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은 하예정을 위로한 후 고고하게 기지개를 켜고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난 이만 가서 쉬련다. 나이가 드니 몸이 예전 같지 않구나.”어르신은 몇 걸음 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 돌려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정이 베개 미리 꺼내줘?”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손님방에 베개 있어요.”어르신은 손자를 힐긋 쳐다볼 뿐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돌아갔다.하예정이 샤워하러 들어갔을 때 할머니는 이미 하늘이 뒤흔들릴 듯이 코를 골았다.하예정은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십여 분 후.그녀는 잠옷을 입고 방에서 나왔는데 문을 닫자마자 잠옷 가운 차림으로 팔을 꼭 껴안은 채 제 방문 앞에 서 있는 전태윤과 마주쳤다.“왜 아직도 안 자요? 내일 출근 안 해요?”하예정은 일부러 낮에 했던 말을 까먹은 듯 한마디 툭 던지고는 그를 스쳐지나 손님방으로 향했다.손님방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침대 시트, 이불, 베개까지 싹 다 없어졌다.‘내가 직접 침구 용품 골라서 샀는데 다 어디 갔지? 도둑이라도 들었나? 아니 무슨 도둑이 침구 용품만 훔쳐 가는데?’하예정은 고개를 돌리고 여전히 거만하게 서 있는 전태윤을 째려봤다. 그녀가 샤워하는 틈을 타 손님방의 침구 용품을 모조리 가져간 게 틀림없었다.전태윤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묵묵히 바라봤다.하예정은 그의 앞으로 다가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곧바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누군가가 전에 나한테 문을 활짝 열고 계약서를 찾으라고 했었죠.”그녀의 말을 들은 전태윤도 뒤따라 들어가더니 방문을 잠그고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천천히 찾아봐. 못 찾아내면 앞으로 두 번 다시 계약서 얘기 꺼내지 마. 그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하예정은 실은 그의 방에 있는 금고를 제외하고는 안 뒤져본 곳이 없었다.그녀는 제법 그럴싸하게 뒤지는 척을 하더니 금고 앞에 서서 몇 번 두드리며 말했다.“열어봐요. 분명 이 안에 있을 거예요.”전태윤이 다가와 금고를 열었다.하예정은 그
그녀는 전태윤의 침대에 올라가 편한 자세로 누웠다.“한번 자보니까 태윤 씨 침대가 참 편하네요. 이건 마치 내 환각이겠죠?”하예정은 눈웃음을 지으며 이불을 덮었다.“태윤 씨, 굿나잇.”전태윤은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한참 노려보다가 불쑥 이불을 젖히고 그녀를 덮치려 했다.다만 하예정이 재빨리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슬리퍼를 신고 문밖으로 달려갔다.“하예정.”전태윤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저기... 내 방 화장실에 다녀와야 해요.”분위기 파악도 못 한 채 생리가 와버렸다.전태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화장실은 여기도 있어.”“그런데 내가 원하는 딱 한 가지 물건이 없어요. 화장실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잘게요. 태윤 씨는 당분간 내버려 둘게요.”하예정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좀 더 키우다가 잡아먹어야지.”전태윤이 아무리 눈치가 무뎌도 이쯤이면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예정의 손을 놓아주며 방으로 돌아가게 했다.잠시 후 그녀가 다시 전태윤의 방으로 돌아왔다.전태윤은 한창 그녀를 등지고 누워 화난 듯 베개 하나를 껴안고 있었다.하예정이 잠시 머뭇거렸다.‘나 그냥 다른 방 가서 잘까? 아니야, 돌아가서 할머니랑 하룻밤 잘래.’하예정이 돌아가려 할 때 전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지도 못해?”‘뭐?’하예정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씩씩거리는 전태윤을 바라봤다.“안고 있으면 더 괴로울까 봐 그러죠.”“홀로 자는 것보단 나아.”그가 괴로움도 마다하겠다니 하예정도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옆에 다가가 이불을 걷고 침대에 누웠다.“너무 그러지 말아요. 갱년기 걸린 여자 같아요.”“나 남자야.”“갱년기 걸린 남자 같아요.”전태윤은 갑자기 팔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기더니 몸을 내리깔고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제야 기분이 풀린 듯 온순한 아내를 꼭 껴안고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며칠이면 돼?”“열흘이요.”“그렇게나 오래 걸려?”“난 내 몸 아껴요.
이경혜는 남편한테 티슈를 건네받고 눈물을 닦으며 드디어 말을 꺼냈다.“우빈이란 아이가 경희를 좀 닮았는데 그 아이 엄마가 하예진이에요. 예진이가 살만 좀 빼면 경희랑 똑같단 말이에요. 소현이는 하예정을 처음 볼 때 친해지고 싶은 느낌이 들었대요. 아까 예진이 모자 볼 때 나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어쩌면 혈연관계 때문이겠죠. 여보, 이번엔 정말 내 동생을 찾은 것 같아요...”이경혜는 동생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에 또다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이미 15년 전에 사망했어요. 그래서 오랫동안 찾지 못한 거죠. 이 세상에 없는데 무슨 수로 찾아내겠어요?”성문철이 그녀를 위로했다.“이건 단지 느낌일 뿐이야. 사람과 사람지간의 인연이란 게 가끔 이렇게 이상하다니까. 일단 눈물 그치고 유전자 검사부터 진행해.”한 번도 본 적 없는 처제가 정말 죽었다면 성문철도 아쉬움이 많이 남을 것이다.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 아내는 그의 성씨 그룹의 직원이었고 그때부터 여동생을 찾아 나섰다.몇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이모를 계속 찾으라고 당부했다.오랜 시간 견지해왔던 신념이 한순간 무너지니 아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직감이 말해주는데 하예정과 하예진은 경희 딸이 맞아요. 경희는 죽었고 두 딸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니... 다행히 두 자매가 나처럼 강하게 버텨왔어요.”그해 이경혜도 고작 8살이라 여동생을 키울 능력이 못 됐다.하예진 자매는 적어도 그녀보단 나았다. 부모님의 사망 배상금을 조금 챙겼으니 말이다. 물론 인간말종 같은 친척들이 대부분 금액을 낚아채 갔지만 마을 이장이 두 자매에게 4천만 원을 남겨주었다. 그해 하예진도 고작 15살이라 어깨에 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동생을 키워왔다.소현이가 말하길 하예정은 언니에게 엄청 잘한다고 했다.이경혜는 두 자매가 서로 의지하며 모진 역경을 파헤치고 여기까지 걸어온 걸 되새겨보았다. 두 아이는 인간의 매정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지금까지 버텨왔다. 하예진은 그녀
“나 입맛 없어요.”“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셨는데 입맛이 없다니, 당신이 얼마나 걱정되는지 알아? 애들도 다 당신 눈치만 보고 있어. 둘째는 당신 기분이 안 좋은 걸 알고 바로 달려왔어.”이들에겐 세 자녀가 있는데 맏이는 듬직하고 성숙한 편이지만 둘째는 집에 머무르는 성격이 아니다. 막둥이는 가장 사랑받고 있는 성소현인데 얼마 전까지 전태윤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이제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다.“다이어트 하는 셈 치죠.”이경혜가 침대에 누웠다.“나 잘래요.”성문철은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뜻을 따랐다.입맛이 없다니 계속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이경혜는 고집이 참 센 편인데 딸아이가 그 점을 쏙 빼닮았다.전태윤이 좋다고 수년간 쫓아다니면서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 포기하지 않더니 결국 직접 당하고 나서야 마음을 접었다.밤새 부부는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다음날, 부슬비가 내려 안 그래도 쌀쌀한 아침이 더욱 춥게 느껴졌다.전태윤이 먼저 깨어났다.옆에 누운 하예정은 새벽에 추웠던지 무심코 그의 품에 쏙 안겨 몸을 녹였다.고개 숙여 귀여운 그녀를 쳐다보는 전태윤의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눈 뜨자마자 사랑하는 여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보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달콤했다.그는 하예정을 몇 분 동안 빤히 쳐다보다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잠이 깰까 봐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비가 내려 하늘도 음침한 게 조깅은 무리일 듯싶었다.전태윤은 잠깐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십 분 후, 그는 방에서 나와 곧게 주방으로 갔다가 일 분도 채 안 돼 다시 되돌아왔다.발코니에서 강일구에게 전화를 걸자 곧바로 통화가 연결됐다. 전태윤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분부를 내렸다.“강일구, 호텔 가서 조찬 3인분 포장해와.”“네, 알겠습니다.”강일구는 공손하게 대답하고 도련님이 전화를 끊자마자 호텔로 출발했다.도련님께서 발렌시아 아파트를 고른 게 참 다행이었다. 호텔과 회사가 그리 멀지 않
전태윤은 강일구가 포장해온 조찬을 들고 식탁 앞에 걸어가 내려놓았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그는 하예정에게 따뜻한 대추차를 끓여주었다.“아침을 직접 만드는 줄 알았더니 포장해왔네?”야유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태윤은 굳이 고개 돌리지 않아도 할머니가 오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는 보는 척도, 대꾸도 안 했다.“뭐 끓여? 향이 완전 진하네?”이때 어르신이 안으로 들어와 뚜껑을 열어보다가 바로 닫았다.“난 또 진도라도 뺀 줄 알았더니.”어르신은 하찮은 표정으로 손자를 두어 번 노려보다가 밖으로 나가려 했다.전태윤은 굳은 얼굴로 끝내 변명에 나섰다.“난 이미 최선을 다했어요.”사실 어젯밤에 기회가 있었지만 타이밍이 너무 안 맞았다.“마음, 마음부터 저격하란 말이야. 예정이 열 손가락이 텅 비어있는 게 안 보여?”전태윤은 할 말을 잃었다.사실 그도 마음을 저격하려고 모진 노력을 해왔다.반지를 진작 두 개 사서 몇 번 끼고 다니기도 했으나 그건 단지 성소현이 마음을 접게 하기 위해서였다.하예정의 반지는 아직도 보관만 하고 있을 뿐 미처 건네지 못했다.“나한테 오래된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어. 네 할아버지가 생전에 산 거야. 우리 부부가 함께 끼려고 샀는데 네 할아버지가 산 반지가 워낙 많았어야지. 이 할미는 하루에 하나씩 껴도 다 못 끼겠더라. 어떤 다이아몬드 반지는 보석함에 넣어두고 한 번도 껴보지 못했어. 계속 거기 두는 것도 공간만 차지하니 그냥 너 줄게. 네가 알아서 해.”어르신의 보석함엔 온갖 진귀한 장신구들이 들어있다. 다만 어르신은 결혼반지만 줄곧 끼고 다닌다. 남편이 나중에 엄청 많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줬지만 그녀는 여전히 결혼 때 끼던 반지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마워요, 할머니.”전태윤은 할머니의 보석함에 들어있는 물품들이 웬만한 주얼리 가게보다 값지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대부분 골동품 같은 진귀한 액세서리였으니까.그의 부모님 세대는 부부마다 할머니가 선물하신 커플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
전태윤은 도련님으로 커오면서 이날 이때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꼬집혀본 적이 없다.‘아파, 아프다고!’“할머니 깨셨어요?”하예정이 침대에서 내려오며 그에게 물었다.할머니가 깨시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려는 모양이다.“깨셨어.”“이렇게 빨리요?”이제 막 달아가려던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그럼 나 이렇게 나가면 할머니께서...”“우린 부부야.”전태윤은 그녀가 자꾸 뭔가를 숨기려 하는 모습이 싫었다.하예정이 웃으며 답했다.“그래요, 우린 부부니까 당당하게 나가야죠. 할머니도 보시면 기뻐할 거예요. 우리가 결혼 뒤에 줄곧 각방을 써서 나한테 얼마나 핀잔을 두셨는지 모르죠?”전태윤이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실은 그도 할머니만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를 내젓게 된다.물론 지금은 감사의 마음이 더 많다. 할머니의 핀잔이 아니었다면 그도 하예정과 결혼하지 못했을 테니까.“방에 가서 옷 갈아입을게요. 오늘 뭐 먹고 싶어요? 아침은 내가 차려줄게요.”“아침 사 왔으니까 할 거 없어.”하예정은 그를 힐긋 쳐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전태윤은 짙은 표정으로 생각했다.‘방금 그 눈빛 뭐지? 아침 사 온 게 그렇게 이상할 일인가? 해가 서쪽에서 뜰 정도냐고?’“할머니, 굿모닝.”밖으로 나온 하예정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할머니께 인사했다.“예정이도 굿모닝.”어르신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배고프지? 태윤이가 아침 일찍 깨어나 찬바람에 비까지 무릅쓰고 관성 호텔에 가서 조찬 포장해왔어. 네가 거기 음식 좋아한다면서?”하예정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에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저 음식 안 가려요. 길거리 토스트나 편의점 음식이라 해도 다 잘 먹어요.”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매일 먹으면 질려. 가끔 메뉴를 바꿔야지. 오늘 추워. 얼른 옷 갈아입고 외투도 하나 걸쳐.”하예정이 알겠다고 대답한 후 무덤덤한 척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을 닫자마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띠리링...”이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대추차 끓여놨어. 공복이니까 일단 텀블러에 부어줄게. 가게 갖고 가서 마셔.”하예정은 살짝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봤다.‘지금 날 위해 대추차를 끓인 거야?’전태윤은 텀블러를 깨끗이 씻고 다 끓인 대추차를 안에 부었다. 그는 덮개를 꼭 닫은 후 봉투에 담아 그녀에게 건넸다.“꼭 마셔.”하예정은 봉투를 건네받고 그윽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나 갈게요.”전태윤은 제자리에 서서 떠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어르신이 그런 손주 녀석에게 쏘아붙였다.“네가 좀 데려다주면 덧나?”“예정이 가는 길 알아요.”할머니는 할 말을 잃었다.관심할 줄도 알고 이제 막 칭찬하려 하는데 금세 뒤통수를 치다니. 할머니는 손주 녀석이 참 한심했다...“할머니, 아까 예정이가 날 바라보는 눈빛 보셨죠? 할머니가 없었으면 분명 나한테 입맞춤했을 거예요.”할머니는 말문이 막혔다.전태윤은 아쉬움만 가득 남긴 채 할머니 옆에 앉아 묵묵히 아침을 먹었다.“예정이가 두꺼운 외투 안 입은 것 같은데.”할머니가 불쑥 말했다.이에 전태윤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나중에 갖다 줄 거예요.”할머니는 흡족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하예정은 급하게 나가면서도 언니한테 전화해 우빈의 상태를 묻는 걸 잊지 않았다. 언니가 휴가를 냈다는 말에 그녀도 더는 언니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가게로 갔다.학생들의 등교 시간을 놓치니 가게 문을 열고 간단하게 청소만 할 뿐이었다. 밖에 비가 내려 문 앞에 진열대를 내놓지 않아서 가게 안이 더 비좁아졌다.하예정은 서재의 먼지를 꼼꼼하게 털었다.며칠 뒤면 학생들의 겨울 방학이 시작될 테니 그녀도 서점 문을 닫고 구정을 보내러 갈 예정이었다.“예정 누나.”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울려 퍼졌다.고개를 돌려보니 커다란 장미꽃 한 다발이 보였고 그 뒤에 꽃다발을 안은 김진우가 보였다.한동안 안 본 사이로 김진우는 몹시 수척해졌다. 수염도 깎지 않아 예전 같은 밝은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하예정은 담담하게 쳐다보다가 고개 돌
김진우가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도 알아. 하지만 누나는 계약 결혼이라 조만간 이혼할 거잖아. 예정 누나, 나 누나 좋아해. 오래전부터 좋아하게 됐어. 아직은 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 알아. 나도 누나 찾아오지 않으려고 애써 참아봤는데 그게 마음처럼 안 돼. 하루에도 수백 번씩 누나 생각이 나. 머릿속엔 온통 누나의 웃는 모습뿐이야. 내가 누나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그는 다시 꽃다발을 하예정에게 건네며 진지하게 물었다.“누나, 내게도 한 번 기다릴 기회를 주면 안 될까?”심효진이 진작 그를 설득도 해보았고 경고장도 날렸지만 김진우는 도저히 이대론 포기할 수 없었다.그는 정말 하예정이 진심으로 좋았다.그녀를 사랑했던 첫 순간에 고백하지 못한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만약 고백했더라면 어쩌면 커서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줄 수도 있을 텐데, 낯선 남자와 초고속 결혼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하예정이 꽃다발을 받더니 그를 스쳐지나 문밖의 휴지통에 가차 없이 내던졌다.그녀는 돌아서서 김진우에게 말했다.“진우야, 혼자 나갈래 아니면 내가 내쫓을까?”“누나!”김진우가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제발 나한테 차갑게 굴지 마! 전엔 안 이랬잖아. 나한테 엄청 잘해줬잖아. 왜 이젠 칼날처럼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냐고? 나 너무 괴로워. 마음이 너무 아프단 말이야. 누나, 내가 누나 남편보다 못한 게 뭐야? 우린 알고 지낸 지 십여 년이 됐어. 서로 모르는 게 없단 말이야. 왜 이런 날 선택하지 않고 그 남자랑 초고속 결혼을 했어?”이 문제에 대해선 심효진이 진작 설명했었다. 하예정은 줄곧 그를 남동생으로만 여겼었다고 입이 닳게 말했지만 김진우가 도통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는 하예정의 남동생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 그녀의 남자가 되고 싶었다.“난 항상 널 동생으로 봐왔기에 그렇게 잘해줬던 거야. 네가 그런 내 마음을 오해할 줄 알았다면 때려죽여도 잘해주지 않았을 거야.”십여 년 동안 알고 지내면서 그녀는 김진우가 커가는 모습을
그 뒤로 이윤미가 그녀의 오빠들과 내연녀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차마 몇 명의 형수님들이 속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형수님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 후로 이윤미의 오빠들과 형수님들이 말다툼하기 시작했다.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고현은 이윤미가 잘했다고 생각했다.바람을 피운 사람이 자기 오빠라고 감싸면서 오빠들을 도와 형수님들을 속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면 자기 남편이 바람피운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알지만, 본인만 모른다면 얼마나 괴롭겠는가!이때 전호영이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군호 씨가 그렇게 멍청하지 않을걸요. 이 대표님께서 돌아오신다면 정군호 씨는 틀림없이 나가서 바람피우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이 대표님을 도와야 한다고 봐요. 못 봤으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현장을 목격했잖아요. 이 대표님을 만나면 알려줘야 해요. 어쨌든 우리 형수님의 이모시기 때문에 우리 형수님의 친척이나 다름없죠. 안 그래요?”고현은 전호영을 꾸지람했다.“호영 씨도 정말 나쁘네요. 이씨 가문에서 난리가 났으면 좋겠죠? 그런데 저도 호영 씨를 지지할 거에요. 이러고 보니 저도 좋은 사람은 아닌가 봐요.”“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죠. 정군호 씨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보세요. 정군호 씨가 잘못한 것을 우리가 바로잡아준 거죠. 이 대표님을 위한 것이지 모함하거나 억울하게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저처럼 일편단심인 남자는 정군호 씨의 이런 행동이 너무 부끄러워요. 만약 집안의 아내가 싫으면 이혼할 것이지... 이혼하기는 싫고 또 밖에서 예쁜 여자들이랑 놀고는 싶고... 두 마리 토끼는 다 잡을 수 없는 법이죠. 하늘 아래 어떻게 그런 좋은 일이 있겠어요?”전호영은 정군호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영상을 찍었다. 그리고 하루 호텔도 카메라가 있었기에 정군호가 내연녀를 껴안고 호텔로 들어가는 장면이 꼭 찍혔을 것이다.전호영이 정군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니었다.“이 대표님이 그토록 기가 센데
“저는 배려심이 깊은 신사에요.”고현은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면서 전호영의 신사다운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하지만 전호영이 고현의 손을 잡고 함께 호텔로 들어가려고 하자 고현은 거절했다.전호영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시종 전호영과 연인처럼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고현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전호영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앞으로나란히 몇 걸음 걷더니 고현이 갑자기 멈추었다.“왜 그러세요?”전호영이 물었다.‘설마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만났나?’전호영은 앞을 보았지만,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보지 못했다.“정군호 씨예요.”고현은 낮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한 뒤 전호영을 잡아당겨 차 뒤로 숨었다. 그녀의 경호원 팀은 고현이 위험한 줄로 알고 본능적으로 최대한 빨리 고현의 앞으로 돌진하며 위험을 막으려고 했다.“얼른 숨으세요. 저를 막지 마시고!”고현은 나지막이 경호원 팀에게 말했다.고현이 누군가의 가십거리를 보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고현은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옷을 입은 늙은 남자를 가리켰다. 그 늙은 남자는 천가 같은 얼굴과 매력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그 여성의 곁을 지나가는 남자라면 모두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몇 번 더 쳐다보았다.“저 남자는 이윤미의 친아버지이자 이 대표님의 남편인 정군호 씨예요.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저도 잘 몰라요. 놀랍게도 밖에서 내연녀를 만나고 있었네요. 만약 이 대표님께 들킨다면 정말 정군호 씨를 죽여놓을지도 몰라요.”이은화의 남편이라는 말을 들은 전호영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정군호와 내연녀의 동영상을 찍었다.그리고 말했다.“이 대표님은 우리 큰형의 결혼식에 가신 뒤로 계속 관성에 남아계시거든요. 아마도 정군호 씨는 이 대표님이 없는 틈을 타 바람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네요”고현도 말을 이었다.“이 대표님께서 남편을 너무 엄격하게 단속하니까 정군호 씨도 아마 진짜로 바람 피우지는 못할 거에요. 기껏해야 지
고현은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저는 어른이 된 후로 여행을 갈 시간이 없었어요. 바빠서 미치겠는데 언제 시간을 내서 놀러 가겠어요? 하지만 출장 다니면서 많은 곳은 가봤어요.”“신혼여행은 어디 가고 싶어요?”전호영이 그녀에게 물었다.고현이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말을 이었다.“저는 물이 맑고 공기가 좋은 산을 좋아해요. 조용하거든요.”“제가 잘 연구해서 산 좋고 물이 맑은 조용한 곳을 찾아볼게요.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우리 둘만의 세상을 잘살아 봐야죠.”알고 보니 고현은 산과 물이 있는 아름다운 곳을 좋아했다.전씨 가문의 서원 리조트가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이 있는 곳이고 평소에도 매우 조용한 곳이었다.“서원 리조트를 좋아해요?”“좋아하죠.그럼 서원 리조트에서 신혼여행을 즐기려고요?”전호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고요. 그곳은 우리 미래의 집이고 신혼여행은 당연히 딴 곳으로 가야죠.”이때 고현이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지금 시집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벌써 신혼여행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네요. 호영 씨와 함께하면 쉽게 호영 씨 의도대로 따라간단 말이죠. 저의 총명함과 자제력 모두 호영 씨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니까요.”“현이 씨가 아직도 이 일을 고민하고 있다니. 제가 아직도 부족한가요?”전호영은 자신이 고현을 오랫동안 쫓아다녔다고 느꼈다. 그는 모든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고현을 대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시집을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하여 전호영은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어떤 방면에서 잘하지 못했는지 알고 싶었다.“아니에요. 충분히 잘하셨어요. 우리 데이트도 별로 안 하고 평소에도 일하느라 바빴던 것 같아요. 아직 결혼까지 할 정도로 감정이 깊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말처럼 하루 못 보면 일 년을 못 본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는 몰라요. 그런 감정을 못 느낀다는 건 제가 호영 씨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아요. 어
경호원 팀은 그들의 전 대표님이 전호영에게 떠밀려 마이바흐 차에 들어가는 모습을 버젓이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차는 곧 고씨 그룹을 빠져나왔다.고빈이 중얼거렸다.“호영 씨는 정말 내가 본 형부 중 가장 오만방자한 형부였어. 처남인 나에게 조금도 아부하지 않고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니.”고빈은 중얼중얼하긴 했지만,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만약 고빈이 정말 친형이 있다면 그는 전호영이 그의 친형을 해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따라갔을 것이다.하지만 그의 친형은 사실 여자였다. 그의 누나 고현은 시집가야 하는 여자였다. 전호영은 그의 누나와 어울리는 남자였기 때문에, 또 전호영이 고빈의 부모님께 고빈이 너무 방해한다고 고자질하면 안 되었기에 고빈은 더는 따라가지 않았다.지금 고씨 가문에서 전호영은 고현 남매보다 체면이 훨씬 섰다.“고빈 씨가 안 따라왔죠?”전호영은 차를 몰면서 조수석에 앉은 고현에게 물었다.고현은 돌아볼 필요도 없이 이내 말을 이었다.“고빈이는 입만 살아서 그렇지 정말 따라오지는 않을 거예요. 호영 씨가 우리 부모님 앞에서 고빈의 고자질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죠. 고빈은 저보다 10분 먼저 태어났지만 지금 정해진 여자친구가 없거든요.”“저도 호영 씨랑 짝을 지으니 저희 부모님의 눈길도 자연스레 고빈의 몸으로 옮겨졌어요. 호영 씨가 제 동생의 고자질하면 저희 부모님은 그를 욕하다가 결국 결혼 재촉 문제로 돌아가거든요. 제 동생은 결혼 재촉을 엄청 무서워하거든요.”고빈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고정된 여자친구를 찾지 못한 일에 관해 고현도 마음이 조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녀에게는 전호영이 있었지만, 고빈의 짝은 아직 어디에 있는지...예전에는 고현은 고빈과 이윤미를 맞세워주려고 했지만, 고빈은 이윤미가 재미없다고 느꼈고 이윤미 또한 고빈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이윤미 곁에 방윤림이 있었다.전호영은 빙그레 웃었다.“저도 항상 고빈 씨의 고자질하고 싶지 않아요.
전호영은 꽃다발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갔다.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직원이 밖으로 나가면서 전호영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는 보습을 보았지만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만약 전호영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상한 일로 여길 것이다.“전 대표님.”다들 마음속으로 아무리 전호영을 비웃을지라도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했다.전호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 그는 고씨네 남매에게 다가갔다.“현이 씨, 퇴근하시죠. 제가 데리러 왔어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자, 받아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 앞으로 내밀었다.고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말했어요. 제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매번 올 때마다 꽃다발을 사 오지 마세요. 제 사무실이 곧 꽃집이 될 것 같으니까요.”전호영은 심지어 하루에 꽃다발을 여러 번 선물한 적도 있었다.고현은 전호영이 보낸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전호영은 보복으로 그녀에게 더 많은 꽃을 보냈다.고현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곧 먹혀 죽을 것만 같았다.“꽃병을 더 사서 사무실로 보내드릴게요.”“저를 꽃병이라고 비아냥거리시려는 거에요? 제 사무실에는 꽃병이 가득 놓여 있거든요.”전호영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잘못했네요. 다음에는 이런 꽃들을 보내지 않고 다루기 쉬운 꽃들로 보낼게요. 현이 씨 사무실에 있는 그 꽃병들을 집으로 몇 개 가져가면 사무실이 꽃병이 줄어들 거 아니에요.”옆에 서 있던 고빈이 말을 이었다.“우리 형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무척 좋아해요. 저에게 주세요. 제가 이 꽃들을 저의 여성 지인들이게 줄 테니까요. 돈도 절약할 수 있으니 너무 좋을 것 같아요.”“고빈 씨는 아직 퇴근 안 하셨군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의 품에 안겨주며 자연스럽게 고현의 손을 잡았다.고빈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설마 이제야 저를 보신 건 아니죠? 혹시 시력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죠? 잘 고려해 보고 짝을 찾으셔야지 아니면 시각장애인을 고를 수도 있어요.”“그건 제 눈에 현이 씨만
장 대표가 전호영의 차를 얼핏 보더니 말을 이었다.“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의 차였군요. 셋째 도련님은 정말 매일 고씨 그룹에 가서 고 대표님을 귀찮게 하는군요. 저는 그저 헛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사실이에요. 고 대표님은 우리 장성에서 가장 젊고 우수한 대기업 대표님이죠. 그의 잘생긴 외모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로잡았는지 몰라요. 고 대표님은 강성의 모든 젊은 여자들의 이상형일걸요. 여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전호영 도련님이 해내게 될 줄은 몰랐네요.”“하지만 외모로 보면 전호영 도련님과 고현 대표님은 참 잘 어울려요. 두 사람 중 한 명이 여자라면 정말 천생연분이죠. 하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 모두 남자네요. 너무 아쉬워요.”두 사람의 만남은 수많은 얼마나 많은 여자의 부러움을 자아냈는지 모른다.강성의 명문 아가씨들도 전호영이라는 남자에게 진 것이 자못 못마땅했다.“두 분이 이미 서로 남녀 관계를 확정하셨나요?”장 대표는 계속해서 물었다.“제가 듣기로는 전호영 도련님이 아직도 고현 대표님께 구애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의 일방적인 짝사랑 아닐까요? 사실 고현 대표님이 정상적인 남자인데 전호영 도련님이 게이일 수도 있죠.”“저도 잘 몰라요. 진실한 사실이 어떠할지 누가 알겠어요. 고 대표님은 냉담한 분으로서 수많은 대표님과 접촉하시지만 진정으로 친한 친구는 얼마 없어요. 고 대표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없거든요.”“하지만 고현 대표님께서 전호영 도련님을 점점 더 포용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이 고 대표님을 위해 여성 옷을 입으며 여자로 분장한 적이 있거든요. 그 두 사람 중에서 아마 전호영 도련님이 더 비정상인 것 같아요. 고 대표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전호영 도련님이 여성 옷을 입었을 거라고 봐요.”전호영은 여성 옷차림으로 고씨 그룹에 왔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그 현장을 목격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전호영을 위해 비밀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소문을 퍼뜨리고 그렇게 일파
멀리 장성에 있는 전호영도 전이진이 보낸 카카오 스토리를 보았다. 그는 여운초와 전이진이 혼인 신고서를 받은 모습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다.그는 결국 다시 자리를 떠나 호텔 사무실을 나오더니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향했다.이때 고현이 사업에 관한 얘기를 방금 마쳤을 때였다.그녀는 일어나서 손을 뻗어 고객과 악수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장 대표님, 수고하셨어요.”장 대표도 이내 대답했다.“즐거운 협력이 되길 바랍니다.”고현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벌써 식사 시간이 되었네요. 우리 함께 식사하는 건 어때요? 제가 대접해 드릴게요.”“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제가 이번에도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네요. 곧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거든요. 다음에요. 다음에 제가 고 대표님께 음식 대접해 드릴게요.”고현은 이해하며 말했다.“장 대표님께서 오신다면 당연히 제가 음식 대접해 드려야죠. 다음에 오시면 꼭 저에게 대접할 기회를 주셔야 해요.”“당연하죠. 약속드릴게요.”장 대표는 웃으며 대답했다.고현이 고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쳐다보자 고빈은 눈치껏 일어나사 미리 준비한 특산품을 장 대표에게 가져다주었다.“장 대표님, 이것은 우리가 장 대표님을 위해 준비한 강성의 특산품이에요. 귀한 물건은 아니고 우리 강성의 특색이에요. 한 번 맛보세요.”장 대표는 사양하다가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고 대표님, 고마워요.”고현과 사업해 본 사람들은 비록 고씨 그룹의 오더를 따내기가 쉽지 않지만, 고현의 인품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했다.고현은 사람이 엄숙하고 차갑지만, 그녀와 사업을 해본 사람들 모두 그녀를 칭찬하곤 했다.하지만 이렇게 좋은 청년 인재가 동성애자라니... 아깝기만 했다.고현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많은 대표가 아마 정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고현이 게이가 아니라면 그들은 모두 자신의 딸과 고현을 맞세워주고 싶어 했다.고현 남매와 고위층 몇 명 인사들이 함께 장 대표를 고씨 그룹 앞까지 배웅하고 장 대표 일행을 미리 준비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엄마가 관성 호텔에 예약해 놓았어. 가서 축하할 겸 밥 먹자. 그리고 모두한테도 관성 호텔에 오라고 전화해 놨어. 할머니께서도 너희 두 사람이 혼인 신고한 일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운초야, 내가 방금 네 고모도 초대했어. 너와 이진이 결혼에 관해 상의하려고. 아직 설이 몇 달 남았는데 그 전에 결혼식 좀 올리자.”명해은이 무척 급했던 모양이다.전이진과 여운초가 혼인 신고하자마자 바로 결혼에 관한 일을 상의하려고 했다.여운초의 새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아직 감옥에 있는데다 여운초가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 명해은은 혼례 문제에 관해서 여준희와 상의하려 했다.하지만 추미자는 결국 여운초의 친어머니였기에 명해은은 여운초의 뜻을 물었다.“운초야, 네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되지 않을까?”명해은은 추미자한테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기에 그냥 결혼 사실을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여운초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이진 씨와 함께 감옥으로 만나러 가서 말할게요. 저와 이진 씨 결혼에 대한 모든 일은 저의 작은 고모와 상의하면 돼요. 여씨 가문에 사람들이 수많지만,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건 제 작은고모뿐이거든요.”여천우도 여운초와 사이가 가까웠지만, 아직 어리기에 이런 일에 관해 잘 모를 것이다.명해은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래. 알았어. 네 작은고모도 너희들이 혼인 신고한 사실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오후에 오신다고 하셨어.”여운초 전이진이 약혼한 뒤로 전씨 가문은 여운초의 배후에 서 있게 되었고 눈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준희는 이 가엽고 운이 좋은 조카를 전이진에 맡기게 되니 매우 안심했다.여준희도 그녀의 집안에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친정집에 가는 횟수가 예전보다 줄었다.여운초 남매는 서로 자주 연락했다.여운초는 작은고모를 어머니로 여기고 있었다.그녀는 친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모성애를 여준희에게서 느꼈다.“언제 면회를 하러 가려고?”“오후에 가려고요. 감옥에 가서 보고
전현민도 벙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이건 세상에 둘도 없는 경사야. 우리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이진아, 이미 이르지 않으니 어서 운초랑 들어가 절차부터 밟아. 직원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간다.”부모님의 재촉을 받은 전이진은 여운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손으로부터 가족관계등록부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서 구청 안으로 걸어갔다.명해은 부부는 돌아가지 않고 밖에 서서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전현민은 아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이러고 있으니 32년 전에 우리 둘이 이곳에 와서 결혼 증명서를 받던 날이 생각나네. 마치 어제 발생한 일과 같은데, 벌써 우리 큰아들이 이곳에 오다니... 세월이 참 빠르긴 빨라. 우리도 늙을 때가 되긴 됐나 보네.”그는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난 당신과 백년해로하겠다고 약속했었지.”명해은도 감격해서 말했다.“그러게요,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딱 맞아요. 난 아직도 자신이 18살인가 하는데 우리 큰아들이 벌써 서른이네요. 우린 정말 늙었나 봐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네요.”“당신은 조금도 안 늙었어. 내 눈에는 당신이 관음보살과 같이 해마다 18살이야.”명해은은 몸 관리를 잘해서 전이진과 함께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남매로 착각할 정도였다.전현민도 몸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젊은 시절에 전씨 가문의 사업에 몰두했기에 심신이 많이 상해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다.은퇴한 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 염색은 했었지만, 그래도 아내와 같이 서면 아내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였다. 사실, 두 내외는 불과 한 살 차였다. 명해은은 남편의 칭찬에 웃음보를 터뜨렸다.“나도 해마다 18살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네요. 내가 아무리 몸 관리를 잘한다 해도 늙기 마련인걸요.”“내가 당신과 함께 늙어 갈 테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보다 훨씬 늙어 보여.”명해은은 웃으면서 말했다.“전 두려울 것 없어요.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하늘이 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