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 여긴 네가 알아서 해. 쟤가 우빈이한테 어떻게 했으면 배로 갚아줘!”전태윤이 임요한을 옆으로 확 던지자 임요한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그런데 임요한은 아직 일어나기도 전에 전태윤을 향해 발길질하려 했다.전태윤은 보지 않고 감각으로 임요한의 발을 세게 밟아버렸다. 그 바람에 임요한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그는 임요한을 싸늘하게 째려보고는 재빨리 하예정을 따라나섰다. 하예정은 이미 주우빈을 카시트에 앉히고 운전하려 했다.“예정아, 내가 운전할게.”전태윤은 운전석에 앉은 하예정을 뒷좌석에 앉힌 후 직접 운전하려 했다. 하예정도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그러고는 맞아서 쓰러진 건지, 아니면 놀라서 쓰러진 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주우빈을 안고 전태윤에게 말했다.“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요.”굳이 그녀가 얘기하지 않아도 전태윤은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는 재빨리 차에 시동을 걸었다.주우빈을 꽉 끌어안은 하예정의 두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렇게 귀여운 주우빈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하다니.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하예정은 혹시라도 주우빈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너무도 무서웠다.만약 주우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임씨 가문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그들은 곧바로 한 병원에 도착했다. 전태윤이 차를 세우자 하예정은 주우빈을 안고 곧장 차에서 내렸다.“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미친 듯이 뛰어가며 의사를 부르는 소리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의사와 간호사는 그녀의 부름에 저마다 화들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녀는 어느 과의 의사인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아무 의사나 잡고 애걸하듯 말했다.“선생님, 우리 조카 좀 살려주세요. 다른 사람한테 학대당해서 쓰러졌어요.”의사는 재빨리 주우빈을 안고 응급실로 향했고 다른 의사와 간호사도 그 뒤를 따랐다.그때 한 간호사가 하예정에게 귀띔했다.“아이가 학대를 당했다면 얼른 경찰에 신고해요.”
잠시 후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주우빈이 병실 침대에 누운 채 나왔다.“우빈아.”하예정네 부부는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의사에게 조급하게 물었다.“선생님, 우리 조카 어때요?”“아이가 얼굴을 세게 맞아서 연조직이 다 손상됐어요. 허벅지에도 시퍼렇게 멍이 들었던데 누군가 걷어찬 거 맞죠? 옷에 발자국이 있더라고요. 그 외에는 다친 데 없어요. 정신을 잃은 건 너무 놀라서 그런 거예요.”간호사는 주우빈의 얼굴에 얼음찜질해주었다.“어떻게 이 어린애한테 이런 몹쓸 짓을 할 수가 있죠?”의사마저도 주우빈을 마음 아파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두 볼이 퉁퉁 붓고 멍이 들 정도로 때렸다면 가해자가 여간 잔인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어린아이에게 이 정도로 손을 썼다는 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뛴 게 틀림없다.“얘 사촌 형이 그랬어요.”의사는 할 말을 잃었다.‘대체 무슨 원한이길래 사촌 형이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아까 아이가 다친 곳을 사진 찍어놓았어요. 사진 줄 테니까 잘 갖고 있어요. 이따가 경찰이 오면 이걸 증거로 고소할 수 있어요.”하예정은 재빨리 감사의 인사와 함께 휴대 전화를 꺼내 의사의 카톡 연락처를 추가했다. 서로 추가한 후 주우빈의 다친 사진을 하예정에게 보냈다.“아이가 몸에는 크게 다친 곳이 없지만 마음이 많이 다쳤을 거예요. 앞으로 아이 옆에서 잘 챙겨줘야 해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어른들이 옆에 있어 준다면 트라우마도 천천히 사라질 겁니다.”하예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선생님.”전태윤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별말씀을요.”의사는 인사에 답한 후 자리를 떠났다.부부는 간호사와 함께 병실로 향했고 간호사가 주우빈을 병실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조금 있으면 아이가 곧 깨어날 겁니다. 깨어나면 잘 다독여주세요. 너무 놀라서 쓰러진 거니까요. 그리고 얼굴이 너무 부어서 얼음찜질도 계속해줘야 해요. 24시간 후에는 온찜질을 해주고요.”“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하예정은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
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아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그 자식은 어떻게 됐어?”전태윤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직접 때리진 않고 걔 아빠한테 때리라고 몰아붙이니까 얼굴이 퉁퉁 붓고 입가에 피날 정도로 때리더라고. 그리고 그 집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어. 신고하겠다고 시건방을 떨어서 신고하라고 했어. 우빈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들을 경찰서에 보내겠다고 하니까 더는 찍소리 못하더라고.”상대가 아직 어린아이인 탓에 전이진이 손을 쓴다면 오히려 임씨 가문에서 그를 고소할 수 있다. 다행히 그들이 사람이 많은 걸 보고 임수찬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큰아들을 따끔하게 혼냈다. 그 바람에 아이의 두 볼이 벌겋게 부어올랐고 입가에 피도 흥건했다.임수찬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기 자식을 마구 때렸다. 큰아들의 얼굴이 퉁퉁 부었을 뿐만 아니라 벨트까지 풀어서 때리기도 했다.그는 큰아들이 주우빈을 때릴 때 하필 하예정 일행에게 들킨 걸 꾸짖었다. 그 바람에 집도 난장판이 되었고 엄청난 손해를 입었으니까.만약 주우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임수찬도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나중에 처남과 장모님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홧김에 큰아들을 쥐어패듯이 때린 것이었다.임수찬의 부모는 임요한이 아직 애라면서 울며불며 소리쳤고 오히려 전이진 일행이 너무했다고 책임을 전가했다.그러자 전이진이 반박했다.“우빈이는 애가 아니에요? 우빈이 인제 고작 몇 살인데 그렇게 때리는 건 말이 되고요?”그의 반박에 임수찬의 부모는 찍소리도 하질 못했다. 자기 손자가 잘못을 저질렀을 땐 아직 어린애라서 그런 거니까 그냥 넘어가 달라면서 애들끼리 티격태격 싸우는 건 정상이라고 했다.이게 티격태격 싸우는 수준이라고? 주우빈이 쓰러져서 병원까지 갔는데?“형, 우리가 그 집을 때려 부술 때 보니까 CCTV가 설치되어 있더라고. 내가 CCTV를 확인해보니까 우빈이 맞는 장면이 다 녹화되어 있었어. 그래서 그 집 CCT
소정남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단번에 알아챘다. 전태윤이 이를 악물며 얘기하는 것 같았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음을 알 수 있었다.“주씨 가문 사람들이 우빈이를 빼앗아갔었는데 우리가 우빈이를 찾았을 때 주형인의 외조카가 글쎄 우빈이를 마구 때리는 거야. 우빈이 지금 병원에 있어. 얼굴이 퉁퉁 부었고 연조직도 손상됐대. 애가 얼마나 놀랐는지 기절까지 했었어.”소정남이 욕설을 퍼부었다.“쓰레기만도 못한 놈들! 어떻게 저런 놈들이 있을 수가 있어? 우리 남자들의 체면을 깎아도 유분수지. 우빈이 지금은 어때?”소정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몸의 상처는 며칠이면 아물겠지만 마음의 상처는 아마 오래갈 거야.”“우빈이 그렇게 때린 놈은 혼냈어? 내가 사람을 데리고 가서 확실하게 패줄까? 어떻게 그렇게 어린애를 그 지경으로 만들 수 있어? 정말 인간도 아니야.”전태윤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우빈이를 저렇게 만든 놈은 고작 열 살짜리 애야. 신고해봤자 나이가 어려서 그냥 부모한테 교육이나 잘하라고 하고 배상하라고 하겠지. 감옥에는 못 보내. 그래도 애 아빠더러 제대로 혼내라고 해서 이미 피 터지게 맞았어.”임수찬에게 직접 임요한을 혼내라고 하는 건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치는 것이기에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나 욕해도 돼? X발, 고작 열 살짜리 애가 그렇게 못됐다고? 나중에 사회에 발을 들이면 얼마 못 가 콩밥을 먹겠네 그럼. 태윤아, 내가 제대로 알아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 당장 애들한테 말할게. 그 집 사람들 전부 빈털터리로 만들 거야!”전태윤의 말투에 미안함이 가득했다.“오늘 소개팅하는데 기분이 안 상했길 바라.”“효진 씨는 형수님의 절친이야. 이번에 좋은 인상을 못 남긴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만날 기회는 언제든지 있어. 인연이 닿는다면 좋은 결과도 있을 거고 인연이 아니라면 아무리 붙여놓으려고 해도 안 돼.”소정남은 심효진과의 소개팅을 아주 중요시했지만 순리에 맡겨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경찰들이 왔어.
메이크업하지 않고 예쁜 옷도 입지 않은 심효진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평소에는 그래도 메이크업을 살짝 했지만 오늘은 완전히 생얼이었다.“효진 씨,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심효진이 방긋 웃어 보였다.“저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앉으세요, 정남 씨.”소정남이 심효진의 맞은편에 앉으며 장미꽃을 건네자 심효진은 받질 않았다.“아까 입에 물고 오시던데요...”심효진이 말끝을 흐리자 소정남이 말했다.“다음에는 꽃다발을 사서 손에 들고 올게요. 입에 물지 않고.”“입이 아무리 커도 꽃 한 다발을 무는 건 무리겠죠?”소정남이 말했다.“그럼요...”그는 입에 물고 온 장미꽃 한 송이를 테이블 밑의 쓰레기통에 버렸다. 심효진이 이미 커피를 주문한 걸 본 그는 종업원을 불러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잠시 후,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오며 소정남을 힐끔거렸다. 그러자 소정남이 배시시 웃으며 종업원에게 말했다.“지금 소개팅 중이에요.”그 순간 종업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뭔가 얘기하려다가 상사의 당부가 떠올랐는지 이내 말을 바꾸었다.“다른 뜻은 없었어요.”종업원은 단지 그가 소 이사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난감한 상황에 종업원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소정남이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부모님이 너무 잘생기게 낳아주셔서 저도 부담스럽다니까요.”그러자 심효진이 웃음을 터뜨렸다.“정남 씨 잘생기긴 하셨어요. 지금까지 제가 본 잘생긴 남자들 중 한 분이에요.”“저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있어요?”“정남 씨 동료분 전태윤 씨요.”소정남이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나랑 걔를 비교하지 말아요. 효진 씨 설마 저의 동료한테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죠?”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사레들린 심효진이 콜록콜록 기침했다.“정남 씨, 전 정남 씨 동료분한테 아무 마음도 없어요. 그분은 저의 절친의 남편이에요. 게다가 그런 차가운 남자는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그녀는 하예정처럼 전태윤과 다정하게 지낼 인내심이 없었다. 게다가 하예정
심효진이 웃으며 말했다.“정남 씨를 좋아하는 여자가 없다면 정남 씨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할 뻔했어요.”소정남이 잠깐 멈칫하다가 말했다.“저 건강해요!”“겉으로는 건강해 보여요.”소정남은 심효진의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라 입만 뻐금거렸다. 그렇다고 심효진에게 그가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소개팅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상대를 희롱하는 짓이라 소정남은 그냥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 말주변이 좋은 소정남이 심효진 앞에서 말문이 막힐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소정남이 속으로 생각했다.‘파티에서 드러누운 일로 유명해진 여자는 역시 달라. 못하는 얘기가 없어!’...병원.하예진은 전씨 할머니와 숙희 아주머니와 함께 황급히 병원에 도착했다.경찰은 기록을 마친 후 곧장 현장을 떠났고 주서인네 부부와 큰아들은 파출소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주서인은 그제야 큰아들이 큰 사고를 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남동생에게 차마 얘기할 수 없었던 주서인은 몰래 부모님께만 얘기했다. 그런데 큰 외손자가 친손자를 병원까지 실려 갈 정도로 때렸다는 소리를 들은 김은희가 울부짖으며 욕하는 바람에 주형인도 그 사실을 알아버렸다.하예진이 병원에 도착한 후 주형인도 부모님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주서인은 아직 차마 병원에 오질 못했다. 가뜩이나 오늘 호되게 당했는데 지금 상황에 하예정 자매 앞에 나타나면 아마 찢어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다. 더구나 주서인네 부부는 큰아들과 함께 먼저 파출소로 가야 했다.“우빈아.”비틀거리며 병실에 들어온 하예진은 동생의 품에 안겨있는 아들에게 달려갔다.“우빈아.”하예진은 아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들의 얼굴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엄마!”엄마의 얼굴을 본 주우빈은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하예진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요한 형이 날 때렸어요... 엄마, 요한 형이 날 때렸어요.”“우빈아
“주서인 같은 엄마 밑에서 컸으니 잘 커 봤자 얼마나 잘 크겠어.”하예정이 싸늘하게 말했다.“언니, 우리 경찰에 신고했어. 임요한을 감옥에 보낼 순 없지만 주서인 부부한테 배상하라고 할 순 있어. 누가 와서 사정하고 사과하든 절대 받아주지 마. 꼭 배상하라고 해.”하예진도 마음을 굳게 먹었다.“배상 말고 다른 대가를 치르게 할 순 없어? 우빈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는데... 예정아, 아까 그 집에서 요한이 손발 확 부러뜨리지 그랬어.”“이진 씨가 걔 아빠한테 요한이 혼내라고 했더니 얼굴이 퉁퉁 부을 정도로 때렸대. 그리고 벨트까지 풀어서 요한이를 때렸다던데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상처가 가득 났다고 하더라고. 이진 씨가 나오기 전에 그 집을 다 때려 부쉈다고 했어.”하예진이 이를 꽉 깨물었다.“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악마 같은 놈.”하예정도 마음 같아선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성의 끈을 잡고 있어 직접 임요한을 혼내진 않았고 아빠인 임수찬에게 훈육을 맡겼다.많은 일을 겪으면서 하예정도 전태윤의 일 처리 방식을 점차 알게 되었다. 그는 아무리 화가 나도 법을 어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전태윤의 침착한 처리 방식이 옳았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머지 인생을 망가뜨리진 않으니까.이번에 전태윤과 그의 동생들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하예정은 이런 남자라면 남은 인생을 그에게 맡겨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언니의 일을 해결한 다음에 전태윤과 마음을 터놓고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해야겠다.“우빈아.”“우빈아.”주형인이 부모님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그들은 의사와 간호사에게 물어 겨우 주우빈의 병실을 찾아냈다.전태윤의 눈짓 한 번에 그의 남동생들은 인간 울타리를 만들어 주형인네 세 식구가 들어오지 못하게 병실 문 앞을 막아섰다.“전태윤, 당장 비켜! 내 아들 봐야겠어! 우빈이는 내 아들이야!”주형인은 아들을 데려갈 생각만 했지, 다치게 할 생각은 전혀
전태윤은 잠깐 침묵하다가 남동생들에게 물러서라고 했다. 그들이 자리를 비켜주자 주형인은 부모님과 함께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주우빈을 안고 있던 하예진은 얼음을 떼고 주형인에게 주우빈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한참 동안 얼음찜질했는데도 부기가 여전히 빠지지 않았다.아이의 피부가 가뜩이나 여린데다가 임요한이 세게 때린 바람에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아들의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고 평소 맑고 반짝이던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평소 아들을 별로 챙기지 않던 주형인마저도 마음 아파하며 임요한을 인간도 아니라고 욕했다.“요한이 어떻게 이런 어린애한테... 내가 정말 너무 오냐오냐했어.”김은희가 주우빈의 얼굴을 어루만지려 하자 화들짝 놀란 주우빈은 고개를 홱 돌리며 엄마의 품에 머리를 숨겼고 겁에 질린 채 두 손으로 엄마의 옷을 꽉 잡았다.“엄마, 엄마.”하예진은 시어머니의 손을 밀쳐내며 싸늘하게 말했다.“우빈이 당신들 무서워하니까 만지지 말아요.”“임요한 이 빌어먹을 놈, 내가 가서 제대로 혼내줘야겠어. 내 손자를 때리라고 지금까지 키운 거 아니야!”주경진은 주우빈을 걱정한 나머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주경진네 부부는 수년간 딸의 세 아이를 돌봐줬다. 아들네 식구가 시 중심에서 살고 또 아들과 함께 지내기를 원치 않아 한다고 가까이 사는 딸이 주경진네 부부를 자기 집으로 모셔갔다. 듣기 좋아 모셔간 거지 사실은 자기 애들을 봐달라는 뜻이었다.주서인의 시부모는 그녀의 아이든 시동생네 아이든 절대 봐주지 않았다. 아이는 부부의 자식이기 때문에 부부가 알아서 키워야 한다고 했다.주경진네 부부는 세 외손주를 최선을 다해 돌봐준 것도 모자라 평소 아들이 주는 용돈도 딸네 가족에게 거의 다 쓰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 결과 힘들게 키운 외손자가 친손자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주경진은 자신이 이리도 배은망덕한 외손자를 키웠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주우빈을 달랜 후 하예진이 시댁 식구들에게 싸늘하게 물었다.“우빈이 이렇게 된 걸 보니까 인제 만족스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