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은 아까 놀란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지만 여전히 사리에 밝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말했다.“그렇다면 축복할게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하정숙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서서히 놓았다.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어머님, 저 먼저 갈게요. 아까는 지진인 것 같은데 조심하세요.”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주현이 갈 때까지 하정숙은 반응하지 못했다.반면 신유리는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서준혁의 손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오므리더니 그를 밀어냈다.서준혁은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가뜩이나 새까만 눈동자는 그녀를 빨아들일 것처럼 깊었다.멀어져가는 주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 얼굴의 웃음은 온데간데 사라진 채 냉담함만이 남았다.주현은 어릴 때부터 시한에서 자랐다. 이 정도 지진에 두려워할 리 없었다.그녀는 아까 다람쥐가 신유리한테 달려드는 순간 서준혁의 눈빛에 스쳐 가는 감정과 본능적으로 신유리의 배를 감싸 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주현은 심리학을 전공한 데다가 친구에게서 들은 정보까지 감안하면 신유리의 아이가 서준혁의 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래서 이 아이를 남겨서는 안 된다.아무리 놀아도 되지만 아이를 가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어떻게 처리할지는 서씨 가문의 일이었다.주현은 홀가분한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문선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진 때문에 그들은 다시 펜션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큰 규모의 지진은 아니었지만 신유리와 같이 지진을 처음 겪어본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여진 가능성이 있어 섣불리 하산할 엄두가 없었다. 잠시 펜션에서 머물다가 다음날 다시 성남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곡연은 신유리의 곁에 앉은 채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신유리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언니, 혹시 어디 불편하진 않죠? 아까 많이 놀랐을 텐데. 우리 엄마가 임산부는 놀라면 안 된다고 했어요.”신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편한 곳은 없었지만 아까 다람쥐가 갑자기 달려들 때 확실
다음날, 시한을 떠날 때 날씨는 맑았다. 비행기가 성남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1시였다. 그들은 함께 불고기를 먹으러 가기로 약속했다. 신유리는 착륙하고 핸드폰을 켜자마자 신기철이 걸어온 몇 개의 부재중 전화와 남긴 메시지가 떴는데 성남에 온다고 했다. 신유리는 그가 성남에 오든 말든 관심이 없어 메시지를 삭제하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휴가를 마치고 오니 연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 쌓여있었다. 그날 저녁, 신유리는 성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작업실로 가서 여러 고객의 문제를 처리했다. 그녀는 곧 부산시로 돌아가야 하기에 해야 할 일을 마저 끝내야 했다. 곡연은 그녀의 몰입 속도에 감탄했다. “언니처럼 명절증후군이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이러다 저 먼저 갈 것 같아요.”비록 그녀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사실 손에 서류를 잔뜩 들고 있었다. “먼저 갈게요. 빨리 서류를 보내야 해서.”곡연이 나가자 별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이신은 아침 일찍부터 부서 사람들에게 불려 가 회의에 참석했고 별장에는 신유리만 남았다. 그러나 곡연은 나간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안색이 어두워진 채 돌아왔다. “언니 아버지가 언니를 만나겠다고 밖에 있어요. 지금 경비원이 막고 있어요.”신유리는 어리둥절해서 핸드폰을 봤는데 어젯밤 신기철이 성남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있었다.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경비원에게 부탁해 줘.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신기철은 그녀를 좋은 일로 찾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시한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신유리는 지금 신기철을 전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이곳은 고급 별장 구역이라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지 못했다. 신유리는 곡연에게 말한 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신기철이 떠났다고 생각했다. 다만 오후에 은행에 가려고 문을 나서자마자 신기철을 마주쳤다. 신기철은 옷도 갈아입지 않아 먼지가 가득했다. 그는 신유리의 앞을 가로막으며 안색도 좋지 않고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밖에서 하루 종일 기다
의사 사무실에서 나온 신유리는 머리가 하얘졌다. 그녀는 간신히 벽을 짚으며 당장이라도 쓰러질듯한 몸을 가누었다. 기형아라는 세 글자가 줄곧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두려움과 막막함에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괜찮을 거야.”이신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는 신유리를 감싸안으며 자신한테 의지하게 했다. “기형아일 확률은 그렇게 높지 않아. 네가 얼마나 건강한데. 오진일 수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신유리는 그 말에 위안이라도 받은 듯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이신의 손을 꽉 잡았다. 다만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재검사해야지. 재검사…”이신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오므린 채 목젖을 아래 우로 굴렸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신유리는 말할 수 없는 당황스러움이 그녀의 온몸을 휩쓸었다. 온몸이 나른하여 힘을 쓰자마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이신은 그녀를 부축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응.”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신의 힘을 빌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어나기도 전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신유리는 무의식 간에 고개를 들어보니 서준혁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신유리는 눈을 깜박이며 이신의 팔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조이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힘이 전혀 없어서 일어나지 못하겠어.”이신은 고개를 들어 반쯤 감은 눈으로 서준혁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신유리의 어깨를 쓰다듬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조금 있다 가자.”신유리는 그의 팔을 잡은 채 그에게 기대있었다. 게다가 이신도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고 있어 두 사람은 더욱 다정해 보였다.서준혁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졌다.그는 입술을 오므린 채 뚜렷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차가워 보였다. 그는 시선을 신유리에게 고정한
서재는 조용했고 서준혁의 싶은 눈동자는 더욱 차가워졌다. 그의 시선은 다시 천천히 검사 보고서 위에 떨어졌고 신유리라는 세 글자는 분명했다.방을 나설 때 하정숙은 컵을 들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격이 만만치 않은 실크 잠옷을 몸에 걸친 채 귀부인의 기세가 넘쳤다. 하정숙은 서준혁을 힐끗 보더니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가볍게 비웃었다.그녀는 담담하게 서준혁을 부르더니 천천히 컵을 내려놓으며 유유하게 말했다. “어디 가?”서준혁은 발걸음을 멈추고 하정숙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평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마치 모자 관계는 뼛속에 흐르는 피만 남은 듯했다. 서준혁이 뒤를 돌아보자 하정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분이 꽤 좋은 것 같았다.“검사 결과는 봤어? 너도 많이 놀랐나 보네.”“그녀를 이 집에 들이는 것을 반대한 게 다행이네. 기형아를 임신했다니, 어쩌면 그녀한테 질병이 있을지도 모르잖아.”하정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준혁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깊은 바다처럼 어두운 눈빛은 주위 사람을 침몰시킬 것 같았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하정숙을 보더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기쁘죠?”하정숙은 얼굴의 웃음이 서서히 굳어졌다....신유리는 입맛이 별로 없었지만 이신이 추천해 준 의사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많이 안정되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느슨해진 것을 보고 곡연이 다가와 물었다. “오늘 밤 날씨도 좋은데 산책할래요? 신선한 공기도 마시고.”신유리는 곡연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것임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나갔다. 바깥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고 신유리는 외투를 잡아당겼다. “아중이가 돌아오면 함께 절에 가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내일 가는 게 좋겠어요. 자두가 평안하고 건강하기를 기도할게요.”신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멈칫하더니 그제야 곡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물었다. “아중이한테 무슨 일 있어?”곡연은 멈칫하더니 이내 화가 난 듯 말했다. “아중이와 진
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상함을 느껴 걸어가던 간호사를 잡고 물었다.“혹시 여기가 검사실로 가는 길인가요?”간호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답답했다. 그녀는 옆의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접수해줄게요. 앉아서 기다리다가 순서가 되면 들어가세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접수처로 향했다. 신유리는 속으로 이상함을 느꼈지만 젊은 여인들이 몇 명 앉아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임신한 게 분명했다.신유리는 멈칫하더니 가서 앉았다. 순간 누군가 조용히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보니 젊은 여인은 얼굴이 초췌해서 혼자 중얼거렸다.“아가야, 엄마가 미안해...”신유리는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임신한 여인 한숨을 내뱉었다.마치 우울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든 듯 신유리에게 말 걸었다.“젊은 분이 웬일이에요?”신유리는 그녀의 말투에서 아쉬워하는 것을 눈치채고 하려던 말을 되레 삼켜버렸다. 마침 접수처에서 신유리를 호출했다.신유리는 고개를 돌려 탄식하는 그녀와 옆에서 흐느끼는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온몸에 기어오르는 공포감을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여기가 양수천자를 하는 곳인가요?”신유리는 어떻게 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수술실 전체 층은 폐쇄되어 있었고 한 점의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다른 사람도 없었고 복도 전체에 그녀의 발자국 소리만 울려 퍼졌다.엘리베이터를 지나던 중 마침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새하얀 이불을 덮고 있었다.신유리는 갑자기 숨이 막히더니 감히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지도 못했다.그 순간 병상에 누워 있는 두 여인을 볼 것만 같았다.신유리는 여기저기 계단을 찾아다니며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마침내 신유리는 병원 밖으로 나왔고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목을 조르던 무형의 손이 풀린 것 같았다.차갑던 몸은 햇빛 아래서 드디어 온도를 되찾았다.신유리는 안색이 어둡다 못해 투명에 가까운 흰색을 띨 정도였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병원 건물을 쳐
신유리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별장으로 돌아왔고 여전히 병원 특유의 소독수냄새와 환경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속이 메슥거려서 토하고 싶어...][무서워...]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여지는 바람에 신유리는 가슴이 꽉 막히는 것처럼 호흡조차 제대로 못했다.주치의 밑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서준혁에게 등기부를 가져다주었고 서준혁은 무언가 적힌 두 글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글자를 검은 물감으로 덮어버렸다.이윽고 들려오는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와 여자의 울먹이는 소리.신유리는 숨이 막혀오는 와중에 서서히 정신을 차렸고 창밖의 불빛은 여전히 밝았다.그녀의 머릿속은 텅 빈지 오래였고 신유리는 조용히 침대 맡에 앉아 시계를 확인하고는 그제야 오후 4시가 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이신이 신유리를 데리고 도착했을 시간은 점심시간쯤이었는데 마음이 복잡하던 신유리는 올라오자마자 바로 잠에 들어버렸다.신유리는 아픈 머리를 꾹꾹 눌러대며 몸을 일으켜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하지만 예상외로 아래에는 곡연과 다른 사람들이 다 도착해있었고 바쁜 임아중과 연우진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그녀가 내려오는 발걸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신유리를 쳐다보았고 임아중은 그녀를 슥 훑어보더니 안쓰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무슨 일이야? 명절까지 보낸 애가 왜 더 야위었어?”사실 임아중의 몸무게도 전보다 훨씬 줄었고 다크써클도 눈 밑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그녀의 컨디션도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하지만 임아중은 자신의 상태는 잊은 듯 신유리를 더 관심해주고 챙겨주었다.“유리야.”연우진은 자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어디 불편한곳은 없어? 이신 씨가 너 오전에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인다고 하더라.”신유리에게 문제가 생긴 일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지만 오전에 이신이 신유리를 데리고 왔을 때 두 사람의 안색은 전부 다 어두웠기에 누구도 먼저 쉽사리 묻지를 못했다.신유리는 연우진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
서창범은 비서와 함께 카페를 나섰고 신유리는 여전히 앞에 놓인 두 종이를 보고 있었다.그녀는 한참간이나 멍하니 보고만 있다 눈을 질끈 감았는데 아까보다 호흡이 더 거칠어졌다.얼마나 지났을까, 신유리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는 계약서 복사본을 내려다보았다.서창범이 말한 것대로 이 계약서에는 문제와 허점들이 많아 화인에서 고소를 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재판장까지 세울 수 있었다.서류에 적힌 글씨도 분명 신유리가 직접 쓴 사인이었다.하지만 이 계약서는 분명-신유리는 가슴에 솜이 가득 찬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혀 불편해졌고 그러는 바람에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어졌다.그러는 와중 임아중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덕분에 신유리는 정신을 겨우 차렸다.“끝났어?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 우리 먼저 밥이나 먹고 검사하러 가자.”임아중은 해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신유리는 상위에 놓인 서류들을 보며 어찌 해야 할지를 몰라 임아중의 말에도 고개를 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뒤, 임아중이 자신의 행동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문득 든 신유리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니, 나 별로 가고 싶지 않아졌어.”“왜? 갑자기 왜 가고 싶지 않아? 유리야, 너 무슨 일 있어? 그 서창범인지 뭔지하는 사람이...”임아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유리는 바로 말을 잘라버리며 대답하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미안, 내가 지금 일이 좀 있어서.”같은 시각, 화인의 어느 한 사무실.이석민은 우서진을 데리고 들어왔고 그는 전에 건방져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자료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우서진은 그 자료를 바로 서준혁의 앞에 툭 내려놓으며 말을 했다.“네가 알아서 봐, 나는 쓸데없는 말 안할게.”사인을 하던 서준혁의 손이 뚝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그가 건넨 자료를 보았다.서준혁은 아주 평온하고 담담한 모습이었고 얼굴에도 전혀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다.우서진은 한참간이나 기다렸지만 서준혁이 먼저 말을 하자 않
서창범은 그의 말에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서준혁을 쭉 훑어보았다.서준혁의 하얗고 깨끗한 피부는 머리위에 있는 조명 덕분에 평소보다 더 차갑게 보였다.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창범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만족하셨다면 그 더러운 수작 이제 그만 하시죠.”서창범이 서준혁의 말에 대답하려고 입을 움찔거렸을 때, 서준혁은 이미 몸을 돌려 떠나버린 뒤였다.하정숙의 옆을 스쳐지나가던 서준혁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가던 길을 갔고 그 순간, 뒤에서 서창범의 고함소리가 울렸다.“너 지금 이게 무슨 태도냐!”하정숙은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서창범에게 대답했다.“쟤가 무슨 태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도 참 못난 어른이네요, 혼자 가서 자기 아들보다 어린 여자애한테 협박이나 하고... 안 쪽팔려요?”그녀의 말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른 서창범이 되물었다.“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그래요! 나 아무것도 몰라요. 근데 그래도 당신보다는 나은 사람이에요! 준혁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다 당신한테서 배운 거잖아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집안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듣기가 싫었던 서준혁은 밖으로 나와 옆에 세워져있던 차에 기대섰다.담배를 피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서준혁이지만 답답한 마음을 조금 달래고자 오래간만에 담배를 손에 들었다.진한 니코틴의 향기와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자 서준혁의 마음은 약간 뚫리는 듯 했고 연기는 그의 눈빛에 묻어있던 냉랭함을 조금이나마 덮어주는 것 같았다.신유리는 임아중의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향해 검사를 받았는데 그녀 또한 신유리가 병원 관계자에 의해 낙태실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임아중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신유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너 그 검사결과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게 아니라는 확신은 있어?”신유리는 그녀의 말에 순간 눈이 동그래지더니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답을 얻은 것 마냥 그대로 굳어버렸다.요 며칠 온통 다른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