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그녀가 옷 벗는 남자를 볼 때 비명을 지르기보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심지어 손을 뻗어 대뜸 만지고 싶어 하는 여자인 걸 너무 잘 알았다.그는 허리를 곧게 펴고 더는 야릇한 자세로 그녀를 감싸지 않았다.어차피 그녀에게 아무 소용 없으니까.“귀마개 껴. 그럼 잘 수 있잖아.”하예정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럼 불편해서 못 자요.”전태윤은 이불 없이 소파에서 자려는 그녀를 텅 빈 손님방에 보낼 수는 없었다. 그도 오늘 밤이 매우 쌀쌀했다. 잠시 고민하던 전태윤은 물컵을 들고 다시 제 방으로 걸어갔다.“내 방에서 자.”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하예정은 흠칫 놀랐다.어쩌다 한번 정색하니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전태윤은 문 앞에 다가가 걸음을 멈추더니 꿈쩍 않는 하예정을 바라보며 짙은 표정으로 쏘아붙였다.“싫으면 소파에서 자고.”그는 말하면서 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려 했다.이미 베개까지 챙긴 하예정은 쏜살같이 달려와 한쪽 발을 문틈에 비집어 전태윤이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그녀의 예쁜 얼굴에 아부가 담긴 미소가 지어졌다.“싫을 리가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전태윤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하예정은 아무것도 못 본 척하며 베개를 챙기고 그를 스쳐지나 방 안에 들어갔다.아침에 전태윤을 도와 얼굴을 씻겨줄 땐 자세히 방을 둘러보지 못했는데 두 번째로 들어오니 저도 모르게 주변을 쭉 훑어보았다.그의 방은 하예정이 청소를 해줄 필요가 없었다. 전부 전태윤이 직접 하는데 먼지 하나 없었다. 할머니는 그가 결벽증이 조금 있다고 했는데 충분히 보아낼 수 있었다.방 구경을 마친 후 하예정은 곧바로 큰 침대에 털썩 누워 베개를 내려놓으며 영역표시를 했다. 그러고는 이불까지 끌어와 살포시 덮었다.편안한 침대에 따뜻한 이불까지 덮으니 완벽 그 자체였다.그녀는 누운 지 2분도 안 돼 다시 일어나 베개를 침대 끝에 내려놓고 방향을 바꿨다.“우리 서로 반대 방향으로 누워요. 내가 침대 끝에 누울게요.”전태윤이 다가와 굳은 표
전태윤은 몰래 한숨을 내쉬고 하예정의 옆에 누웠다.그녀를 갖고 싶어도 이런 식은 원하지 않았다.그녀가 달갑게 받아들일 때, 적어도 그녀가 맨정신일 때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비몽 사몽하게 관계를 해버리면 누가 저와 함께 잤는지조차 모를 테니까.하예정은 환경이 바뀌어도 잠만 잘 잤다. 다만 전태윤은 달랐다.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와 한 침대에서 자본 적이 없었고 이토록 예쁘고 날씬한 여자가 옆에 누워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심지어 그 여자는 명실상부한 그의 아내였다.전태윤은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잠든 하예정은 그에게 기대 몸을 따뜻하게 녹였다.전태윤은 살짝 짜증이 밀려와 손을 뻗어 그녀의 잠옷 단추를 풀어헤치려 했지만 단추 한 개만 풀고는 금세 포기했다.그는 예쁘게 잠든 하예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녀의 입에 살짝 입 맞추고는 마음껏 품에 파고들어 오게 내버려 두었다.‘그래, 난 참을 수 있어. 버티는 게 곧 이기는 거야!’전태윤은 끊임없이 묵념하며 마음을 다잡았다!‘하예정 너 두고 봐, 때 되면 나 절대 가만 안 둬!’결국 그도 너무 졸린 나머지 스르륵 잠이 들었다.두 사람은 그 시각 문 앞에서 누군가가 귀를 바짝 대고 인기척 소리를 엿듣는다는 걸 전혀 몰랐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어때요?”문득 숙희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비록 아주 낮은 목소리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놀라서 펄쩍 뛰었다.숙희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이토록 놀라실 줄은 전혀 몰라 잇따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할머니는 숙희 아주머니를 보더니 가슴을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질책했다.“숙희야, 왜 소리 없이 불쑥 나타나. 깜짝 놀랐잖아.”“어르신께서 저를 보신 줄 알았어요.”할머니는 손자의 방에서 무슨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지 고도로 집중하느라 숙희 아주머니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가 이젠.”어르신이 나지막이 아주머니를 다그쳤다.“아무것도 안 들려. 태윤의 방에 틀림없이 방음 소재를 썼을 거야. 아무리 귀 기울여도 잠잠하잖아.”“두 사람
밤새 비가 내리더니 날이 밝자 멈췄다.하예정은 늘 정해진 시간에 잠에서 깼다.눈 뜨자마자 전태윤의 준수한 얼굴을 본 그녀는 흠칫 놀라며 어젯밤 일을 되새겼다. 그녀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살며시 밖으로 나가려 했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다시 고개 돌려 전태윤을 살짝 밀쳐보았는데 아주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제 하루 커피로 겨우 버틴 그였기에 깊이 잠든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그는 오늘 휴가까지 냈으니 푹 자게 내버려 두었다.하예정은 속으론 그를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하는 짓은 극심한 방해였다.그녀는 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더니 참지 못하고 몇 번 입맞춤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어쩜 나보다 예뻐? 종일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만 짓지 않는다면 진작 당신을 덮쳤을 텐데. 내가 좀 더 용기 낼 수 있을 때 제대로 덮쳐볼게.”그녀는 몰래 뽀뽀한 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전태윤의 방은 그녀의 금지구역인데 어렵게 들어오기도 했고 마침 그가 깊이 잠들었으니 이 기회에 계약서를 훔쳐서 없애버리기로 했다.그렇지 않으면 늘 본인만 아무런 보장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계약서는 전태윤이 무심코 없애버렸으니까.여기까지 생각한 하예정은 전태윤이 잠든 틈을 타 그의 방에서 몰래 계약서를 찾아보았다. 그가 깰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침대 끝까지 훑어보아도 계약서라곤 보이질 않았다.그의 방에 금고가 하나 있는데 하예정은 열 수 없었다.“설마 금고에 넣어둔 거야?”하예정이 구시렁댔다. 계약서를 굳이 금고에 잠글 필요가 있을까?그녀의 예측이 맞았다. 전태윤은 정말 계약서를 보물처럼 여기며 금고에 넣어두었다.결국 하예정은 아무 성과 없이 베개를 안고 살며시 방을 나섰다. 이른 아침 다들 깨나지 않은 틈을 타 제 방에 돌아와 할머니와 하룻밤 잔 것처럼 연기하려 했다.그 시각 할머니는 코골이를 멈췄다.다만 날이 이미 밝았다.하예정이 옷을 갈아입고 세안을 마치자 할머니께서 깨어났다.“할머니, 잘 주무셨어요?”할
전태윤이 잠에서 깼을 때 하예정은 이미 밖에 나가버렸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나랑 잤으면 내가 깨어날 때까지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니야?”하예정이 그 말을 들었으면 어이가 없어 뒷목을 잡을 것이다.‘저기요, 태윤 씨,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건 아니죠. 누가 누구랑 자요. 우린 단지 한 침대에서 잠을 잤을 뿐이라고요.’전태윤도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온 집안에는 반려동물 강아지와 고양이를 제외하곤 세 여인 모두 보이지 않았다.보아하니 장 보러 간 게 틀림없었다.전태윤은 발코니의 그네에 앉아 어젯밤 아내와 함께 보낸 기억을 되새기며 몇 마디 요약했다.‘비록 적응되지 않지만 은근히 기대되네.’잠시 후 하예정 일행이 돌아왔다.그녀는 식자재 말고도 침구 용품까지 사 왔다. 가구점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아 새 침대를 고르지 못했는데 이따가 다시 나가서 침대를 산 후 손님방에 놓아야만 안심하고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아 참, 오늘 출근 안 하지.’전태윤은 오늘 휴가 내고 그녀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바람 쐬러 펜션에 가기로 했다. 할머니를 즐겁게 해드려야 하니까.인기척 소리를 들은 전태윤은 그네에서 내려 방안으로 들어왔다. 와이프가 크고 작은 봉투를 한가득 들고 있었는데 죄다 침구 용품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한없이 짙어졌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태윤아, 너 아직 집에 있었어? 출근한 줄 알았더니.”어르신은 기대에 못 미치는 손주 녀석을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봤다.‘못난 놈.’“할머니, 나 오늘 하루 휴가 냈어요. 이따 아침 먹고 광명 아파트에 우빈이 데리러 갔다가 우리 함께 서교에 있는 펜션으로 바람 쐬러 가요.”전태윤은 할머니의 싸늘한 눈빛을 뒤로한 채 가까이 다가오며 오늘의 스케줄을 얘기했다.그는 하예정의 손에 든 침구 용품까지 들어서 빈 손님방에 내려놓았다.그의 말을 들은 할머니가 되물었다.“며칠 있을 건데?”“딱 오늘 하루요.”“거긴 펜션이야. 하루만 가서 뭘 논
하예정은 순간 가슴이 움찔거렸다. 이혼할 때 부부 중 한쪽이 재산을 빼돌리는 사례가 너무 많았다.주씨 집안 사람들의 성품을 생각해보니 주형인도 얼마든지 재산을 빼돌릴 가능성이 있었다.“할머니, 저 꼭 언니한테 얘기할게요.”할머니가 대답했다.“도움 필요하면 태윤이한테 말해. 얘가 대신 알아봐 줄 거야.”“할머니, 정말 도움이 절박하면 태윤 씨한테 가장 먼저 얘기할 거예요.”할머니는 흡족한 얼굴로 하예정을 바라봤다.전태윤은 눈썹을 살짝 들썩거렸지만 할머니가 쳐다보자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바꿨다. 할머니는 속으로 그를 구박했다.‘그래, 계속 아닌 척해. 네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아침 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함께 광명 아파트로 출발했다.하예진은 이미 아들을 데리고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연 며칠 이모와 함께 있으니 주우빈도 이젠 습관이 됐는지 오늘은 울며 떼를 쓰지 않았다.“할머님.”어르신을 본 하예진이 바로 인사를 올렸다.할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예진에게 화이팅하는 동작을 해 보였다.하예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동생의 시댁 식구들은 그녀의 시댁보다 몇 배는 더 좋았다.하예정은 조카를 안고 언니에게 말했다.“언니, 주형인 수입이 얼마인지 알아? 재산 빼돌리지 못하게 언니가 잘 감시해야 해. 내일 우리 다 함께 올 테니까 기죽을 거 없어. 하늘이 무너져도 우리가 함께 받쳐줄게.”하예진이 대답했다.“대충 알고 있어. 월급은 얼마 남지 않지만 부업이 있어. 몰래 주서인네 가족을 돕지 않는다면 적금이 대략 3억 정도 될 거야.”그밖에도 서현주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도 하예진에게 영수증이 있으니 이혼소송을 걸면 전부 돌려받을 수 있다.주형인은 아직 하예진의 남편이기에 그의 재산은 혼후 재산에 속한다. 하예진의 동의 없이 부부 공동 재산으로 서현주에게 그토록 비싼 액세서리를 선물했으니 아내가 돌려받는 건 너무나 지당한 일이었다.“그 인간 사악해서 적금을 제 명의로 해놓지 않았을 수도 있어.”하예진이 아무 말도 하지
하예진은 동생과 더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우빈을 예정에게 넘기고 제부와 할머니한테까지 인사를 마친 뒤 곧바로 스쿠터를 타고 출근했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출근 시간이 15분 남았다.그녀는 처음에 다섯 바퀴 달릴 때 20분이 걸렸지만 요 며칠 적응했는지 속도가 좀 빨라졌다.‘그래, 아직 여유 있어.’스쿠터를 세우고 열쇠를 잠근 후 하예진은 다섯 바퀴 뛰러 갔다.그녀는 매일 아침 출근 전에 회사 앞의 작은 정원을 다섯 바퀴씩 뛴다. 노씨 그룹에서 이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처음엔 다들 구경거리로 삼았지만 슬슬 달리기 대열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그들은 종일 사무실에 앉아있다 보니 운동량이 적어 쉽게 살이 찌기 마련이다. 비록 하예진처럼 뚱뚱한 건 아니지만 출근 전에 두 바퀴 정도 달리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될 듯싶었다.하예진은 14분 만에 다섯 바퀴를 달리고 마지막 1분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오늘은 집에서 늦게 떠나다 보니 시간이 빠듯했지만 다행히 지각하진 않았다.“대표님.”“대표님.”뒤에서 울려 퍼지는 동료들의 인사 소리를 들어보니 노동명이 온 듯싶었다.하예진이 머리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노동명이 성큼성큼 들어왔다.그는 전태윤처럼 종일 정장 차림이 아니라 수수하게 옷을 차려입고 경호원들도 동행시키지 않았다. 틀을 차리지 않고 상사의 포스도 차리지 않으며 모든 직원의 인사에 똑같이 머리를 끄덕여주었다.하예진은 이곳에 출근한 며칠 동안 사석에서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바로 노동명에 관한 동료들의 의논이었다.노동명은 노씨 일가의 넷째 도련님이고 올해 나이 35세에 아직 싱글이다. 사춘기 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얼굴에 보란 듯이 칼자국을 남겼다.이런 그의 과거와 듬직하고 위엄이 넘치는 체구까지 더하니 전혀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35세지만 여자친구가 없는 그는 소문에 의하면 재벌가의 여인들이 그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싫어하고 더불어 그가 겪었던 질풍노도의 시기도 싫어하며 괜히 결혼 뒤에 가정폭력을 당할까 봐
노동명의 말을 들은 하예진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그녀는 식욕이 차 넘치고 종일 먹기만 할 뿐 운동할 생각이 없어서 점점 더 뚱뚱해졌다.“알겠습니다, 대표님. 수습 기간에 반드시 살을 빼겠습니다.”앞으론 아침뿐만 아니라 저녁에도 달리기하기로 다짐했다.‘난 꼭 할 수 있어. 다이어트 성공하고 말 거야.’“그래, 수습 기간을 한 달로 줄일 테니까 앞으로 잘해.”노동명은 간결한 이 한마디만 남긴 채 하예진을 남겨두고 그의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건장한 체구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말끔히 사라졌다.그가 떠난 후에야 하예진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는데 상사가 한창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하예진은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재무팀으로 향했다.그녀는 전에 재무총괄직을 맡았었고 지금은 또 노동명과 친분이 있는 것 같아 재무총괄 담당자가 늘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비록 아직은 재무팀의 신입사원이지만 조만간 본인 자리까지 꿰차고 올라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하여 암암리에서 하예정에게 수많은 함정을 파놓아 그녀가 업무상 실수를 저지르게 하려고 애를 썼다. 수습 기간도 채우지 못한 채 실격을 당하여 떨어져 나앉게 할 작정이었다.만약 예전의 하예진이라면 동료들에게 이런 괴롭힘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했을 때 진작 때려치웠을 것이다.다만 지금은 꾹 참아야 한다. 적어도 이혼하고 우빈의 양육권을 가져올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그녀가 나간 후 재무팀의 다른 직원들이 총괄 담당자 곁으로 다가가 수군거렸다.“제 주제도 모르고 감히 대표님께 끼를 부려요? 게다가 노 대표님도 왜 예진 씨한테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는 거예요?”하예진은 노동명과 대화할 때 그를 정면으로 보고 있어 다들 그녀가 대표님께 야릇한 눈빛으로 끼를 부렸을 거라고 떠들어댔다.“예진 씨는 결혼도 했고 두 살짜리 아들도 있어.”재무총괄 담당자가 담담하게 말했다.“대표님은 예진 씨를 좋아할 리 없어.”“물론이죠. 꼴 좀 보세요. 대표님이
...서교 펜션으로 가는 길에서 하예정은 심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효진아, 나 오늘 할머니 모시고 바람 쐬러 가. 가게 하루만 너한테 맡길게.”심효진이 웃으며 대답했다.“알았어. 할머니 즐겁게 해드려. 가게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어차피 내일이 주말이라 가게도 문을 열지 않는다. 굳이 연다면 하예정이 가게 안에서 출고를 다그칠 것이다.통화를 마친 후 심효진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예정이 결혼생활이 점점 더 다채로워지네.”“누나.”이때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환하던 심효진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는 김진우를 바라보며 하찮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진우야, 누나가 저번에 한 말 귓등으로 흘려들었어? 가게로 찾아오지 말랬잖아. 너랑 예정이는 불가능하다고!”며칠 안 본 사이에 김진우는 훌쩍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다크서클도 심하고 수염까지 삐죽삐죽 자라났다. 22살 젊은 남자의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사촌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효진도 매우 속상했다.사랑의 상처는 이토록 혹독한 법이었다.김진우는 수년간 하예정을 짝사랑해왔기에 당장 포기하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누나.”김진우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나 며칠 동안 가게에 찾아오지 않으려고 애써 참아봤는데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마음을 가라앉히면 예정 누나가 저절로 생각나. 나 예정 누나 너무 사랑하나 봐. 이젠 어떡해? 누나 나 좀 도와줘!”김진우는 심효진의 양쪽 어깨를 꽉 잡고 애원 섞인 말투로 말했다.“나 누나 동생이잖아. 누나 말곤 날 도와줄 사람이 없어.”심효진은 자신의 어깨를 꽉 잡은 김진우의 손을 내려놓으며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김진우, 누나가 몇 번을 얘기해? 예정이는 이미 결혼했어. 유부녀를 아무리 사랑해봤자 이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아. 그러니까 네가 마음 접어. 예정이는 너랑 안 어울려. 널 사랑할 리도 없고.”이어서 그녀는 또 사악한 눈빛으로 김진우에게 경고장을 날렸다.“너 감히 뻔뻔스럽게
“할머니, 어디 가시려고요?”소정남은 전씨 할머니가 나가려는 것을 보면서 묻고 있었다.전씨 할머니가 대답하셨다.“너무 오래 나가 놀았는데 산기슭에 있는 옛 친구들을 찾아가 이야기도 나누고 카드놀이도 해야지.”전씨 할머니는 귀부인티를 내지 않고 산기슭에 있는 노동자들의 부모님들과 잘 어울려 다니셨다.그 할머니들도 전씨 할머니와 이런저런 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이야기들 나누렴. 난 나가야겠어. 좀 이따가 밥 먹을 때 날 부를 필요 없어. 사람을 시켜 산기슭에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해. 옛친구들과 함께 먹게. 어묵 같은 거 있으면 더 좋고.”“할머니, 연세가 많으셔서 그런 음식은 적게 드세요.”전씨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래. 알았어. 안 먹을게.”“제가 할머니께 드시지 말라고 하면 할머니께서는 저를 욕하시더니 왜 예정이가 드시지 말라고 하면 바로 수긍하세요?”전태윤이 일부러 투덜거렸다.그는 전씨 할머니가 손자며느리가 생겼다고 손자를 안중에 두지도 않으신다고 불평했다.전씨 할머니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떠나셨다.할머니는 하예정을 유난히 좋아하셨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듯했다.그러나 손자는 너무 많아서 그다지 소중하지 않았던 모양이다.떠들썩한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저녁 6시가 넘으니 날이 금세 어두워졌다.전씨 가문의 세 사모님은 여운초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하러 집을 나섰다.전이진은 리조트 입구까지 배웅하며 끊임없이 명해은에게 당부했다.“엄마, 우리 운초 씨를 잘 돌봐주세요. 남들이 괴롭힘당하게 하지 말고요.”“알았어. 누가 감히 우리 며느리를 건드리면 내가 가장 먼저 그녀를 용서할 수 없을 거야!”명해은은 전이진의 잔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있었다.전이진은 또다시 들이밀었다.“아니면 제가 따라갈래요.”“네 아버지랑 다 집에 있는데 네가 따라가서 뭐 하게?”명해은은 운전 기사에게 차를 몰아라고 지시했고 창문을 눌러 아들에게 고개를 내밀어 말을 건넸다.“날도 어두워지고
전창빈은 할머니께 말씀드렸다.“할머니께서 조금 전에 저 보고 할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집에 방금 돌아오셨는데 물도 아직 한 모금 마시지 않으시고 바로 내려가셔서 카드놀이도 이야기도 나누시겠다고 하시다니.”하예정도 말했다.“할머니, 그 할머니들도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할머니께서도 오랜만에 돌아오셨는데 그 할머니들의 돈을 전부 따버리면 안 돼요.”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돈 내기하는 거 아니야. 카드놀이에서 지는 사람의 얼굴에 낙서하면서 노는 거지. 누가 얼굴에 가장 많이 그려지는지 지켜보면서 노는 거야.”현장의 사람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노인네의 세계를 그들은 아직 잘 모른다.어르신들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재치다.곧, 소정남과 심효진 부부, 그리고 소정남 부모님도 함께 들어왔다.집안이 더 시끌벅적해졌다.전씨 할머니는 소정남의 아버지 소균혁을 보더니 물었다.“셋째야, 당신 집 맏이가 사돈집에 갔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안 왔어?”소정남의 아버지는 형제 중 셋째였다.전씨 할머니는 예전부터 줄곧 소균혁을 셋째라고 불렀다.“설전에야 돌아온다고 하셨어요.”소지훈은 정윤하에게 고백했고 정윤하도 소지훈에게도 약간의 관심이 가진 듯 했다.소지훈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정윤하는 수차례의 고민 끝에 결국 소지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며칠 만에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소균성 부부는 연성에서 너무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듯했다.하마터면 홀아비가 될 뻔한 아들이 드디어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생겼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소균성 부부의 마음에 걸려 있던 큰 돌도 마침내 땅에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하여 너무 기뻐서 관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비록 관성이 매우 춥고 가끔 눈이 온다고 해도 소균성 부부는 따뜻한 관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차라리 정씨 가문에 틀어박혀 불을 쬐고 싶어 했다.세 식구가 정씨 가문 사람들이 정윤하와 소
“여보, 오늘 밤은 내가 선물한 보석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가.”“보석 반지만 이진 씨가 선물한 걸 착용하면 되잖아.”전이진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그래, 그럼. 이것만은 우리 엄마에게 양보할게.”여운초는 웃긴다는 듯 그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었다.“참, 당신과 형수님께서 용씨 사모님도 오늘 밤 연회에 참석한다고 하던데.”전이진은 문득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목소리와 몸매가 여운별과 닮은 그 젊은 사모님을 언급하자 여운초의 웃고 있던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마침 잘 지켜볼 수 있게 됐네.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지켜보면 허점을 잡히기 마련이야.”“내가 시간 날 때 사람 시켜서 알아봤거든. 근데 그 사모님이 정말로 용씨 사모님이더라고. 남편이 정말로 용씨였어.”“응.”여운초는 용씨 사모님이 여운별이라고 의심은 하고 있지만, 증거는 없었다.만약 용씨 사모님과 여운별이 같은 사람이라면 분명 음모일 것이다. 만약 음모라면 배후에는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이 모든 상황을 조종하고 있을 것이다.여운초는 10년 동안 어둠 속에서 살면서 인간성을 꿰뚫어 보게 되어 사람을 쉽게 믿지 못했다.지금 여운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다.그녀의 친어머니마저도 그녀가 죽기를 원했기에 그녀는 정말 사람을 쉽게 믿지 못했다.“나와 여운별은 20년 동안 자매로 지내면서 많은 일이 있었거든. 남들이 모르는 여운별의 사소한 습관들도 난 전부 잘 알고 있어. 아마 여운별 본인도 모를 수도 있어. 내가 몇 번만 더 만나고 접촉해 보면 분명 허점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 용씨 사모님도 우리 앞에 나타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만약 정말로 여운별이 가장한 거라면 이렇게 단기간에 여러 생활 습관은 고칠 수 없을 거야.”전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동일 인물이 옳든 아니든 용씨 사모님의 실체를 알기 전에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해.”“나도 알아. 아주버님과 형수님이 곧 돌아오실 거야.
그랬다. 전태윤도 하예정과 딸을 낳고 싶었다.특히 그가 매일 예지연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볼 때마다 늘 딸이 갖고 싶었다.예준성의 그 보배 딸은 점점 더 귀여워지고 있었다. 옥같이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에 눈도 어찌나 동그란지 여기저기 눈동자를 굴려서 볼 때면 앞으로 분명 똑똑한 아이로 자랄 수 있을 것이다.예준성도 매일 SNS에 그의 보물단지 예지연의 사진을 몇 번이고 올린다.물론, 매일 예씨 가문의 대표 SNS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예준성은 소중한 딸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매우 아까워했다. 심지어 A시 사람들은 예씨 가문의 손자 세대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있다.예지연이 너무 어려서 어른들의 보호를 잘 받고 있었기에 언론에 아이의 정면 거의 찍히지 못했다.전태윤도 예준성의 SNS를 볼 수 있는 것도 하예정과 모연정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기 때문이지, 그와 예준성의 친분으로는 볼 수 없었다.그는 예준성이 전씨 가문이 딸을 낳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의 소중한 딸을 자랑한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때때로 예준성이 영상을 보내면 전태윤은 예준성이 보낸 영상을 반복해서 보곤 한다. 심지어 영상 속으로 들어가 예지연을 집으로 데려가 그의 딸로 삼고 싶은 충동까지 느끼고 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그들은 할머니 일행이 돌아오면 모두 서원 리조트로 출발하려고 했다.어젯밤에 리조트로 돌아온 전이진 부부는 지금 드레스를 입어보고 있다.여운초가 연회에서 입을 드레스를 입어보고 있었고 전이 진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가끔 여운초가 남편에게 물었다.“이진 씨, 이 드레스를 입으면 어때?”“좋은데. 당신은 어떤 옷을 입어도 너무 예쁘고 너무 어울려.”전이진이 웃으며 말했다.그는 일어나서 여운초의 등 뒤로 가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여보,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우리 엄마와 함께 있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당신을 잘 보호할 수 있을 거야.”“처음으로 당신 아내의 신분으로 어머님을 따라
하예정은 무언가 떠오른 듯 전태윤에게 말했다. “태윤 씨, 우리도 리조트에 이틀 정도 지내러 갈까요? 주말에 출근도 안 하고 서점도 주말에는 문을 안 열잖아요.” 예전에는 서점만 운영할 때 주말에도 문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사업이 커지면서 서점은 그냥 하예정과 심효진의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돈을 더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애정으로 운영하는 곳이 된 것이다. 그래서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았다. 전태윤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 친구인 소정남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를 읽고 나서 그는 휴대폰을 하예정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래, 우리도 리조트에 가서 주말을 보내자.” “어머님, 아버님, 할머니도 오늘 가시니까 소정남 씨와 효진이도 불러서 점심 같이 먹어요. 샤부샤부 어때요? 오랜만에 샤부샤부 먹고 싶어요.” 하예정이 자주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는 것에 전현림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아무런 이의도 없이 받아들였다. 하예정이 자신의 어머니와 꽤 닮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한 것 같았다. 예전에 전씨 할머니가 일부러 하예정을 자신의 은인으로 만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덕분에 온 가족이 하예정에게 감사하게 되었고 전씨 할머니는 장남인 전태윤에게 하예정과 결혼하라고 했다. 전현림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머니의 수법은 정말 대단해. 손자들도 어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다행히 전태윤과 하예정은 사이가 좋았으며 지금은 아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하예정을 아끼는 전태윤은 당연히 아무런 이의도 없었다. 그는 소정남에게 답장을 보냈다. “예정아, 우리 아침 먹고 리조트로 가자. 소정남이랑 효진 씨도 리조트에서 만나자. 샤부샤부는 사람이 많아야 더 맛있잖아. 예준하 씨랑 소현 누나도 불러야겠다.” 전태윤이 제안했다. 하예정은 성소현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성소현은 사양했다. 그녀는 예준하와 A 시로 날아가 예진 리조트에서 며칠 지낼 예정이었다. 예준하를 계속 관
전태윤은 그를 속인 거였다. 하예정은 주우빈에게 답장을 보냈다. [눈이 왔구나. 우빈이 운이 좋네, 갔는데 바로 눈이 와서 진짜 눈을 볼 수 있게 됐구나.] [눈사람도 만들 수 있네. 이모는 지금까지 눈사람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어.] [아침 맛있게 먹었어? 옷 많이 입고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 [너희 셋째 작은 아버지는 여행 갔는데 열흘에서 보름 정도는 있어야 돌아올 거야. 네가 따라가면 유치원에 못 가잖아.] 다행히 전호영은 빨리 도망친 덕분에 주우빈에게 붙잡히지 않았다. 하예정의 답장을 받은 주우빈은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하예정과 주우빈은 30분 동안 통화를 했다. 통화를 마친 후, 전태윤은 중얼거렸다. “오늘에서야 우빈이가 그렇게 말을 잘하는 줄 알았네. 당신이랑 30분 동안이나 이야기하다니.” 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 “우빈이는 앞으로 수다쟁이가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따뜻한 남자가 될 거예요.” 따뜻한 남자에다 수다쟁이라니... “9시가 넘었네요. 부모님과 할머니도 일어나셨을 거예요. 우리도 얼른 서둘러야죠. 창빈 도련님은 오늘 원림성의 A 시로 가는 거예요?” 전태윤은 먼저 그녀의 옷을 가져오며 말했다. “월요일에 갈 거야. 이틀 정도는 집에서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려고.” 10여 분 후, 부부는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 거실 소파에는 전현림 혼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전씨 할머니와 장소민, 그리고 어제 형의 집에서 잔 전창빈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님.” 부부는 전현림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전현림은 부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일어났구나. 아침 식사 준비해 뒀어. 아직 따뜻할 거야. 먹으러 가.” “엄마랑 할머니는 어디 계세요?” 전태윤이 물었다. “창빈이는 아직 안 일어났어요?” “할머니가 엄마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셨는데 창빈이도 같이 갔어.” “이렇게 추운 날씨에 할머니가 산책하러 나가시다니.” 전태윤이 말했다. “할머니 말씀하시길,
“예진아, 늦었어. 얼른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야겠어. 내일 아침 같이 먹자.” 노동명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했다. 하예진은 그의 얼굴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동명 씨, 잘 자요.” “잘자.” 하예진은 그를 밀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직접 휠체어를 조종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달콤한 미소였다. 그날 밤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지나갔다. 주말 아침, 출근할 필요도 없고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평소 일찍 일어나던 전태윤도 침대에서 나오기 싫었다. 그는 침대에 늘어져 아내의 따뜻한 핫팩이 되어 주었다. 관성의 기온이 떨어져 정말 추웠지만 사실 기온은 아직 10도 정도였다. 낮에는 최대로 10도 중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관성 사람들은 너무 추웠다. 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인터넷으로 두꺼운 옷을 주문했다. 관성 사람들이 옷을 주문하면 판매자들은 재빨리 발송했다. 며칠 후 주문이 취소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관성의 추위는 찬 공기가 남하할 때 며칠 동안 추워지고 며칠이 지나면 다시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발송이 늦으면 날씨가 풀리고 나서 두꺼운 옷을 입을 필요가 없어지면서 주문을 취소하게 된다. 방에는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 가장 추운 며칠 동안 전태윤은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 그는 보일러를 켜면 하예정이 더워서 자신의 품에 안기지 않을까 봐 일부러 켜지 않았다. 그가 하예정이 자신의 품에 안기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건 절대 예정이에게 들키면 안 돼. 아니면 또 교활하다고 할 거야.’ ‘카톡!’ 하예정의 카톡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는 잠에서 깼지만 움직이기 싫어서 전태윤에게 말했다. “여보, 누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는지 좀 봐줘요. 너무 시끄러워요.” 전태윤이 말했다. “내 생각엔 우빈일 거야.” “우빈이는 엄마랑 있어서 이렇게 일찍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거예요. 아직 꿈나라에 있을지도 몰라요.”
시도 때도 없이 간식을 꺼내 그녀에게 먹여줬다. 영화가 끝날 즈음, 하예진은 그가 챙겨준 음식으로 배부르게 먹고는 그를 보고 말했다. “이제 됐네요. 야식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예요. 또 산책하면서 소화라도 좀 시켜야겠어요.” 노동명이 일어나자 하예진과 보디가드가 그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 노동명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를 밀면서 호텔까지 걸어가. 산책하면서 소화 시키는 거지.” 하예진도 웃으며 말했다. “그러죠 뭐. 그런데 걸어가면 길을 못 찾을지도 몰라요. 길을 잘못 들면 우리 둘 다 강성의 길거리에서 하룻밤을 돌아다녀야 할 거예요. 저 원망하지 마요.” “그럴 리 없어.” 지금은 밤이 더욱 깊어졌다. 영화관을 나오니 거리의 떠들썩함은 사라지고 점점 고요해지고 있었다. 하예진은 노동명을 천천히 밀며 걸었다. 보디가드들은 두 사람 뒤에서 조용히 그들을 보호했다. 걷다 보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동명 씨, 눈이 오네요. 빨리 차 타고 호텔로 돌아가요.” 어느 정도 걷자 하예진은 더 이상 배가 부르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고 눈이 오니 길이 미끄러워 운전하기 어려울까 걱정되었다. “그래.” 노동명은 아무런 이의 없이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에게는 그녀의 말이 곧 정답이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이내 그들은 이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주우빈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강일구는 주우빈과 함께 있었다. 하예진이 돌아오자 강일구는 방으로 돌아갔다. “우빈이 자고 있어?” 노동명은 방에 들어와 주우빈을 보았다. 아이가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불을 살짝 덮어주며 말했다. “보일러 온도는 적당하면 돼, 너무 높일 필요 없어. 우빈이가 땀을 흘리고 있잖아.” 아이는 더우면 이불을 걷어차는 버릇이 있었다. 하예진은 온도를 조금 낮췄다. 노동명은 주우빈의 땀을 닦아주고 이불을 살짝 걷어내 더 덥지 않게 했다. 노동명의 행동을 보며 하예진의 눈에는 애틋함이 가득했다. 그는 주
노동명은 남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등에 한 번, 손바닥에 한번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하예진은 다급하게 손을 뺐다. 그녀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영화관 안은 어두웠고 아무도 그녀를 주시하지 않아 그녀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동명 씨, 진지하게 좀 굴어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노동명은 늘 거칠고 대범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쳤으며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그런 그가 애교를 부리기 시작하면 그녀의 얼굴은 빨개졌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마치 어린 소녀처럼 변했다. 하예정은 언니가 두 번째 사춘기를 맞은 것 같다고 말했다. 노동명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진지해질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예진아, 앞으로 네가 휴식을 원할 때,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서 바람을 좀 쐬고 싶다면 나에게 말만 해줘. 아무리 바빠도 내 손에 있는 일을 내려놓고 너와 함께 나갈 수 있어. 일도 중요하지만 너의 행복이 더 중요해. 나는 돈도 충분히 있어. 예전에 번 돈이 너무 많아서 다 쓰지도 못했어. 지금 일을 하는 건 그냥 시간을 보내고 약간의 용돈을 버는 정도야. 나에게는 너와 우빈의 행복이 가장 중요해.” 하예진은 그를 꾸짖듯 말했다. “동명 씨가 말하는 약간의 용돈은 다른 사람들이 평생을 바쳐도 못 버는 금액이에요. 동명 씨,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하예진이 식당을 운영하며 매출이 좋아 월 순이익이 꽤 높다고 하더라도 그가 버는 돈에 비하면 그녀의 이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잇, 비교하니까 열 받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하며 온 힘을 다해야 그 정도 돈을 벌 수 있다. 일반 직장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노동명이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젊은 시절 고생하며 노력한 결과다. 노동명은 업계에서 십여 년을 뛰어다니며 오늘의 성과를 이루었다.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