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 아파트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장 하예진의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고 수많은 이웃들이 하예진의 집 문 앞에 모여들어 구경하고 있었다.“주형인 이 나쁜 자식아, 당장 내 아들 돌려줘. 당신네 집안사람들은 정말 못돼먹었어! 평소에는 우빈이를 장난감 취급하면서 데리고 놀다가 애가 울면 나 몰라라 하잖아.”“우빈이 벌써 29개월이에요.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사람이 애한테 옷 한 벌, 장난감 하나라도 사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인제 와서 우빈이 보고 싶다고요? 우빈이 보고 싶다고 할 때 제가 언제 못 만나게 하던가요?”시부모와 형님은 하예진이 주형인을 때리지 못하게 그녀를 꽉 잡았다. 하예진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 치며 욕설을 퍼부었다.조금 전에 이미 시댁 식구와 한바탕 싸웠는지 머리가 잔뜩 헝클어졌고 목소리도 갈라졌지만 여전히 그들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퍽퍽!”주서인은 가차 없이 하예진의 뺨을 두 대 내리치고는 욕설을 퍼부었다.“우빈이는 주씨 가문의 손자야. 내 동생이랑 이혼하면 우빈이는 당연히 우리가 데려와야지. 우리가 우리 주씨 가문의 손자를 데려가는 건 자유야. 더 시끄럽게 울었다간 혓바닥을 잘라버릴 줄 알아.”형님에게 뺨을 맞은 하예진은 더욱 미친 듯이 날뛰며 벗어나려 했다. 주경진과 김은희가 그런 하예진을 통제하기 버거워하자 주서인이 냉큼 그들을 도왔다.할머니와 숙희 아주머니가 인파를 뚫고 문 앞에 도착한 순간 마침 그 장면을 목격했다. 할머니는 너무도 화난 나머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숙희 아주머니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할머니는 젊었을 적 정보통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분이었다. 비록 퇴직한 후 더는 손을 쓴 적이 없지만 몸이 강경하여 주먹과 발을 휘두르면 일반인보다 훨씬 강했다.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무릎으로 하예진의 가슴팍을 누르고 있는 주서인을 발로 걷어차더니 주경진과 김은희도 연거푸 걷어찼다. 그 바람에 세 사람 모두 순식간에 바닥에 넘어졌다.
주경진과 김은희가 딸을 도와주려고 하면 할머니는 가차 없이 그들을 걷어찼다.주씨 가문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곧 팔순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가 이토록 용맹하다니.할머니의 도움 덕에 하예진은 주서인과 마음껏 치고받았다. 주서인은 평소 입만 모질뿐 아예 하예진의 상대가 안 되었다. 게다가 하예진이 체구도 있어 주서인을 깔고 앉으면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하예진이 손을 멈췄을 때 주서인의 꼴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형인아, 이런 천한 년이랑 살아서 뭐 해. 당장 이혼해, 당장. 이 집은 네 것이니까 맨몸으로 쫓아내!”주서인은 지금까지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 앞에서 반격도 못 하고 얻어맞기만 하다니.헝클어진 머리에 얼굴이 시퍼렇고 코가 부은 하예진도 온몸이 쑤셨다. 그녀는 주서인을 힘껏 짓누르며 몸을 일으켰다.“서인아.”주경진과 김은희는 재빨리 달려가 딸을 부축했다. 잔뜩 얻어맞은 딸의 모습에 두 사람은 마음이 아팠다.그때 할머니가 숙희 아주머니에게 분부했다.“숙희야, 이웃들한테 저 사람들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얘기해줘. 우리가 세력을 믿고 남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겠어. 지금 열세에 처한 건 우리야. 저쪽은 남자 둘에 여자 둘이고 우린 연약한 여자 셋이야. 게다가 난 나이도 많아 지팡이 없인 걷지도 못해. 괴롭히는 쪽은 저쪽이야.”구경하던 사람들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할머니, 방금 할머니가 혼자서 넷을 해결했거든요?’할머니가 연세를 들이밀며 주형인을 협박했던 것처럼 쓰러지기라도 해서 주씨 가문에 책임을 묻는다면 주씨 가문은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숙희 아주머니는 하예정과 함께 며칠 지내면서 하예진네 부부의 일을 다 알고 있었다. 하예진이 불륜 현장을 잡으러 간 그날 밤에도 주우빈을 돌본 건 그녀였다. 하여 숙희 아주머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얘기했다.주형인이 아내를 때렸다는 사실은 아파트 사람들이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주형인이 하예진을 폭행했을 때 하예진이 칼을 들고 주형인을 쫓아다
자유를 얻은 주서인은 이를 갈며 할머니를 노려보았다.‘저 할망구만 아니었으면 예진한테 얻어맞지 않았을 텐데.’할머니는 하예진을 끌고 소파에 앉더니 주서인을 힐끗 째려보았다.“정말 네 덕에 사람의 인성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됐어. 넌 입도 뻥긋하지 마. 안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돼지 새끼랑 싸우는 줄 알아.”주서인은 너무도 화가 나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누나.”주형인이 누나를 말렸다. 아무래도 조금 전 할머니가 한 얘기를 듣지 못한 모양이다.“누나, 저분은 전태윤 씨 할머니야.”머릿속에 전태윤의 차가운 얼굴과 사나운 눈매가 문득 떠오른 주서인은 순간 움찔하더니 기세가 한결 꺾였다.“전씨 할머니...”그때 김은희가 말했다.“이건 우리 형인이랑 예진이 일이에요. 제삼자는 끼어들지 말아요. 알겠어요?”“내가 언제 끼어들었어요? 내가 끼어드는 거 봤어요?”할머니가 되물었다. 할머니는 집안에 들어온 후 발길질 몇 번 한 게 다였다. 할머니의 말에 김은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오히려 과하게 간섭한 건 시어머니인 당신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 딸 말이에요. 시집도 간 여자가 동생네 가정사에 간섭하는 게 말이 돼요? 평소에도 이간질 많이 했죠? 대체 딸을 어떻게 가르친 거예요? 혹시 사돈댁에 복수라도 하려고 저런 딸을 그 집에 시집 보낸 거예요?”김은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우린 우빈이 할머니 할아버지예요. 우린 그냥 우빈이 보고 싶어서 한동안 같이 지내려고 데려온 거라고요. 그런데 예진이는 우리를 유괴범 취급하면서 경찰에 신고까지 했어요.”주경진이 입을 열었다. 하예진이 신고한 후 인근 지구대에서 다녀갔다. 집안싸움인 걸 확인한 경찰은 간단하게 중재한 후 그냥 가버렸다. 경찰은 하예진을 도와 주우빈을 되찾아올 수 없었다.“예진이한테 얘기하지도 않고 데려갔다는 게 말이 돼요? 애가 울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고 그냥 안고 갔잖아요. 그건 대놓고 뺏은 거죠. 유괴범 취급한 것도 체면을 살려준 건 줄 알아요.”주경진은 입을 쩍
하예진은 차가 없었다. 하여 하예정과 통화를 마친 후 동생네 부부는 주우빈을 찾으러 가고 그녀는 주형인과 끝장을 보기로 했다.하지만 그녀 혼자서 주형인네 가족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전씨 할머니와 숙희 아주머니가 온 덕에 그녀는 위기를 넘겼다.주형인은 어젯밤에 작성한 이혼 합의서를 꺼내며 하예진에게 말했다.“예진아, 내가 당신한테 미안한 짓을 한 건 인정해. 당신이 절대로 날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이렇게 된 이상 우리 더는 같이 못 살아. 그러니까 좋게 좋게 끝내자. 이건 내가 작성한 이혼 합의서야. 읽어봐봐, 문제없으면 사인해서 다음 주 월요일에 이혼 신고하러 가자.”하예진은 차가운 얼굴로 이혼 합의서를 훑어보았다. 내용을 확인한 그녀는 너무도 화가 나 주형인을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다.주형인이 쓴 이혼 합의서를 확인한 할머니는 연거푸 심호흡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혔다.‘주씨 가문 사람들 정말 양아치네!’주형인은 하예진의 표정이 굳어진 걸 발견하고 뻔뻔스럽게 말했다.“이 집은 내가 결혼 전에 개인 재산으로 산 거고 명의도 내 명의로만 되어있어. 그러니까 집은 당연히 내 것이고 차도 내가 샀으니까 내 것이야. 당신이 일자리를 찾긴 했지만 아직 수습 기간도 끝나지 않아서 안정적인 수입이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없어. 그러니까 내가 양보해서 우빈이 양육권은 내가 가질게. 당신 앞으로 매달 우빈이 양육비 40만 원씩 보내면 돼.”“우빈이 인제 고작 29개월이라 아직 분유도 먹어야 하고 기저귀도 필요해. 세 살이 되면 어린이집도 가야 하는데 어린이집 학비가 매년 점점 비싸져. 그리고 앞으로 교육비도 엄청 많이 들어. 우빈이 크면 집도 사줘야 하고 장가도 보내야 하는데 전부 다 돈이야. 우빈이 양육권을 내가 가지고 당신한테 매달 양육비 40만 원을 보내라는 건 이미 많이 양보한 거야. 내가 우빈이 친아빠니 어쩌겠어, 양보해야지 뭐. 그리고 내가 평소에 지출이 많아서 적금이 많지 않아. 하지만 적금의 절반인 6백만 원
하예진이 싸늘하게 웃었다.“인테리어 비용을 돌려받으면 당신들이 내쫓지 않아도 알아서 나갈 거예요.”“인테리어 비용은 일전 한 푼도 못 줘!”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바람에 주서인은 얼굴이 더욱 아팠다. 하예진은 얼음찜질이라도 하고 있었지만 주서인은 그저 고통을 참고만 있었다. 두 볼이 어찌나 욱신거리는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엄청 부어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예진! 절대 가만 안 둬!’“법원에서 봅시다!”전씨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주씨 가문 사람들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너무하네. 합의를 못 봤으니 더 얘기할 필요도 없어. 예진아, 당장 가서 이혼 소송하고 법원에서 보기로 해.”그러자 주형인이 하예진을 협박했다.“하예진, 소송하면 당신한테 유리할 것 같아? 당신 동생이랑 이 사람들 당신한테 전혀 도움이 안 돼. 일을 크게 벌였다간 앞으로 우빈이 못 만날 줄 알아.”하예진이 이혼 소송을 걸고 재산을 나눈다면 그는 주우빈을 숨겨 하예진이 평생 주우빈을 만나지 못 하게 할 생각이었다.그녀는 주형인을 차갑게 째려보기만 할 뿐 그의 협박 따위 안중에도 두질 않았다. 이혼 소송해서 재산 분할도 하고 아들의 양육권도 가져올 셈이었다. 그녀의 몫은 무슨 수를 써서든 다 챙길 것이고 절대 주형인과 서현주의 좋은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다.하예진과 주형인이 합의를 못 본 그 시각, 하예정은 전태윤, 그리고 그의 형제들과 함께 임씨 저택에 도착했다.임수찬이 주우빈을 데려갔으니 주씨 저택이 아니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갔을 거라고 하예정은 생각했다.임씨 저택은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안팎으로 화려한 인테리어가 마을에서 특히 더 눈에 띄었다.임수찬은 주우빈을 금방 데려왔기 때문에 하예진네 자매가 주우빈이 이곳에 있는 걸 알더라도 처가댁에서 하예진네 자매를 막고 있어 바로 데리러 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여 그는 주우빈을 데리고 온 후 작은아들과 놀게 했고 와이프가 집에 없는 틈에 방에서 게임을 즐겼다.갑자기 안겨 간 주우빈은 오는 길 내내 울음을
하예정은 잽싸게 달려가 임요한의 손에서 주우빈을 당겨오고는 한 손으로 임요한의 뺨을 때렸다.임요한은 10살 정도의 남자아이였는데 키가 어찌나 큰지 열네댓 살 되는 청소년 같았다. 갑자기 하예정에게 맞았는데도 임요한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불같이 화를 내며 미친 듯이 하예정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하예정을 건드리기도 전에 두 발이 공중에 붕 떴다.무슨 상황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얼굴은 이미 벽에 닿아 있었고 누군가 두 손을 뒤로 꽉 잡고 그를 누르고 있었다. 임요한은 벗어나고 싶었지만 상대의 힘이 너무 강해 꼼짝달싹도 못 했다. 꽉 잡힌 두 손에 고통이 점점 밀려왔다.“이거 놔!”임요한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이거 놓고 나랑 일대일로 붙어!”꼼짝달싹 못 하는 동생을 본 임윤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생을 도와주러 가려 했지만 누군가 막아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샌가 집안에 훤칠한 체구의 남자들이 몇몇 들어와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훈남이었다.임윤아는 고작 12살밖에 안 되었지만 남자 보는 눈은 있었다. 평소 친구들과 어느 남자 연예인이 잘생겼는지 자주 토론하곤 했었다. 임윤아는 눈앞의 남자들을 보며 넋을 놓았다.‘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인가? 너무 잘생겼잖아!’“당... 당신들은 누구야!”조금 전까지 주우빈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임수찬의 부모님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하예정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주우빈만 살폈다. 주우빈의 두 볼이 임요한에게 얻어맞아 퉁퉁 부어있었고 시뻘건 손자국이 선명한가 하면 입가에 피도 묻어있었다. 평소 천진난만하게 반짝이던 아이의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주우빈은 울고 싶었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울음소리도 내질 못했다.그 모습에 하예정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우빈을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우빈아, 이모야. 이모가 우리 우빈이 구하러 왔어. 울고 싶으면 울어, 우빈아. 이모 놀란단 말이야.”주우빈은 자신을 안은 사람이 하예정인 걸 확인하고 나서야 큰소
“이진아, 여긴 네가 알아서 해. 쟤가 우빈이한테 어떻게 했으면 배로 갚아줘!”전태윤이 임요한을 옆으로 확 던지자 임요한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그런데 임요한은 아직 일어나기도 전에 전태윤을 향해 발길질하려 했다.전태윤은 보지 않고 감각으로 임요한의 발을 세게 밟아버렸다. 그 바람에 임요한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그는 임요한을 싸늘하게 째려보고는 재빨리 하예정을 따라나섰다. 하예정은 이미 주우빈을 카시트에 앉히고 운전하려 했다.“예정아, 내가 운전할게.”전태윤은 운전석에 앉은 하예정을 뒷좌석에 앉힌 후 직접 운전하려 했다. 하예정도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그러고는 맞아서 쓰러진 건지, 아니면 놀라서 쓰러진 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주우빈을 안고 전태윤에게 말했다.“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요.”굳이 그녀가 얘기하지 않아도 전태윤은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는 재빨리 차에 시동을 걸었다.주우빈을 꽉 끌어안은 하예정의 두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렇게 귀여운 주우빈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하다니.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하예정은 혹시라도 주우빈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너무도 무서웠다.만약 주우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임씨 가문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그들은 곧바로 한 병원에 도착했다. 전태윤이 차를 세우자 하예정은 주우빈을 안고 곧장 차에서 내렸다.“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미친 듯이 뛰어가며 의사를 부르는 소리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의사와 간호사는 그녀의 부름에 저마다 화들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녀는 어느 과의 의사인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아무 의사나 잡고 애걸하듯 말했다.“선생님, 우리 조카 좀 살려주세요. 다른 사람한테 학대당해서 쓰러졌어요.”의사는 재빨리 주우빈을 안고 응급실로 향했고 다른 의사와 간호사도 그 뒤를 따랐다.그때 한 간호사가 하예정에게 귀띔했다.“아이가 학대를 당했다면 얼른 경찰에 신고해요.”
잠시 후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주우빈이 병실 침대에 누운 채 나왔다.“우빈아.”하예정네 부부는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의사에게 조급하게 물었다.“선생님, 우리 조카 어때요?”“아이가 얼굴을 세게 맞아서 연조직이 다 손상됐어요. 허벅지에도 시퍼렇게 멍이 들었던데 누군가 걷어찬 거 맞죠? 옷에 발자국이 있더라고요. 그 외에는 다친 데 없어요. 정신을 잃은 건 너무 놀라서 그런 거예요.”간호사는 주우빈의 얼굴에 얼음찜질해주었다.“어떻게 이 어린애한테 이런 몹쓸 짓을 할 수가 있죠?”의사마저도 주우빈을 마음 아파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두 볼이 퉁퉁 붓고 멍이 들 정도로 때렸다면 가해자가 여간 잔인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어린아이에게 이 정도로 손을 썼다는 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뛴 게 틀림없다.“얘 사촌 형이 그랬어요.”의사는 할 말을 잃었다.‘대체 무슨 원한이길래 사촌 형이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아까 아이가 다친 곳을 사진 찍어놓았어요. 사진 줄 테니까 잘 갖고 있어요. 이따가 경찰이 오면 이걸 증거로 고소할 수 있어요.”하예정은 재빨리 감사의 인사와 함께 휴대 전화를 꺼내 의사의 카톡 연락처를 추가했다. 서로 추가한 후 주우빈의 다친 사진을 하예정에게 보냈다.“아이가 몸에는 크게 다친 곳이 없지만 마음이 많이 다쳤을 거예요. 앞으로 아이 옆에서 잘 챙겨줘야 해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어른들이 옆에 있어 준다면 트라우마도 천천히 사라질 겁니다.”하예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선생님.”전태윤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별말씀을요.”의사는 인사에 답한 후 자리를 떠났다.부부는 간호사와 함께 병실로 향했고 간호사가 주우빈을 병실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조금 있으면 아이가 곧 깨어날 겁니다. 깨어나면 잘 다독여주세요. 너무 놀라서 쓰러진 거니까요. 그리고 얼굴이 너무 부어서 얼음찜질도 계속해줘야 해요. 24시간 후에는 온찜질을 해주고요.”“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하예정은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