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정은 내심 흐뭇했지만 결국 그의 뜻을 거절했다.전태윤이 무언가 얘기하려고 할 때 그녀는 한 손에 꽃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목을 꼭 껴안으며 고개를 숙이게 했다. 하예정은 남편에게 바짝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남자가 꽃을 너무 자주 사면 못 써요. 그러다 바람날라.”말을 마친 그녀는 전태윤의 가슴을 툭 내리쳤다. 말인즉슨 절대 바람피우지 말라는 뜻이었다.전태윤은 어안이 벙벙했다.‘이런 말도 있었어? 나중에 소남정에게 물어봐야겠네.’하예정이 그의 차에 올라탄 후 전태윤도 운전석에 돌아가 시동을 걸며 그녀에게 물었다.“우빈이는 좀 어때?”“아직 부기가 다 안 빠졌어요. 어젯밤엔 열이 나서 밤새 울더니 오늘 아침에 드디어 열도 내리고 아이도 울다 지쳐 예진 언니 품에 안겨서 잠들었어요.”우빈의 얘기에 홀가분했던 그녀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태윤 씨.”하예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말했다.“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리도 아이가 생기면 무슨 일이 있든, 우리 둘 사이가 어떻게 변하든 절대 아이한테는 상처 주지 말아요. 약속할 수 있죠?”전태윤은 급브레이크를 밟고 고개를 홱 돌린 채 그녀를 쳐다봤다.부부는 진지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전태윤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그의 일상 속에 그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하예정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그에게 기대는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부부는 서로 잘 알았다. 둘은 이미 서로의 세계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전태윤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더니 몸을 좀 더 기울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지그시 눈 감은 순간, 이마, 얼굴, 그리고 입술까지 가볍게 키스했다.“예정아, 네가 날 진심으로 대하면 난 반드시 더 깊은 사랑으로 보답할 거야. 내 마음이 작아서 네가 입주하면 다른 사람은 더이상 용납하지 못해.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아.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그건 우리의 생명의 연속이겠지. 내가 다치는 한이
전태윤은 주차한 뒤 주형인이 재산을 빼돌린 증거가 생각나 이제 막 하차하려는 하예정을 불러세웠다.“친구한테 부탁해서 주형인이 재산 빼돌린 일이 있는지 조사해보았는데 생각보다 일을 효율적으로 하더라고. 어젯밤에 바로 모든 증거를 내게 보내왔어. 저 뒷좌석에 노란 서류 봉투에 들어있어.”“친구분 참 대단하네요. 이렇게 빨리 증거를 수집하다니.”하예정은 그의 친구에게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생겼다. 언젠가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다.그녀는 증거를 수집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거로 여겼었다. 어쨌거나 주형인이 인제 와서 재산을 빼돌린 게 아니라 진작 시작했으니까.다만 하루 사이에 증거를 모두 수집하다니.“태윤 씨 친구분 탐정 사무소 같은 거 꾸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실력을 아껴두기엔 너무 애석하잖아요.”하예정은 조수석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고 노란 서류 봉투를 챙겼다.“걔 가족 중에 정보 탐색만 전문적으로 하는 분이 있어서 인맥도 넓고 무언가 맡기면 효율이 엄청 높아.”소씨 일가의 정보망이 매우 넓고 관성이 또 소씨 일가의 본거지다 보니 이 도시에서 일어난 일들은 거의 그 집안을 숨길 수가 없다. 소씨 일가가 마음만 먹으면 관성에서 알아내지 못할 일이 없다.다만 그 비용이 매우 높다 보니 일반인들은 감히 선뜻 소씨 일가에 부탁을 청하지 못한다.“그런 분들은 늘 소설에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에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집안이 존재하네요.”하예정은 서류 봉투를 챙긴 후 전태윤이 선물한 꽃다발을 차에 내려놓았다.전태윤이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해명했다.“예진 언니 지금 기분이 최악이라 언니 앞에서 당신 자랑하고 싶지 않아서요.”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전태윤의 볼에 입 맞추며 미소 지었다.“태윤 씨가 꽃 선물한 거 나만 알고 있으면 돼요.”남편 자랑할 기회는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굳이 지금 티 내고 싶지 않았다.전태윤은 이해한다는 듯이 대답했다.“자매 사이가 엄청 좋아 보여.”“십여 년을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어요. 언니
“아주머니, 언니랑 우빈이가 겨우 잠들었으니 일단 깨우지 마세요. 죽 끓여서 나중에 깨나면 먹게 해요.”숙희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세 사람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하예정은 정신 좀 차리려고 커피 믹스를 한 잔 풀었다.숙희 아주머니가 먼저 주방을 나서자 전태윤이 그 틈을 타 와이프의 손을 덥석 잡았다.“예정아.”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넌 집에서 쉬고 있어. 내가 다녀오면 돼.”하예정은 그의 손을 꼭 잡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나 괜찮아요. 커피 한 잔 마시면 버틸 수 있어요. 임씨 가문에 가면 싸워야 할지도 몰라요. 싸움은 당신이 나보다 못해요. 아마 당신 동생들도 말싸움으론 주서인 감당하지 못할걸요.”그들은 지적인 사람들이라 당연히 말싸움에 능하지 못할 것이다.“난 우빈이 이모예요. 애가 그 인간들한테 괴롭힘을 당해 이 지경이 됐으니 반드시 찾아가서 따져 물을 거예요. 어젠 우빈이가 쓰러져서 아이만 돌보다 보니 그 인간들 상대할 겨를이 없었어요. 이젠 우빈이도 조금 호전됐으니 그 집 찾아가서 꼬치꼬치 캐물어야죠.”전태윤의 그윽한 눈빛에 하예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태윤 씨, 자꾸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아요. 자꾸만 날 유혹하는 것 같잖아요. 심장이 쿵쾅대고 허튼 생각하게 된단 말이에요. 마음 같아선 확 덮쳐서 당신 잡아먹고 싶어요.”전태윤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띠리링...”이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전이진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전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형, 우리 지금 XX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대기하고 있어.”“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전태윤은 전화를 끊은 후 하예정에게 말했다.“다들 어제 그곳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대.”하예정은 남은 커피를 두세 입에 대충 들이마시고는 숙희 아주머니에게 몇 마디 당부한 후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가는 길에서 그녀는 성소현의 전화를 받았다.“예정 씨, 내가 보낸 사진 받았죠? 보니까 어때요? 익숙한
하예정이 조마조마해 하고 있을 때 성소현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녀는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로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정 씨, 엄마가 점심이면 집에 도착할 거예요. 나 예정 씨네 가서 우빈이 한번 데려와도 될까요?”성소현은 이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사진을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저 하예정의 말대로 아이들은 어릴 때 다 귀여운 듯싶었다.만약 주우빈이 이모와 닮았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닮은 구석이 있다면 성소현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데려와 엄마에게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성소현은 애초에 하예정을 처음 봤을 때도 이상하게 자꾸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다.주우빈을 처음 봤을 때도 아이가 너무 예뻤다.만약 주우빈이 이모의 후손이라면 성소현도 왜 아이를 처음 봤을 때 그토록 귀여웠는지 해석이 될 것 같았다.우빈이 또래의 아이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유독 주우빈만 그토록 귀여웠고 마음 같아서는 당장 뺏어와 제 조카로 만들고 싶었다. 주우빈에게 장난감을 사줄 때도 그녀는 전혀 망설임 없이 아이에게 장난감 공장이라도 열어줄 기세로 어마어마하게 사줬었다.하예정에게도 같은 마음이었다.성소현은 상류층에 머물러있다 보니 주변에 항상 아양을 떠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전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26살인 그녀는 너무 까다로운 탓에 진짜 친구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적었다.하지만 하예정을 처음 만났을 때 마치 옛친구와 만난 것처럼 친숙함을 느꼈고 하예정의 출신, 조건을 전부 마다한 채 그녀와 친구를 맺고 싶었다.하예정이 그녀를 위해 전씨 일가의 도련님을 사로잡도록 팁을 알려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진심으로 하예정이 마음에 들었고 친구로 지내고 싶었다.“소현 씨,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우빈이 지금 상황이 좀 안 좋거든요.”성소현은 순간 가슴이 움찔거려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우빈이 무슨 일 있어요?”하예정은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우리 언니가 지금 남편과 이혼 중이잖아요. 주씨 집안에서 언니가 방심한 틈을 타 우빈
“네, 집안이 대가족이에요. 소현 씨, 마음만 받을게요. 너무 고마워요.”성소현은 하예정의 남편 쪽에서 사람들을 불러와 도와준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예정 씨, 남편분이랑 초고속 결혼이라고 했죠? 인제 보니 꽤 괜찮은 분 같네요. 이런 일 생겼을 때 적어도 선뜻 나서서 도와주잖아요.”하예진의 남편은 12년이나 알고 지냈지만 초고속 결혼한 하예정의 남편과 비할 바가 못 된다!“그래요, 그럼 난 이번엔 안 갈게요. 하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 생기면 꼭 나한테 얘기해야 해요. 안 그러면 날 친구로 안 여기는 거라고 삐질 거예요. 예정 씨 언니네 집 주소 보내줘요. 가서 우빈이 좀 봐야겠어요.”하예정은 이번 요구엔 거절하지 않았다.통화를 마친 후 그녀는 곧바로 성소현에게 예진의 집 주소를 보내주었다.전태윤은 둘의 통화 내용을 유의 깊게 엿들었다.성소현이 사람을 불러오겠다고 할 때 그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성소현이 오면 그의 신분은 바로 들통나 버린다.이렇게 갑자기 들통나서는 안 된다. 하예정이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게다가 부부의 감정이 아직 견고해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들켜버리면 하예정은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다행히 아내가 성소현의 호의를 거절했다.전태윤은 성소현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지만 그녀가 하예정을 향한 마음만은 진심이란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성소현의 성격과 지위로 그녀는 무슨 일이든 참지 않고 제멋대로 굴 수 있다.전태윤은 일부러 무심한 척 질문을 건넸다.“성소현 씨야?”“네, 소현 씨 어머님이랑 이모님의 어릴 때 사진을 보내줬는데 처음엔 얼핏 봐서 아무 느낌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중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문득 이모님과 우빈이가 많이 닮은 것 같더라고요.”전태윤은 그녀의 말에 식겁하여 하마터면 앞차를 들이받을 뻔했다.그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자 하예정의 몸도 앞으로 쏠렸다.“운전 천천히 해요. 내가 할까요?”하예정이 말했다.“운전은 꼭 천천히 해야 해요. 침착해서 나쁠 것 하나 없어
또 어쩌면 성소현이 이모가 어른이 된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하예정은 임씨 일가에 다녀온 이후에 곧장 이모님의 어른이 된 모습을 그려보기로 했다. 정말 언니랑 닮았을지 그녀도 몹시 궁금했으니까!“그러니까 지금 우리 장모님이 소현 씨 이모님이란 말이야?”전태윤은 어이가 없었다.‘이럴 수가! 말도 안 돼!’이렇게 기막힌 일이 그의 아내한테 벌어지다니!심지어 성소현은 한때 그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적극 구애했고 하예정도 그녈 위해 전태윤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내줬다.만약 전태윤이 결혼반지를 낀 모습을 성소현에게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지금도 매일 같이 집착하며 귀찮게 굴 것이다.성소현을 따끔하게 혼내주려 했는데 뜻밖에도 그녀와 하예정이 절친한 사이가 돼버려 이젠 더는 어쩔 수 없었다.진심으로 하예정을 챙겨주는 사람이니 전태윤도 더욱 각별히 대할 수밖에 없다.하씨 일가의 인간쓰레기들은 요즘 들어 매우 잠잠해졌다. 더는 하예정을 찾아와 귀찮게 굴지 않았다. 만약 그랬더라면 전태윤과 성소현, 두 사람 모두 선뜻 도와 나섰을 것이다.하씨 일가의 사람들은 하예정의 배후에 있는 조력자가 전태윤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다들 성소현인 줄 알고 그녀의 신분에 지레 겁을 먹어 잠시 잠잠해졌을 뿐이다.“나도 확신할 순 없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지 15년이 다 돼가는데 만약 정말 그렇다면...”하예정은 성소현의 엄마가 수십 년 동안 여동생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진작 사망했다는 걸 알게 되면 타격이 얼마나 클지 내심 걱정됐다.그리고 본인 엄마도 떠올리니 너무 가슴 아팠다.“설마 진짜겠어요?”하예정은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소현 씨 어머님은 줄곧 여동생을 찾았어요. 우리 엄마는 살아계실 때 가족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아마도 가족을 찾고 싶어 했을 거예요. 전에 우리한테 말했거든요. 대체 친부모한테 버림받은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납치당해 팔려간 것인지 말이에요!”전태윤이 침묵했다.만약 돌
지금은 일단 우빈이를 위해 임씨 일가에 찾아가 죄를 물어야 한다.정체를 숨긴 일은 아직 좀 더 시간을 끌 수 있다. 그는 이제 곧 A시에 가서 예준성과 모연정의 결혼식에 참석한다.하루라도 미룰 수만 있다면 계속 더 미뤄야 한다.다만 성소현의 엄마와 마주치기 전에는 꼭 하예정에게 이실직고해야 한다.부디... 그녀가 너무 흥분하지 말기를.전태윤은 애초에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해 신분을 숨기고 일단 성품을 관찰해보기로 했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그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들이 돈을 넘본 것인지 진짜 그를 알기 위해서인지 구분할 수 없었으니까!어느덧 하예정의 성품과 처사 능력,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독립적인 모습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전태윤은 언제부터인가 그녀에게 끌리기 시작했다.한편 성소현은 하예정과 통화를 마친 후 바로 가정부에게 분부했다.“아줌마, 영양제 좀 준비해주세요.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거로요. 누구 선물해줘야 해요.”보영 아줌마가 물었다.“네, 아가씨. 실례지만 그 아이 몇 살쯤 되나요?”“두 살 좀 넘을 거예요.”“두 살짜리 아기는 별일 없으면 영양제 안 먹는 게 좋아요.”보영 아줌마가 그녀를 일깨워주었다.성소현은 아직 미혼이라 당연히 이 방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여 미리 일깨워주는 것도 가정부의 직책이라고 여겼다.아가씨가 괜히 선물을 잘못 건넸다가 돌아와서 원망을 늘여놓으면 안 되니까.“전혀 먹으면 안 되나요?”그도 그럴 것이 주우빈은 워낙 건강하여 영양제가 딱히 필요해 보이진 않았다.“굳이 먹어야 한다면 칼슘 보충제 종류가 괜찮을 것 같아요. 다만 이 댁엔 없어요.”큰 도련님은 결혼식을 올리긴 했지만 와이프를 너무 사랑하다 보니 아직 신혼생활을 즐기느라 아이를 갖지 않았다. 둘째 도련님과 아가씨도 아직 싱글이다 보니 이 집안엔 영유아용 영양제가 없다.“됐어요, 그럼 아이들 영양제 말고 보양식으로 아무거나 준비해주세요. 예진 언니네 댁으로
이경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전태윤한테 여자가 있었다고?”“이미 결혼했어요. 와이프한테 엄청 잘해주는 것 같아요. 어찌나 아끼고 지켜주는지 오빠도 그 와이프의 정체를 모르더라니까요.”“그래... 그럼 넌 이만 마음 접어야겠다. 처음부터 네 사람이 아니었어. 줄곧 네가 쫓아다녔을 뿐이지.”이경혜는 전태윤이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아쉽게도 그가 성소현에게 전혀 호감이 없었다.그저 소현이가 일방적으로 좋아한 것뿐이었다.이젠 유부남이란 걸 알게 됐으니 마음을 접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엄마, 나 할 얘기 있어요.”성소현은 더는 엄마한테 전태윤의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언급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으니까.수년간 사랑했던 남자가 유부남이란 사실을 갑자기 알게 됐고 그녀는 하마터면 제삼자가 될 뻔했다. 하루아침에 마음을 내려놓으려니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성소현은 최대한 전태윤의 얘기를 피해 가며 마음을 달랬다.“무슨 일인데? 엄마 곧 집 도착해. 집에 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아마 지금 들으면 기뻐하실 거예요. 이모에 관한 새로운 단서가 나타났거든요.”아니나 다를까 이경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진짜야? 새 단서가 나타났어? 그래서 네 이모 지금 어디 있는데?”“내 친구 예정 씨 알죠? 왜 있잖아요, 저번에 실검에 올랐던 ‘불효 손녀’ 말이에요. 내가 예정 씨한테 엄마랑 이모가 어릴 때 찍은 사진을 보내줬는데 아까 전화 와서 조카 우빈이가 우리 이모랑 조금 닮은 것 같대요.”순간 이경혜가 사색이 되었다.지난번 실검 사건으로 꽤 큰 소동이 벌어졌다. 이경혜는 하씨 일가에서 삭제한 사진을 미처 보진 못했지만 딸에게 대략적인 얘기를 전해 들었다.하씨 일가의 두 자매는 부모님을 전부 여의었다.만약 하예정의 조카가 이경혜의 동생을 닮았다면 하예정의 엄마가 이경혜의 동생이란 얘기인데 상대는 이미 15년 전에 사망했다.이경혜는 믿을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수십 년을 찾아 헤맨 여동생이 15년 전에 사망했다는 말인가?그녀는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