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이 잠에서 깼을 때 하예정은 이미 밖에 나가버렸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나랑 잤으면 내가 깨어날 때까지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니야?”하예정이 그 말을 들었으면 어이가 없어 뒷목을 잡을 것이다.‘저기요, 태윤 씨,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건 아니죠. 누가 누구랑 자요. 우린 단지 한 침대에서 잠을 잤을 뿐이라고요.’전태윤도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온 집안에는 반려동물 강아지와 고양이를 제외하곤 세 여인 모두 보이지 않았다.보아하니 장 보러 간 게 틀림없었다.전태윤은 발코니의 그네에 앉아 어젯밤 아내와 함께 보낸 기억을 되새기며 몇 마디 요약했다.‘비록 적응되지 않지만 은근히 기대되네.’잠시 후 하예정 일행이 돌아왔다.그녀는 식자재 말고도 침구 용품까지 사 왔다. 가구점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아 새 침대를 고르지 못했는데 이따가 다시 나가서 침대를 산 후 손님방에 놓아야만 안심하고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아 참, 오늘 출근 안 하지.’전태윤은 오늘 휴가 내고 그녀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바람 쐬러 펜션에 가기로 했다. 할머니를 즐겁게 해드려야 하니까.인기척 소리를 들은 전태윤은 그네에서 내려 방안으로 들어왔다. 와이프가 크고 작은 봉투를 한가득 들고 있었는데 죄다 침구 용품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한없이 짙어졌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태윤아, 너 아직 집에 있었어? 출근한 줄 알았더니.”어르신은 기대에 못 미치는 손주 녀석을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봤다.‘못난 놈.’“할머니, 나 오늘 하루 휴가 냈어요. 이따 아침 먹고 광명 아파트에 우빈이 데리러 갔다가 우리 함께 서교에 있는 펜션으로 바람 쐬러 가요.”전태윤은 할머니의 싸늘한 눈빛을 뒤로한 채 가까이 다가오며 오늘의 스케줄을 얘기했다.그는 하예정의 손에 든 침구 용품까지 들어서 빈 손님방에 내려놓았다.그의 말을 들은 할머니가 되물었다.“며칠 있을 건데?”“딱 오늘 하루요.”“거긴 펜션이야. 하루만 가서 뭘 논
하예정은 순간 가슴이 움찔거렸다. 이혼할 때 부부 중 한쪽이 재산을 빼돌리는 사례가 너무 많았다.주씨 집안 사람들의 성품을 생각해보니 주형인도 얼마든지 재산을 빼돌릴 가능성이 있었다.“할머니, 저 꼭 언니한테 얘기할게요.”할머니가 대답했다.“도움 필요하면 태윤이한테 말해. 얘가 대신 알아봐 줄 거야.”“할머니, 정말 도움이 절박하면 태윤 씨한테 가장 먼저 얘기할 거예요.”할머니는 흡족한 얼굴로 하예정을 바라봤다.전태윤은 눈썹을 살짝 들썩거렸지만 할머니가 쳐다보자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바꿨다. 할머니는 속으로 그를 구박했다.‘그래, 계속 아닌 척해. 네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아침 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함께 광명 아파트로 출발했다.하예진은 이미 아들을 데리고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연 며칠 이모와 함께 있으니 주우빈도 이젠 습관이 됐는지 오늘은 울며 떼를 쓰지 않았다.“할머님.”어르신을 본 하예진이 바로 인사를 올렸다.할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예진에게 화이팅하는 동작을 해 보였다.하예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동생의 시댁 식구들은 그녀의 시댁보다 몇 배는 더 좋았다.하예정은 조카를 안고 언니에게 말했다.“언니, 주형인 수입이 얼마인지 알아? 재산 빼돌리지 못하게 언니가 잘 감시해야 해. 내일 우리 다 함께 올 테니까 기죽을 거 없어. 하늘이 무너져도 우리가 함께 받쳐줄게.”하예진이 대답했다.“대충 알고 있어. 월급은 얼마 남지 않지만 부업이 있어. 몰래 주서인네 가족을 돕지 않는다면 적금이 대략 3억 정도 될 거야.”그밖에도 서현주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도 하예진에게 영수증이 있으니 이혼소송을 걸면 전부 돌려받을 수 있다.주형인은 아직 하예진의 남편이기에 그의 재산은 혼후 재산에 속한다. 하예진의 동의 없이 부부 공동 재산으로 서현주에게 그토록 비싼 액세서리를 선물했으니 아내가 돌려받는 건 너무나 지당한 일이었다.“그 인간 사악해서 적금을 제 명의로 해놓지 않았을 수도 있어.”하예진이 아무 말도 하지
하예진은 동생과 더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우빈을 예정에게 넘기고 제부와 할머니한테까지 인사를 마친 뒤 곧바로 스쿠터를 타고 출근했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출근 시간이 15분 남았다.그녀는 처음에 다섯 바퀴 달릴 때 20분이 걸렸지만 요 며칠 적응했는지 속도가 좀 빨라졌다.‘그래, 아직 여유 있어.’스쿠터를 세우고 열쇠를 잠근 후 하예진은 다섯 바퀴 뛰러 갔다.그녀는 매일 아침 출근 전에 회사 앞의 작은 정원을 다섯 바퀴씩 뛴다. 노씨 그룹에서 이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처음엔 다들 구경거리로 삼았지만 슬슬 달리기 대열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그들은 종일 사무실에 앉아있다 보니 운동량이 적어 쉽게 살이 찌기 마련이다. 비록 하예진처럼 뚱뚱한 건 아니지만 출근 전에 두 바퀴 정도 달리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될 듯싶었다.하예진은 14분 만에 다섯 바퀴를 달리고 마지막 1분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오늘은 집에서 늦게 떠나다 보니 시간이 빠듯했지만 다행히 지각하진 않았다.“대표님.”“대표님.”뒤에서 울려 퍼지는 동료들의 인사 소리를 들어보니 노동명이 온 듯싶었다.하예진이 머리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노동명이 성큼성큼 들어왔다.그는 전태윤처럼 종일 정장 차림이 아니라 수수하게 옷을 차려입고 경호원들도 동행시키지 않았다. 틀을 차리지 않고 상사의 포스도 차리지 않으며 모든 직원의 인사에 똑같이 머리를 끄덕여주었다.하예진은 이곳에 출근한 며칠 동안 사석에서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바로 노동명에 관한 동료들의 의논이었다.노동명은 노씨 일가의 넷째 도련님이고 올해 나이 35세에 아직 싱글이다. 사춘기 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얼굴에 보란 듯이 칼자국을 남겼다.이런 그의 과거와 듬직하고 위엄이 넘치는 체구까지 더하니 전혀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35세지만 여자친구가 없는 그는 소문에 의하면 재벌가의 여인들이 그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싫어하고 더불어 그가 겪었던 질풍노도의 시기도 싫어하며 괜히 결혼 뒤에 가정폭력을 당할까 봐
노동명의 말을 들은 하예진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그녀는 식욕이 차 넘치고 종일 먹기만 할 뿐 운동할 생각이 없어서 점점 더 뚱뚱해졌다.“알겠습니다, 대표님. 수습 기간에 반드시 살을 빼겠습니다.”앞으론 아침뿐만 아니라 저녁에도 달리기하기로 다짐했다.‘난 꼭 할 수 있어. 다이어트 성공하고 말 거야.’“그래, 수습 기간을 한 달로 줄일 테니까 앞으로 잘해.”노동명은 간결한 이 한마디만 남긴 채 하예진을 남겨두고 그의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건장한 체구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말끔히 사라졌다.그가 떠난 후에야 하예진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는데 상사가 한창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하예진은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재무팀으로 향했다.그녀는 전에 재무총괄직을 맡았었고 지금은 또 노동명과 친분이 있는 것 같아 재무총괄 담당자가 늘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비록 아직은 재무팀의 신입사원이지만 조만간 본인 자리까지 꿰차고 올라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하여 암암리에서 하예정에게 수많은 함정을 파놓아 그녀가 업무상 실수를 저지르게 하려고 애를 썼다. 수습 기간도 채우지 못한 채 실격을 당하여 떨어져 나앉게 할 작정이었다.만약 예전의 하예진이라면 동료들에게 이런 괴롭힘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했을 때 진작 때려치웠을 것이다.다만 지금은 꾹 참아야 한다. 적어도 이혼하고 우빈의 양육권을 가져올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그녀가 나간 후 재무팀의 다른 직원들이 총괄 담당자 곁으로 다가가 수군거렸다.“제 주제도 모르고 감히 대표님께 끼를 부려요? 게다가 노 대표님도 왜 예진 씨한테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는 거예요?”하예진은 노동명과 대화할 때 그를 정면으로 보고 있어 다들 그녀가 대표님께 야릇한 눈빛으로 끼를 부렸을 거라고 떠들어댔다.“예진 씨는 결혼도 했고 두 살짜리 아들도 있어.”재무총괄 담당자가 담담하게 말했다.“대표님은 예진 씨를 좋아할 리 없어.”“물론이죠. 꼴 좀 보세요. 대표님이
...서교 펜션으로 가는 길에서 하예정은 심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효진아, 나 오늘 할머니 모시고 바람 쐬러 가. 가게 하루만 너한테 맡길게.”심효진이 웃으며 대답했다.“알았어. 할머니 즐겁게 해드려. 가게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어차피 내일이 주말이라 가게도 문을 열지 않는다. 굳이 연다면 하예정이 가게 안에서 출고를 다그칠 것이다.통화를 마친 후 심효진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예정이 결혼생활이 점점 더 다채로워지네.”“누나.”이때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환하던 심효진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는 김진우를 바라보며 하찮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진우야, 누나가 저번에 한 말 귓등으로 흘려들었어? 가게로 찾아오지 말랬잖아. 너랑 예정이는 불가능하다고!”며칠 안 본 사이에 김진우는 훌쩍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다크서클도 심하고 수염까지 삐죽삐죽 자라났다. 22살 젊은 남자의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사촌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효진도 매우 속상했다.사랑의 상처는 이토록 혹독한 법이었다.김진우는 수년간 하예정을 짝사랑해왔기에 당장 포기하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누나.”김진우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나 며칠 동안 가게에 찾아오지 않으려고 애써 참아봤는데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마음을 가라앉히면 예정 누나가 저절로 생각나. 나 예정 누나 너무 사랑하나 봐. 이젠 어떡해? 누나 나 좀 도와줘!”김진우는 심효진의 양쪽 어깨를 꽉 잡고 애원 섞인 말투로 말했다.“나 누나 동생이잖아. 누나 말곤 날 도와줄 사람이 없어.”심효진은 자신의 어깨를 꽉 잡은 김진우의 손을 내려놓으며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김진우, 누나가 몇 번을 얘기해? 예정이는 이미 결혼했어. 유부녀를 아무리 사랑해봤자 이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아. 그러니까 네가 마음 접어. 예정이는 너랑 안 어울려. 널 사랑할 리도 없고.”이어서 그녀는 또 사악한 눈빛으로 김진우에게 경고장을 날렸다.“너 감히 뻔뻔스럽게
김씨 일가는 심효진 고모의 시댁이다. 심효진은 어릴 때부터 고모가 그 집안에서 겪은 모진 고통을 직접 목격해왔다. 심씨 일가는 집 철거로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가게도 꽤 많이 세를 주어 자산이 무려 200억에 가까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모는 재벌가에 시집가기가 너무 어려웠다.그러니 하예정은 더 말할 것도 없다.심효진은 친구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솔직하게 현실을 얘기했을 뿐이다.“예정 누나는?”“남편이랑 데이트하러 갔어.”김진우는 순간 사색이 되었다.곧이어 그는 방안 곳곳을 수색하며 하예정의 종적을 찾아 헤맸다. 심효진은 그가 실컷 찾도록 내버려 두었다.하예정을 찾지 못한 김진우는 그제야 사촌 누나의 말을 믿었다. 예정 누나는 진짜 가게에 없었다.그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여 가게를 떠났다.심효진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동생이 하루빨리 단념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사랑 때문에 바보처럼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말길 바랐다.두 사람 사이에 낀 심효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깊은 감정의 늪에 빠진 동생도 안쓰러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친구를 지켜줘야 했다. 김진우가 하예정의 결혼생활에 끼어드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다.서교 펜션.전태윤과 할머니는 전씨 일가의 어르신과 도련님의 신분으로 찾아온 게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매표소로 향했다.이 펜션은 대외적으로 운영하는 곳이라 입장권을 사야 들어갈 수 있다.전태윤은 입장권을 끊어 하예정에게 건네더니 그녀의 품에서 주우빈을 안아왔다.“우빈이 내가 안을게.”하예정이 힘들면 안 되니까.“우빈이 유모차 가져와서 안에 앉혀야겠어요. 유모차 밀면 훨씬 간편할 것 같아요.”전태윤은 곧바로 차 키를 숙희 아주머니께 건넸다. 아주머니는 차에서 주우빈의 유모차를 내렸다.검표를 마친 후 그들 일행은 펜션으로 들어갔다.펜션에 들어서자마자 하예정은 이곳의 수려한 풍경에 확 사로잡혔다. 그녀는 안으로 걸어가면서 물었다.“여긴 원림 식인가요?”“맞아. 원림
하예정은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본능적으로 전태윤을 끌고 갔다.이건 절호의 기회였다.전태윤도 곧장 그녀의 손을 잡았다.두 사람은 서서히 걸어가며 깍지를 꼈다.와이프와 손잡고 걸으니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전태윤은 연애 경험도 없고 또 하필 츤데레 같은 남자라 와이프와 손을 잡으니 그 무엇보다 기분이 달콤했다.하예정은 서로 맞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전태윤이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있었다.고개 들어 전태윤을 바라보니 여전히 차갑고 도도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구시렁댔다.‘이젠 대놓고 스킨십하네.’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몇 번 그렸다. 전태윤이 힐긋 쳐다볼 때 그녀도 아무렇지 않은 듯 앞만 보며 걸어갔다.대놓고 스킨십하는 건 하예정도 만만치 않았다.전태윤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그는 하예정의 이런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쑥스러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그녀가 너무 좋았다.“처형의 일이 다 해결되거든 나중에 이리로 와서 며칠 묵자.”그는 먼 곳의 나무집 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저런 집에 살면 참 괜찮을 것 같아.”“약속 지켜요.”“내가 언제 약속 어긴 적 있어?”하예정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날 속여도 당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나도 딱히 어쩔 수 없잖아요.”전태윤은 문득 할 말을 잃었다.그는 정말 하예정을 감쪽같이 속였으니까.갑자기 침묵한 전태윤을 바라보며 하예정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설마 진짜 날 속인 건 아니죠?”전태윤은 무슨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때마침 하예정의 휴대폰이 울리며 그를 한 번 구해줬다. 전태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소현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예정 씨, 오늘 가게 안 나갔어요?”성소현이 서점으로 찾아갔지만 하예정이 보이지 않아 전화를 걸었다.“네, 오늘 하루 바람 쐬러 나왔어요.”성소현이 흥미진진하게 물었다.“어디로 갔는데요? 나도 마침 한가한데 주소 보내줘요. 바로 갈게요. 우리 함께 놀아요.”“서교 펜션에
하예정은 성소현이 대표님께 감정이 깊다는 걸 알고 있어 이 화제에 관하여 더 많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성소현만 마음 아파할까 봐 그녀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한참 얘기를 나눈 후 성소현은 지금 해야 할 일들에 관해 말을 꺼냈다.“큰 오빠는 내가 한가할 때마다 대표님을 떠올리며 힘들어할까 봐 일을 좀 맡겼어요. 나보고 최선을 다해 이모를 찾아보라고 했어요.”“소현 씨 이모요?”하예정은 성씨 집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전씨 일가에 버금가는 재벌 가문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성씨 일가에서 유일하게 알고 지내는 사람이 바로 성소현이었다.“예정 씨, 실은 우리 엄마랑 예정 씨네 자매분 매우 닮았어요. 우리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아무 친척도 우리 엄마랑 이모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어요. 결국 엄마랑 이모는 보육원에서 한동안 생활했어요. 우리 이모가 그땐 나이가 어려 철들지 않았고 또 귀엽게 생기다 보니 결혼 뒤 아이를 낳지 못한 부잣집에 입양됐어요.”“엄마는 계속 보육원에 남아 있었는데 늘 이모를 그리워하며 지냈어요. 나중에 커서 능력이 생기자 이모를 찾아 나섰지만 그 시절엔 사람 한 명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여 게시물을 올리고 이모를 찾았으면 훨씬 쉬웠을 텐데 말이죠.”“우리 엄마는 아직도 이모를 못 찾았어요. 얼마 전엔 그 당시 이모를 입양했던 부부를 찾게 되어 이모도 보게 될 줄 알고 다들 엄청 기뻐했는데 정작 엄마랑 함께 그 집으로 찾아가니 부부가 이모의 행방을 모르더라고요.”하예정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어떻게 모를 수 있죠? 그분들이 소현 씨 이모님을 입양했잖아요. 혹시 소현 씨 이모랑 엄마가 만나는 게 두려워 일부러 숨긴 건 아닐까요?”“아니요.”성소현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우리 이모를 입양한 지 1년 만에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어요. 그때부터 이모가 눈엣가시로 여겨져 모질게 학대했어요. 심지어 이모가 커서 그들이 낳은 자식과 재산을 뺏을까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