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진이 싸늘하게 웃었다.“인테리어 비용을 돌려받으면 당신들이 내쫓지 않아도 알아서 나갈 거예요.”“인테리어 비용은 일전 한 푼도 못 줘!”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바람에 주서인은 얼굴이 더욱 아팠다. 하예진은 얼음찜질이라도 하고 있었지만 주서인은 그저 고통을 참고만 있었다. 두 볼이 어찌나 욱신거리는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엄청 부어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예진! 절대 가만 안 둬!’“법원에서 봅시다!”전씨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주씨 가문 사람들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너무하네. 합의를 못 봤으니 더 얘기할 필요도 없어. 예진아, 당장 가서 이혼 소송하고 법원에서 보기로 해.”그러자 주형인이 하예진을 협박했다.“하예진, 소송하면 당신한테 유리할 것 같아? 당신 동생이랑 이 사람들 당신한테 전혀 도움이 안 돼. 일을 크게 벌였다간 앞으로 우빈이 못 만날 줄 알아.”하예진이 이혼 소송을 걸고 재산을 나눈다면 그는 주우빈을 숨겨 하예진이 평생 주우빈을 만나지 못 하게 할 생각이었다.그녀는 주형인을 차갑게 째려보기만 할 뿐 그의 협박 따위 안중에도 두질 않았다. 이혼 소송해서 재산 분할도 하고 아들의 양육권도 가져올 셈이었다. 그녀의 몫은 무슨 수를 써서든 다 챙길 것이고 절대 주형인과 서현주의 좋은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다.하예진과 주형인이 합의를 못 본 그 시각, 하예정은 전태윤, 그리고 그의 형제들과 함께 임씨 저택에 도착했다.임수찬이 주우빈을 데려갔으니 주씨 저택이 아니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갔을 거라고 하예정은 생각했다.임씨 저택은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안팎으로 화려한 인테리어가 마을에서 특히 더 눈에 띄었다.임수찬은 주우빈을 금방 데려왔기 때문에 하예진네 자매가 주우빈이 이곳에 있는 걸 알더라도 처가댁에서 하예진네 자매를 막고 있어 바로 데리러 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여 그는 주우빈을 데리고 온 후 작은아들과 놀게 했고 와이프가 집에 없는 틈에 방에서 게임을 즐겼다.갑자기 안겨 간 주우빈은 오는 길 내내 울음을
하예정은 잽싸게 달려가 임요한의 손에서 주우빈을 당겨오고는 한 손으로 임요한의 뺨을 때렸다.임요한은 10살 정도의 남자아이였는데 키가 어찌나 큰지 열네댓 살 되는 청소년 같았다. 갑자기 하예정에게 맞았는데도 임요한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불같이 화를 내며 미친 듯이 하예정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하예정을 건드리기도 전에 두 발이 공중에 붕 떴다.무슨 상황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얼굴은 이미 벽에 닿아 있었고 누군가 두 손을 뒤로 꽉 잡고 그를 누르고 있었다. 임요한은 벗어나고 싶었지만 상대의 힘이 너무 강해 꼼짝달싹도 못 했다. 꽉 잡힌 두 손에 고통이 점점 밀려왔다.“이거 놔!”임요한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이거 놓고 나랑 일대일로 붙어!”꼼짝달싹 못 하는 동생을 본 임윤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생을 도와주러 가려 했지만 누군가 막아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샌가 집안에 훤칠한 체구의 남자들이 몇몇 들어와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훈남이었다.임윤아는 고작 12살밖에 안 되었지만 남자 보는 눈은 있었다. 평소 친구들과 어느 남자 연예인이 잘생겼는지 자주 토론하곤 했었다. 임윤아는 눈앞의 남자들을 보며 넋을 놓았다.‘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인가? 너무 잘생겼잖아!’“당... 당신들은 누구야!”조금 전까지 주우빈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임수찬의 부모님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하예정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주우빈만 살폈다. 주우빈의 두 볼이 임요한에게 얻어맞아 퉁퉁 부어있었고 시뻘건 손자국이 선명한가 하면 입가에 피도 묻어있었다. 평소 천진난만하게 반짝이던 아이의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주우빈은 울고 싶었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울음소리도 내질 못했다.그 모습에 하예정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우빈을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우빈아, 이모야. 이모가 우리 우빈이 구하러 왔어. 울고 싶으면 울어, 우빈아. 이모 놀란단 말이야.”주우빈은 자신을 안은 사람이 하예정인 걸 확인하고 나서야 큰소
“이진아, 여긴 네가 알아서 해. 쟤가 우빈이한테 어떻게 했으면 배로 갚아줘!”전태윤이 임요한을 옆으로 확 던지자 임요한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그런데 임요한은 아직 일어나기도 전에 전태윤을 향해 발길질하려 했다.전태윤은 보지 않고 감각으로 임요한의 발을 세게 밟아버렸다. 그 바람에 임요한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그는 임요한을 싸늘하게 째려보고는 재빨리 하예정을 따라나섰다. 하예정은 이미 주우빈을 카시트에 앉히고 운전하려 했다.“예정아, 내가 운전할게.”전태윤은 운전석에 앉은 하예정을 뒷좌석에 앉힌 후 직접 운전하려 했다. 하예정도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그러고는 맞아서 쓰러진 건지, 아니면 놀라서 쓰러진 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주우빈을 안고 전태윤에게 말했다.“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요.”굳이 그녀가 얘기하지 않아도 전태윤은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는 재빨리 차에 시동을 걸었다.주우빈을 꽉 끌어안은 하예정의 두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렇게 귀여운 주우빈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하다니.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하예정은 혹시라도 주우빈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너무도 무서웠다.만약 주우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임씨 가문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그들은 곧바로 한 병원에 도착했다. 전태윤이 차를 세우자 하예정은 주우빈을 안고 곧장 차에서 내렸다.“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미친 듯이 뛰어가며 의사를 부르는 소리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의사와 간호사는 그녀의 부름에 저마다 화들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녀는 어느 과의 의사인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아무 의사나 잡고 애걸하듯 말했다.“선생님, 우리 조카 좀 살려주세요. 다른 사람한테 학대당해서 쓰러졌어요.”의사는 재빨리 주우빈을 안고 응급실로 향했고 다른 의사와 간호사도 그 뒤를 따랐다.그때 한 간호사가 하예정에게 귀띔했다.“아이가 학대를 당했다면 얼른 경찰에 신고해요.”
잠시 후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주우빈이 병실 침대에 누운 채 나왔다.“우빈아.”하예정네 부부는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의사에게 조급하게 물었다.“선생님, 우리 조카 어때요?”“아이가 얼굴을 세게 맞아서 연조직이 다 손상됐어요. 허벅지에도 시퍼렇게 멍이 들었던데 누군가 걷어찬 거 맞죠? 옷에 발자국이 있더라고요. 그 외에는 다친 데 없어요. 정신을 잃은 건 너무 놀라서 그런 거예요.”간호사는 주우빈의 얼굴에 얼음찜질해주었다.“어떻게 이 어린애한테 이런 몹쓸 짓을 할 수가 있죠?”의사마저도 주우빈을 마음 아파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두 볼이 퉁퉁 붓고 멍이 들 정도로 때렸다면 가해자가 여간 잔인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어린아이에게 이 정도로 손을 썼다는 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뛴 게 틀림없다.“얘 사촌 형이 그랬어요.”의사는 할 말을 잃었다.‘대체 무슨 원한이길래 사촌 형이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아까 아이가 다친 곳을 사진 찍어놓았어요. 사진 줄 테니까 잘 갖고 있어요. 이따가 경찰이 오면 이걸 증거로 고소할 수 있어요.”하예정은 재빨리 감사의 인사와 함께 휴대 전화를 꺼내 의사의 카톡 연락처를 추가했다. 서로 추가한 후 주우빈의 다친 사진을 하예정에게 보냈다.“아이가 몸에는 크게 다친 곳이 없지만 마음이 많이 다쳤을 거예요. 앞으로 아이 옆에서 잘 챙겨줘야 해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어른들이 옆에 있어 준다면 트라우마도 천천히 사라질 겁니다.”하예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선생님.”전태윤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별말씀을요.”의사는 인사에 답한 후 자리를 떠났다.부부는 간호사와 함께 병실로 향했고 간호사가 주우빈을 병실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조금 있으면 아이가 곧 깨어날 겁니다. 깨어나면 잘 다독여주세요. 너무 놀라서 쓰러진 거니까요. 그리고 얼굴이 너무 부어서 얼음찜질도 계속해줘야 해요. 24시간 후에는 온찜질을 해주고요.”“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하예정은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
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아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그 자식은 어떻게 됐어?”전태윤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직접 때리진 않고 걔 아빠한테 때리라고 몰아붙이니까 얼굴이 퉁퉁 붓고 입가에 피날 정도로 때리더라고. 그리고 그 집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어. 신고하겠다고 시건방을 떨어서 신고하라고 했어. 우빈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들을 경찰서에 보내겠다고 하니까 더는 찍소리 못하더라고.”상대가 아직 어린아이인 탓에 전이진이 손을 쓴다면 오히려 임씨 가문에서 그를 고소할 수 있다. 다행히 그들이 사람이 많은 걸 보고 임수찬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큰아들을 따끔하게 혼냈다. 그 바람에 아이의 두 볼이 벌겋게 부어올랐고 입가에 피도 흥건했다.임수찬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기 자식을 마구 때렸다. 큰아들의 얼굴이 퉁퉁 부었을 뿐만 아니라 벨트까지 풀어서 때리기도 했다.그는 큰아들이 주우빈을 때릴 때 하필 하예정 일행에게 들킨 걸 꾸짖었다. 그 바람에 집도 난장판이 되었고 엄청난 손해를 입었으니까.만약 주우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임수찬도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나중에 처남과 장모님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홧김에 큰아들을 쥐어패듯이 때린 것이었다.임수찬의 부모는 임요한이 아직 애라면서 울며불며 소리쳤고 오히려 전이진 일행이 너무했다고 책임을 전가했다.그러자 전이진이 반박했다.“우빈이는 애가 아니에요? 우빈이 인제 고작 몇 살인데 그렇게 때리는 건 말이 되고요?”그의 반박에 임수찬의 부모는 찍소리도 하질 못했다. 자기 손자가 잘못을 저질렀을 땐 아직 어린애라서 그런 거니까 그냥 넘어가 달라면서 애들끼리 티격태격 싸우는 건 정상이라고 했다.이게 티격태격 싸우는 수준이라고? 주우빈이 쓰러져서 병원까지 갔는데?“형, 우리가 그 집을 때려 부술 때 보니까 CCTV가 설치되어 있더라고. 내가 CCTV를 확인해보니까 우빈이 맞는 장면이 다 녹화되어 있었어. 그래서 그 집 CCT
소정남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단번에 알아챘다. 전태윤이 이를 악물며 얘기하는 것 같았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음을 알 수 있었다.“주씨 가문 사람들이 우빈이를 빼앗아갔었는데 우리가 우빈이를 찾았을 때 주형인의 외조카가 글쎄 우빈이를 마구 때리는 거야. 우빈이 지금 병원에 있어. 얼굴이 퉁퉁 부었고 연조직도 손상됐대. 애가 얼마나 놀랐는지 기절까지 했었어.”소정남이 욕설을 퍼부었다.“쓰레기만도 못한 놈들! 어떻게 저런 놈들이 있을 수가 있어? 우리 남자들의 체면을 깎아도 유분수지. 우빈이 지금은 어때?”소정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몸의 상처는 며칠이면 아물겠지만 마음의 상처는 아마 오래갈 거야.”“우빈이 그렇게 때린 놈은 혼냈어? 내가 사람을 데리고 가서 확실하게 패줄까? 어떻게 그렇게 어린애를 그 지경으로 만들 수 있어? 정말 인간도 아니야.”전태윤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우빈이를 저렇게 만든 놈은 고작 열 살짜리 애야. 신고해봤자 나이가 어려서 그냥 부모한테 교육이나 잘하라고 하고 배상하라고 하겠지. 감옥에는 못 보내. 그래도 애 아빠더러 제대로 혼내라고 해서 이미 피 터지게 맞았어.”임수찬에게 직접 임요한을 혼내라고 하는 건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치는 것이기에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나 욕해도 돼? X발, 고작 열 살짜리 애가 그렇게 못됐다고? 나중에 사회에 발을 들이면 얼마 못 가 콩밥을 먹겠네 그럼. 태윤아, 내가 제대로 알아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 당장 애들한테 말할게. 그 집 사람들 전부 빈털터리로 만들 거야!”전태윤의 말투에 미안함이 가득했다.“오늘 소개팅하는데 기분이 안 상했길 바라.”“효진 씨는 형수님의 절친이야. 이번에 좋은 인상을 못 남긴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만날 기회는 언제든지 있어. 인연이 닿는다면 좋은 결과도 있을 거고 인연이 아니라면 아무리 붙여놓으려고 해도 안 돼.”소정남은 심효진과의 소개팅을 아주 중요시했지만 순리에 맡겨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경찰들이 왔어.
메이크업하지 않고 예쁜 옷도 입지 않은 심효진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평소에는 그래도 메이크업을 살짝 했지만 오늘은 완전히 생얼이었다.“효진 씨,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심효진이 방긋 웃어 보였다.“저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앉으세요, 정남 씨.”소정남이 심효진의 맞은편에 앉으며 장미꽃을 건네자 심효진은 받질 않았다.“아까 입에 물고 오시던데요...”심효진이 말끝을 흐리자 소정남이 말했다.“다음에는 꽃다발을 사서 손에 들고 올게요. 입에 물지 않고.”“입이 아무리 커도 꽃 한 다발을 무는 건 무리겠죠?”소정남이 말했다.“그럼요...”그는 입에 물고 온 장미꽃 한 송이를 테이블 밑의 쓰레기통에 버렸다. 심효진이 이미 커피를 주문한 걸 본 그는 종업원을 불러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잠시 후,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오며 소정남을 힐끔거렸다. 그러자 소정남이 배시시 웃으며 종업원에게 말했다.“지금 소개팅 중이에요.”그 순간 종업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뭔가 얘기하려다가 상사의 당부가 떠올랐는지 이내 말을 바꾸었다.“다른 뜻은 없었어요.”종업원은 단지 그가 소 이사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난감한 상황에 종업원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소정남이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부모님이 너무 잘생기게 낳아주셔서 저도 부담스럽다니까요.”그러자 심효진이 웃음을 터뜨렸다.“정남 씨 잘생기긴 하셨어요. 지금까지 제가 본 잘생긴 남자들 중 한 분이에요.”“저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있어요?”“정남 씨 동료분 전태윤 씨요.”소정남이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나랑 걔를 비교하지 말아요. 효진 씨 설마 저의 동료한테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죠?”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사레들린 심효진이 콜록콜록 기침했다.“정남 씨, 전 정남 씨 동료분한테 아무 마음도 없어요. 그분은 저의 절친의 남편이에요. 게다가 그런 차가운 남자는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그녀는 하예정처럼 전태윤과 다정하게 지낼 인내심이 없었다. 게다가 하예정
심효진이 웃으며 말했다.“정남 씨를 좋아하는 여자가 없다면 정남 씨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할 뻔했어요.”소정남이 잠깐 멈칫하다가 말했다.“저 건강해요!”“겉으로는 건강해 보여요.”소정남은 심효진의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라 입만 뻐금거렸다. 그렇다고 심효진에게 그가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소개팅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상대를 희롱하는 짓이라 소정남은 그냥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 말주변이 좋은 소정남이 심효진 앞에서 말문이 막힐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소정남이 속으로 생각했다.‘파티에서 드러누운 일로 유명해진 여자는 역시 달라. 못하는 얘기가 없어!’...병원.하예진은 전씨 할머니와 숙희 아주머니와 함께 황급히 병원에 도착했다.경찰은 기록을 마친 후 곧장 현장을 떠났고 주서인네 부부와 큰아들은 파출소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주서인은 그제야 큰아들이 큰 사고를 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남동생에게 차마 얘기할 수 없었던 주서인은 몰래 부모님께만 얘기했다. 그런데 큰 외손자가 친손자를 병원까지 실려 갈 정도로 때렸다는 소리를 들은 김은희가 울부짖으며 욕하는 바람에 주형인도 그 사실을 알아버렸다.하예진이 병원에 도착한 후 주형인도 부모님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주서인은 아직 차마 병원에 오질 못했다. 가뜩이나 오늘 호되게 당했는데 지금 상황에 하예정 자매 앞에 나타나면 아마 찢어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다. 더구나 주서인네 부부는 큰아들과 함께 먼저 파출소로 가야 했다.“우빈아.”비틀거리며 병실에 들어온 하예진은 동생의 품에 안겨있는 아들에게 달려갔다.“우빈아.”하예진은 아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들의 얼굴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엄마!”엄마의 얼굴을 본 주우빈은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하예진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요한 형이 날 때렸어요... 엄마, 요한 형이 날 때렸어요.”“우빈아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