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서인 같은 엄마 밑에서 컸으니 잘 커 봤자 얼마나 잘 크겠어.”하예정이 싸늘하게 말했다.“언니, 우리 경찰에 신고했어. 임요한을 감옥에 보낼 순 없지만 주서인 부부한테 배상하라고 할 순 있어. 누가 와서 사정하고 사과하든 절대 받아주지 마. 꼭 배상하라고 해.”하예진도 마음을 굳게 먹었다.“배상 말고 다른 대가를 치르게 할 순 없어? 우빈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는데... 예정아, 아까 그 집에서 요한이 손발 확 부러뜨리지 그랬어.”“이진 씨가 걔 아빠한테 요한이 혼내라고 했더니 얼굴이 퉁퉁 부을 정도로 때렸대. 그리고 벨트까지 풀어서 요한이를 때렸다던데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상처가 가득 났다고 하더라고. 이진 씨가 나오기 전에 그 집을 다 때려 부쉈다고 했어.”하예진이 이를 꽉 깨물었다.“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악마 같은 놈.”하예정도 마음 같아선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성의 끈을 잡고 있어 직접 임요한을 혼내진 않았고 아빠인 임수찬에게 훈육을 맡겼다.많은 일을 겪으면서 하예정도 전태윤의 일 처리 방식을 점차 알게 되었다. 그는 아무리 화가 나도 법을 어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전태윤의 침착한 처리 방식이 옳았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머지 인생을 망가뜨리진 않으니까.이번에 전태윤과 그의 동생들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하예정은 이런 남자라면 남은 인생을 그에게 맡겨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언니의 일을 해결한 다음에 전태윤과 마음을 터놓고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해야겠다.“우빈아.”“우빈아.”주형인이 부모님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그들은 의사와 간호사에게 물어 겨우 주우빈의 병실을 찾아냈다.전태윤의 눈짓 한 번에 그의 남동생들은 인간 울타리를 만들어 주형인네 세 식구가 들어오지 못하게 병실 문 앞을 막아섰다.“전태윤, 당장 비켜! 내 아들 봐야겠어! 우빈이는 내 아들이야!”주형인은 아들을 데려갈 생각만 했지, 다치게 할 생각은 전혀
전태윤은 잠깐 침묵하다가 남동생들에게 물러서라고 했다. 그들이 자리를 비켜주자 주형인은 부모님과 함께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주우빈을 안고 있던 하예진은 얼음을 떼고 주형인에게 주우빈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한참 동안 얼음찜질했는데도 부기가 여전히 빠지지 않았다.아이의 피부가 가뜩이나 여린데다가 임요한이 세게 때린 바람에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아들의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고 평소 맑고 반짝이던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평소 아들을 별로 챙기지 않던 주형인마저도 마음 아파하며 임요한을 인간도 아니라고 욕했다.“요한이 어떻게 이런 어린애한테... 내가 정말 너무 오냐오냐했어.”김은희가 주우빈의 얼굴을 어루만지려 하자 화들짝 놀란 주우빈은 고개를 홱 돌리며 엄마의 품에 머리를 숨겼고 겁에 질린 채 두 손으로 엄마의 옷을 꽉 잡았다.“엄마, 엄마.”하예진은 시어머니의 손을 밀쳐내며 싸늘하게 말했다.“우빈이 당신들 무서워하니까 만지지 말아요.”“임요한 이 빌어먹을 놈, 내가 가서 제대로 혼내줘야겠어. 내 손자를 때리라고 지금까지 키운 거 아니야!”주경진은 주우빈을 걱정한 나머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주경진네 부부는 수년간 딸의 세 아이를 돌봐줬다. 아들네 식구가 시 중심에서 살고 또 아들과 함께 지내기를 원치 않아 한다고 가까이 사는 딸이 주경진네 부부를 자기 집으로 모셔갔다. 듣기 좋아 모셔간 거지 사실은 자기 애들을 봐달라는 뜻이었다.주서인의 시부모는 그녀의 아이든 시동생네 아이든 절대 봐주지 않았다. 아이는 부부의 자식이기 때문에 부부가 알아서 키워야 한다고 했다.주경진네 부부는 세 외손주를 최선을 다해 돌봐준 것도 모자라 평소 아들이 주는 용돈도 딸네 가족에게 거의 다 쓰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 결과 힘들게 키운 외손자가 친손자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주경진은 자신이 이리도 배은망덕한 외손자를 키웠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주우빈을 달랜 후 하예진이 시댁 식구들에게 싸늘하게 물었다.“우빈이 이렇게 된 걸 보니까 인제 만족스
그에게 안기고 싶지 않았던 주우빈은 하예진의 옷자락만 꽉 잡고 있었다. 하예진도 주우빈을 끌어안은 채 주형인의 손을 밀쳐냈다.“주형인, 당신 아들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지금 당장 부모님을 모시고 나가! 당신이 우빈이 편을 들어줄 기대 따위 하지 않으니까 여기서 우빈이 놀라게 하지 마. 우빈이 이미 충분히 놀랐다고...”하예진은 또다시 감정이 북받쳐 올라 울먹였고 주형인은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김은희가 뭔가 얘기하려 하자 옆에 있던 남편이 말렸다. 말이 아니게 어두운 남편의 얼굴을 본 김은희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후 주형인이 입을 열었다.“그럼 우리 먼저 갈게. 당신이 우빈이 잘 챙기고 있어. 우빈이 양육권을 정하기 전에 절대 다시는 우빈이 데려가지 않을 거야. 이건 내가 약속할게.”주우빈을 데려와봤자 돌볼 시간이 없었고 주우빈을 부모님께 맡기는 건 더욱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만약 부모님이 그와 함께 살면 모를까... 하지만 서현주는 절대 시부모와 한집에서 살 수 없다고 했다.주형인과 하예진은 결국 오늘 이혼 조건에 대한 결론을 짓지 못했다. 하예진이 이혼 소송을 하더라도 그 기간에 계속 합의는 할 수 있다. 더는 질질 끌고 싶지 않았던 그는 하루라도 빨리 그녀와 이혼하고 싶었다.주형인은 부모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김은희가 말했다.“형인아, 너 설마 이대로 우빈이 포기하는 건 아니지?”“엄마, 지금 우빈이 너무 놀라서 상태가 불안정해. 우빈이 엄마랑 이모가 어릴 때부터 돌봐줘서 감정이 깊어. 일단 두 사람한테 맡기는 게 좋겠어. 그래야 우빈이 다친 마음도 빨리 회복되지. 잠깐 맡긴다고 내가 우빈이 양육권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야.”주형인이 안전 벨트를 맸다.“엄마, 나랑 예진이 이혼하면 아빠랑 같이 다시 본가로 들어가서 우빈이 돌봐줘. 생활비는 매달 몇십만 원씩 더 줄게. 요한이 이번에 너무했어. 어떻게 우빈이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을 수가 있어? 우빈이를 누나 집에 둬서는 안 되겠어.”주경진이 말했다
“누나 지금...”주형인이 말을 끝내기 전에 조수석에 타고 있던 주경진이 손을 내밀어 그의 휴대 전화를 빼앗았다.“형인아, 넌 운전에 집중해.”주경진은 어두운 목소리로 아들에게 한마디 하고는 휴대 전화를 들고 딸에게 말했다.“하예정한테 배상을 요구했다간 내가 절대 가만 안 있어.”아빠의 목소리에 주서인은 억울한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아빠, 수찬 씨가 요한이를 때렸어.”“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아빠가 혼 좀 내는 게 뭐? 너희들도 어릴 때 말을 안 들으면 나한테 많이 맞았어.”주서인이 잠깐 멈칫하다가 말했다.“아빠 제정신이야? 지금 하예진네 자매 편을 드는 거야? 아빠 딸은 나야. 내가 친딸이라고! 요한이가 아무리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애야. 잘못을 저질러봤자 얼마나 큰 잘못이겠어. 얘가 뭐 사람을 죽였어, 도둑질이라도 했어? 그냥 우빈이 몇 대 때린 것뿐이잖아. 요한이가 그러는데 정한이가 우빈이한테 맞아서 우는 걸 보고 형으로서 동생을 대신해 나서준 거라고 했어. 고작 발로 몇 대 걷어차고 뺨을 때렸을 뿐인데 병원에 실려 갔다고? 별일도 아닌 거 가지고 일부러 떠들썩하게 구는 게 틀림없어.”주서인은 파출소에서 본 자신의 집 CCTV를 인정하지 않았다. 화면 속에는 주우빈이 그녀의 큰아들에게 따귀를 연속 몇 대 맞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있었다. 양쪽 볼을 다 합하면 아마 십여 대는 될 것이다.경찰들은 임요한의 퉁퉁 부은 얼굴과 벨트에 맞은 상처까지 봤지만 못 본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임요한만 못된 애라면서 만약 하예정이 오지 않았더라면 주우빈이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애들은 사람을 세게 때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라 때릴 때 힘을 조절하지 못한다. 아무튼 주서인은 주우빈이 죽지 않았기에 자기 아들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정한이 먼저 주우빈을 때려서 주우빈이 받아친 바람에 정한이 울며 주우빈을 때리라고 하는 장면이 CCTV에 찍혔어도 자기 자식이니 잘못이 있어도 없다고 감싸야 했다. 남의 자식이 죽든 말
“네 집을 부순 게 뭐? 나 대신 분풀이해준 예정이가 오히려 고마워. 주서인, 너 예정이한테 배상을 요구한다면 평생 친정에 돌아올 생각 하지 말고 날 아빠라고 부르지도 마. 그리고 이 십여 년 동안 나랑 네 엄마가 네 집안에 쓴 돈도 전부 다 갚아. 다 적어놓고 있어. 네 동생이 출근해서부터 매달 우리한테 생활비를 줬는데 거의 다 네 집안 생활비에 썼어. 형인이 그렇게까지 해줬는데 친아들이 네 아들한테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갔어.”“예정이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크게 벌인다고 생각하지 마. 내가 다 물어봤는데 우빈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응급상황이었대. 의사 선생님들마저 가해자가 너무했다고 할 정도였고 우빈이 어느 정도로 다쳤는지 나도 다 봤어. 우린 지금 병원에서 나와서 너희 집으로 가는 길이야. 가서 짐 챙기고 그 집 나올 거야. 앞으로 나랑 네 엄마는 본가에서 지낼 테니까 네 자식은 너의 시부모한테 봐달라고 해. 시부모가 싫다고 하면 네가 혼자 봐. 걔네들은 네가 낳은 애들이지, 내가 낳은 게 아니야. 우린 너의 부모로서 널 가르치고 키우는 건 우리 의무지만 외손주까지 키워야 하는 의무는 없어.”주서인이 말했다.“아빠, 하예정이 무슨 마술이라도 부렸어? 왜 갑자기 걔 편드는 건데? 엄마랑 본가로 들어가겠다고? 엄마 아빠 둘이서만 지내면 내가 마음이 안 놓여. 요한이도 많이 맞았어. 아빠도 방금 얘기했잖아, 요한이는 직접 키운 외손자라고. 그런데 마음 아프지도 않아?”그러자 주경진이 싸늘하게 말했다.“걔는 맞아도 싸. 아빠가 아들 교육하려고 때린 건데 외할아버지인 내가 왜 끼어들겠어? 요한이 내 외손자인 건 맞지만 우빈이는 내 친손자야. 외손자랑 친손자가 비교된다고 생각해? 요한이 성이 뭐고 우빈이 성이 뭐야? 우빈이는 나랑 같은 주씨고 우리 주씨 가문의 손자야. 평소 요한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못 참아. 우빈이가 그 지경으로 맞은 걸 보니까 친할아버지로서 절대 참을 수 없어.”어릴 때부터 직접 키운 외손자에게 손을 대진 않을 거지
주경진이 어쩌다가 손자의 편에 섰지만 하예정 일행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얼음찜질을 한참 동안 해주니 주우빈 얼굴의 부기도 조금 내렸다. 주우빈은 줄곧 울며 집에 가겠다고 떼를 썼다.하예정이 의사에게 퇴원해도 되냐고 묻자 의사가 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이가 심하게 놀란 탓에 열이 날 수도 있어서 조심하라고 했다.해 질 무렵, 그들은 하예진 모자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주우빈 걱정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하예정은 전태윤을 끌고 베란다 밖으로 나와 그에게 말했다.“오늘 저녁은 아무래도 언니 집에서 우빈이랑 같이 있어야겠어요. 그래도 되죠?”전태윤은 내심 아쉬웠다. 지금 하예정과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하루 24시간 붙어있어도 모자랐지만 주우빈이 저런 일을 당했으니 이모로서 곁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이해되었다.“태윤 씨?”전태윤이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그윽하게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안 돼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우빈이 열이 날 수도 있대요. 언니 혼자서 돌보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요.”그때 전태윤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마치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 같았다. 하예정은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느껴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우빈이 챙기면서 네 몸도 잘 챙겨, 알았지?”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싸늘함 대신 따뜻함이 묻어있었다.“그럴게요.”“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 혼자 해결하려고만 하지 말고.”전태윤은 지금까지도 그녀가 하지철 등 건달들을 상대할 때 혼자서 용맹하게 전부 쓰러뜨린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 미인을 멋있게 구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말이다.하예정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거실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시동생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자 냉큼 손을 뻗어 전태윤의 건장한 허리를 끌어안고는 탄탄한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아내가 먼저 안겼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전태윤은
전태윤은 그녀를 살며시 밀어내며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쳤다. 하예정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매번 그와 두 눈을 마주칠 때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반해 스킨십을 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가 계속 지금처럼 다정하다면 아마 한 주일도 안 되어 진도가 쭉쭉 나갈 것이다. 그것도 매일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하예정이 온갖 야릇한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전태윤의 중저음이 귓가에 들려왔다.“우리 언제 계약서를 썼어?”하예정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니 전태윤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믿지 못하는 듯싶었다.“그때 태윤 씨가 작성한 계약서 있잖아요. 나한테 반년 기한이라면서 사인하라고 했던 거요.”전태윤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계약서 내용 어디 한번 외워봐 봐.”하예정은 입만 뻐금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기한이 반년이고 서로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다른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예정아, 너 아무래도 요즘 언니 일 때문에 신경 많이 써서 우리가 계약서를 썼다고 착각했나 본데 우리 계약서 같은 거 쓴 적 없어. 만약 진짜로 썼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따가 집에 가서 내 방문을 활짝 열 테니까 마음껏 뒤져봐. 네가 말한 계약서를 찾아낸다면 우리가 진짜 썼다고 믿을게.”하예정은 말문이 막혀버렸다.‘분명 계약서에 사인했었는데. 지금... 없었던 거로 하자는 뜻이야?’전태윤은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난 동생들이랑 밥 먹으러 가야겠다. 숙희 아주머니도 여기 남아서 도우라고 할게.”하예정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늘 오만하고 도도한 전태윤이 계약서를 썼었다는 사실을 발뺌한다는 게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그의 말에 하예정은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경악한 그녀의 모습에 전태윤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이만 갈게.”“그래요. 동생들한테 맛있는 거 사줘요. 내가 돈 줄게
전태윤을 포함한 여덟 형제는 할머니를 모시고 나와 관성 호텔에서 식사하기로 했다.여덟 도련님이 경호원과 동행하지 않은 채 어르신을 모시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호텔 매니저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예를 갖춰 인사해도 되나?’그런데 둘째 도련님이 말하길 큰 도련님이 경호원과 동행하지 않으면 일반 손님으로 대하라고 했다.호텔 매니저가 한창 망설이던 그때 전태윤 일행은 호텔 안으로 들어와 호텔 매니저 앞을 스쳐 지나갔다.하나같이 남다른 분위기에 그들이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이목이 전부 그들에게 쏠렸다. 몇몇 형제들이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할머니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부러움이 가득했다.‘저 할머니는 참으로 행복하셔. 이렇게나 잘생긴 손자가 여덟이나 되다니.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라고. 부러워 죽겠어!’사람들의 시선에 할머니는 이렇게 답하는 듯했다.‘날 부러워하지 말아요. 손자가 너무 많아서 애들 혼사 생각만 하면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식사 후 전태윤이 전이진에게 말했다.“이진아, 넌 할머니 모시고 본가로 돌아가. 난 소씨 저택에 다녀올게.”주형인이 재산을 빼돌린 증거가 아직 소정남에게 있고 마침 소씨 가문 가주의 아들도 저택에 있어 직접 가지러 가겠다고 했다.“나 본가로 안 가.”할머니가 거절했다.“예정이 오늘 집에 안 와서 재미난 구경도 없어요. 본가로 가지 않고 발렌시아 아파트에 있으면 심심할 텐데 내일 다시 오셔도 되잖아요.”그러자 할머니가 전태윤을 째려보았다.“심심하지도 않고 재미난 구경도 할 생각 없어. 난 단지 우리 손주며느리가 보고 싶어서 손주며느리랑 함께 지내고 싶을 뿐이야. 너랑 같이 자는 것도 아니고 신경 쓰지 마.”전태윤은 어이가 없었다.“그 집은 제집이에요.”“네가 살림을 맡아?”전태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지금까지 줄곧 하예정이 이 집안 살림을 맡아왔다.“집안 살림을 안 하면 발언권이 없으니까 그냥 닥쳐.”전태윤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친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