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정은 문득 좌절감에 빠졌다. 그녀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악착같이 공부하여 겨우 좋은 대학에 붙었다.그런데 전태윤의 형제들은 하나같이 홀가분하게 좋은 대학에 붙었고 심지어 레벨까지 건너뛰었다니.“형수님, 그렇게 타격받은 표정 짓지 말아요. 진짜 타격받은 건 저잖아요.”하예정도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았다. 전지율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도련님도 너무 낙심하지 말아요. 꼭 좋은 대학 갈 수 있을 거예요. 화이팅!”“난 꼭 형들이 다녔던 대학 갈래요. 못 붙으면... 재수하면 되죠.”원래는 못 붙으면 제 뺨을 두어 대 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행동은 썩 탐탁지 않아 말을 바꿨다.전태윤은 고개 돌려 동생을 힐긋 바라보더니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너 못 붙으면 어디 가서 내 동생이란 말 하고 다니지 마.”전지율이 침묵했다.“태윤 씨도 도련님한테 스트레스 너무 주지 말아요.”“이 녀석은 종일 게임만 하고 공부에 대한 긴장감이 없어. 스트레스 팍팍 줘야 해.”전지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누구나 다 형처럼 자율적인 줄 알아...”‘자율적이다 못해 할머니가 신경 쓰지 않았으면 평생 형수님을 부를 기회도 없을 뻔했잖아.’전태윤이 코웃음 치자 전지율은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뚜뚜...”이때 전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운전 속도를 조금 늦추고 확인해보니 숙희 아주머니한테서 온 문자였다.「도련님, 성소현 씨가 어머님과 함께 이리로 왔어요. 사모님 모시고 돌아오실 때 집에 올라오지 말아요.」전태윤은 문자를 확인한 후 바로 삭제했다.‘성소현 모녀 행동 참 빨라. 이렇게 빨리 오다니.’그는 계속 아무렇지 않은 듯 운전했다.잠시 후 그는 소정남에게 문자를 보냈다.「10분 뒤에 나한테 전화해.」문자를 받은 소정남은 살짝 의아해하다가 잠시 고민한 후 바로 알아챘다.일행이 고속도로에서 내려온 후 전이진이 차를 세우고 전태윤 부부에게 말했다.“형, 형수님, 우린 이만 따로 갈게요.”“그래.”“그래요, 이진
어르신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걸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예정은 밤잠을 설쳤고 아침에 커피를 한 잔 마시긴 했지만 지금 여전히 졸음이 쏟아졌다.“언니한테 전화해서 우빈이가 어떤지 물어봐야겠어요.”이 전화 한 통에 성소현 모녀가 선물을 들고 우빈이 보러 온 사실을 바로 알게 됐다. 그녀들이 찾아온 목적을 하예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언니, 소현 씨 어머님께서 무슨 얘기 하셨어?”하예정은 아직 예진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다.“별말 없었어. 우빈이가 겪은 일을 가슴 아파하셨어. 소현 씨는 임씨 일가 사람들을 족히 30여 분 욕했어.”여동생의 친구, 여동생의 시댁 식구들, 모두가 하예진의 남편과 시댁보다 나았다. 하예진은 문득 마음이 차갑게 식고 한기가 감돌았다.애초에 얼마나 눈이 멀었길래 주형인 같은 인간쓰레기한테 시집간 걸까?꼴에 아빠라고 뻔뻔스럽게 주우빈의 양육권을 뺏으려 하다니?나중에 이혼소송으로 법정에 설 때 하예진은 아들이 학대당한 사진을 전부 판사에게 제공하기로 했다. 판사는 꼭 우빈이를 위해 양육권을 그녀에게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소현 씨 어머님이... 몸이 많이 편찮으신 것 같아. 낯빛도 창백해서 깜짝 놀랐어. 두 분 얼마 있지도 않고 소현 씨가 먼저 어머님을 부축하여 나가셨어.”하예정은 이경혜가 낯빛이 창백해졌다는 말만 유의 깊게 들었다.사색이 된 엄마의 모습에 성소현도 깜짝 놀라 얼른 부축하여 집을 나섰다.하예정은 언니의 말을 듣고 한참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언니, 우리 엄마가 어쩌면 소현 씨 어머님이 수십 년 찾아 헤매시던 여동생일지 몰라.”“콜록콜록...”차 뒤에 있던 어르신이 하예정의 말을 듣고 사레가 들렸다.하예정이 고개 돌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할머니, 괜찮으세요? 에어컨 바람이 너무 셌죠?”“그래, 에어컨 바람이 너무 건조해서 기침이 나는구나.”어르신은 자신이 충격을 받았다는 말을 감히 털어놓지 못했다.전태윤은 침착하게 운전하며 에어컨을 껐다.한 번도 본 적 없는
전태윤은 하예정을 안고 그들의 아담한 집으로 돌아갔다.문을 열자마자 강아지가 마구 달려왔다.“저리 비켜!”전태윤이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자 강아지는 얌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 더는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이 집의 남자 주인공이 저를 안 좋아한다는 걸 강아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래도 학대하지 않고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해주니 참 다행이었다.“띠리링...”전태윤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그는 하예정을 안고 있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상대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아마도 소정남이 그의 분부대로 10분에 한 번씩 전화를 걸어 핑곗거리를 둘러대고 자리를 떠나게 하려는 듯싶었다.다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성소현 모녀가 이미 하예진의 집을 떠났으니 말이다.전태윤은 하예정을 방에 데려가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준 후에야 휴대폰을 꺼내 소정남에게 전화를 걸었다.“정남아, 전화할 필요 없어.”“그래? 안 그래도 지금 막 너한테 폭풍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는데.”전태윤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밥 먹었어? 함께 먹을래?”“아니, 괜찮아. 너 효진 씨랑 데이트 안 해?”소정남이 대답했다.“데이트 신청 거절당하면 창피하잖아! 저번에 만나고 각자 연락처를 남겼는데 아직 아무 연락이 없어. 그래서 나도 지금 효진 씨가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겠어.”전태윤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나 이제야 알 것 같아. 우리 할머니가 우물쭈물하는 날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셨는지 말이야...”소정남은 말문이 턱 막혔다.“그럼, 지금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데이트 신청할까?”“네가 알아서 해. 어차피 아내를 만들려면 뻔뻔스러워져야 하는 법이야.”“보아하니 넌 엄청 뻔뻔스러워진 모양이야.”전태윤이 머쓱하게 대답했다.“잘 모르겠지만 뭐 아무튼 그런 것 같아.”소정남이 호탕하게 웃었다.“예정 씨는 내가 평생 본 여자 중에 가장 대단한 사람이야.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다니까!”“꺼져!”전태윤은 욕설을 퍼부은 후 바로 전화를 끊
전태윤이 한사코 잡아뗐다.“아니거든!”“정말 아니에요?”“아니야!”하예정은 허리를 곧게 펴고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아쉽다고 했으면 숙희 아주머니더러 언니 집에 남아있어달라고 할 참이었는데, 난 그냥 집에 돌아와 태윤 씨랑 있어 주려 했더니 괜찮다고요? 알았어요, 그럼 난 언니한테 갈게요.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는 게 인제 좀 겨울 느낌이 나네요. 혼자 자면 으슬으슬 춥고 막 그래요.”전태윤은 묵묵부답이었다.그녀는 대놓고 암시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쉽다고 한마디만 해주면 당장 베개를 안고 와 그의 침대에 누워 자겠다는 뜻이었다!하예정은 아쉬운 표정으로 전태윤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계속 아래로 내려와 그의 목과 가슴까지 어루만졌다. 전태윤이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나서야 그녀는 제멋대로인 손을 거둬들였다.“나 배고파요. 밥을 먹어야겠어요. 우리 남편 차린 밥상 맛있을 런지나.”하예정은 곧바로 걸어 나가려 했다.전태윤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그가 불쑥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이렇게 유혹해놓고 그냥 가려고?”전태윤이 중저음의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산타를 배운 그녀도 전태윤의 팔에서 벗어나질 못했다.“힘 좀 풀어요.”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하예정은 힘이라도 줄여달라고 애원할 뿐이었다.전태윤은 그녀의 볼에 몰래 살짝 입맞춤하고 나서야 힘을 풀었다. 하예정은 그의 품에서 몸을 홱 돌려 반짝이는 눈동자로 빤히 쳐다보았다. 눈부신 그녀의 미모에 전태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하예정.”“예정이라고 불러요.”“넌 날 태윤 씨라고 부르면서.”전태윤이 살짝 서운한 듯 대꾸했다.그녀는 별다른 애칭 없이 딱딱하게 남편 이름을 불렀다.“그럼 뭐 태윤아 이렇게 불러줄까요?”전태윤이 겨우 말을 이었다.“그냥 태윤 씨라고 해.”‘태윤아’ 라고 부르는 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전태윤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하하.”하예정은 미리 짐작한
부부는 서로 꽁냥거리다가 밥 먹으러 갔다. 밥을 먹을 때에도 전태윤은 그녀에게 한없이 자상했다.하예정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그녀는 속으로 감탄했다.‘역시 훌륭한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이라니까. 내가 완벽하게 만들어놓은 남편, 절대 딴 사람한테 뺏길 수 없어.’저녁 식사를 마친 후 부부는 함께 하예진의 집으로 갔다.주우빈은 잠에서 깼지만 혼자 놀려 하지 않고 껌딱지처럼 엄마한테 찰싹 달라붙었다.하예정을 제외하곤 숙희 아주머니조차 그를 안을 수 없었다.“언니, 내일 출근할 거야?”하예정이 조카를 안고 언니에게 물었다.하예진은 주우빈을 바라보며 한참 고민한 후 대답했다.“예정아, 나 사직하고 혼자 창업할 생각이야.”그녀는 주우빈의 현재 상태가 너무 걱정됐지만 신입사원으로서 빈번하게 휴가를 내면 회사에서 잘릴 확률이 매우 높았다.하루 동안 고민한 후 하예진은 끝내 아들을 돌보면서 창업하기로 결심했다.“어떤 분야로 창업할 건데?”하예정이 떠보듯이 물었다.“토스트 가게를 차리고 싶어. 네 생각은 어때? 난 회사 다니는 것 말고는 내놓을만한 게 요리 솜씨밖에 없어. 토스트 가게를 차려서 오전에만 일하고 오후엔 우빈이 돌볼 수 있잖아.”“토스트 가게를 하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느라 언니 엄청 피곤할 거야. 게다가 혼자 운영할 수 있겠어?”하예정이 옆에서 도울 순 있지만 매일 온다는 보장은 못 해준다.“일단 길거리 토스트로 시작해서 기본 메뉴만 해보려고. 나중에 돈을 벌면 가게도 임대하고 직원도 구하지 뭐.”줄곧 말이 없던 전태윤이 입을 열었다. 그는 처형의 창업을 적극 찬성했다.“처형, 봐둔 장소는 있어요? 어디서부터 시작하려고요? 돈은 얼마나 필요하죠?”“시장 근처면 가장 좋겠지만 어려울 것 같아요. 시장을 제외하곤 대기업 등 회사 주변이에요. 구내식당이 없는 회사면 좋겠지만 그런 곳은 이미 딴사람들이 차지했어요.”누군가가 임대를 하면 모를까.하예정이 말했다.“언니, 그건 걱정 말고 일단 시장 조사부터
“예정아, 제부, 두 사람 내일 올 필요 없어요. 각자 출근하고 가게 가요. 나 우빈이 잘 돌볼 수 있어.”하예정은 썩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럼 숙희 아주머니한테 여기 남아있으라고 할게.”숙희 아주머니를 고용한 이유는 낮에 주우빈을 잘 보살피고 하예정과 전태윤의 집 청소를 맡기기 위해서였다.하예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제부가 동생이 힘들어하는 걸 원치 않아 숙희 아주머니를 고용했는데 어느덧 종일 하예진만 도와주고 있으니 말이다.“언니랑 나는 서로 돕고 살아야지.”하예정은 언니가 부담을 갖는 걸 원치 않았다.“언니랑 우빈이가 잘 지내야만 내가 마음이 놓여.”“숙희 아주머니의 월급은 일단 네가 지급해. 나중에 내가 자리 잡거든 다 갚을게.”그녀는 절대 동생의 도움을 당연하게 생각할 사람이 아니었다.전태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처형, 우린 한 가족이에요. 너무 칼같이 돈 계산을 할 필요 없어요. 나랑 예정이는 지금 수입도 낙관적이고 아직 아이가 없어 경제적 부담이 덜해요. 숙희 아주머니의 월급은 신경 쓰지 말아요. 우리가 알아서 두둑하게 챙겨드릴게요.”하예진은 제부 전태윤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동생 예정이는 그녀보다 훨씬 행운아였다.전태윤은 책임감 있는 훌륭한 남자이니까.저녁 9시가 다 돼서야 부부는 광명 아파트에서 돌아왔다.어르신은 거실에 앉아 TV를 보다가 나란히 손잡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더니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전태윤은 살짝 어색해 보였지만 하예정은 태연한 모습이었다.부부가 손 잡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할머니, 어디 다녀오셨어요? 오후엔 아예 얼굴도 못 뵈었네요.”할머니 앞으로 다가간 하예정이 그제야 전태윤의 손을 놓고 할머니 곁에 나란히 앉았다.“옛친구 만나서 수다 좀 떨었어. 지금 막 네 언니 집에서 돌아온 거야? 우빈이는 좀 어때?”하예정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많이 나아졌어요. 숙희 아주머니한테 거기 계속 남아있으라고 했어요. 우리 언니랑 우빈이 돌봐달라고 했거든요.”“그래, 잘했
어르신은 하예정을 위로한 후 고고하게 기지개를 켜고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난 이만 가서 쉬련다. 나이가 드니 몸이 예전 같지 않구나.”어르신은 몇 걸음 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 돌려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정이 베개 미리 꺼내줘?”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손님방에 베개 있어요.”어르신은 손자를 힐긋 쳐다볼 뿐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돌아갔다.하예정이 샤워하러 들어갔을 때 할머니는 이미 하늘이 뒤흔들릴 듯이 코를 골았다.하예정은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십여 분 후.그녀는 잠옷을 입고 방에서 나왔는데 문을 닫자마자 잠옷 가운 차림으로 팔을 꼭 껴안은 채 제 방문 앞에 서 있는 전태윤과 마주쳤다.“왜 아직도 안 자요? 내일 출근 안 해요?”하예정은 일부러 낮에 했던 말을 까먹은 듯 한마디 툭 던지고는 그를 스쳐지나 손님방으로 향했다.손님방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침대 시트, 이불, 베개까지 싹 다 없어졌다.‘내가 직접 침구 용품 골라서 샀는데 다 어디 갔지? 도둑이라도 들었나? 아니 무슨 도둑이 침구 용품만 훔쳐 가는데?’하예정은 고개를 돌리고 여전히 거만하게 서 있는 전태윤을 째려봤다. 그녀가 샤워하는 틈을 타 손님방의 침구 용품을 모조리 가져간 게 틀림없었다.전태윤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묵묵히 바라봤다.하예정은 그의 앞으로 다가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곧바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누군가가 전에 나한테 문을 활짝 열고 계약서를 찾으라고 했었죠.”그녀의 말을 들은 전태윤도 뒤따라 들어가더니 방문을 잠그고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천천히 찾아봐. 못 찾아내면 앞으로 두 번 다시 계약서 얘기 꺼내지 마. 그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하예정은 실은 그의 방에 있는 금고를 제외하고는 안 뒤져본 곳이 없었다.그녀는 제법 그럴싸하게 뒤지는 척을 하더니 금고 앞에 서서 몇 번 두드리며 말했다.“열어봐요. 분명 이 안에 있을 거예요.”전태윤이 다가와 금고를 열었다.하예정은 그
그녀는 전태윤의 침대에 올라가 편한 자세로 누웠다.“한번 자보니까 태윤 씨 침대가 참 편하네요. 이건 마치 내 환각이겠죠?”하예정은 눈웃음을 지으며 이불을 덮었다.“태윤 씨, 굿나잇.”전태윤은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한참 노려보다가 불쑥 이불을 젖히고 그녀를 덮치려 했다.다만 하예정이 재빨리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슬리퍼를 신고 문밖으로 달려갔다.“하예정.”전태윤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저기... 내 방 화장실에 다녀와야 해요.”분위기 파악도 못 한 채 생리가 와버렸다.전태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화장실은 여기도 있어.”“그런데 내가 원하는 딱 한 가지 물건이 없어요. 화장실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잘게요. 태윤 씨는 당분간 내버려 둘게요.”하예정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좀 더 키우다가 잡아먹어야지.”전태윤이 아무리 눈치가 무뎌도 이쯤이면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예정의 손을 놓아주며 방으로 돌아가게 했다.잠시 후 그녀가 다시 전태윤의 방으로 돌아왔다.전태윤은 한창 그녀를 등지고 누워 화난 듯 베개 하나를 껴안고 있었다.하예정이 잠시 머뭇거렸다.‘나 그냥 다른 방 가서 잘까? 아니야, 돌아가서 할머니랑 하룻밤 잘래.’하예정이 돌아가려 할 때 전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지도 못해?”‘뭐?’하예정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씩씩거리는 전태윤을 바라봤다.“안고 있으면 더 괴로울까 봐 그러죠.”“홀로 자는 것보단 나아.”그가 괴로움도 마다하겠다니 하예정도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옆에 다가가 이불을 걷고 침대에 누웠다.“너무 그러지 말아요. 갱년기 걸린 여자 같아요.”“나 남자야.”“갱년기 걸린 남자 같아요.”전태윤은 갑자기 팔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기더니 몸을 내리깔고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제야 기분이 풀린 듯 온순한 아내를 꼭 껴안고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며칠이면 돼?”“열흘이요.”“그렇게나 오래 걸려?”“난 내 몸 아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