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진은 동생과 더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우빈을 예정에게 넘기고 제부와 할머니한테까지 인사를 마친 뒤 곧바로 스쿠터를 타고 출근했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출근 시간이 15분 남았다.그녀는 처음에 다섯 바퀴 달릴 때 20분이 걸렸지만 요 며칠 적응했는지 속도가 좀 빨라졌다.‘그래, 아직 여유 있어.’스쿠터를 세우고 열쇠를 잠근 후 하예진은 다섯 바퀴 뛰러 갔다.그녀는 매일 아침 출근 전에 회사 앞의 작은 정원을 다섯 바퀴씩 뛴다. 노씨 그룹에서 이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처음엔 다들 구경거리로 삼았지만 슬슬 달리기 대열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그들은 종일 사무실에 앉아있다 보니 운동량이 적어 쉽게 살이 찌기 마련이다. 비록 하예진처럼 뚱뚱한 건 아니지만 출근 전에 두 바퀴 정도 달리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될 듯싶었다.하예진은 14분 만에 다섯 바퀴를 달리고 마지막 1분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오늘은 집에서 늦게 떠나다 보니 시간이 빠듯했지만 다행히 지각하진 않았다.“대표님.”“대표님.”뒤에서 울려 퍼지는 동료들의 인사 소리를 들어보니 노동명이 온 듯싶었다.하예진이 머리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노동명이 성큼성큼 들어왔다.그는 전태윤처럼 종일 정장 차림이 아니라 수수하게 옷을 차려입고 경호원들도 동행시키지 않았다. 틀을 차리지 않고 상사의 포스도 차리지 않으며 모든 직원의 인사에 똑같이 머리를 끄덕여주었다.하예진은 이곳에 출근한 며칠 동안 사석에서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바로 노동명에 관한 동료들의 의논이었다.노동명은 노씨 일가의 넷째 도련님이고 올해 나이 35세에 아직 싱글이다. 사춘기 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얼굴에 보란 듯이 칼자국을 남겼다.이런 그의 과거와 듬직하고 위엄이 넘치는 체구까지 더하니 전혀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35세지만 여자친구가 없는 그는 소문에 의하면 재벌가의 여인들이 그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싫어하고 더불어 그가 겪었던 질풍노도의 시기도 싫어하며 괜히 결혼 뒤에 가정폭력을 당할까 봐
노동명의 말을 들은 하예진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그녀는 식욕이 차 넘치고 종일 먹기만 할 뿐 운동할 생각이 없어서 점점 더 뚱뚱해졌다.“알겠습니다, 대표님. 수습 기간에 반드시 살을 빼겠습니다.”앞으론 아침뿐만 아니라 저녁에도 달리기하기로 다짐했다.‘난 꼭 할 수 있어. 다이어트 성공하고 말 거야.’“그래, 수습 기간을 한 달로 줄일 테니까 앞으로 잘해.”노동명은 간결한 이 한마디만 남긴 채 하예진을 남겨두고 그의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건장한 체구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말끔히 사라졌다.그가 떠난 후에야 하예진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는데 상사가 한창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하예진은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재무팀으로 향했다.그녀는 전에 재무총괄직을 맡았었고 지금은 또 노동명과 친분이 있는 것 같아 재무총괄 담당자가 늘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비록 아직은 재무팀의 신입사원이지만 조만간 본인 자리까지 꿰차고 올라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하여 암암리에서 하예정에게 수많은 함정을 파놓아 그녀가 업무상 실수를 저지르게 하려고 애를 썼다. 수습 기간도 채우지 못한 채 실격을 당하여 떨어져 나앉게 할 작정이었다.만약 예전의 하예진이라면 동료들에게 이런 괴롭힘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했을 때 진작 때려치웠을 것이다.다만 지금은 꾹 참아야 한다. 적어도 이혼하고 우빈의 양육권을 가져올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그녀가 나간 후 재무팀의 다른 직원들이 총괄 담당자 곁으로 다가가 수군거렸다.“제 주제도 모르고 감히 대표님께 끼를 부려요? 게다가 노 대표님도 왜 예진 씨한테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는 거예요?”하예진은 노동명과 대화할 때 그를 정면으로 보고 있어 다들 그녀가 대표님께 야릇한 눈빛으로 끼를 부렸을 거라고 떠들어댔다.“예진 씨는 결혼도 했고 두 살짜리 아들도 있어.”재무총괄 담당자가 담담하게 말했다.“대표님은 예진 씨를 좋아할 리 없어.”“물론이죠. 꼴 좀 보세요. 대표님이
...서교 펜션으로 가는 길에서 하예정은 심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효진아, 나 오늘 할머니 모시고 바람 쐬러 가. 가게 하루만 너한테 맡길게.”심효진이 웃으며 대답했다.“알았어. 할머니 즐겁게 해드려. 가게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어차피 내일이 주말이라 가게도 문을 열지 않는다. 굳이 연다면 하예정이 가게 안에서 출고를 다그칠 것이다.통화를 마친 후 심효진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예정이 결혼생활이 점점 더 다채로워지네.”“누나.”이때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환하던 심효진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는 김진우를 바라보며 하찮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진우야, 누나가 저번에 한 말 귓등으로 흘려들었어? 가게로 찾아오지 말랬잖아. 너랑 예정이는 불가능하다고!”며칠 안 본 사이에 김진우는 훌쩍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다크서클도 심하고 수염까지 삐죽삐죽 자라났다. 22살 젊은 남자의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사촌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효진도 매우 속상했다.사랑의 상처는 이토록 혹독한 법이었다.김진우는 수년간 하예정을 짝사랑해왔기에 당장 포기하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누나.”김진우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나 며칠 동안 가게에 찾아오지 않으려고 애써 참아봤는데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마음을 가라앉히면 예정 누나가 저절로 생각나. 나 예정 누나 너무 사랑하나 봐. 이젠 어떡해? 누나 나 좀 도와줘!”김진우는 심효진의 양쪽 어깨를 꽉 잡고 애원 섞인 말투로 말했다.“나 누나 동생이잖아. 누나 말곤 날 도와줄 사람이 없어.”심효진은 자신의 어깨를 꽉 잡은 김진우의 손을 내려놓으며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김진우, 누나가 몇 번을 얘기해? 예정이는 이미 결혼했어. 유부녀를 아무리 사랑해봤자 이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아. 그러니까 네가 마음 접어. 예정이는 너랑 안 어울려. 널 사랑할 리도 없고.”이어서 그녀는 또 사악한 눈빛으로 김진우에게 경고장을 날렸다.“너 감히 뻔뻔스럽게
김씨 일가는 심효진 고모의 시댁이다. 심효진은 어릴 때부터 고모가 그 집안에서 겪은 모진 고통을 직접 목격해왔다. 심씨 일가는 집 철거로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가게도 꽤 많이 세를 주어 자산이 무려 200억에 가까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모는 재벌가에 시집가기가 너무 어려웠다.그러니 하예정은 더 말할 것도 없다.심효진은 친구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솔직하게 현실을 얘기했을 뿐이다.“예정 누나는?”“남편이랑 데이트하러 갔어.”김진우는 순간 사색이 되었다.곧이어 그는 방안 곳곳을 수색하며 하예정의 종적을 찾아 헤맸다. 심효진은 그가 실컷 찾도록 내버려 두었다.하예정을 찾지 못한 김진우는 그제야 사촌 누나의 말을 믿었다. 예정 누나는 진짜 가게에 없었다.그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여 가게를 떠났다.심효진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동생이 하루빨리 단념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사랑 때문에 바보처럼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말길 바랐다.두 사람 사이에 낀 심효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깊은 감정의 늪에 빠진 동생도 안쓰러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친구를 지켜줘야 했다. 김진우가 하예정의 결혼생활에 끼어드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다.서교 펜션.전태윤과 할머니는 전씨 일가의 어르신과 도련님의 신분으로 찾아온 게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매표소로 향했다.이 펜션은 대외적으로 운영하는 곳이라 입장권을 사야 들어갈 수 있다.전태윤은 입장권을 끊어 하예정에게 건네더니 그녀의 품에서 주우빈을 안아왔다.“우빈이 내가 안을게.”하예정이 힘들면 안 되니까.“우빈이 유모차 가져와서 안에 앉혀야겠어요. 유모차 밀면 훨씬 간편할 것 같아요.”전태윤은 곧바로 차 키를 숙희 아주머니께 건넸다. 아주머니는 차에서 주우빈의 유모차를 내렸다.검표를 마친 후 그들 일행은 펜션으로 들어갔다.펜션에 들어서자마자 하예정은 이곳의 수려한 풍경에 확 사로잡혔다. 그녀는 안으로 걸어가면서 물었다.“여긴 원림 식인가요?”“맞아. 원림
하예정은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본능적으로 전태윤을 끌고 갔다.이건 절호의 기회였다.전태윤도 곧장 그녀의 손을 잡았다.두 사람은 서서히 걸어가며 깍지를 꼈다.와이프와 손잡고 걸으니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전태윤은 연애 경험도 없고 또 하필 츤데레 같은 남자라 와이프와 손을 잡으니 그 무엇보다 기분이 달콤했다.하예정은 서로 맞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전태윤이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있었다.고개 들어 전태윤을 바라보니 여전히 차갑고 도도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구시렁댔다.‘이젠 대놓고 스킨십하네.’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몇 번 그렸다. 전태윤이 힐긋 쳐다볼 때 그녀도 아무렇지 않은 듯 앞만 보며 걸어갔다.대놓고 스킨십하는 건 하예정도 만만치 않았다.전태윤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그는 하예정의 이런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쑥스러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그녀가 너무 좋았다.“처형의 일이 다 해결되거든 나중에 이리로 와서 며칠 묵자.”그는 먼 곳의 나무집 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저런 집에 살면 참 괜찮을 것 같아.”“약속 지켜요.”“내가 언제 약속 어긴 적 있어?”하예정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날 속여도 당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나도 딱히 어쩔 수 없잖아요.”전태윤은 문득 할 말을 잃었다.그는 정말 하예정을 감쪽같이 속였으니까.갑자기 침묵한 전태윤을 바라보며 하예정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설마 진짜 날 속인 건 아니죠?”전태윤은 무슨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때마침 하예정의 휴대폰이 울리며 그를 한 번 구해줬다. 전태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소현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예정 씨, 오늘 가게 안 나갔어요?”성소현이 서점으로 찾아갔지만 하예정이 보이지 않아 전화를 걸었다.“네, 오늘 하루 바람 쐬러 나왔어요.”성소현이 흥미진진하게 물었다.“어디로 갔는데요? 나도 마침 한가한데 주소 보내줘요. 바로 갈게요. 우리 함께 놀아요.”“서교 펜션에
하예정은 성소현이 대표님께 감정이 깊다는 걸 알고 있어 이 화제에 관하여 더 많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성소현만 마음 아파할까 봐 그녀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한참 얘기를 나눈 후 성소현은 지금 해야 할 일들에 관해 말을 꺼냈다.“큰 오빠는 내가 한가할 때마다 대표님을 떠올리며 힘들어할까 봐 일을 좀 맡겼어요. 나보고 최선을 다해 이모를 찾아보라고 했어요.”“소현 씨 이모요?”하예정은 성씨 집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전씨 일가에 버금가는 재벌 가문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성씨 일가에서 유일하게 알고 지내는 사람이 바로 성소현이었다.“예정 씨, 실은 우리 엄마랑 예정 씨네 자매분 매우 닮았어요. 우리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아무 친척도 우리 엄마랑 이모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어요. 결국 엄마랑 이모는 보육원에서 한동안 생활했어요. 우리 이모가 그땐 나이가 어려 철들지 않았고 또 귀엽게 생기다 보니 결혼 뒤 아이를 낳지 못한 부잣집에 입양됐어요.”“엄마는 계속 보육원에 남아 있었는데 늘 이모를 그리워하며 지냈어요. 나중에 커서 능력이 생기자 이모를 찾아 나섰지만 그 시절엔 사람 한 명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여 게시물을 올리고 이모를 찾았으면 훨씬 쉬웠을 텐데 말이죠.”“우리 엄마는 아직도 이모를 못 찾았어요. 얼마 전엔 그 당시 이모를 입양했던 부부를 찾게 되어 이모도 보게 될 줄 알고 다들 엄청 기뻐했는데 정작 엄마랑 함께 그 집으로 찾아가니 부부가 이모의 행방을 모르더라고요.”하예정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어떻게 모를 수 있죠? 그분들이 소현 씨 이모님을 입양했잖아요. 혹시 소현 씨 이모랑 엄마가 만나는 게 두려워 일부러 숨긴 건 아닐까요?”“아니요.”성소현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우리 이모를 입양한 지 1년 만에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어요. 그때부터 이모가 눈엣가시로 여겨져 모질게 학대했어요. 심지어 이모가 커서 그들이 낳은 자식과 재산을 뺏을까
“우리 엄마랑 이모가 헤어질 때 둘이서 사진 한 장 찍었는데 각자 한 장씩 챙겼대요. 이후에 사진으로 서로를 확인하려 했나 봐요. 다만 아쉽게도 이모를 처음 입양했던 부부가 그 사진을 불태워버렸어요. 엄마는 아직 사진을 잘 간직하고 있지만 수십 년이 지나다 보니 아무리 잘 보관해도 어렴풋해지기 마련이에요. 오빠도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었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었어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에요. 이모가 낳은 자식들이 이모를 쏙 빼닮았고 또 우연히 엄마와 마주쳐야만 겨우 찾아낼 수 있어요.”그렇지 않으면 찾아낼 희망이 없다.다만 우연히 마주칠 기회도 거의 0에 가깝다.“하늘은 간절한 자를 도와줘요. 소현 씨네 가족분들 반드시 이모님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하예정은 성소현에게 힘내라는 말만 해줄 뿐 딱히 도움이 되지 못했다.성씨 일가는 재력, 권력, 인맥까지 전부 갖추고 있지만 수년을 찾아 헤매도 이모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하예정처럼 권력도, 세력도, 인맥도 없는 자가 대체 무슨 능력으로 찾아준단 말인가?“하루빨리 이모를 찾아서 엄마와 만나게 해드렸으면 좋겠어요. 예정 씨, 주변에 혹시 누군가 입양된 분이 계시거든 꼭 나한테 알려요. 일말의 가능성도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하예정은 문득 자신의 어머니가 떠올랐다.그녀가 성소현에게 물었다.“소현 씨 이모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죠?”“54살이요. 우리 엄마랑 이모는 50년을 떨어져 살았어요.”하예정이 잠시 침묵한 후 말을 이었다.“우리 엄마도 만약 살아계시면 54살일 텐데. 실은 우리 엄마도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께서 낳은 친자식이 아니거든요. 우연히 엄마를 발견해서 길러주셨어요. 엄마는 생전에 나랑 우리 언니만 낳으셨고요. 소현 씨도 우리 언니 봤었죠.”입양된 사람들이 많고 많아 하예정은 자신의 어머니가 성소현의 이모와 겹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성소현도 하예정 자매를 만났었는데 언니 하예진이 유난히 엄마를 많이 닮았다. 성소현은 그런 하예진을 마주하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니 당연히
성소현이 감격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예정 씨가 정말 우리 이모를 찾아준다면 우리 가족의 은인이나 다름없어요. 저희가 무조건 보답해드릴게요.”“우린 친구니까 도울 만큼 도와야죠. 나도 엄마 생각나서 그래요. 우리 엄마가 살아계신다면 나랑 언니도 최선을 다해 엄마의 가족을 찾아드렸을 거예요.”엄마가 돌아가신 지 십수 년이 지나 하예정은 이젠 엄마의 얼굴도 희미해졌다. 다행히 하예진이 엄마를 매우 닮아 언니를 보면서 엄마의 모습을 겨우 되새긴다.“예정 씨 데이트 마저 해요. 내가 괜히 방해만 된 것 같네요. 즐겁게 놀다 와요. 결혼식에 나 꼭 불러요. 무조건 참석할 거예요.”성소현은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또 그 성소현 씨야?”전태윤이 무심코 물었다.“맞아요. 소현 씨도 원래 이리로 오려 했는데 내가 태윤 씨랑 함께 있다고 하니까 안 오겠다더라고요.”전태윤이 속으로 구시렁댔다.‘그런 눈치는 있네!’“소현 씨 참 괜찮은 분인데, 태윤 씨네 대표님...”전씨 그룹의 도련님이 결혼반지를 낀 걸 되새기며 하예정은 저도 몰래 한숨이 새어 나왔다.“두 분 참 인연이 안 닿는단 말이죠.”“두 사람 무슨 얘기 했어? 얼핏 들어보니 우리 장모님을 언급하는 것 같던데?”전태윤이 금세 화제를 돌렸다.그는 더이상 자신의 가십거리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하예정은 그와 손잡고 나란히 걸으며 대답했다.“소현 씨는 지금 최선을 다해 이모를 찾고 있대요.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에요. 종일 전씨 그룹 도련님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요. 소현 씨 어머니가 보육원에서 자랐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여동생이 한 분 계셨는데 입양됐대요. 그런데 여러 번 입양되다 보니 이젠 소식이 끊겼대요.”“우리 엄마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입양해서 키우셨어요. 하지만 엄마를 찾는 가족은 없었죠. 어린 시절 기억도 별로 없고요. 그전에 입양했던 양부모가 엄마를 너무 학대해서 못 견디고 도망친 것만 기억이 난댔어요. 그때 엄마는 고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