 아빠보다 더 엄해서 매번 집에 돌아올 때마다 나한테 연습지를 한 박스나 전해줘요. 쉴 새 없이 문제만 풀라는 거죠. 내가 한가한 꼴을 못 본다니까요.”전지율은 오늘 처음 하예정을 만났지만 덥석 그녀에게 기대며 말했다. 큰형이 앞으로 주도권을 형수님께 완전히 뺏겨버린다는 것을 그는 곧바로 알아챘으니까.사실 전지율의
하예정은 문득 좌절감에 빠졌다. 그녀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악착같이 공부하여 겨우 좋은 대학에 붙었다.그런데 전태윤의 형제들은 하나같이 홀가분하게 좋은 대학에 붙었고 심지어 레벨까지 건너뛰었다니.“형수님, 그렇게 타격받은 표정 짓지 말아요. 진짜 타격받은 건 저잖아요.”하예정도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았다. 전지율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도련님도 너무 낙심하지 말아요. 꼭 좋은 대학 갈 수 있을 거예요. 화이팅!”“난 꼭 형들이 다녔던 대학 갈래요. 못 붙으면... 재수하면 되죠.”원래는 못 붙으면 제 뺨을 두어 대 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행동은 썩 탐탁지 않아 말을 바꿨다.전태윤은 고개 돌려 동생을 힐긋 바라보더니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너 못 붙으면 어디 가서 내 동생이란 말 하고 다니지 마.”전지율이 침묵했다.“태윤 씨도 도련님한테 스트레스 너무 주지 말아요.”“이 녀석은 종일 게임만 하고 공부에 대한 긴장감이 없어. 스트레스 팍팍 줘야 해.”전지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누구나 다 형처럼 자율적인 줄 알아...”‘자율적이다 못해 할머니가 신경 쓰지 않았으면 평생 형수님을 부를 기회도 없을 뻔했잖아.’전태윤이 코웃음 치자 전지율은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뚜뚜...”이때 전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운전 속도를 조금 늦추고 확인해보니 숙희 아주머니한테서 온 문자였다.「도련님, 성소현 씨가 어머님과 함께 이리로 왔어요. 사모님 모시고 돌아오실 때 집에 올라오지 말아요.」전태윤은 문자를 확인한 후 바로 삭제했다.‘성소현 모녀 행동 참 빨라. 이렇게 빨리 오다니.’그는 계속 아무렇지 않은 듯 운전했다.잠시 후 그는 소정남에게 문자를 보냈다.「10분 뒤에 나한테 전화해.」문자를 받은 소정남은 살짝 의아해하다가 잠시 고민한 후 바로 알아챘다.일행이 고속도로에서 내려온 후 전이진이 차를 세우고 전태윤 부부에게 말했다.“형, 형수님, 우린 이만 따로 갈게요.”“그래.”“그래요, 이진
어르신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걸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예정은 밤잠을 설쳤고 아침에 커피를 한 잔 마시긴 했지만 지금 여전히 졸음이 쏟아졌다.“언니한테 전화해서 우빈이가 어떤지 물어봐야겠어요.”이 전화 한 통에 성소현 모녀가 선물을 들고 우빈이 보러 온 사실을 바로 알게 됐다. 그녀들이 찾아온 목적을 하예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언니, 소현 씨 어머님께서 무슨 얘기 하셨어?”하예정은 아직 예진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다.“별말 없었어. 우빈이가 겪은 일을 가슴 아파하셨어. 소현 씨는 임씨 일가 사람들을 족히 30여 분 욕했어.”여동생의 친구, 여동생의 시댁 식구들, 모두가 하예진의 남편과 시댁보다 나았다. 하예진은 문득 마음이 차갑게 식고 한기가 감돌았다.애초에 얼마나 눈이 멀었길래 주형인 같은 인간쓰레기한테 시집간 걸까?꼴에 아빠라고 뻔뻔스럽게 주우빈의 양육권을 뺏으려 하다니?나중에 이혼소송으로 법정에 설 때 하예진은 아들이 학대당한 사진을 전부 판사에게 제공하기로 했다. 판사는 꼭 우빈이를 위해 양육권을 그녀에게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소현 씨 어머님이... 몸이 많이 편찮으신 것 같아. 낯빛도 창백해서 깜짝 놀랐어. 두 분 얼마 있지도 않고 소현 씨가 먼저 어머님을 부축하여 나가셨어.”하예정은 이경혜가 낯빛이 창백해졌다는 말만 유의 깊게 들었다.사색이 된 엄마의 모습에 성소현도 깜짝 놀라 얼른 부축하여 집을 나섰다.하예정은 언니의 말을 듣고 한참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언니, 우리 엄마가 어쩌면 소현 씨 어머님이 수십 년 찾아 헤매시던 여동생일지 몰라.”“콜록콜록...”차 뒤에 있던 어르신이 하예정의 말을 듣고 사레가 들렸다.하예정이 고개 돌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할머니, 괜찮으세요? 에어컨 바람이 너무 셌죠?”“그래, 에어컨 바람이 너무 건조해서 기침이 나는구나.”어르신은 자신이 충격을 받았다는 말을 감히 털어놓지 못했다.전태윤은 침착하게 운전하며 에어컨을 껐다.한 번도 본 적 없는
전태윤은 하예정을 안고 그들의 아담한 집으로 돌아갔다.문을 열자마자 강아지가 마구 달려왔다.“저리 비켜!”전태윤이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자 강아지는 얌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 더는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이 집의 남자 주인공이 저를 안 좋아한다는 걸 강아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래도 학대하지 않고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해주니 참 다행이었다.“띠리링...”전태윤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그는 하예정을 안고 있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상대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아마도 소정남이 그의 분부대로 10분에 한 번씩 전화를 걸어 핑곗거리를 둘러대고 자리를 떠나게 하려는 듯싶었다.다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성소현 모녀가 이미 하예진의 집을 떠났으니 말이다.전태윤은 하예정을 방에 데려가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준 후에야 휴대폰을 꺼내 소정남에게 전화를 걸었다.“정남아, 전화할 필요 없어.”“그래? 안 그래도 지금 막 너한테 폭풍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는데.”전태윤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밥 먹었어? 함께 먹을래?”“아니, 괜찮아. 너 효진 씨랑 데이트 안 해?”소정남이 대답했다.“데이트 신청 거절당하면 창피하잖아! 저번에 만나고 각자 연락처를 남겼는데 아직 아무 연락이 없어. 그래서 나도 지금 효진 씨가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겠어.”전태윤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나 이제야 알 것 같아. 우리 할머니가 우물쭈물하는 날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셨는지 말이야...”소정남은 말문이 턱 막혔다.“그럼, 지금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데이트 신청할까?”“네가 알아서 해. 어차피 아내를 만들려면 뻔뻔스러워져야 하는 법이야.”“보아하니 넌 엄청 뻔뻔스러워진 모양이야.”전태윤이 머쓱하게 대답했다.“잘 모르겠지만 뭐 아무튼 그런 것 같아.”소정남이 호탕하게 웃었다.“예정 씨는 내가 평생 본 여자 중에 가장 대단한 사람이야.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다니까!”“꺼져!”전태윤은 욕설을 퍼부은 후 바로 전화를 끊
노동명은 하예진이 가슴 아파할까 봐, 또 격려의 말들을 늘어놓을까 봐 자신이 폐인이라는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하예진은 호텔에 비치된 주전자를 씻고 주전자로 물을 끓였다. 그리고 컵을 씻어 녹차 한 봉지를 집어 들고 녹차 한 잔을 타서 가져다주었다.하예진은 찻잔을 침대 머리맡 카운터에 놓고 노동명에게 말했다.“지금은 물이 뜨거워서 좀 이따가 마셔요.”따르릉...하예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더니 노동명에게 말했다.“예정이에요.”그녀는 하예정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며 서둘러 받았다.“예정아, 뭔 일 있어?”“엄마.”전화기 건너편에서 앳된 어린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빈아, 우빈이가 드디어 엄마가 생각났나 보네. 엄마한테 전화할 줄 다 알고.”하예진은 웃으며 우빈을 조롱했다.우빈이 입을 삐죽 내밀며 억울하다는 듯 다시 엄마를 불렀다.아들의 억울한 어조를 알아챈 하예진이 물어보았다.“왜? 기분이 안 좋아? 친구랑 싸웠어?”“아니요. 동명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에요. 정말 나빠요. 저 몰래 아무 말도 없이 엄마 보러 갔어요. 제가 제 친구를 아저씨한테 소개해 주려고 이모한테 부탁해 아저씨 찾으러 왔는데 글쎄 노 할머니께서 아저씨가 엄마 찾으러 가셨다고 한 거 있죠?”우빈 녀석은 너무 서러서 계속해서 말했다.“아저씨는 말도 없이... 제가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저하고 말 좀 하시지. 그럼 저도 아저씨 따라서 엄마한테 갔을 텐데. 아저씨는 약속을 어기는 나쁜 사람이에요.”하예진이 출장을 간 후 노동명은 분명히 우빈에게 나중에 하예진이 보고 싶으면 노동명의 개인 비행기를 타고 강성으로 하예진을 보러 가자고 약속했었다.우빈은 그 당시 노동명이 그의 친아버지보다도 더 잘해준다고 생각했다.주형인은 매번 우빈을 볼 때마다 잘 대해주지만, 우빈 앞에서 노동명의 험담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우빈은 주형인이 그리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고 여겼다.노동명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주형인과 주경진 부부 그리고
노동명은 하예진의 손을 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예진의 활기차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좋아했다.“예진아.”노동명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가까이 가면서 떠보았다.“나... 뽀뽀해도 돼?”하예진은 얼굴이 갑자기 노을처럼 붉어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처녀가 아닌 결혼도, 이혼도 해본 아이가 있는 여자였지만, 이런 물음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결국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그 모습을 본 노동명의 마음은 더욱 설레었다.노동명은 하예진을 사랑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녀의 손밖에 잡아보지 못했다.더 깊은 접촉을 해보지 못했다.“예진아, 뽀뽀 해도 돼?”노동명은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잡으면서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도록 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노동명이 다가가니 그의 숨결이 하예진의 얼굴에 닿았다.하예진의 대답을 들을 수 없게 되자 그도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고 그녀가 눈을 감은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그녀를 껴안으며 키스했다.그들은 부드러운 입맞춤으로부터 거친 키스까지 이르렀다.하예진은 문득 눈을 뜨면서 노동명을 밀치고 일어나 말했다.“물이 끓었어요. 따뜻한 물을 드시겠어요? 아니면 차 한잔하실래요?”하예진은 애써 숨을 골랐다.노동명은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녹차 한 잔 줘. 비행기에서 잠시 쉬었으니 더는 쉴 필요 없어. 녹차 한 잔 마시면서 기운 내야겠어.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얼른 해. 내가 따라갈게.”“제가 할 일은 오전에 다 처리했어요. 이따가 이씨 가문에 가서 저 대신 돌아가신 경호원의 유가족을 보러 가려고 해요. 어쨌든 저 대신 차를 몰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요.”설령 이은화의 계략이 맞는다고 해도 증거가 없는 한 당분간은 사고라고 할 수밖에 없다.이씨 가문 경호원의 죽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하예진을 도와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였다.하예진이 가족을 찾아뵙고 고인을 방문해야
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하예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날 뭐로 보는 거야? 나도 예전에 공원 벤치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거든. 비록 사춘기 때 저지른 일이지만...”하예진은 노동명이 10대 때 반항하여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따라 사회에 뛰쳐 든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다가 그의 할머니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잘못을 뉘우치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창업하여 노씨 그룹을 설립했다.이미 십여 년이 지난 일이다.그는 할머니가 그리울까 봐 하예진 앞에서 할머니에 관한 얘기를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듣자니 노동명은 형제중 막내라 할머니는 그를 가장 아꼈다.우빈은 노동명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처음에 무척 무서워했다. 그는 당시 수술을 받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받지 않았다.칼자국을 남겨놓은 이유는 그의 반항 때문에 할머니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사실을 명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할머니에게 미안했다.“난 안 가려. 이런 룸도 얼마나 좋아.”노동명은 자신의 평소 출장할 때 로얄 스위트룸에 묵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그는 싱글이고 재산도 많기에 마땅히 즐겨야 한다고 생각했다.아니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이제 쉬시려고요?”“나 소파에 앉으면 돼.”노동명은 창가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하예진이 그를 밀고 소파 앞으로 다가가서 멈추었다.그녀는 노동명을 부축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어. 이제 두 걸음은 걸을 수 있거든.”매일 재활을 하고 몇 걸음 걷다 보니 그의 다리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더 멀리 가려고 하면 두 다리가 견딜 수 없이 지끈지끈 아파 났고 고통스러워 똑바로 서지 못하고 땅으로 넘어지게 된다.노동명의 두 다리는 넘어지고 부딪혀 멍이 들었다.그는 주위 사람들이 가슴 아파할까 봐 상처를 가리려고 매일 긴 바지를 입고 있고 다녔다.노동명은 누구의 동정심도 필요하지 않았다!하예진은 결국 부축하는 것을 포기했다.노동명은 스스로 일어서서 한 발짝 앞
하예진이 관성을 떠나던 날, 노동명이 심술부린 탓으로 하예진을 공항까지 배웅조차 하지 않았다.심지어 하예진의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에 답장도 하지 않아 그녀가 걱정을 안고 강성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강성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하예진은 여전히 노동명을 걱정했고 전태윤 부부에게 우빈을 데리고 노동명의 집에 가서 그를 위로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그날 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노동명은 얼굴이 붉어졌다.하예진은 그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저는 화도 안 났어요. 앞으로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가 동명 씨를 싫어하고 저를 힘들게 할 것 같다면 저는 진작에 동명 씨를 멀리했을 거예요. 이렇게 가까이 지내지도 동명 씨를 믿지도 않을 거란 말이에요.”지난번 노동명이 하예진에게 고백했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하지 않았지만, 물처럼 유유하게 감정을 교류했다. 그들은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서로를 지지하고 의지하면서 지내왔고 두 사람 마음도 점점 가까워졌다.지금 노동명은 하예진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그녀도 노동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두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서로가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되였다.다른 사람은 이미 두 사람을 커플로 여기고 있다.요리가 나오자 하예진은 잘 먹지 않고 노동명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미인 옆에서 자신을 잘 보살펴 주는 것을 본 노동명은 너무 행복했고 하마터면 배가 터질 뻔했다.노동명은 몇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왔기에 하예진은 그를 호텔에서 쉬게 한 다음 저녁에 그에게 호텔 근처를 구경시켜주려고 했다.강일구는 노동명 일행에게 룸 세 개를 예약해 주었고 노동명이 하예진의 룸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 하자 강일구는 흔쾌히 노동명과 룸을 바꾸었다.어차피 노동명은 강성에서 하룻밤만 묵고 내일 오후 관성으로 돌아갈 계획이다.연말이 다가오면 노씨 그룹도 정신없이 바쁘기에 노동명은 회사 대표로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쌓인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하예진은 노씨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