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은 하예정을 위로한 후 고고하게 기지개를 켜고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난 이만 가서 쉬련다. 나이가 드니 몸이 예전 같지 않구나.”어르신은 몇 걸음 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 돌려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정이 베개 미리 꺼내줘?”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손님방에 베개 있어요.”어르신은 손자를 힐긋 쳐다볼 뿐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돌아갔다.하예정이 샤워하러 들어갔을 때 할머니는 이미 하늘이 뒤흔들릴 듯이 코를 골았다.하예정은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십여 분 후.그녀는 잠옷을 입고 방에서 나왔는데 문을 닫자마자 잠옷 가운 차림으로 팔을 꼭 껴안은 채 제 방문 앞에 서 있는 전태윤과 마주쳤다.“왜 아직도 안 자요? 내일 출근 안 해요?”하예정은 일부러 낮에 했던 말을 까먹은 듯 한마디 툭 던지고는 그를 스쳐지나 손님방으로 향했다.손님방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침대 시트, 이불, 베개까지 싹 다 없어졌다.‘내가 직접 침구 용품 골라서 샀는데 다 어디 갔지? 도둑이라도 들었나? 아니 무슨 도둑이 침구 용품만 훔쳐 가는데?’하예정은 고개를 돌리고 여전히 거만하게 서 있는 전태윤을 째려봤다. 그녀가 샤워하는 틈을 타 손님방의 침구 용품을 모조리 가져간 게 틀림없었다.전태윤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묵묵히 바라봤다.하예정은 그의 앞으로 다가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곧바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누군가가 전에 나한테 문을 활짝 열고 계약서를 찾으라고 했었죠.”그녀의 말을 들은 전태윤도 뒤따라 들어가더니 방문을 잠그고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천천히 찾아봐. 못 찾아내면 앞으로 두 번 다시 계약서 얘기 꺼내지 마. 그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하예정은 실은 그의 방에 있는 금고를 제외하고는 안 뒤져본 곳이 없었다.그녀는 제법 그럴싸하게 뒤지는 척을 하더니 금고 앞에 서서 몇 번 두드리며 말했다.“열어봐요. 분명 이 안에 있을 거예요.”전태윤이 다가와 금고를 열었다.하예정은 그
그녀는 전태윤의 침대에 올라가 편한 자세로 누웠다.“한번 자보니까 태윤 씨 침대가 참 편하네요. 이건 마치 내 환각이겠죠?”하예정은 눈웃음을 지으며 이불을 덮었다.“태윤 씨, 굿나잇.”전태윤은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한참 노려보다가 불쑥 이불을 젖히고 그녀를 덮치려 했다.다만 하예정이 재빨리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슬리퍼를 신고 문밖으로 달려갔다.“하예정.”전태윤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저기... 내 방 화장실에 다녀와야 해요.”분위기 파악도 못 한 채 생리가 와버렸다.전태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화장실은 여기도 있어.”“그런데 내가 원하는 딱 한 가지 물건이 없어요. 화장실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잘게요. 태윤 씨는 당분간 내버려 둘게요.”하예정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좀 더 키우다가 잡아먹어야지.”전태윤이 아무리 눈치가 무뎌도 이쯤이면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예정의 손을 놓아주며 방으로 돌아가게 했다.잠시 후 그녀가 다시 전태윤의 방으로 돌아왔다.전태윤은 한창 그녀를 등지고 누워 화난 듯 베개 하나를 껴안고 있었다.하예정이 잠시 머뭇거렸다.‘나 그냥 다른 방 가서 잘까? 아니야, 돌아가서 할머니랑 하룻밤 잘래.’하예정이 돌아가려 할 때 전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지도 못해?”‘뭐?’하예정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씩씩거리는 전태윤을 바라봤다.“안고 있으면 더 괴로울까 봐 그러죠.”“홀로 자는 것보단 나아.”그가 괴로움도 마다하겠다니 하예정도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옆에 다가가 이불을 걷고 침대에 누웠다.“너무 그러지 말아요. 갱년기 걸린 여자 같아요.”“나 남자야.”“갱년기 걸린 남자 같아요.”전태윤은 갑자기 팔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기더니 몸을 내리깔고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제야 기분이 풀린 듯 온순한 아내를 꼭 껴안고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며칠이면 돼?”“열흘이요.”“그렇게나 오래 걸려?”“난 내 몸 아껴요.
이경혜는 남편한테 티슈를 건네받고 눈물을 닦으며 드디어 말을 꺼냈다.“우빈이란 아이가 경희를 좀 닮았는데 그 아이 엄마가 하예진이에요. 예진이가 살만 좀 빼면 경희랑 똑같단 말이에요. 소현이는 하예정을 처음 볼 때 친해지고 싶은 느낌이 들었대요. 아까 예진이 모자 볼 때 나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어쩌면 혈연관계 때문이겠죠. 여보, 이번엔 정말 내 동생을 찾은 것 같아요...”이경혜는 동생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에 또다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이미 15년 전에 사망했어요. 그래서 오랫동안 찾지 못한 거죠. 이 세상에 없는데 무슨 수로 찾아내겠어요?”성문철이 그녀를 위로했다.“이건 단지 느낌일 뿐이야. 사람과 사람지간의 인연이란 게 가끔 이렇게 이상하다니까. 일단 눈물 그치고 유전자 검사부터 진행해.”한 번도 본 적 없는 처제가 정말 죽었다면 성문철도 아쉬움이 많이 남을 것이다.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 아내는 그의 성씨 그룹의 직원이었고 그때부터 여동생을 찾아 나섰다.몇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이모를 계속 찾으라고 당부했다.오랜 시간 견지해왔던 신념이 한순간 무너지니 아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직감이 말해주는데 하예정과 하예진은 경희 딸이 맞아요. 경희는 죽었고 두 딸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니... 다행히 두 자매가 나처럼 강하게 버텨왔어요.”그해 이경혜도 고작 8살이라 여동생을 키울 능력이 못 됐다.하예진 자매는 적어도 그녀보단 나았다. 부모님의 사망 배상금을 조금 챙겼으니 말이다. 물론 인간말종 같은 친척들이 대부분 금액을 낚아채 갔지만 마을 이장이 두 자매에게 4천만 원을 남겨주었다. 그해 하예진도 고작 15살이라 어깨에 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동생을 키워왔다.소현이가 말하길 하예정은 언니에게 엄청 잘한다고 했다.이경혜는 두 자매가 서로 의지하며 모진 역경을 파헤치고 여기까지 걸어온 걸 되새겨보았다. 두 아이는 인간의 매정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지금까지 버텨왔다. 하예진은 그녀
“나 입맛 없어요.”“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셨는데 입맛이 없다니, 당신이 얼마나 걱정되는지 알아? 애들도 다 당신 눈치만 보고 있어. 둘째는 당신 기분이 안 좋은 걸 알고 바로 달려왔어.”이들에겐 세 자녀가 있는데 맏이는 듬직하고 성숙한 편이지만 둘째는 집에 머무르는 성격이 아니다. 막둥이는 가장 사랑받고 있는 성소현인데 얼마 전까지 전태윤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이제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다.“다이어트 하는 셈 치죠.”이경혜가 침대에 누웠다.“나 잘래요.”성문철은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뜻을 따랐다.입맛이 없다니 계속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이경혜는 고집이 참 센 편인데 딸아이가 그 점을 쏙 빼닮았다.전태윤이 좋다고 수년간 쫓아다니면서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 포기하지 않더니 결국 직접 당하고 나서야 마음을 접었다.밤새 부부는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다음날, 부슬비가 내려 안 그래도 쌀쌀한 아침이 더욱 춥게 느껴졌다.전태윤이 먼저 깨어났다.옆에 누운 하예정은 새벽에 추웠던지 무심코 그의 품에 쏙 안겨 몸을 녹였다.고개 숙여 귀여운 그녀를 쳐다보는 전태윤의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눈 뜨자마자 사랑하는 여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보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달콤했다.그는 하예정을 몇 분 동안 빤히 쳐다보다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잠이 깰까 봐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비가 내려 하늘도 음침한 게 조깅은 무리일 듯싶었다.전태윤은 잠깐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십 분 후, 그는 방에서 나와 곧게 주방으로 갔다가 일 분도 채 안 돼 다시 되돌아왔다.발코니에서 강일구에게 전화를 걸자 곧바로 통화가 연결됐다. 전태윤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분부를 내렸다.“강일구, 호텔 가서 조찬 3인분 포장해와.”“네, 알겠습니다.”강일구는 공손하게 대답하고 도련님이 전화를 끊자마자 호텔로 출발했다.도련님께서 발렌시아 아파트를 고른 게 참 다행이었다. 호텔과 회사가 그리 멀지 않
전태윤은 강일구가 포장해온 조찬을 들고 식탁 앞에 걸어가 내려놓았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그는 하예정에게 따뜻한 대추차를 끓여주었다.“아침을 직접 만드는 줄 알았더니 포장해왔네?”야유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태윤은 굳이 고개 돌리지 않아도 할머니가 오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는 보는 척도, 대꾸도 안 했다.“뭐 끓여? 향이 완전 진하네?”이때 어르신이 안으로 들어와 뚜껑을 열어보다가 바로 닫았다.“난 또 진도라도 뺀 줄 알았더니.”어르신은 하찮은 표정으로 손자를 두어 번 노려보다가 밖으로 나가려 했다.전태윤은 굳은 얼굴로 끝내 변명에 나섰다.“난 이미 최선을 다했어요.”사실 어젯밤에 기회가 있었지만 타이밍이 너무 안 맞았다.“마음, 마음부터 저격하란 말이야. 예정이 열 손가락이 텅 비어있는 게 안 보여?”전태윤은 할 말을 잃었다.사실 그도 마음을 저격하려고 모진 노력을 해왔다.반지를 진작 두 개 사서 몇 번 끼고 다니기도 했으나 그건 단지 성소현이 마음을 접게 하기 위해서였다.하예정의 반지는 아직도 보관만 하고 있을 뿐 미처 건네지 못했다.“나한테 오래된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어. 네 할아버지가 생전에 산 거야. 우리 부부가 함께 끼려고 샀는데 네 할아버지가 산 반지가 워낙 많았어야지. 이 할미는 하루에 하나씩 껴도 다 못 끼겠더라. 어떤 다이아몬드 반지는 보석함에 넣어두고 한 번도 껴보지 못했어. 계속 거기 두는 것도 공간만 차지하니 그냥 너 줄게. 네가 알아서 해.”어르신의 보석함엔 온갖 진귀한 장신구들이 들어있다. 다만 어르신은 결혼반지만 줄곧 끼고 다닌다. 남편이 나중에 엄청 많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줬지만 그녀는 여전히 결혼 때 끼던 반지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마워요, 할머니.”전태윤은 할머니의 보석함에 들어있는 물품들이 웬만한 주얼리 가게보다 값지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대부분 골동품 같은 진귀한 액세서리였으니까.그의 부모님 세대는 부부마다 할머니가 선물하신 커플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
전태윤은 도련님으로 커오면서 이날 이때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꼬집혀본 적이 없다.‘아파, 아프다고!’“할머니 깨셨어요?”하예정이 침대에서 내려오며 그에게 물었다.할머니가 깨시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려는 모양이다.“깨셨어.”“이렇게 빨리요?”이제 막 달아가려던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그럼 나 이렇게 나가면 할머니께서...”“우린 부부야.”전태윤은 그녀가 자꾸 뭔가를 숨기려 하는 모습이 싫었다.하예정이 웃으며 답했다.“그래요, 우린 부부니까 당당하게 나가야죠. 할머니도 보시면 기뻐할 거예요. 우리가 결혼 뒤에 줄곧 각방을 써서 나한테 얼마나 핀잔을 두셨는지 모르죠?”전태윤이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실은 그도 할머니만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를 내젓게 된다.물론 지금은 감사의 마음이 더 많다. 할머니의 핀잔이 아니었다면 그도 하예정과 결혼하지 못했을 테니까.“방에 가서 옷 갈아입을게요. 오늘 뭐 먹고 싶어요? 아침은 내가 차려줄게요.”“아침 사 왔으니까 할 거 없어.”하예정은 그를 힐긋 쳐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전태윤은 짙은 표정으로 생각했다.‘방금 그 눈빛 뭐지? 아침 사 온 게 그렇게 이상할 일인가? 해가 서쪽에서 뜰 정도냐고?’“할머니, 굿모닝.”밖으로 나온 하예정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할머니께 인사했다.“예정이도 굿모닝.”어르신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배고프지? 태윤이가 아침 일찍 깨어나 찬바람에 비까지 무릅쓰고 관성 호텔에 가서 조찬 포장해왔어. 네가 거기 음식 좋아한다면서?”하예정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에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저 음식 안 가려요. 길거리 토스트나 편의점 음식이라 해도 다 잘 먹어요.”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매일 먹으면 질려. 가끔 메뉴를 바꿔야지. 오늘 추워. 얼른 옷 갈아입고 외투도 하나 걸쳐.”하예정이 알겠다고 대답한 후 무덤덤한 척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을 닫자마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띠리링...”이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대추차 끓여놨어. 공복이니까 일단 텀블러에 부어줄게. 가게 갖고 가서 마셔.”하예정은 살짝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봤다.‘지금 날 위해 대추차를 끓인 거야?’전태윤은 텀블러를 깨끗이 씻고 다 끓인 대추차를 안에 부었다. 그는 덮개를 꼭 닫은 후 봉투에 담아 그녀에게 건넸다.“꼭 마셔.”하예정은 봉투를 건네받고 그윽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나 갈게요.”전태윤은 제자리에 서서 떠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어르신이 그런 손주 녀석에게 쏘아붙였다.“네가 좀 데려다주면 덧나?”“예정이 가는 길 알아요.”할머니는 할 말을 잃었다.관심할 줄도 알고 이제 막 칭찬하려 하는데 금세 뒤통수를 치다니. 할머니는 손주 녀석이 참 한심했다...“할머니, 아까 예정이가 날 바라보는 눈빛 보셨죠? 할머니가 없었으면 분명 나한테 입맞춤했을 거예요.”할머니는 말문이 막혔다.전태윤은 아쉬움만 가득 남긴 채 할머니 옆에 앉아 묵묵히 아침을 먹었다.“예정이가 두꺼운 외투 안 입은 것 같은데.”할머니가 불쑥 말했다.이에 전태윤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나중에 갖다 줄 거예요.”할머니는 흡족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하예정은 급하게 나가면서도 언니한테 전화해 우빈의 상태를 묻는 걸 잊지 않았다. 언니가 휴가를 냈다는 말에 그녀도 더는 언니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가게로 갔다.학생들의 등교 시간을 놓치니 가게 문을 열고 간단하게 청소만 할 뿐이었다. 밖에 비가 내려 문 앞에 진열대를 내놓지 않아서 가게 안이 더 비좁아졌다.하예정은 서재의 먼지를 꼼꼼하게 털었다.며칠 뒤면 학생들의 겨울 방학이 시작될 테니 그녀도 서점 문을 닫고 구정을 보내러 갈 예정이었다.“예정 누나.”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울려 퍼졌다.고개를 돌려보니 커다란 장미꽃 한 다발이 보였고 그 뒤에 꽃다발을 안은 김진우가 보였다.한동안 안 본 사이로 김진우는 몹시 수척해졌다. 수염도 깎지 않아 예전 같은 밝은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하예정은 담담하게 쳐다보다가 고개 돌
김진우가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도 알아. 하지만 누나는 계약 결혼이라 조만간 이혼할 거잖아. 예정 누나, 나 누나 좋아해. 오래전부터 좋아하게 됐어. 아직은 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 알아. 나도 누나 찾아오지 않으려고 애써 참아봤는데 그게 마음처럼 안 돼. 하루에도 수백 번씩 누나 생각이 나. 머릿속엔 온통 누나의 웃는 모습뿐이야. 내가 누나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그는 다시 꽃다발을 하예정에게 건네며 진지하게 물었다.“누나, 내게도 한 번 기다릴 기회를 주면 안 될까?”심효진이 진작 그를 설득도 해보았고 경고장도 날렸지만 김진우는 도저히 이대론 포기할 수 없었다.그는 정말 하예정이 진심으로 좋았다.그녀를 사랑했던 첫 순간에 고백하지 못한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만약 고백했더라면 어쩌면 커서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줄 수도 있을 텐데, 낯선 남자와 초고속 결혼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하예정이 꽃다발을 받더니 그를 스쳐지나 문밖의 휴지통에 가차 없이 내던졌다.그녀는 돌아서서 김진우에게 말했다.“진우야, 혼자 나갈래 아니면 내가 내쫓을까?”“누나!”김진우가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제발 나한테 차갑게 굴지 마! 전엔 안 이랬잖아. 나한테 엄청 잘해줬잖아. 왜 이젠 칼날처럼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냐고? 나 너무 괴로워. 마음이 너무 아프단 말이야. 누나, 내가 누나 남편보다 못한 게 뭐야? 우린 알고 지낸 지 십여 년이 됐어. 서로 모르는 게 없단 말이야. 왜 이런 날 선택하지 않고 그 남자랑 초고속 결혼을 했어?”이 문제에 대해선 심효진이 진작 설명했었다. 하예정은 줄곧 그를 남동생으로만 여겼었다고 입이 닳게 말했지만 김진우가 도통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는 하예정의 남동생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 그녀의 남자가 되고 싶었다.“난 항상 널 동생으로 봐왔기에 그렇게 잘해줬던 거야. 네가 그런 내 마음을 오해할 줄 알았다면 때려죽여도 잘해주지 않았을 거야.”십여 년 동안 알고 지내면서 그녀는 김진우가 커가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