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진이 어쩌다가 손자의 편에 섰지만 하예정 일행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얼음찜질을 한참 동안 해주니 주우빈 얼굴의 부기도 조금 내렸다. 주우빈은 줄곧 울며 집에 가겠다고 떼를 썼다.하예정이 의사에게 퇴원해도 되냐고 묻자 의사가 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이가 심하게 놀란 탓에 열이 날 수도 있어서 조심하라고 했다.해 질 무렵, 그들은 하예진 모자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주우빈 걱정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하예정은 전태윤을 끌고 베란다 밖으로 나와 그에게 말했다.“오늘 저녁은 아무래도 언니 집에서 우빈이랑 같이 있어야겠어요. 그래도 되죠?”전태윤은 내심 아쉬웠다. 지금 하예정과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하루 24시간 붙어있어도 모자랐지만 주우빈이 저런 일을 당했으니 이모로서 곁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이해되었다.“태윤 씨?”전태윤이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그윽하게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안 돼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우빈이 열이 날 수도 있대요. 언니 혼자서 돌보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요.”그때 전태윤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마치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 같았다. 하예정은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느껴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우빈이 챙기면서 네 몸도 잘 챙겨, 알았지?”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싸늘함 대신 따뜻함이 묻어있었다.“그럴게요.”“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 혼자 해결하려고만 하지 말고.”전태윤은 지금까지도 그녀가 하지철 등 건달들을 상대할 때 혼자서 용맹하게 전부 쓰러뜨린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 미인을 멋있게 구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말이다.하예정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거실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시동생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자 냉큼 손을 뻗어 전태윤의 건장한 허리를 끌어안고는 탄탄한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아내가 먼저 안겼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전태윤은
전태윤은 그녀를 살며시 밀어내며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쳤다. 하예정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매번 그와 두 눈을 마주칠 때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반해 스킨십을 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가 계속 지금처럼 다정하다면 아마 한 주일도 안 되어 진도가 쭉쭉 나갈 것이다. 그것도 매일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하예정이 온갖 야릇한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전태윤의 중저음이 귓가에 들려왔다.“우리 언제 계약서를 썼어?”하예정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니 전태윤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믿지 못하는 듯싶었다.“그때 태윤 씨가 작성한 계약서 있잖아요. 나한테 반년 기한이라면서 사인하라고 했던 거요.”전태윤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계약서 내용 어디 한번 외워봐 봐.”하예정은 입만 뻐금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기한이 반년이고 서로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다른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예정아, 너 아무래도 요즘 언니 일 때문에 신경 많이 써서 우리가 계약서를 썼다고 착각했나 본데 우리 계약서 같은 거 쓴 적 없어. 만약 진짜로 썼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따가 집에 가서 내 방문을 활짝 열 테니까 마음껏 뒤져봐. 네가 말한 계약서를 찾아낸다면 우리가 진짜 썼다고 믿을게.”하예정은 말문이 막혀버렸다.‘분명 계약서에 사인했었는데. 지금... 없었던 거로 하자는 뜻이야?’전태윤은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난 동생들이랑 밥 먹으러 가야겠다. 숙희 아주머니도 여기 남아서 도우라고 할게.”하예정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늘 오만하고 도도한 전태윤이 계약서를 썼었다는 사실을 발뺌한다는 게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그의 말에 하예정은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경악한 그녀의 모습에 전태윤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이만 갈게.”“그래요. 동생들한테 맛있는 거 사줘요. 내가 돈 줄게
전태윤을 포함한 여덟 형제는 할머니를 모시고 나와 관성 호텔에서 식사하기로 했다.여덟 도련님이 경호원과 동행하지 않은 채 어르신을 모시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호텔 매니저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예를 갖춰 인사해도 되나?’그런데 둘째 도련님이 말하길 큰 도련님이 경호원과 동행하지 않으면 일반 손님으로 대하라고 했다.호텔 매니저가 한창 망설이던 그때 전태윤 일행은 호텔 안으로 들어와 호텔 매니저 앞을 스쳐 지나갔다.하나같이 남다른 분위기에 그들이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이목이 전부 그들에게 쏠렸다. 몇몇 형제들이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할머니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부러움이 가득했다.‘저 할머니는 참으로 행복하셔. 이렇게나 잘생긴 손자가 여덟이나 되다니.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라고. 부러워 죽겠어!’사람들의 시선에 할머니는 이렇게 답하는 듯했다.‘날 부러워하지 말아요. 손자가 너무 많아서 애들 혼사 생각만 하면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식사 후 전태윤이 전이진에게 말했다.“이진아, 넌 할머니 모시고 본가로 돌아가. 난 소씨 저택에 다녀올게.”주형인이 재산을 빼돌린 증거가 아직 소정남에게 있고 마침 소씨 가문 가주의 아들도 저택에 있어 직접 가지러 가겠다고 했다.“나 본가로 안 가.”할머니가 거절했다.“예정이 오늘 집에 안 와서 재미난 구경도 없어요. 본가로 가지 않고 발렌시아 아파트에 있으면 심심할 텐데 내일 다시 오셔도 되잖아요.”그러자 할머니가 전태윤을 째려보았다.“심심하지도 않고 재미난 구경도 할 생각 없어. 난 단지 우리 손주며느리가 보고 싶어서 손주며느리랑 함께 지내고 싶을 뿐이야. 너랑 같이 자는 것도 아니고 신경 쓰지 마.”전태윤은 어이가 없었다.“그 집은 제집이에요.”“네가 살림을 맡아?”전태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지금까지 줄곧 하예정이 이 집안 살림을 맡아왔다.“집안 살림을 안 하면 발언권이 없으니까 그냥 닥쳐.”전태윤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친할머니
소정남은 한창 소씨 가문 가주의 아들인 소지훈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촌지간이지만 우애가 아주 깊었다.그때 검은 옷차림의 한 남자가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오더니 예를 갖춰 말했다.“도련님들, 전씨 가문의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얼른 안으로 모셔요.”남자는 공손한 태도로 알겠다고 한 뒤 나가버렸다. 소정남이 테이블 위에 놓인 노란색 서류 봉투를 가리켰다.“태윤이 물건 가지러 왔네.”“직접 왔다는 건 날 만나러 온 거겠지.”소지훈은 도우미에게 차와 과일을 좀 가져오라고 했다. 그는 자주 집안의 힘을 동원하여 소정남을 도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태윤을 도와준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던 전태윤은 직접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고 했다.“태윤이 진작 형을 만나고 싶어 했어. 그런데 형이 너무 바빠서 집에 자주 없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어.”“태윤이는 네 친구니까 내 친구나 다름없어. 친구 사이에 서로 도우면서 사는 거지 뭐.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 네가 전씨 그룹에서 너의 가치를 증명해서 형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소지훈은 소정남의 어깨를 두드렸다.“계속 열심히 해. 그런데 너무 일만 하지 말고 네 혼사도 생각해야지. 작은어머니가 네가 나이도 많은데 아직 여자친구도 없다고 맨날 뭐라 하셔.”“형은 나보다 나이가 많잖아. 형도 여자친구가 없는데 내가 급할 게 뭐가 있겠어?”소지훈이 잠깐 멈칫했다.“방금 한 얘기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조금 전 나갔던 검은 옷 남자가 전태윤을 데리고 들어왔다. 전태윤의 경호원들은 전태윤이 준비한 선물을 안으로 들여놓은 후 조용히 밖에서 대기했다.“전태윤.”소정남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불렀다. 소지훈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다른 인사는 하지 않았다. 전태윤이 그들 앞으로 다가와서 소정남이 정식으로 소개를 마친 후에야 두 사람은 서로 악수하며 인사했다.“지훈 씨의 존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태윤 씨도 명성이 자자하시더군요.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네요.
“따르릉...”소지훈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그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태윤 씨, 미안해서 어쩌죠?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전태윤도 황급히 일어났다.“정남아, 형 대신 태윤 씨한테 잘 대접해.”소지훈은 동생에게 당부한 후 바로 저택을 나섰다.소지훈도 없는데 그 저택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전태윤은 소정남과 함께 소정남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에 가자 소정남의 어머니는 혼기가 꽉 찬 아들이 아직 여자친구도 없다면서 온 저녁 전태윤에게 하소연했다.전태윤은 겨우 그 집에서 나오며 소정남에게 말했다.“다음에 어머님이 집에 계시면 나한테 집에 가자고 하지 마.”그러자 소정남이 피식 웃었다.“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효진 씨랑 소개팅한 건 어떻게 됐어? 가족들한테 얘기 안 했어?”“지훈 형만 알고 있고 다른 가족들은 몰라. 아직 친해지지도 못했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찾아가면 효진 씨가 얼마나 놀라겠어.”전태윤이 동정 어린 눈빛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마음에 들면 노력해봐. 이참에 솔로 탈출하면 좋잖아.”“솔로 탈출하면 또 애나 낳으라고 닦달하실 거야. 애 하나 낳으면 둘째 셋째를 낳으라고 할 게 뻔해. 어른들은 항상 다그치시잖아.”소정남은 그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부모님이 조용해지실 거라고 전혀 믿지 않았다. 전태윤을 보면 모르겠는가? 전태윤이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하예정과 결혼한 후에도 할머니는 빨리 아이를 낳으라고 다그치시는 것을.“효진 씨 내 스타일이긴 한데 성격이 너무 직설적이야. 가끔 너무 직설적으로 얘기해서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니까.”사실 이건 다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소정남은 심효진 같은 이런 성격의 여자를 좋아하니까.“그럼 네가 더 적극적으로 하면 되지.”소정남과 심효진이 서로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실에 전태윤은 너무도 뿌듯했고 직접 주선해준 보람을 느꼈다.소정남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정남의 배웅을 받으며 전태윤은 경호원들
하예정은 내심 흐뭇했지만 결국 그의 뜻을 거절했다.전태윤이 무언가 얘기하려고 할 때 그녀는 한 손에 꽃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목을 꼭 껴안으며 고개를 숙이게 했다. 하예정은 남편에게 바짝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남자가 꽃을 너무 자주 사면 못 써요. 그러다 바람날라.”말을 마친 그녀는 전태윤의 가슴을 툭 내리쳤다. 말인즉슨 절대 바람피우지 말라는 뜻이었다.전태윤은 어안이 벙벙했다.‘이런 말도 있었어? 나중에 소남정에게 물어봐야겠네.’하예정이 그의 차에 올라탄 후 전태윤도 운전석에 돌아가 시동을 걸며 그녀에게 물었다.“우빈이는 좀 어때?”“아직 부기가 다 안 빠졌어요. 어젯밤엔 열이 나서 밤새 울더니 오늘 아침에 드디어 열도 내리고 아이도 울다 지쳐 예진 언니 품에 안겨서 잠들었어요.”우빈의 얘기에 홀가분했던 그녀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태윤 씨.”하예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말했다.“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리도 아이가 생기면 무슨 일이 있든, 우리 둘 사이가 어떻게 변하든 절대 아이한테는 상처 주지 말아요. 약속할 수 있죠?”전태윤은 급브레이크를 밟고 고개를 홱 돌린 채 그녀를 쳐다봤다.부부는 진지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전태윤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그의 일상 속에 그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하예정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그에게 기대는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부부는 서로 잘 알았다. 둘은 이미 서로의 세계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전태윤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더니 몸을 좀 더 기울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지그시 눈 감은 순간, 이마, 얼굴, 그리고 입술까지 가볍게 키스했다.“예정아, 네가 날 진심으로 대하면 난 반드시 더 깊은 사랑으로 보답할 거야. 내 마음이 작아서 네가 입주하면 다른 사람은 더이상 용납하지 못해.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아.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그건 우리의 생명의 연속이겠지. 내가 다치는 한이
전태윤은 주차한 뒤 주형인이 재산을 빼돌린 증거가 생각나 이제 막 하차하려는 하예정을 불러세웠다.“친구한테 부탁해서 주형인이 재산 빼돌린 일이 있는지 조사해보았는데 생각보다 일을 효율적으로 하더라고. 어젯밤에 바로 모든 증거를 내게 보내왔어. 저 뒷좌석에 노란 서류 봉투에 들어있어.”“친구분 참 대단하네요. 이렇게 빨리 증거를 수집하다니.”하예정은 그의 친구에게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생겼다. 언젠가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다.그녀는 증거를 수집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거로 여겼었다. 어쨌거나 주형인이 인제 와서 재산을 빼돌린 게 아니라 진작 시작했으니까.다만 하루 사이에 증거를 모두 수집하다니.“태윤 씨 친구분 탐정 사무소 같은 거 꾸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실력을 아껴두기엔 너무 애석하잖아요.”하예정은 조수석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고 노란 서류 봉투를 챙겼다.“걔 가족 중에 정보 탐색만 전문적으로 하는 분이 있어서 인맥도 넓고 무언가 맡기면 효율이 엄청 높아.”소씨 일가의 정보망이 매우 넓고 관성이 또 소씨 일가의 본거지다 보니 이 도시에서 일어난 일들은 거의 그 집안을 숨길 수가 없다. 소씨 일가가 마음만 먹으면 관성에서 알아내지 못할 일이 없다.다만 그 비용이 매우 높다 보니 일반인들은 감히 선뜻 소씨 일가에 부탁을 청하지 못한다.“그런 분들은 늘 소설에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에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집안이 존재하네요.”하예정은 서류 봉투를 챙긴 후 전태윤이 선물한 꽃다발을 차에 내려놓았다.전태윤이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해명했다.“예진 언니 지금 기분이 최악이라 언니 앞에서 당신 자랑하고 싶지 않아서요.”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전태윤의 볼에 입 맞추며 미소 지었다.“태윤 씨가 꽃 선물한 거 나만 알고 있으면 돼요.”남편 자랑할 기회는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굳이 지금 티 내고 싶지 않았다.전태윤은 이해한다는 듯이 대답했다.“자매 사이가 엄청 좋아 보여.”“십여 년을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어요. 언니
“아주머니, 언니랑 우빈이가 겨우 잠들었으니 일단 깨우지 마세요. 죽 끓여서 나중에 깨나면 먹게 해요.”숙희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세 사람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하예정은 정신 좀 차리려고 커피 믹스를 한 잔 풀었다.숙희 아주머니가 먼저 주방을 나서자 전태윤이 그 틈을 타 와이프의 손을 덥석 잡았다.“예정아.”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넌 집에서 쉬고 있어. 내가 다녀오면 돼.”하예정은 그의 손을 꼭 잡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나 괜찮아요. 커피 한 잔 마시면 버틸 수 있어요. 임씨 가문에 가면 싸워야 할지도 몰라요. 싸움은 당신이 나보다 못해요. 아마 당신 동생들도 말싸움으론 주서인 감당하지 못할걸요.”그들은 지적인 사람들이라 당연히 말싸움에 능하지 못할 것이다.“난 우빈이 이모예요. 애가 그 인간들한테 괴롭힘을 당해 이 지경이 됐으니 반드시 찾아가서 따져 물을 거예요. 어젠 우빈이가 쓰러져서 아이만 돌보다 보니 그 인간들 상대할 겨를이 없었어요. 이젠 우빈이도 조금 호전됐으니 그 집 찾아가서 꼬치꼬치 캐물어야죠.”전태윤의 그윽한 눈빛에 하예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태윤 씨, 자꾸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아요. 자꾸만 날 유혹하는 것 같잖아요. 심장이 쿵쾅대고 허튼 생각하게 된단 말이에요. 마음 같아선 확 덮쳐서 당신 잡아먹고 싶어요.”전태윤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띠리링...”이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전이진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전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형, 우리 지금 XX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대기하고 있어.”“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전태윤은 전화를 끊은 후 하예정에게 말했다.“다들 어제 그곳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대.”하예정은 남은 커피를 두세 입에 대충 들이마시고는 숙희 아주머니에게 몇 마디 당부한 후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가는 길에서 그녀는 성소현의 전화를 받았다.“예정 씨, 내가 보낸 사진 받았죠? 보니까 어때요? 익숙한
그 뒤로 이윤미가 그녀의 오빠들과 내연녀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차마 몇 명의 형수님들이 속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형수님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 후로 이윤미의 오빠들과 형수님들이 말다툼하기 시작했다.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고현은 이윤미가 잘했다고 생각했다.바람을 피운 사람이 자기 오빠라고 감싸면서 오빠들을 도와 형수님들을 속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면 자기 남편이 바람피운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알지만, 본인만 모른다면 얼마나 괴롭겠는가!이때 전호영이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군호 씨가 그렇게 멍청하지 않을걸요. 이 대표님께서 돌아오신다면 정군호 씨는 틀림없이 나가서 바람피우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이 대표님을 도와야 한다고 봐요. 못 봤으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현장을 목격했잖아요. 이 대표님을 만나면 알려줘야 해요. 어쨌든 우리 형수님의 이모시기 때문에 우리 형수님의 친척이나 다름없죠. 안 그래요?”고현은 전호영을 꾸지람했다.“호영 씨도 정말 나쁘네요. 이씨 가문에서 난리가 났으면 좋겠죠? 그런데 저도 호영 씨를 지지할 거에요. 이러고 보니 저도 좋은 사람은 아닌가 봐요.”“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죠. 정군호 씨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보세요. 정군호 씨가 잘못한 것을 우리가 바로잡아준 거죠. 이 대표님을 위한 것이지 모함하거나 억울하게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저처럼 일편단심인 남자는 정군호 씨의 이런 행동이 너무 부끄러워요. 만약 집안의 아내가 싫으면 이혼할 것이지... 이혼하기는 싫고 또 밖에서 예쁜 여자들이랑 놀고는 싶고... 두 마리 토끼는 다 잡을 수 없는 법이죠. 하늘 아래 어떻게 그런 좋은 일이 있겠어요?”전호영은 정군호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영상을 찍었다. 그리고 하루 호텔도 카메라가 있었기에 정군호가 내연녀를 껴안고 호텔로 들어가는 장면이 꼭 찍혔을 것이다.전호영이 정군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니었다.“이 대표님이 그토록 기가 센데
“저는 배려심이 깊은 신사에요.”고현은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면서 전호영의 신사다운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하지만 전호영이 고현의 손을 잡고 함께 호텔로 들어가려고 하자 고현은 거절했다.전호영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시종 전호영과 연인처럼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고현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전호영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앞으로나란히 몇 걸음 걷더니 고현이 갑자기 멈추었다.“왜 그러세요?”전호영이 물었다.‘설마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만났나?’전호영은 앞을 보았지만,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보지 못했다.“정군호 씨예요.”고현은 낮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한 뒤 전호영을 잡아당겨 차 뒤로 숨었다. 그녀의 경호원 팀은 고현이 위험한 줄로 알고 본능적으로 최대한 빨리 고현의 앞으로 돌진하며 위험을 막으려고 했다.“얼른 숨으세요. 저를 막지 마시고!”고현은 나지막이 경호원 팀에게 말했다.고현이 누군가의 가십거리를 보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고현은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옷을 입은 늙은 남자를 가리켰다. 그 늙은 남자는 천가 같은 얼굴과 매력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그 여성의 곁을 지나가는 남자라면 모두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몇 번 더 쳐다보았다.“저 남자는 이윤미의 친아버지이자 이 대표님의 남편인 정군호 씨예요.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저도 잘 몰라요. 놀랍게도 밖에서 내연녀를 만나고 있었네요. 만약 이 대표님께 들킨다면 정말 정군호 씨를 죽여놓을지도 몰라요.”이은화의 남편이라는 말을 들은 전호영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정군호와 내연녀의 동영상을 찍었다.그리고 말했다.“이 대표님은 우리 큰형의 결혼식에 가신 뒤로 계속 관성에 남아계시거든요. 아마도 정군호 씨는 이 대표님이 없는 틈을 타 바람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네요”고현도 말을 이었다.“이 대표님께서 남편을 너무 엄격하게 단속하니까 정군호 씨도 아마 진짜로 바람 피우지는 못할 거에요. 기껏해야 지
고현은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저는 어른이 된 후로 여행을 갈 시간이 없었어요. 바빠서 미치겠는데 언제 시간을 내서 놀러 가겠어요? 하지만 출장 다니면서 많은 곳은 가봤어요.”“신혼여행은 어디 가고 싶어요?”전호영이 그녀에게 물었다.고현이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말을 이었다.“저는 물이 맑고 공기가 좋은 산을 좋아해요. 조용하거든요.”“제가 잘 연구해서 산 좋고 물이 맑은 조용한 곳을 찾아볼게요.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우리 둘만의 세상을 잘살아 봐야죠.”알고 보니 고현은 산과 물이 있는 아름다운 곳을 좋아했다.전씨 가문의 서원 리조트가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이 있는 곳이고 평소에도 매우 조용한 곳이었다.“서원 리조트를 좋아해요?”“좋아하죠.그럼 서원 리조트에서 신혼여행을 즐기려고요?”전호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고요. 그곳은 우리 미래의 집이고 신혼여행은 당연히 딴 곳으로 가야죠.”이때 고현이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지금 시집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벌써 신혼여행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네요. 호영 씨와 함께하면 쉽게 호영 씨 의도대로 따라간단 말이죠. 저의 총명함과 자제력 모두 호영 씨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니까요.”“현이 씨가 아직도 이 일을 고민하고 있다니. 제가 아직도 부족한가요?”전호영은 자신이 고현을 오랫동안 쫓아다녔다고 느꼈다. 그는 모든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고현을 대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시집을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하여 전호영은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어떤 방면에서 잘하지 못했는지 알고 싶었다.“아니에요. 충분히 잘하셨어요. 우리 데이트도 별로 안 하고 평소에도 일하느라 바빴던 것 같아요. 아직 결혼까지 할 정도로 감정이 깊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말처럼 하루 못 보면 일 년을 못 본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는 몰라요. 그런 감정을 못 느낀다는 건 제가 호영 씨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아요. 어
경호원 팀은 그들의 전 대표님이 전호영에게 떠밀려 마이바흐 차에 들어가는 모습을 버젓이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차는 곧 고씨 그룹을 빠져나왔다.고빈이 중얼거렸다.“호영 씨는 정말 내가 본 형부 중 가장 오만방자한 형부였어. 처남인 나에게 조금도 아부하지 않고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니.”고빈은 중얼중얼하긴 했지만,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만약 고빈이 정말 친형이 있다면 그는 전호영이 그의 친형을 해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따라갔을 것이다.하지만 그의 친형은 사실 여자였다. 그의 누나 고현은 시집가야 하는 여자였다. 전호영은 그의 누나와 어울리는 남자였기 때문에, 또 전호영이 고빈의 부모님께 고빈이 너무 방해한다고 고자질하면 안 되었기에 고빈은 더는 따라가지 않았다.지금 고씨 가문에서 전호영은 고현 남매보다 체면이 훨씬 섰다.“고빈 씨가 안 따라왔죠?”전호영은 차를 몰면서 조수석에 앉은 고현에게 물었다.고현은 돌아볼 필요도 없이 이내 말을 이었다.“고빈이는 입만 살아서 그렇지 정말 따라오지는 않을 거예요. 호영 씨가 우리 부모님 앞에서 고빈의 고자질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죠. 고빈은 저보다 10분 먼저 태어났지만 지금 정해진 여자친구가 없거든요.”“저도 호영 씨랑 짝을 지으니 저희 부모님의 눈길도 자연스레 고빈의 몸으로 옮겨졌어요. 호영 씨가 제 동생의 고자질하면 저희 부모님은 그를 욕하다가 결국 결혼 재촉 문제로 돌아가거든요. 제 동생은 결혼 재촉을 엄청 무서워하거든요.”고빈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고정된 여자친구를 찾지 못한 일에 관해 고현도 마음이 조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녀에게는 전호영이 있었지만, 고빈의 짝은 아직 어디에 있는지...예전에는 고현은 고빈과 이윤미를 맞세워주려고 했지만, 고빈은 이윤미가 재미없다고 느꼈고 이윤미 또한 고빈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이윤미 곁에 방윤림이 있었다.전호영은 빙그레 웃었다.“저도 항상 고빈 씨의 고자질하고 싶지 않아요.
전호영은 꽃다발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갔다.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직원이 밖으로 나가면서 전호영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는 보습을 보았지만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만약 전호영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상한 일로 여길 것이다.“전 대표님.”다들 마음속으로 아무리 전호영을 비웃을지라도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했다.전호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 그는 고씨네 남매에게 다가갔다.“현이 씨, 퇴근하시죠. 제가 데리러 왔어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자, 받아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 앞으로 내밀었다.고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말했어요. 제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매번 올 때마다 꽃다발을 사 오지 마세요. 제 사무실이 곧 꽃집이 될 것 같으니까요.”전호영은 심지어 하루에 꽃다발을 여러 번 선물한 적도 있었다.고현은 전호영이 보낸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전호영은 보복으로 그녀에게 더 많은 꽃을 보냈다.고현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곧 먹혀 죽을 것만 같았다.“꽃병을 더 사서 사무실로 보내드릴게요.”“저를 꽃병이라고 비아냥거리시려는 거에요? 제 사무실에는 꽃병이 가득 놓여 있거든요.”전호영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잘못했네요. 다음에는 이런 꽃들을 보내지 않고 다루기 쉬운 꽃들로 보낼게요. 현이 씨 사무실에 있는 그 꽃병들을 집으로 몇 개 가져가면 사무실이 꽃병이 줄어들 거 아니에요.”옆에 서 있던 고빈이 말을 이었다.“우리 형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무척 좋아해요. 저에게 주세요. 제가 이 꽃들을 저의 여성 지인들이게 줄 테니까요. 돈도 절약할 수 있으니 너무 좋을 것 같아요.”“고빈 씨는 아직 퇴근 안 하셨군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의 품에 안겨주며 자연스럽게 고현의 손을 잡았다.고빈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설마 이제야 저를 보신 건 아니죠? 혹시 시력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죠? 잘 고려해 보고 짝을 찾으셔야지 아니면 시각장애인을 고를 수도 있어요.”“그건 제 눈에 현이 씨만
장 대표가 전호영의 차를 얼핏 보더니 말을 이었다.“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의 차였군요. 셋째 도련님은 정말 매일 고씨 그룹에 가서 고 대표님을 귀찮게 하는군요. 저는 그저 헛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사실이에요. 고 대표님은 우리 장성에서 가장 젊고 우수한 대기업 대표님이죠. 그의 잘생긴 외모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로잡았는지 몰라요. 고 대표님은 강성의 모든 젊은 여자들의 이상형일걸요. 여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전호영 도련님이 해내게 될 줄은 몰랐네요.”“하지만 외모로 보면 전호영 도련님과 고현 대표님은 참 잘 어울려요. 두 사람 중 한 명이 여자라면 정말 천생연분이죠. 하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 모두 남자네요. 너무 아쉬워요.”두 사람의 만남은 수많은 얼마나 많은 여자의 부러움을 자아냈는지 모른다.강성의 명문 아가씨들도 전호영이라는 남자에게 진 것이 자못 못마땅했다.“두 분이 이미 서로 남녀 관계를 확정하셨나요?”장 대표는 계속해서 물었다.“제가 듣기로는 전호영 도련님이 아직도 고현 대표님께 구애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의 일방적인 짝사랑 아닐까요? 사실 고현 대표님이 정상적인 남자인데 전호영 도련님이 게이일 수도 있죠.”“저도 잘 몰라요. 진실한 사실이 어떠할지 누가 알겠어요. 고 대표님은 냉담한 분으로서 수많은 대표님과 접촉하시지만 진정으로 친한 친구는 얼마 없어요. 고 대표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없거든요.”“하지만 고현 대표님께서 전호영 도련님을 점점 더 포용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이 고 대표님을 위해 여성 옷을 입으며 여자로 분장한 적이 있거든요. 그 두 사람 중에서 아마 전호영 도련님이 더 비정상인 것 같아요. 고 대표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전호영 도련님이 여성 옷을 입었을 거라고 봐요.”전호영은 여성 옷차림으로 고씨 그룹에 왔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그 현장을 목격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전호영을 위해 비밀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소문을 퍼뜨리고 그렇게 일파
멀리 장성에 있는 전호영도 전이진이 보낸 카카오 스토리를 보았다. 그는 여운초와 전이진이 혼인 신고서를 받은 모습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다.그는 결국 다시 자리를 떠나 호텔 사무실을 나오더니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향했다.이때 고현이 사업에 관한 얘기를 방금 마쳤을 때였다.그녀는 일어나서 손을 뻗어 고객과 악수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장 대표님, 수고하셨어요.”장 대표도 이내 대답했다.“즐거운 협력이 되길 바랍니다.”고현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벌써 식사 시간이 되었네요. 우리 함께 식사하는 건 어때요? 제가 대접해 드릴게요.”“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제가 이번에도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네요. 곧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거든요. 다음에요. 다음에 제가 고 대표님께 음식 대접해 드릴게요.”고현은 이해하며 말했다.“장 대표님께서 오신다면 당연히 제가 음식 대접해 드려야죠. 다음에 오시면 꼭 저에게 대접할 기회를 주셔야 해요.”“당연하죠. 약속드릴게요.”장 대표는 웃으며 대답했다.고현이 고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쳐다보자 고빈은 눈치껏 일어나사 미리 준비한 특산품을 장 대표에게 가져다주었다.“장 대표님, 이것은 우리가 장 대표님을 위해 준비한 강성의 특산품이에요. 귀한 물건은 아니고 우리 강성의 특색이에요. 한 번 맛보세요.”장 대표는 사양하다가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고 대표님, 고마워요.”고현과 사업해 본 사람들은 비록 고씨 그룹의 오더를 따내기가 쉽지 않지만, 고현의 인품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했다.고현은 사람이 엄숙하고 차갑지만, 그녀와 사업을 해본 사람들 모두 그녀를 칭찬하곤 했다.하지만 이렇게 좋은 청년 인재가 동성애자라니... 아깝기만 했다.고현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많은 대표가 아마 정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고현이 게이가 아니라면 그들은 모두 자신의 딸과 고현을 맞세워주고 싶어 했다.고현 남매와 고위층 몇 명 인사들이 함께 장 대표를 고씨 그룹 앞까지 배웅하고 장 대표 일행을 미리 준비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엄마가 관성 호텔에 예약해 놓았어. 가서 축하할 겸 밥 먹자. 그리고 모두한테도 관성 호텔에 오라고 전화해 놨어. 할머니께서도 너희 두 사람이 혼인 신고한 일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운초야, 내가 방금 네 고모도 초대했어. 너와 이진이 결혼에 관해 상의하려고. 아직 설이 몇 달 남았는데 그 전에 결혼식 좀 올리자.”명해은이 무척 급했던 모양이다.전이진과 여운초가 혼인 신고하자마자 바로 결혼에 관한 일을 상의하려고 했다.여운초의 새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아직 감옥에 있는데다 여운초가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 명해은은 혼례 문제에 관해서 여준희와 상의하려 했다.하지만 추미자는 결국 여운초의 친어머니였기에 명해은은 여운초의 뜻을 물었다.“운초야, 네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되지 않을까?”명해은은 추미자한테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기에 그냥 결혼 사실을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여운초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이진 씨와 함께 감옥으로 만나러 가서 말할게요. 저와 이진 씨 결혼에 대한 모든 일은 저의 작은 고모와 상의하면 돼요. 여씨 가문에 사람들이 수많지만,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건 제 작은고모뿐이거든요.”여천우도 여운초와 사이가 가까웠지만, 아직 어리기에 이런 일에 관해 잘 모를 것이다.명해은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래. 알았어. 네 작은고모도 너희들이 혼인 신고한 사실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오후에 오신다고 하셨어.”여운초 전이진이 약혼한 뒤로 전씨 가문은 여운초의 배후에 서 있게 되었고 눈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준희는 이 가엽고 운이 좋은 조카를 전이진에 맡기게 되니 매우 안심했다.여준희도 그녀의 집안에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친정집에 가는 횟수가 예전보다 줄었다.여운초 남매는 서로 자주 연락했다.여운초는 작은고모를 어머니로 여기고 있었다.그녀는 친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모성애를 여준희에게서 느꼈다.“언제 면회를 하러 가려고?”“오후에 가려고요. 감옥에 가서 보고
전현민도 벙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이건 세상에 둘도 없는 경사야. 우리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이진아, 이미 이르지 않으니 어서 운초랑 들어가 절차부터 밟아. 직원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간다.”부모님의 재촉을 받은 전이진은 여운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손으로부터 가족관계등록부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서 구청 안으로 걸어갔다.명해은 부부는 돌아가지 않고 밖에 서서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전현민은 아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이러고 있으니 32년 전에 우리 둘이 이곳에 와서 결혼 증명서를 받던 날이 생각나네. 마치 어제 발생한 일과 같은데, 벌써 우리 큰아들이 이곳에 오다니... 세월이 참 빠르긴 빨라. 우리도 늙을 때가 되긴 됐나 보네.”그는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난 당신과 백년해로하겠다고 약속했었지.”명해은도 감격해서 말했다.“그러게요,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딱 맞아요. 난 아직도 자신이 18살인가 하는데 우리 큰아들이 벌써 서른이네요. 우린 정말 늙었나 봐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네요.”“당신은 조금도 안 늙었어. 내 눈에는 당신이 관음보살과 같이 해마다 18살이야.”명해은은 몸 관리를 잘해서 전이진과 함께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남매로 착각할 정도였다.전현민도 몸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젊은 시절에 전씨 가문의 사업에 몰두했기에 심신이 많이 상해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다.은퇴한 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 염색은 했었지만, 그래도 아내와 같이 서면 아내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였다. 사실, 두 내외는 불과 한 살 차였다. 명해은은 남편의 칭찬에 웃음보를 터뜨렸다.“나도 해마다 18살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네요. 내가 아무리 몸 관리를 잘한다 해도 늙기 마련인걸요.”“내가 당신과 함께 늙어 갈 테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보다 훨씬 늙어 보여.”명해은은 웃으면서 말했다.“전 두려울 것 없어요.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하늘이 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