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효진이 웃으며 말했다.“정남 씨를 좋아하는 여자가 없다면 정남 씨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할 뻔했어요.”소정남이 잠깐 멈칫하다가 말했다.“저 건강해요!”“겉으로는 건강해 보여요.”소정남은 심효진의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라 입만 뻐금거렸다. 그렇다고 심효진에게 그가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소개팅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상대를 희롱하는 짓이라 소정남은 그냥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 말주변이 좋은 소정남이 심효진 앞에서 말문이 막힐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소정남이 속으로 생각했다.‘파티에서 드러누운 일로 유명해진 여자는 역시 달라. 못하는 얘기가 없어!’...병원.하예진은 전씨 할머니와 숙희 아주머니와 함께 황급히 병원에 도착했다.경찰은 기록을 마친 후 곧장 현장을 떠났고 주서인네 부부와 큰아들은 파출소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주서인은 그제야 큰아들이 큰 사고를 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남동생에게 차마 얘기할 수 없었던 주서인은 몰래 부모님께만 얘기했다. 그런데 큰 외손자가 친손자를 병원까지 실려 갈 정도로 때렸다는 소리를 들은 김은희가 울부짖으며 욕하는 바람에 주형인도 그 사실을 알아버렸다.하예진이 병원에 도착한 후 주형인도 부모님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주서인은 아직 차마 병원에 오질 못했다. 가뜩이나 오늘 호되게 당했는데 지금 상황에 하예정 자매 앞에 나타나면 아마 찢어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다. 더구나 주서인네 부부는 큰아들과 함께 먼저 파출소로 가야 했다.“우빈아.”비틀거리며 병실에 들어온 하예진은 동생의 품에 안겨있는 아들에게 달려갔다.“우빈아.”하예진은 아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들의 얼굴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엄마!”엄마의 얼굴을 본 주우빈은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하예진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요한 형이 날 때렸어요... 엄마, 요한 형이 날 때렸어요.”“우빈아
“주서인 같은 엄마 밑에서 컸으니 잘 커 봤자 얼마나 잘 크겠어.”하예정이 싸늘하게 말했다.“언니, 우리 경찰에 신고했어. 임요한을 감옥에 보낼 순 없지만 주서인 부부한테 배상하라고 할 순 있어. 누가 와서 사정하고 사과하든 절대 받아주지 마. 꼭 배상하라고 해.”하예진도 마음을 굳게 먹었다.“배상 말고 다른 대가를 치르게 할 순 없어? 우빈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는데... 예정아, 아까 그 집에서 요한이 손발 확 부러뜨리지 그랬어.”“이진 씨가 걔 아빠한테 요한이 혼내라고 했더니 얼굴이 퉁퉁 부을 정도로 때렸대. 그리고 벨트까지 풀어서 요한이를 때렸다던데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상처가 가득 났다고 하더라고. 이진 씨가 나오기 전에 그 집을 다 때려 부쉈다고 했어.”하예진이 이를 꽉 깨물었다.“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악마 같은 놈.”하예정도 마음 같아선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성의 끈을 잡고 있어 직접 임요한을 혼내진 않았고 아빠인 임수찬에게 훈육을 맡겼다.많은 일을 겪으면서 하예정도 전태윤의 일 처리 방식을 점차 알게 되었다. 그는 아무리 화가 나도 법을 어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전태윤의 침착한 처리 방식이 옳았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머지 인생을 망가뜨리진 않으니까.이번에 전태윤과 그의 동생들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하예정은 이런 남자라면 남은 인생을 그에게 맡겨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언니의 일을 해결한 다음에 전태윤과 마음을 터놓고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해야겠다.“우빈아.”“우빈아.”주형인이 부모님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그들은 의사와 간호사에게 물어 겨우 주우빈의 병실을 찾아냈다.전태윤의 눈짓 한 번에 그의 남동생들은 인간 울타리를 만들어 주형인네 세 식구가 들어오지 못하게 병실 문 앞을 막아섰다.“전태윤, 당장 비켜! 내 아들 봐야겠어! 우빈이는 내 아들이야!”주형인은 아들을 데려갈 생각만 했지, 다치게 할 생각은 전혀
전태윤은 잠깐 침묵하다가 남동생들에게 물러서라고 했다. 그들이 자리를 비켜주자 주형인은 부모님과 함께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주우빈을 안고 있던 하예진은 얼음을 떼고 주형인에게 주우빈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한참 동안 얼음찜질했는데도 부기가 여전히 빠지지 않았다.아이의 피부가 가뜩이나 여린데다가 임요한이 세게 때린 바람에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아들의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고 평소 맑고 반짝이던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평소 아들을 별로 챙기지 않던 주형인마저도 마음 아파하며 임요한을 인간도 아니라고 욕했다.“요한이 어떻게 이런 어린애한테... 내가 정말 너무 오냐오냐했어.”김은희가 주우빈의 얼굴을 어루만지려 하자 화들짝 놀란 주우빈은 고개를 홱 돌리며 엄마의 품에 머리를 숨겼고 겁에 질린 채 두 손으로 엄마의 옷을 꽉 잡았다.“엄마, 엄마.”하예진은 시어머니의 손을 밀쳐내며 싸늘하게 말했다.“우빈이 당신들 무서워하니까 만지지 말아요.”“임요한 이 빌어먹을 놈, 내가 가서 제대로 혼내줘야겠어. 내 손자를 때리라고 지금까지 키운 거 아니야!”주경진은 주우빈을 걱정한 나머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주경진네 부부는 수년간 딸의 세 아이를 돌봐줬다. 아들네 식구가 시 중심에서 살고 또 아들과 함께 지내기를 원치 않아 한다고 가까이 사는 딸이 주경진네 부부를 자기 집으로 모셔갔다. 듣기 좋아 모셔간 거지 사실은 자기 애들을 봐달라는 뜻이었다.주서인의 시부모는 그녀의 아이든 시동생네 아이든 절대 봐주지 않았다. 아이는 부부의 자식이기 때문에 부부가 알아서 키워야 한다고 했다.주경진네 부부는 세 외손주를 최선을 다해 돌봐준 것도 모자라 평소 아들이 주는 용돈도 딸네 가족에게 거의 다 쓰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 결과 힘들게 키운 외손자가 친손자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주경진은 자신이 이리도 배은망덕한 외손자를 키웠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주우빈을 달랜 후 하예진이 시댁 식구들에게 싸늘하게 물었다.“우빈이 이렇게 된 걸 보니까 인제 만족스
그에게 안기고 싶지 않았던 주우빈은 하예진의 옷자락만 꽉 잡고 있었다. 하예진도 주우빈을 끌어안은 채 주형인의 손을 밀쳐냈다.“주형인, 당신 아들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지금 당장 부모님을 모시고 나가! 당신이 우빈이 편을 들어줄 기대 따위 하지 않으니까 여기서 우빈이 놀라게 하지 마. 우빈이 이미 충분히 놀랐다고...”하예진은 또다시 감정이 북받쳐 올라 울먹였고 주형인은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김은희가 뭔가 얘기하려 하자 옆에 있던 남편이 말렸다. 말이 아니게 어두운 남편의 얼굴을 본 김은희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후 주형인이 입을 열었다.“그럼 우리 먼저 갈게. 당신이 우빈이 잘 챙기고 있어. 우빈이 양육권을 정하기 전에 절대 다시는 우빈이 데려가지 않을 거야. 이건 내가 약속할게.”주우빈을 데려와봤자 돌볼 시간이 없었고 주우빈을 부모님께 맡기는 건 더욱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만약 부모님이 그와 함께 살면 모를까... 하지만 서현주는 절대 시부모와 한집에서 살 수 없다고 했다.주형인과 하예진은 결국 오늘 이혼 조건에 대한 결론을 짓지 못했다. 하예진이 이혼 소송을 하더라도 그 기간에 계속 합의는 할 수 있다. 더는 질질 끌고 싶지 않았던 그는 하루라도 빨리 그녀와 이혼하고 싶었다.주형인은 부모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김은희가 말했다.“형인아, 너 설마 이대로 우빈이 포기하는 건 아니지?”“엄마, 지금 우빈이 너무 놀라서 상태가 불안정해. 우빈이 엄마랑 이모가 어릴 때부터 돌봐줘서 감정이 깊어. 일단 두 사람한테 맡기는 게 좋겠어. 그래야 우빈이 다친 마음도 빨리 회복되지. 잠깐 맡긴다고 내가 우빈이 양육권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야.”주형인이 안전 벨트를 맸다.“엄마, 나랑 예진이 이혼하면 아빠랑 같이 다시 본가로 들어가서 우빈이 돌봐줘. 생활비는 매달 몇십만 원씩 더 줄게. 요한이 이번에 너무했어. 어떻게 우빈이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을 수가 있어? 우빈이를 누나 집에 둬서는 안 되겠어.”주경진이 말했다
“누나 지금...”주형인이 말을 끝내기 전에 조수석에 타고 있던 주경진이 손을 내밀어 그의 휴대 전화를 빼앗았다.“형인아, 넌 운전에 집중해.”주경진은 어두운 목소리로 아들에게 한마디 하고는 휴대 전화를 들고 딸에게 말했다.“하예정한테 배상을 요구했다간 내가 절대 가만 안 있어.”아빠의 목소리에 주서인은 억울한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아빠, 수찬 씨가 요한이를 때렸어.”“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아빠가 혼 좀 내는 게 뭐? 너희들도 어릴 때 말을 안 들으면 나한테 많이 맞았어.”주서인이 잠깐 멈칫하다가 말했다.“아빠 제정신이야? 지금 하예진네 자매 편을 드는 거야? 아빠 딸은 나야. 내가 친딸이라고! 요한이가 아무리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애야. 잘못을 저질러봤자 얼마나 큰 잘못이겠어. 얘가 뭐 사람을 죽였어, 도둑질이라도 했어? 그냥 우빈이 몇 대 때린 것뿐이잖아. 요한이가 그러는데 정한이가 우빈이한테 맞아서 우는 걸 보고 형으로서 동생을 대신해 나서준 거라고 했어. 고작 발로 몇 대 걷어차고 뺨을 때렸을 뿐인데 병원에 실려 갔다고? 별일도 아닌 거 가지고 일부러 떠들썩하게 구는 게 틀림없어.”주서인은 파출소에서 본 자신의 집 CCTV를 인정하지 않았다. 화면 속에는 주우빈이 그녀의 큰아들에게 따귀를 연속 몇 대 맞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있었다. 양쪽 볼을 다 합하면 아마 십여 대는 될 것이다.경찰들은 임요한의 퉁퉁 부은 얼굴과 벨트에 맞은 상처까지 봤지만 못 본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임요한만 못된 애라면서 만약 하예정이 오지 않았더라면 주우빈이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애들은 사람을 세게 때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라 때릴 때 힘을 조절하지 못한다. 아무튼 주서인은 주우빈이 죽지 않았기에 자기 아들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정한이 먼저 주우빈을 때려서 주우빈이 받아친 바람에 정한이 울며 주우빈을 때리라고 하는 장면이 CCTV에 찍혔어도 자기 자식이니 잘못이 있어도 없다고 감싸야 했다. 남의 자식이 죽든 말
“네 집을 부순 게 뭐? 나 대신 분풀이해준 예정이가 오히려 고마워. 주서인, 너 예정이한테 배상을 요구한다면 평생 친정에 돌아올 생각 하지 말고 날 아빠라고 부르지도 마. 그리고 이 십여 년 동안 나랑 네 엄마가 네 집안에 쓴 돈도 전부 다 갚아. 다 적어놓고 있어. 네 동생이 출근해서부터 매달 우리한테 생활비를 줬는데 거의 다 네 집안 생활비에 썼어. 형인이 그렇게까지 해줬는데 친아들이 네 아들한테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갔어.”“예정이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크게 벌인다고 생각하지 마. 내가 다 물어봤는데 우빈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응급상황이었대. 의사 선생님들마저 가해자가 너무했다고 할 정도였고 우빈이 어느 정도로 다쳤는지 나도 다 봤어. 우린 지금 병원에서 나와서 너희 집으로 가는 길이야. 가서 짐 챙기고 그 집 나올 거야. 앞으로 나랑 네 엄마는 본가에서 지낼 테니까 네 자식은 너의 시부모한테 봐달라고 해. 시부모가 싫다고 하면 네가 혼자 봐. 걔네들은 네가 낳은 애들이지, 내가 낳은 게 아니야. 우린 너의 부모로서 널 가르치고 키우는 건 우리 의무지만 외손주까지 키워야 하는 의무는 없어.”주서인이 말했다.“아빠, 하예정이 무슨 마술이라도 부렸어? 왜 갑자기 걔 편드는 건데? 엄마랑 본가로 들어가겠다고? 엄마 아빠 둘이서만 지내면 내가 마음이 안 놓여. 요한이도 많이 맞았어. 아빠도 방금 얘기했잖아, 요한이는 직접 키운 외손자라고. 그런데 마음 아프지도 않아?”그러자 주경진이 싸늘하게 말했다.“걔는 맞아도 싸. 아빠가 아들 교육하려고 때린 건데 외할아버지인 내가 왜 끼어들겠어? 요한이 내 외손자인 건 맞지만 우빈이는 내 친손자야. 외손자랑 친손자가 비교된다고 생각해? 요한이 성이 뭐고 우빈이 성이 뭐야? 우빈이는 나랑 같은 주씨고 우리 주씨 가문의 손자야. 평소 요한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못 참아. 우빈이가 그 지경으로 맞은 걸 보니까 친할아버지로서 절대 참을 수 없어.”어릴 때부터 직접 키운 외손자에게 손을 대진 않을 거지
주경진이 어쩌다가 손자의 편에 섰지만 하예정 일행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얼음찜질을 한참 동안 해주니 주우빈 얼굴의 부기도 조금 내렸다. 주우빈은 줄곧 울며 집에 가겠다고 떼를 썼다.하예정이 의사에게 퇴원해도 되냐고 묻자 의사가 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이가 심하게 놀란 탓에 열이 날 수도 있어서 조심하라고 했다.해 질 무렵, 그들은 하예진 모자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주우빈 걱정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하예정은 전태윤을 끌고 베란다 밖으로 나와 그에게 말했다.“오늘 저녁은 아무래도 언니 집에서 우빈이랑 같이 있어야겠어요. 그래도 되죠?”전태윤은 내심 아쉬웠다. 지금 하예정과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하루 24시간 붙어있어도 모자랐지만 주우빈이 저런 일을 당했으니 이모로서 곁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이해되었다.“태윤 씨?”전태윤이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그윽하게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안 돼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우빈이 열이 날 수도 있대요. 언니 혼자서 돌보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요.”그때 전태윤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마치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 같았다. 하예정은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느껴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우빈이 챙기면서 네 몸도 잘 챙겨, 알았지?”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싸늘함 대신 따뜻함이 묻어있었다.“그럴게요.”“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 혼자 해결하려고만 하지 말고.”전태윤은 지금까지도 그녀가 하지철 등 건달들을 상대할 때 혼자서 용맹하게 전부 쓰러뜨린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 미인을 멋있게 구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말이다.하예정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거실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시동생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자 냉큼 손을 뻗어 전태윤의 건장한 허리를 끌어안고는 탄탄한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아내가 먼저 안겼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전태윤은
전태윤은 그녀를 살며시 밀어내며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쳤다. 하예정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매번 그와 두 눈을 마주칠 때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반해 스킨십을 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가 계속 지금처럼 다정하다면 아마 한 주일도 안 되어 진도가 쭉쭉 나갈 것이다. 그것도 매일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하예정이 온갖 야릇한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전태윤의 중저음이 귓가에 들려왔다.“우리 언제 계약서를 썼어?”하예정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니 전태윤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믿지 못하는 듯싶었다.“그때 태윤 씨가 작성한 계약서 있잖아요. 나한테 반년 기한이라면서 사인하라고 했던 거요.”전태윤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계약서 내용 어디 한번 외워봐 봐.”하예정은 입만 뻐금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기한이 반년이고 서로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다른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예정아, 너 아무래도 요즘 언니 일 때문에 신경 많이 써서 우리가 계약서를 썼다고 착각했나 본데 우리 계약서 같은 거 쓴 적 없어. 만약 진짜로 썼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따가 집에 가서 내 방문을 활짝 열 테니까 마음껏 뒤져봐. 네가 말한 계약서를 찾아낸다면 우리가 진짜 썼다고 믿을게.”하예정은 말문이 막혀버렸다.‘분명 계약서에 사인했었는데. 지금... 없었던 거로 하자는 뜻이야?’전태윤은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난 동생들이랑 밥 먹으러 가야겠다. 숙희 아주머니도 여기 남아서 도우라고 할게.”하예정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늘 오만하고 도도한 전태윤이 계약서를 썼었다는 사실을 발뺌한다는 게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그의 말에 하예정은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경악한 그녀의 모습에 전태윤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이만 갈게.”“그래요. 동생들한테 맛있는 거 사줘요. 내가 돈 줄게
그 뒤로 이윤미가 그녀의 오빠들과 내연녀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차마 몇 명의 형수님들이 속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형수님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 후로 이윤미의 오빠들과 형수님들이 말다툼하기 시작했다.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고현은 이윤미가 잘했다고 생각했다.바람을 피운 사람이 자기 오빠라고 감싸면서 오빠들을 도와 형수님들을 속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면 자기 남편이 바람피운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알지만, 본인만 모른다면 얼마나 괴롭겠는가!이때 전호영이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군호 씨가 그렇게 멍청하지 않을걸요. 이 대표님께서 돌아오신다면 정군호 씨는 틀림없이 나가서 바람피우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이 대표님을 도와야 한다고 봐요. 못 봤으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현장을 목격했잖아요. 이 대표님을 만나면 알려줘야 해요. 어쨌든 우리 형수님의 이모시기 때문에 우리 형수님의 친척이나 다름없죠. 안 그래요?”고현은 전호영을 꾸지람했다.“호영 씨도 정말 나쁘네요. 이씨 가문에서 난리가 났으면 좋겠죠? 그런데 저도 호영 씨를 지지할 거에요. 이러고 보니 저도 좋은 사람은 아닌가 봐요.”“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죠. 정군호 씨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보세요. 정군호 씨가 잘못한 것을 우리가 바로잡아준 거죠. 이 대표님을 위한 것이지 모함하거나 억울하게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저처럼 일편단심인 남자는 정군호 씨의 이런 행동이 너무 부끄러워요. 만약 집안의 아내가 싫으면 이혼할 것이지... 이혼하기는 싫고 또 밖에서 예쁜 여자들이랑 놀고는 싶고... 두 마리 토끼는 다 잡을 수 없는 법이죠. 하늘 아래 어떻게 그런 좋은 일이 있겠어요?”전호영은 정군호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영상을 찍었다. 그리고 하루 호텔도 카메라가 있었기에 정군호가 내연녀를 껴안고 호텔로 들어가는 장면이 꼭 찍혔을 것이다.전호영이 정군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니었다.“이 대표님이 그토록 기가 센데
“저는 배려심이 깊은 신사에요.”고현은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면서 전호영의 신사다운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하지만 전호영이 고현의 손을 잡고 함께 호텔로 들어가려고 하자 고현은 거절했다.전호영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시종 전호영과 연인처럼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고현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전호영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앞으로나란히 몇 걸음 걷더니 고현이 갑자기 멈추었다.“왜 그러세요?”전호영이 물었다.‘설마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만났나?’전호영은 앞을 보았지만,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보지 못했다.“정군호 씨예요.”고현은 낮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한 뒤 전호영을 잡아당겨 차 뒤로 숨었다. 그녀의 경호원 팀은 고현이 위험한 줄로 알고 본능적으로 최대한 빨리 고현의 앞으로 돌진하며 위험을 막으려고 했다.“얼른 숨으세요. 저를 막지 마시고!”고현은 나지막이 경호원 팀에게 말했다.고현이 누군가의 가십거리를 보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고현은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옷을 입은 늙은 남자를 가리켰다. 그 늙은 남자는 천가 같은 얼굴과 매력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그 여성의 곁을 지나가는 남자라면 모두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몇 번 더 쳐다보았다.“저 남자는 이윤미의 친아버지이자 이 대표님의 남편인 정군호 씨예요.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저도 잘 몰라요. 놀랍게도 밖에서 내연녀를 만나고 있었네요. 만약 이 대표님께 들킨다면 정말 정군호 씨를 죽여놓을지도 몰라요.”이은화의 남편이라는 말을 들은 전호영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정군호와 내연녀의 동영상을 찍었다.그리고 말했다.“이 대표님은 우리 큰형의 결혼식에 가신 뒤로 계속 관성에 남아계시거든요. 아마도 정군호 씨는 이 대표님이 없는 틈을 타 바람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네요”고현도 말을 이었다.“이 대표님께서 남편을 너무 엄격하게 단속하니까 정군호 씨도 아마 진짜로 바람 피우지는 못할 거에요. 기껏해야 지
고현은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저는 어른이 된 후로 여행을 갈 시간이 없었어요. 바빠서 미치겠는데 언제 시간을 내서 놀러 가겠어요? 하지만 출장 다니면서 많은 곳은 가봤어요.”“신혼여행은 어디 가고 싶어요?”전호영이 그녀에게 물었다.고현이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말을 이었다.“저는 물이 맑고 공기가 좋은 산을 좋아해요. 조용하거든요.”“제가 잘 연구해서 산 좋고 물이 맑은 조용한 곳을 찾아볼게요.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우리 둘만의 세상을 잘살아 봐야죠.”알고 보니 고현은 산과 물이 있는 아름다운 곳을 좋아했다.전씨 가문의 서원 리조트가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이 있는 곳이고 평소에도 매우 조용한 곳이었다.“서원 리조트를 좋아해요?”“좋아하죠.그럼 서원 리조트에서 신혼여행을 즐기려고요?”전호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고요. 그곳은 우리 미래의 집이고 신혼여행은 당연히 딴 곳으로 가야죠.”이때 고현이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지금 시집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벌써 신혼여행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네요. 호영 씨와 함께하면 쉽게 호영 씨 의도대로 따라간단 말이죠. 저의 총명함과 자제력 모두 호영 씨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니까요.”“현이 씨가 아직도 이 일을 고민하고 있다니. 제가 아직도 부족한가요?”전호영은 자신이 고현을 오랫동안 쫓아다녔다고 느꼈다. 그는 모든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고현을 대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시집을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하여 전호영은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어떤 방면에서 잘하지 못했는지 알고 싶었다.“아니에요. 충분히 잘하셨어요. 우리 데이트도 별로 안 하고 평소에도 일하느라 바빴던 것 같아요. 아직 결혼까지 할 정도로 감정이 깊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말처럼 하루 못 보면 일 년을 못 본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는 몰라요. 그런 감정을 못 느낀다는 건 제가 호영 씨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아요. 어
경호원 팀은 그들의 전 대표님이 전호영에게 떠밀려 마이바흐 차에 들어가는 모습을 버젓이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차는 곧 고씨 그룹을 빠져나왔다.고빈이 중얼거렸다.“호영 씨는 정말 내가 본 형부 중 가장 오만방자한 형부였어. 처남인 나에게 조금도 아부하지 않고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니.”고빈은 중얼중얼하긴 했지만,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만약 고빈이 정말 친형이 있다면 그는 전호영이 그의 친형을 해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따라갔을 것이다.하지만 그의 친형은 사실 여자였다. 그의 누나 고현은 시집가야 하는 여자였다. 전호영은 그의 누나와 어울리는 남자였기 때문에, 또 전호영이 고빈의 부모님께 고빈이 너무 방해한다고 고자질하면 안 되었기에 고빈은 더는 따라가지 않았다.지금 고씨 가문에서 전호영은 고현 남매보다 체면이 훨씬 섰다.“고빈 씨가 안 따라왔죠?”전호영은 차를 몰면서 조수석에 앉은 고현에게 물었다.고현은 돌아볼 필요도 없이 이내 말을 이었다.“고빈이는 입만 살아서 그렇지 정말 따라오지는 않을 거예요. 호영 씨가 우리 부모님 앞에서 고빈의 고자질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죠. 고빈은 저보다 10분 먼저 태어났지만 지금 정해진 여자친구가 없거든요.”“저도 호영 씨랑 짝을 지으니 저희 부모님의 눈길도 자연스레 고빈의 몸으로 옮겨졌어요. 호영 씨가 제 동생의 고자질하면 저희 부모님은 그를 욕하다가 결국 결혼 재촉 문제로 돌아가거든요. 제 동생은 결혼 재촉을 엄청 무서워하거든요.”고빈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고정된 여자친구를 찾지 못한 일에 관해 고현도 마음이 조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녀에게는 전호영이 있었지만, 고빈의 짝은 아직 어디에 있는지...예전에는 고현은 고빈과 이윤미를 맞세워주려고 했지만, 고빈은 이윤미가 재미없다고 느꼈고 이윤미 또한 고빈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이윤미 곁에 방윤림이 있었다.전호영은 빙그레 웃었다.“저도 항상 고빈 씨의 고자질하고 싶지 않아요.
전호영은 꽃다발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갔다.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직원이 밖으로 나가면서 전호영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는 보습을 보았지만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만약 전호영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상한 일로 여길 것이다.“전 대표님.”다들 마음속으로 아무리 전호영을 비웃을지라도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했다.전호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 그는 고씨네 남매에게 다가갔다.“현이 씨, 퇴근하시죠. 제가 데리러 왔어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자, 받아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 앞으로 내밀었다.고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말했어요. 제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매번 올 때마다 꽃다발을 사 오지 마세요. 제 사무실이 곧 꽃집이 될 것 같으니까요.”전호영은 심지어 하루에 꽃다발을 여러 번 선물한 적도 있었다.고현은 전호영이 보낸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전호영은 보복으로 그녀에게 더 많은 꽃을 보냈다.고현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곧 먹혀 죽을 것만 같았다.“꽃병을 더 사서 사무실로 보내드릴게요.”“저를 꽃병이라고 비아냥거리시려는 거에요? 제 사무실에는 꽃병이 가득 놓여 있거든요.”전호영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잘못했네요. 다음에는 이런 꽃들을 보내지 않고 다루기 쉬운 꽃들로 보낼게요. 현이 씨 사무실에 있는 그 꽃병들을 집으로 몇 개 가져가면 사무실이 꽃병이 줄어들 거 아니에요.”옆에 서 있던 고빈이 말을 이었다.“우리 형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무척 좋아해요. 저에게 주세요. 제가 이 꽃들을 저의 여성 지인들이게 줄 테니까요. 돈도 절약할 수 있으니 너무 좋을 것 같아요.”“고빈 씨는 아직 퇴근 안 하셨군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의 품에 안겨주며 자연스럽게 고현의 손을 잡았다.고빈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설마 이제야 저를 보신 건 아니죠? 혹시 시력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죠? 잘 고려해 보고 짝을 찾으셔야지 아니면 시각장애인을 고를 수도 있어요.”“그건 제 눈에 현이 씨만
장 대표가 전호영의 차를 얼핏 보더니 말을 이었다.“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의 차였군요. 셋째 도련님은 정말 매일 고씨 그룹에 가서 고 대표님을 귀찮게 하는군요. 저는 그저 헛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사실이에요. 고 대표님은 우리 장성에서 가장 젊고 우수한 대기업 대표님이죠. 그의 잘생긴 외모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로잡았는지 몰라요. 고 대표님은 강성의 모든 젊은 여자들의 이상형일걸요. 여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전호영 도련님이 해내게 될 줄은 몰랐네요.”“하지만 외모로 보면 전호영 도련님과 고현 대표님은 참 잘 어울려요. 두 사람 중 한 명이 여자라면 정말 천생연분이죠. 하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 모두 남자네요. 너무 아쉬워요.”두 사람의 만남은 수많은 얼마나 많은 여자의 부러움을 자아냈는지 모른다.강성의 명문 아가씨들도 전호영이라는 남자에게 진 것이 자못 못마땅했다.“두 분이 이미 서로 남녀 관계를 확정하셨나요?”장 대표는 계속해서 물었다.“제가 듣기로는 전호영 도련님이 아직도 고현 대표님께 구애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의 일방적인 짝사랑 아닐까요? 사실 고현 대표님이 정상적인 남자인데 전호영 도련님이 게이일 수도 있죠.”“저도 잘 몰라요. 진실한 사실이 어떠할지 누가 알겠어요. 고 대표님은 냉담한 분으로서 수많은 대표님과 접촉하시지만 진정으로 친한 친구는 얼마 없어요. 고 대표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없거든요.”“하지만 고현 대표님께서 전호영 도련님을 점점 더 포용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이 고 대표님을 위해 여성 옷을 입으며 여자로 분장한 적이 있거든요. 그 두 사람 중에서 아마 전호영 도련님이 더 비정상인 것 같아요. 고 대표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전호영 도련님이 여성 옷을 입었을 거라고 봐요.”전호영은 여성 옷차림으로 고씨 그룹에 왔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그 현장을 목격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전호영을 위해 비밀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소문을 퍼뜨리고 그렇게 일파
멀리 장성에 있는 전호영도 전이진이 보낸 카카오 스토리를 보았다. 그는 여운초와 전이진이 혼인 신고서를 받은 모습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다.그는 결국 다시 자리를 떠나 호텔 사무실을 나오더니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향했다.이때 고현이 사업에 관한 얘기를 방금 마쳤을 때였다.그녀는 일어나서 손을 뻗어 고객과 악수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장 대표님, 수고하셨어요.”장 대표도 이내 대답했다.“즐거운 협력이 되길 바랍니다.”고현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벌써 식사 시간이 되었네요. 우리 함께 식사하는 건 어때요? 제가 대접해 드릴게요.”“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제가 이번에도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네요. 곧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거든요. 다음에요. 다음에 제가 고 대표님께 음식 대접해 드릴게요.”고현은 이해하며 말했다.“장 대표님께서 오신다면 당연히 제가 음식 대접해 드려야죠. 다음에 오시면 꼭 저에게 대접할 기회를 주셔야 해요.”“당연하죠. 약속드릴게요.”장 대표는 웃으며 대답했다.고현이 고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쳐다보자 고빈은 눈치껏 일어나사 미리 준비한 특산품을 장 대표에게 가져다주었다.“장 대표님, 이것은 우리가 장 대표님을 위해 준비한 강성의 특산품이에요. 귀한 물건은 아니고 우리 강성의 특색이에요. 한 번 맛보세요.”장 대표는 사양하다가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고 대표님, 고마워요.”고현과 사업해 본 사람들은 비록 고씨 그룹의 오더를 따내기가 쉽지 않지만, 고현의 인품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했다.고현은 사람이 엄숙하고 차갑지만, 그녀와 사업을 해본 사람들 모두 그녀를 칭찬하곤 했다.하지만 이렇게 좋은 청년 인재가 동성애자라니... 아깝기만 했다.고현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많은 대표가 아마 정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고현이 게이가 아니라면 그들은 모두 자신의 딸과 고현을 맞세워주고 싶어 했다.고현 남매와 고위층 몇 명 인사들이 함께 장 대표를 고씨 그룹 앞까지 배웅하고 장 대표 일행을 미리 준비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엄마가 관성 호텔에 예약해 놓았어. 가서 축하할 겸 밥 먹자. 그리고 모두한테도 관성 호텔에 오라고 전화해 놨어. 할머니께서도 너희 두 사람이 혼인 신고한 일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운초야, 내가 방금 네 고모도 초대했어. 너와 이진이 결혼에 관해 상의하려고. 아직 설이 몇 달 남았는데 그 전에 결혼식 좀 올리자.”명해은이 무척 급했던 모양이다.전이진과 여운초가 혼인 신고하자마자 바로 결혼에 관한 일을 상의하려고 했다.여운초의 새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아직 감옥에 있는데다 여운초가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 명해은은 혼례 문제에 관해서 여준희와 상의하려 했다.하지만 추미자는 결국 여운초의 친어머니였기에 명해은은 여운초의 뜻을 물었다.“운초야, 네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되지 않을까?”명해은은 추미자한테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기에 그냥 결혼 사실을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여운초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이진 씨와 함께 감옥으로 만나러 가서 말할게요. 저와 이진 씨 결혼에 대한 모든 일은 저의 작은 고모와 상의하면 돼요. 여씨 가문에 사람들이 수많지만,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건 제 작은고모뿐이거든요.”여천우도 여운초와 사이가 가까웠지만, 아직 어리기에 이런 일에 관해 잘 모를 것이다.명해은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래. 알았어. 네 작은고모도 너희들이 혼인 신고한 사실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오후에 오신다고 하셨어.”여운초 전이진이 약혼한 뒤로 전씨 가문은 여운초의 배후에 서 있게 되었고 눈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준희는 이 가엽고 운이 좋은 조카를 전이진에 맡기게 되니 매우 안심했다.여준희도 그녀의 집안에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친정집에 가는 횟수가 예전보다 줄었다.여운초 남매는 서로 자주 연락했다.여운초는 작은고모를 어머니로 여기고 있었다.그녀는 친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모성애를 여준희에게서 느꼈다.“언제 면회를 하러 가려고?”“오후에 가려고요. 감옥에 가서 보고
전현민도 벙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이건 세상에 둘도 없는 경사야. 우리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이진아, 이미 이르지 않으니 어서 운초랑 들어가 절차부터 밟아. 직원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간다.”부모님의 재촉을 받은 전이진은 여운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손으로부터 가족관계등록부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서 구청 안으로 걸어갔다.명해은 부부는 돌아가지 않고 밖에 서서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전현민은 아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이러고 있으니 32년 전에 우리 둘이 이곳에 와서 결혼 증명서를 받던 날이 생각나네. 마치 어제 발생한 일과 같은데, 벌써 우리 큰아들이 이곳에 오다니... 세월이 참 빠르긴 빨라. 우리도 늙을 때가 되긴 됐나 보네.”그는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난 당신과 백년해로하겠다고 약속했었지.”명해은도 감격해서 말했다.“그러게요,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딱 맞아요. 난 아직도 자신이 18살인가 하는데 우리 큰아들이 벌써 서른이네요. 우린 정말 늙었나 봐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네요.”“당신은 조금도 안 늙었어. 내 눈에는 당신이 관음보살과 같이 해마다 18살이야.”명해은은 몸 관리를 잘해서 전이진과 함께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남매로 착각할 정도였다.전현민도 몸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젊은 시절에 전씨 가문의 사업에 몰두했기에 심신이 많이 상해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다.은퇴한 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 염색은 했었지만, 그래도 아내와 같이 서면 아내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였다. 사실, 두 내외는 불과 한 살 차였다. 명해은은 남편의 칭찬에 웃음보를 터뜨렸다.“나도 해마다 18살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네요. 내가 아무리 몸 관리를 잘한다 해도 늙기 마련인걸요.”“내가 당신과 함께 늙어 갈 테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보다 훨씬 늙어 보여.”명해은은 웃으면서 말했다.“전 두려울 것 없어요.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하늘이 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