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은 아까 놀란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지만 여전히 사리에 밝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말했다.“그렇다면 축복할게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하정숙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서서히 놓았다.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어머님, 저 먼저 갈게요. 아까는 지진인 것 같은데 조심하세요.”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주현이 갈 때까지 하정숙은 반응하지 못했다.반면 신유리는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서준혁의 손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오므리더니 그를 밀어냈다.서준혁은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가뜩이나 새까만 눈동자는 그녀를 빨아들일 것처럼 깊었다.멀어져가는 주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 얼굴의 웃음은 온데간데 사라진 채 냉담함만이 남았다.주현은 어릴 때부터 시한에서 자랐다. 이 정도 지진에 두려워할 리 없었다.그녀는 아까 다람쥐가 신유리한테 달려드는 순간 서준혁의 눈빛에 스쳐 가는 감정과 본능적으로 신유리의 배를 감싸 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주현은 심리학을 전공한 데다가 친구에게서 들은 정보까지 감안하면 신유리의 아이가 서준혁의 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래서 이 아이를 남겨서는 안 된다.아무리 놀아도 되지만 아이를 가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어떻게 처리할지는 서씨 가문의 일이었다.주현은 홀가분한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문선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진 때문에 그들은 다시 펜션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큰 규모의 지진은 아니었지만 신유리와 같이 지진을 처음 겪어본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여진 가능성이 있어 섣불리 하산할 엄두가 없었다. 잠시 펜션에서 머물다가 다음날 다시 성남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곡연은 신유리의 곁에 앉은 채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신유리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언니, 혹시 어디 불편하진 않죠? 아까 많이 놀랐을 텐데. 우리 엄마가 임산부는 놀라면 안 된다고 했어요.”신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편한 곳은 없었지만 아까 다람쥐가 갑자기 달려들 때 확실
다음날, 시한을 떠날 때 날씨는 맑았다. 비행기가 성남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1시였다. 그들은 함께 불고기를 먹으러 가기로 약속했다. 신유리는 착륙하고 핸드폰을 켜자마자 신기철이 걸어온 몇 개의 부재중 전화와 남긴 메시지가 떴는데 성남에 온다고 했다. 신유리는 그가 성남에 오든 말든 관심이 없어 메시지를 삭제하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휴가를 마치고 오니 연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 쌓여있었다. 그날 저녁, 신유리는 성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작업실로 가서 여러 고객의 문제를 처리했다. 그녀는 곧 부산시로 돌아가야 하기에 해야 할 일을 마저 끝내야 했다. 곡연은 그녀의 몰입 속도에 감탄했다. “언니처럼 명절증후군이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이러다 저 먼저 갈 것 같아요.”비록 그녀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사실 손에 서류를 잔뜩 들고 있었다. “먼저 갈게요. 빨리 서류를 보내야 해서.”곡연이 나가자 별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이신은 아침 일찍부터 부서 사람들에게 불려 가 회의에 참석했고 별장에는 신유리만 남았다. 그러나 곡연은 나간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안색이 어두워진 채 돌아왔다. “언니 아버지가 언니를 만나겠다고 밖에 있어요. 지금 경비원이 막고 있어요.”신유리는 어리둥절해서 핸드폰을 봤는데 어젯밤 신기철이 성남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있었다.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경비원에게 부탁해 줘.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신기철은 그녀를 좋은 일로 찾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시한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신유리는 지금 신기철을 전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이곳은 고급 별장 구역이라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지 못했다. 신유리는 곡연에게 말한 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신기철이 떠났다고 생각했다. 다만 오후에 은행에 가려고 문을 나서자마자 신기철을 마주쳤다. 신기철은 옷도 갈아입지 않아 먼지가 가득했다. 그는 신유리의 앞을 가로막으며 안색도 좋지 않고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밖에서 하루 종일 기다
의사 사무실에서 나온 신유리는 머리가 하얘졌다. 그녀는 간신히 벽을 짚으며 당장이라도 쓰러질듯한 몸을 가누었다. 기형아라는 세 글자가 줄곧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두려움과 막막함에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괜찮을 거야.”이신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는 신유리를 감싸안으며 자신한테 의지하게 했다. “기형아일 확률은 그렇게 높지 않아. 네가 얼마나 건강한데. 오진일 수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신유리는 그 말에 위안이라도 받은 듯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이신의 손을 꽉 잡았다. 다만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재검사해야지. 재검사…”이신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오므린 채 목젖을 아래 우로 굴렸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신유리는 말할 수 없는 당황스러움이 그녀의 온몸을 휩쓸었다. 온몸이 나른하여 힘을 쓰자마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이신은 그녀를 부축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응.”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신의 힘을 빌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어나기도 전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신유리는 무의식 간에 고개를 들어보니 서준혁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신유리는 눈을 깜박이며 이신의 팔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조이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힘이 전혀 없어서 일어나지 못하겠어.”이신은 고개를 들어 반쯤 감은 눈으로 서준혁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신유리의 어깨를 쓰다듬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조금 있다 가자.”신유리는 그의 팔을 잡은 채 그에게 기대있었다. 게다가 이신도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고 있어 두 사람은 더욱 다정해 보였다.서준혁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졌다.그는 입술을 오므린 채 뚜렷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차가워 보였다. 그는 시선을 신유리에게 고정한
서재는 조용했고 서준혁의 싶은 눈동자는 더욱 차가워졌다. 그의 시선은 다시 천천히 검사 보고서 위에 떨어졌고 신유리라는 세 글자는 분명했다.방을 나설 때 하정숙은 컵을 들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격이 만만치 않은 실크 잠옷을 몸에 걸친 채 귀부인의 기세가 넘쳤다. 하정숙은 서준혁을 힐끗 보더니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가볍게 비웃었다.그녀는 담담하게 서준혁을 부르더니 천천히 컵을 내려놓으며 유유하게 말했다. “어디 가?”서준혁은 발걸음을 멈추고 하정숙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평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마치 모자 관계는 뼛속에 흐르는 피만 남은 듯했다. 서준혁이 뒤를 돌아보자 하정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분이 꽤 좋은 것 같았다.“검사 결과는 봤어? 너도 많이 놀랐나 보네.”“그녀를 이 집에 들이는 것을 반대한 게 다행이네. 기형아를 임신했다니, 어쩌면 그녀한테 질병이 있을지도 모르잖아.”하정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준혁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깊은 바다처럼 어두운 눈빛은 주위 사람을 침몰시킬 것 같았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하정숙을 보더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기쁘죠?”하정숙은 얼굴의 웃음이 서서히 굳어졌다....신유리는 입맛이 별로 없었지만 이신이 추천해 준 의사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많이 안정되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느슨해진 것을 보고 곡연이 다가와 물었다. “오늘 밤 날씨도 좋은데 산책할래요? 신선한 공기도 마시고.”신유리는 곡연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것임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나갔다. 바깥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고 신유리는 외투를 잡아당겼다. “아중이가 돌아오면 함께 절에 가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내일 가는 게 좋겠어요. 자두가 평안하고 건강하기를 기도할게요.”신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멈칫하더니 그제야 곡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물었다. “아중이한테 무슨 일 있어?”곡연은 멈칫하더니 이내 화가 난 듯 말했다. “아중이와 진
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상함을 느껴 걸어가던 간호사를 잡고 물었다.“혹시 여기가 검사실로 가는 길인가요?”간호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답답했다. 그녀는 옆의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접수해줄게요. 앉아서 기다리다가 순서가 되면 들어가세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접수처로 향했다. 신유리는 속으로 이상함을 느꼈지만 젊은 여인들이 몇 명 앉아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임신한 게 분명했다.신유리는 멈칫하더니 가서 앉았다. 순간 누군가 조용히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보니 젊은 여인은 얼굴이 초췌해서 혼자 중얼거렸다.“아가야, 엄마가 미안해...”신유리는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임신한 여인 한숨을 내뱉었다.마치 우울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든 듯 신유리에게 말 걸었다.“젊은 분이 웬일이에요?”신유리는 그녀의 말투에서 아쉬워하는 것을 눈치채고 하려던 말을 되레 삼켜버렸다. 마침 접수처에서 신유리를 호출했다.신유리는 고개를 돌려 탄식하는 그녀와 옆에서 흐느끼는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온몸에 기어오르는 공포감을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여기가 양수천자를 하는 곳인가요?”신유리는 어떻게 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수술실 전체 층은 폐쇄되어 있었고 한 점의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다른 사람도 없었고 복도 전체에 그녀의 발자국 소리만 울려 퍼졌다.엘리베이터를 지나던 중 마침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새하얀 이불을 덮고 있었다.신유리는 갑자기 숨이 막히더니 감히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지도 못했다.그 순간 병상에 누워 있는 두 여인을 볼 것만 같았다.신유리는 여기저기 계단을 찾아다니며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마침내 신유리는 병원 밖으로 나왔고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목을 조르던 무형의 손이 풀린 것 같았다.차갑던 몸은 햇빛 아래서 드디어 온도를 되찾았다.신유리는 안색이 어둡다 못해 투명에 가까운 흰색을 띨 정도였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병원 건물을 쳐
신유리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별장으로 돌아왔고 여전히 병원 특유의 소독수냄새와 환경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속이 메슥거려서 토하고 싶어...][무서워...]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여지는 바람에 신유리는 가슴이 꽉 막히는 것처럼 호흡조차 제대로 못했다.주치의 밑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서준혁에게 등기부를 가져다주었고 서준혁은 무언가 적힌 두 글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글자를 검은 물감으로 덮어버렸다.이윽고 들려오는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와 여자의 울먹이는 소리.신유리는 숨이 막혀오는 와중에 서서히 정신을 차렸고 창밖의 불빛은 여전히 밝았다.그녀의 머릿속은 텅 빈지 오래였고 신유리는 조용히 침대 맡에 앉아 시계를 확인하고는 그제야 오후 4시가 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이신이 신유리를 데리고 도착했을 시간은 점심시간쯤이었는데 마음이 복잡하던 신유리는 올라오자마자 바로 잠에 들어버렸다.신유리는 아픈 머리를 꾹꾹 눌러대며 몸을 일으켜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하지만 예상외로 아래에는 곡연과 다른 사람들이 다 도착해있었고 바쁜 임아중과 연우진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그녀가 내려오는 발걸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신유리를 쳐다보았고 임아중은 그녀를 슥 훑어보더니 안쓰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무슨 일이야? 명절까지 보낸 애가 왜 더 야위었어?”사실 임아중의 몸무게도 전보다 훨씬 줄었고 다크써클도 눈 밑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그녀의 컨디션도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하지만 임아중은 자신의 상태는 잊은 듯 신유리를 더 관심해주고 챙겨주었다.“유리야.”연우진은 자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어디 불편한곳은 없어? 이신 씨가 너 오전에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인다고 하더라.”신유리에게 문제가 생긴 일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지만 오전에 이신이 신유리를 데리고 왔을 때 두 사람의 안색은 전부 다 어두웠기에 누구도 먼저 쉽사리 묻지를 못했다.신유리는 연우진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
서창범은 비서와 함께 카페를 나섰고 신유리는 여전히 앞에 놓인 두 종이를 보고 있었다.그녀는 한참간이나 멍하니 보고만 있다 눈을 질끈 감았는데 아까보다 호흡이 더 거칠어졌다.얼마나 지났을까, 신유리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는 계약서 복사본을 내려다보았다.서창범이 말한 것대로 이 계약서에는 문제와 허점들이 많아 화인에서 고소를 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재판장까지 세울 수 있었다.서류에 적힌 글씨도 분명 신유리가 직접 쓴 사인이었다.하지만 이 계약서는 분명-신유리는 가슴에 솜이 가득 찬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혀 불편해졌고 그러는 바람에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어졌다.그러는 와중 임아중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덕분에 신유리는 정신을 겨우 차렸다.“끝났어?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 우리 먼저 밥이나 먹고 검사하러 가자.”임아중은 해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신유리는 상위에 놓인 서류들을 보며 어찌 해야 할지를 몰라 임아중의 말에도 고개를 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뒤, 임아중이 자신의 행동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문득 든 신유리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니, 나 별로 가고 싶지 않아졌어.”“왜? 갑자기 왜 가고 싶지 않아? 유리야, 너 무슨 일 있어? 그 서창범인지 뭔지하는 사람이...”임아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유리는 바로 말을 잘라버리며 대답하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미안, 내가 지금 일이 좀 있어서.”같은 시각, 화인의 어느 한 사무실.이석민은 우서진을 데리고 들어왔고 그는 전에 건방져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자료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우서진은 그 자료를 바로 서준혁의 앞에 툭 내려놓으며 말을 했다.“네가 알아서 봐, 나는 쓸데없는 말 안할게.”사인을 하던 서준혁의 손이 뚝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그가 건넨 자료를 보았다.서준혁은 아주 평온하고 담담한 모습이었고 얼굴에도 전혀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다.우서진은 한참간이나 기다렸지만 서준혁이 먼저 말을 하자 않
서창범은 그의 말에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서준혁을 쭉 훑어보았다.서준혁의 하얗고 깨끗한 피부는 머리위에 있는 조명 덕분에 평소보다 더 차갑게 보였다.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창범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만족하셨다면 그 더러운 수작 이제 그만 하시죠.”서창범이 서준혁의 말에 대답하려고 입을 움찔거렸을 때, 서준혁은 이미 몸을 돌려 떠나버린 뒤였다.하정숙의 옆을 스쳐지나가던 서준혁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가던 길을 갔고 그 순간, 뒤에서 서창범의 고함소리가 울렸다.“너 지금 이게 무슨 태도냐!”하정숙은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서창범에게 대답했다.“쟤가 무슨 태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도 참 못난 어른이네요, 혼자 가서 자기 아들보다 어린 여자애한테 협박이나 하고... 안 쪽팔려요?”그녀의 말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른 서창범이 되물었다.“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그래요! 나 아무것도 몰라요. 근데 그래도 당신보다는 나은 사람이에요! 준혁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다 당신한테서 배운 거잖아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집안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듣기가 싫었던 서준혁은 밖으로 나와 옆에 세워져있던 차에 기대섰다.담배를 피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서준혁이지만 답답한 마음을 조금 달래고자 오래간만에 담배를 손에 들었다.진한 니코틴의 향기와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자 서준혁의 마음은 약간 뚫리는 듯 했고 연기는 그의 눈빛에 묻어있던 냉랭함을 조금이나마 덮어주는 것 같았다.신유리는 임아중의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향해 검사를 받았는데 그녀 또한 신유리가 병원 관계자에 의해 낙태실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임아중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신유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너 그 검사결과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게 아니라는 확신은 있어?”신유리는 그녀의 말에 순간 눈이 동그래지더니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답을 얻은 것 마냥 그대로 굳어버렸다.요 며칠 온통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