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진과 김은희가 딸을 도와주려고 하면 할머니는 가차 없이 그들을 걷어찼다.주씨 가문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곧 팔순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가 이토록 용맹하다니.할머니의 도움 덕에 하예진은 주서인과 마음껏 치고받았다. 주서인은 평소 입만 모질뿐 아예 하예진의 상대가 안 되었다. 게다가 하예진이 체구도 있어 주서인을 깔고 앉으면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하예진이 손을 멈췄을 때 주서인의 꼴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형인아, 이런 천한 년이랑 살아서 뭐 해. 당장 이혼해, 당장. 이 집은 네 것이니까 맨몸으로 쫓아내!”주서인은 지금까지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 앞에서 반격도 못 하고 얻어맞기만 하다니.헝클어진 머리에 얼굴이 시퍼렇고 코가 부은 하예진도 온몸이 쑤셨다. 그녀는 주서인을 힘껏 짓누르며 몸을 일으켰다.“서인아.”주경진과 김은희는 재빨리 달려가 딸을 부축했다. 잔뜩 얻어맞은 딸의 모습에 두 사람은 마음이 아팠다.그때 할머니가 숙희 아주머니에게 분부했다.“숙희야, 이웃들한테 저 사람들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얘기해줘. 우리가 세력을 믿고 남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겠어. 지금 열세에 처한 건 우리야. 저쪽은 남자 둘에 여자 둘이고 우린 연약한 여자 셋이야. 게다가 난 나이도 많아 지팡이 없인 걷지도 못해. 괴롭히는 쪽은 저쪽이야.”구경하던 사람들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할머니, 방금 할머니가 혼자서 넷을 해결했거든요?’할머니가 연세를 들이밀며 주형인을 협박했던 것처럼 쓰러지기라도 해서 주씨 가문에 책임을 묻는다면 주씨 가문은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숙희 아주머니는 하예정과 함께 며칠 지내면서 하예진네 부부의 일을 다 알고 있었다. 하예진이 불륜 현장을 잡으러 간 그날 밤에도 주우빈을 돌본 건 그녀였다. 하여 숙희 아주머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얘기했다.주형인이 아내를 때렸다는 사실은 아파트 사람들이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주형인이 하예진을 폭행했을 때 하예진이 칼을 들고 주형인을 쫓아다
자유를 얻은 주서인은 이를 갈며 할머니를 노려보았다.‘저 할망구만 아니었으면 예진한테 얻어맞지 않았을 텐데.’할머니는 하예진을 끌고 소파에 앉더니 주서인을 힐끗 째려보았다.“정말 네 덕에 사람의 인성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됐어. 넌 입도 뻥긋하지 마. 안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돼지 새끼랑 싸우는 줄 알아.”주서인은 너무도 화가 나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누나.”주형인이 누나를 말렸다. 아무래도 조금 전 할머니가 한 얘기를 듣지 못한 모양이다.“누나, 저분은 전태윤 씨 할머니야.”머릿속에 전태윤의 차가운 얼굴과 사나운 눈매가 문득 떠오른 주서인은 순간 움찔하더니 기세가 한결 꺾였다.“전씨 할머니...”그때 김은희가 말했다.“이건 우리 형인이랑 예진이 일이에요. 제삼자는 끼어들지 말아요. 알겠어요?”“내가 언제 끼어들었어요? 내가 끼어드는 거 봤어요?”할머니가 되물었다. 할머니는 집안에 들어온 후 발길질 몇 번 한 게 다였다. 할머니의 말에 김은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오히려 과하게 간섭한 건 시어머니인 당신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 딸 말이에요. 시집도 간 여자가 동생네 가정사에 간섭하는 게 말이 돼요? 평소에도 이간질 많이 했죠? 대체 딸을 어떻게 가르친 거예요? 혹시 사돈댁에 복수라도 하려고 저런 딸을 그 집에 시집 보낸 거예요?”김은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우린 우빈이 할머니 할아버지예요. 우린 그냥 우빈이 보고 싶어서 한동안 같이 지내려고 데려온 거라고요. 그런데 예진이는 우리를 유괴범 취급하면서 경찰에 신고까지 했어요.”주경진이 입을 열었다. 하예진이 신고한 후 인근 지구대에서 다녀갔다. 집안싸움인 걸 확인한 경찰은 간단하게 중재한 후 그냥 가버렸다. 경찰은 하예진을 도와 주우빈을 되찾아올 수 없었다.“예진이한테 얘기하지도 않고 데려갔다는 게 말이 돼요? 애가 울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고 그냥 안고 갔잖아요. 그건 대놓고 뺏은 거죠. 유괴범 취급한 것도 체면을 살려준 건 줄 알아요.”주경진은 입을 쩍
하예진은 차가 없었다. 하여 하예정과 통화를 마친 후 동생네 부부는 주우빈을 찾으러 가고 그녀는 주형인과 끝장을 보기로 했다.하지만 그녀 혼자서 주형인네 가족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전씨 할머니와 숙희 아주머니가 온 덕에 그녀는 위기를 넘겼다.주형인은 어젯밤에 작성한 이혼 합의서를 꺼내며 하예진에게 말했다.“예진아, 내가 당신한테 미안한 짓을 한 건 인정해. 당신이 절대로 날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이렇게 된 이상 우리 더는 같이 못 살아. 그러니까 좋게 좋게 끝내자. 이건 내가 작성한 이혼 합의서야. 읽어봐봐, 문제없으면 사인해서 다음 주 월요일에 이혼 신고하러 가자.”하예진은 차가운 얼굴로 이혼 합의서를 훑어보았다. 내용을 확인한 그녀는 너무도 화가 나 주형인을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다.주형인이 쓴 이혼 합의서를 확인한 할머니는 연거푸 심호흡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혔다.‘주씨 가문 사람들 정말 양아치네!’주형인은 하예진의 표정이 굳어진 걸 발견하고 뻔뻔스럽게 말했다.“이 집은 내가 결혼 전에 개인 재산으로 산 거고 명의도 내 명의로만 되어있어. 그러니까 집은 당연히 내 것이고 차도 내가 샀으니까 내 것이야. 당신이 일자리를 찾긴 했지만 아직 수습 기간도 끝나지 않아서 안정적인 수입이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없어. 그러니까 내가 양보해서 우빈이 양육권은 내가 가질게. 당신 앞으로 매달 우빈이 양육비 40만 원씩 보내면 돼.”“우빈이 인제 고작 29개월이라 아직 분유도 먹어야 하고 기저귀도 필요해. 세 살이 되면 어린이집도 가야 하는데 어린이집 학비가 매년 점점 비싸져. 그리고 앞으로 교육비도 엄청 많이 들어. 우빈이 크면 집도 사줘야 하고 장가도 보내야 하는데 전부 다 돈이야. 우빈이 양육권을 내가 가지고 당신한테 매달 양육비 40만 원을 보내라는 건 이미 많이 양보한 거야. 내가 우빈이 친아빠니 어쩌겠어, 양보해야지 뭐. 그리고 내가 평소에 지출이 많아서 적금이 많지 않아. 하지만 적금의 절반인 6백만 원
하예진이 싸늘하게 웃었다.“인테리어 비용을 돌려받으면 당신들이 내쫓지 않아도 알아서 나갈 거예요.”“인테리어 비용은 일전 한 푼도 못 줘!”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바람에 주서인은 얼굴이 더욱 아팠다. 하예진은 얼음찜질이라도 하고 있었지만 주서인은 그저 고통을 참고만 있었다. 두 볼이 어찌나 욱신거리는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엄청 부어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예진! 절대 가만 안 둬!’“법원에서 봅시다!”전씨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주씨 가문 사람들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너무하네. 합의를 못 봤으니 더 얘기할 필요도 없어. 예진아, 당장 가서 이혼 소송하고 법원에서 보기로 해.”그러자 주형인이 하예진을 협박했다.“하예진, 소송하면 당신한테 유리할 것 같아? 당신 동생이랑 이 사람들 당신한테 전혀 도움이 안 돼. 일을 크게 벌였다간 앞으로 우빈이 못 만날 줄 알아.”하예진이 이혼 소송을 걸고 재산을 나눈다면 그는 주우빈을 숨겨 하예진이 평생 주우빈을 만나지 못 하게 할 생각이었다.그녀는 주형인을 차갑게 째려보기만 할 뿐 그의 협박 따위 안중에도 두질 않았다. 이혼 소송해서 재산 분할도 하고 아들의 양육권도 가져올 셈이었다. 그녀의 몫은 무슨 수를 써서든 다 챙길 것이고 절대 주형인과 서현주의 좋은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다.하예진과 주형인이 합의를 못 본 그 시각, 하예정은 전태윤, 그리고 그의 형제들과 함께 임씨 저택에 도착했다.임수찬이 주우빈을 데려갔으니 주씨 저택이 아니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갔을 거라고 하예정은 생각했다.임씨 저택은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안팎으로 화려한 인테리어가 마을에서 특히 더 눈에 띄었다.임수찬은 주우빈을 금방 데려왔기 때문에 하예진네 자매가 주우빈이 이곳에 있는 걸 알더라도 처가댁에서 하예진네 자매를 막고 있어 바로 데리러 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여 그는 주우빈을 데리고 온 후 작은아들과 놀게 했고 와이프가 집에 없는 틈에 방에서 게임을 즐겼다.갑자기 안겨 간 주우빈은 오는 길 내내 울음을
하예정은 잽싸게 달려가 임요한의 손에서 주우빈을 당겨오고는 한 손으로 임요한의 뺨을 때렸다.임요한은 10살 정도의 남자아이였는데 키가 어찌나 큰지 열네댓 살 되는 청소년 같았다. 갑자기 하예정에게 맞았는데도 임요한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불같이 화를 내며 미친 듯이 하예정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하예정을 건드리기도 전에 두 발이 공중에 붕 떴다.무슨 상황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얼굴은 이미 벽에 닿아 있었고 누군가 두 손을 뒤로 꽉 잡고 그를 누르고 있었다. 임요한은 벗어나고 싶었지만 상대의 힘이 너무 강해 꼼짝달싹도 못 했다. 꽉 잡힌 두 손에 고통이 점점 밀려왔다.“이거 놔!”임요한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이거 놓고 나랑 일대일로 붙어!”꼼짝달싹 못 하는 동생을 본 임윤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생을 도와주러 가려 했지만 누군가 막아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샌가 집안에 훤칠한 체구의 남자들이 몇몇 들어와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훈남이었다.임윤아는 고작 12살밖에 안 되었지만 남자 보는 눈은 있었다. 평소 친구들과 어느 남자 연예인이 잘생겼는지 자주 토론하곤 했었다. 임윤아는 눈앞의 남자들을 보며 넋을 놓았다.‘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인가? 너무 잘생겼잖아!’“당... 당신들은 누구야!”조금 전까지 주우빈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임수찬의 부모님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하예정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주우빈만 살폈다. 주우빈의 두 볼이 임요한에게 얻어맞아 퉁퉁 부어있었고 시뻘건 손자국이 선명한가 하면 입가에 피도 묻어있었다. 평소 천진난만하게 반짝이던 아이의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주우빈은 울고 싶었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울음소리도 내질 못했다.그 모습에 하예정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우빈을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우빈아, 이모야. 이모가 우리 우빈이 구하러 왔어. 울고 싶으면 울어, 우빈아. 이모 놀란단 말이야.”주우빈은 자신을 안은 사람이 하예정인 걸 확인하고 나서야 큰소
“이진아, 여긴 네가 알아서 해. 쟤가 우빈이한테 어떻게 했으면 배로 갚아줘!”전태윤이 임요한을 옆으로 확 던지자 임요한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그런데 임요한은 아직 일어나기도 전에 전태윤을 향해 발길질하려 했다.전태윤은 보지 않고 감각으로 임요한의 발을 세게 밟아버렸다. 그 바람에 임요한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그는 임요한을 싸늘하게 째려보고는 재빨리 하예정을 따라나섰다. 하예정은 이미 주우빈을 카시트에 앉히고 운전하려 했다.“예정아, 내가 운전할게.”전태윤은 운전석에 앉은 하예정을 뒷좌석에 앉힌 후 직접 운전하려 했다. 하예정도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그러고는 맞아서 쓰러진 건지, 아니면 놀라서 쓰러진 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주우빈을 안고 전태윤에게 말했다.“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요.”굳이 그녀가 얘기하지 않아도 전태윤은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는 재빨리 차에 시동을 걸었다.주우빈을 꽉 끌어안은 하예정의 두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렇게 귀여운 주우빈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하다니.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하예정은 혹시라도 주우빈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너무도 무서웠다.만약 주우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임씨 가문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그들은 곧바로 한 병원에 도착했다. 전태윤이 차를 세우자 하예정은 주우빈을 안고 곧장 차에서 내렸다.“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미친 듯이 뛰어가며 의사를 부르는 소리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의사와 간호사는 그녀의 부름에 저마다 화들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녀는 어느 과의 의사인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아무 의사나 잡고 애걸하듯 말했다.“선생님, 우리 조카 좀 살려주세요. 다른 사람한테 학대당해서 쓰러졌어요.”의사는 재빨리 주우빈을 안고 응급실로 향했고 다른 의사와 간호사도 그 뒤를 따랐다.그때 한 간호사가 하예정에게 귀띔했다.“아이가 학대를 당했다면 얼른 경찰에 신고해요.”
잠시 후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주우빈이 병실 침대에 누운 채 나왔다.“우빈아.”하예정네 부부는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의사에게 조급하게 물었다.“선생님, 우리 조카 어때요?”“아이가 얼굴을 세게 맞아서 연조직이 다 손상됐어요. 허벅지에도 시퍼렇게 멍이 들었던데 누군가 걷어찬 거 맞죠? 옷에 발자국이 있더라고요. 그 외에는 다친 데 없어요. 정신을 잃은 건 너무 놀라서 그런 거예요.”간호사는 주우빈의 얼굴에 얼음찜질해주었다.“어떻게 이 어린애한테 이런 몹쓸 짓을 할 수가 있죠?”의사마저도 주우빈을 마음 아파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두 볼이 퉁퉁 붓고 멍이 들 정도로 때렸다면 가해자가 여간 잔인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어린아이에게 이 정도로 손을 썼다는 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뛴 게 틀림없다.“얘 사촌 형이 그랬어요.”의사는 할 말을 잃었다.‘대체 무슨 원한이길래 사촌 형이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아까 아이가 다친 곳을 사진 찍어놓았어요. 사진 줄 테니까 잘 갖고 있어요. 이따가 경찰이 오면 이걸 증거로 고소할 수 있어요.”하예정은 재빨리 감사의 인사와 함께 휴대 전화를 꺼내 의사의 카톡 연락처를 추가했다. 서로 추가한 후 주우빈의 다친 사진을 하예정에게 보냈다.“아이가 몸에는 크게 다친 곳이 없지만 마음이 많이 다쳤을 거예요. 앞으로 아이 옆에서 잘 챙겨줘야 해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어른들이 옆에 있어 준다면 트라우마도 천천히 사라질 겁니다.”하예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선생님.”전태윤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별말씀을요.”의사는 인사에 답한 후 자리를 떠났다.부부는 간호사와 함께 병실로 향했고 간호사가 주우빈을 병실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조금 있으면 아이가 곧 깨어날 겁니다. 깨어나면 잘 다독여주세요. 너무 놀라서 쓰러진 거니까요. 그리고 얼굴이 너무 부어서 얼음찜질도 계속해줘야 해요. 24시간 후에는 온찜질을 해주고요.”“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하예정은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
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아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그 자식은 어떻게 됐어?”전태윤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직접 때리진 않고 걔 아빠한테 때리라고 몰아붙이니까 얼굴이 퉁퉁 붓고 입가에 피날 정도로 때리더라고. 그리고 그 집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어. 신고하겠다고 시건방을 떨어서 신고하라고 했어. 우빈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들을 경찰서에 보내겠다고 하니까 더는 찍소리 못하더라고.”상대가 아직 어린아이인 탓에 전이진이 손을 쓴다면 오히려 임씨 가문에서 그를 고소할 수 있다. 다행히 그들이 사람이 많은 걸 보고 임수찬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큰아들을 따끔하게 혼냈다. 그 바람에 아이의 두 볼이 벌겋게 부어올랐고 입가에 피도 흥건했다.임수찬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기 자식을 마구 때렸다. 큰아들의 얼굴이 퉁퉁 부었을 뿐만 아니라 벨트까지 풀어서 때리기도 했다.그는 큰아들이 주우빈을 때릴 때 하필 하예정 일행에게 들킨 걸 꾸짖었다. 그 바람에 집도 난장판이 되었고 엄청난 손해를 입었으니까.만약 주우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임수찬도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나중에 처남과 장모님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홧김에 큰아들을 쥐어패듯이 때린 것이었다.임수찬의 부모는 임요한이 아직 애라면서 울며불며 소리쳤고 오히려 전이진 일행이 너무했다고 책임을 전가했다.그러자 전이진이 반박했다.“우빈이는 애가 아니에요? 우빈이 인제 고작 몇 살인데 그렇게 때리는 건 말이 되고요?”그의 반박에 임수찬의 부모는 찍소리도 하질 못했다. 자기 손자가 잘못을 저질렀을 땐 아직 어린애라서 그런 거니까 그냥 넘어가 달라면서 애들끼리 티격태격 싸우는 건 정상이라고 했다.이게 티격태격 싸우는 수준이라고? 주우빈이 쓰러져서 병원까지 갔는데?“형, 우리가 그 집을 때려 부술 때 보니까 CCTV가 설치되어 있더라고. 내가 CCTV를 확인해보니까 우빈이 맞는 장면이 다 녹화되어 있었어. 그래서 그 집 CCT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