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강지혁에게서 아들을 받아들었다."고마워요. 유진 씨, 나 일단 윤이 눕히고 올게요."탁유미는 아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그 모습을 본 임유진은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나 잠시 언니랑 얘기 좀 하다 올게. 여기서 기다려."그러고는 바로 탁유미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들어갔을 때 탁유미는 마침 윤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있었다."유진 씨, 오늘 우리 윤이 봐줘서 정말 고마워요."탁유미가 임유진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한편 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뜸을 들이더니 곧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언니, 나 오늘 이경빈 씨 만났어요."이경빈이라는 세 글자에 탁유미의 몸은 눈에 띄게 굳었고 얼굴은 단번에 하얗게 질려버렸다."그 사람..."그러고는 그 사람이라는 세 글자를 내뱉은 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탁유미의 눈동자에 두려움과 초조함이 잔뜩 서려 있는 모습을 본 임유진은 다급하게 말했다."그냥 우연히 만난 것뿐이에요. 윤이 인공와우가 떨어졌었는데 혼자 열심히 찾다가 이경빈 씨를 만났나 봐요."그녀는 아까 챙겨두었던 윤이의 인공와우를 탁유미에게 건넸다."그리고 이경빈 씨는... 윤이가 자기 아들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어요."탁유미는 그 말에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더니 놀란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윤이가 누구 아들인지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어떻게 알았어요?"탁유미가 물었다."사실은 얼마 전 혁이한테서 이경빈 씨 이름을 들었어요. 그러다 변호사로 있었을 때 언니 사건 파일을 본 기억이 있어서 대충 추측한 거예요. 윤이... 이경빈 씨하고 꽤 닮았더라고요."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이내 아차 싶었는지 곧바로 사과했다."미안해요..."이건 탁유미 사생활이라 임유진이 이렇게 마음대로 얘기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그러자 탁유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뭐가 미안해요. 그러고 보니 유진 씨 전에 변호사였댔죠? 아까 사건 파일도 본 적이
임유진이 떠난 후 탁유미는 깊이 잠든 자기 아들을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말랑한 아이의 볼을 매만졌다. 그러다 문득 전에 아이가 수어로 아빠는 어디 있냐고 물었던 게 떠올랐다.그때 그녀는 정말 최악의 거짓말을 했었다. 하늘에 있다고 말이다.언제까지 이 거짓말로 아이를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빠가 어디 있는지 도저히 윤이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어떻게 말해야 할까? 처음부터 너희 아버지는 나쁜 마음을 먹고 나한테 접근한 거라고 그렇게 말해야 할까?생각해보면 탁유미는 이경빈에게 이런 말도 했었다."내가 만약 네 아이를 뱄다고 하면?"그러자 이경빈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너는 내 아이를 밸 자격이 없어."윤이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윤이라는 생명을 바란 적이 없었다.이경빈은 그녀를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일방적인 바람일 뿐이었다. 3년 전 탁유미는 어리석고 또 멍청했다. 그녀는 이경빈이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에게 감동을 주려고 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감옥에서 윤이마저 없었으면 탁유미는 아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윤이는 오늘 자신의 생부를 만났다. 탁유미는 그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이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이 도시로 이사 온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다행인 건 이경빈이 윤이를 못 알아봤다는 것이다.그때 윤이가 몸을 뒤척이더니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예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탁유미는 아들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그에게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 이경빈 세글자를 검색했다. 그러자 그의 최근 소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그녀는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이경빈이 이번 투자 때문에 S 시에 장기간 머무를 수도 있다는 소식을 봐버렸기 때문이다.기간은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다. 짧게는 아마 1, 2주일 것이고 길면 아마 몇 개월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같은 도시에 있으면 아무래도 만날 확률이 커진다.그녀는 이제부터 최대한 이
마치 사진 속 두 사람이 뭘 어떻게 사랑하든 그녀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듯이 말이다.이제는 그녀도 이경빈을 향한 마음을 확실하게 접은 것 같다.탁유미는 지금은 그저 자기 아들을 지키고 이 가족을 지킬 생각뿐이다....임유진은 윤이 식당을 떠난 후 여전히 잔뜩 가라앉은 표정을 지우지 않았고 그 모습을 쭉 지켜보던 강지혁은 강씨 저택으로 돌아온 후 그녀에게 물었다."아직도 그 꼬맹이 생각해?"그러자 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유미 언니는 이경빈 씨가 자기를 찾아내는 걸 원치 않았어. 그래서 이제까지 윤이에게 아빠가 하늘에 있다고 거짓말을 해왔던 거고. 그리고... 나도 이경빈씨가 유미 언니를 찾아내고 윤이와 만나는 게 좋다고는 생각 안 해. 이경빈 씨 옆에는 현재 다른 여성이 있기도 하고... 만약 나라면 언니보다 더 멀리 도망가서 영원히 마주칠 일 없게 할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아마 그녀는 별다른 의도 없이 내뱉은 말이겠지만 듣는 강지혁은 달랐다."이경빈 씨가 탁유미 씨를 감옥에 보내버려서...?"강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했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응."임유진의 간단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강지혁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만약 그게 나라면... 누나는 그래도 멀리 도망쳐서 영원히 나와 마주치지 않을 거야?""너?"임유진은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해오는 강지혁을 의문스럽게 쳐다봤다."너는 이경빈 씨가 아닌데 나더러 어떻게 대답하라는 거야.""그래서 만약에라는 거야. 누나 전에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용서해준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만약.. 내가 이경빈과 똑같은 짓을 했다고 하면 누나는 날 용서해 줄 거야?"임유진은 진지하게 물어보는 강지혁에 똑같이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아마 용서 못할 거야. 세상에는 쉽게 용서가 되는 일이 있고 그럴 수 없는 일이 있어."그래서 ‘무슨 짓을 하든’이라는 데에도 전제가 필요한 것이다.강지혁은 그녀의 대답에 마치 심장에 구멍이 뚫린
"약속할게. 너한테서 멀리 도망가지 않을게."다정한 그녀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퍼지더니 불안해하는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인 후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정말이지?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그럼 정말이지."임유진은 이토록 자신에게 사랑의 감정을 뿜어내는 강지혁이 자신을 상처 주는 일을 할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경빈이 아니니까, 임유진은 그들 사이가 절대 이경빈과 탁유미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그럼 날 사랑한다고 말해. 날 하루라도 안 보면 미칠 것 같다고 말해."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임유진을 향한 갈망이 잔뜩 어려 있었다.가끔 그의 눈빛은 임유진을 압도했고 그녀를 놀라게 했다. 지금처럼 이런 눈빛으로 그녀를 볼 때면 임유진은 마치 강지혁의 세상에 자신밖에 없다고 착각하게 될 것 같았다.그는 대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 거지?임유진은 두 사람이 막 연인이 됐을 때 그의 사랑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확신할 수 있다."사랑해."임유진은 손으로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강지혁이 대체 왜 이토록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혹시 어린 시절 트라우마 때문에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이러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그녀는 그의 두려움을 없애 주고 싶었다."널 하루라도 안 보면 미칠 것 같아."그녀의 말이 끝나자 강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따뜻한 그녀의 입술에 반해 그의 입술은 차가웠다.차가울수록 따뜻함을 더욱더 갈망하게 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강지혁은 자신의 숨결과 체온 그리고 그의 모든 걸 지금 그녀에게 각인시키려고 하고 있다.임유진은 그의 키스에 정신을 못차렸다. 그때 강지혁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침대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에 눕힌 후 두 손으로 그녀를 가두더니 욕망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다 그녀의 손을 들더니 자신의 볼로
"나한테는 소중한 일자리야. 내가 가치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거든."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눈을 반짝이더니 이내 씩 하고 웃었다."데려다줄게."그러고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한 다음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아!"임유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스킨십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직도 쑥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강지혁은 귀엽다는 듯 웃었다."왜, 싫어?"그는 걸어가다 말고 다시 몸을 돌리고는 자신의 두 팔로 그녀를 가두어 버렸다.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그에게 갇혀버리고 만 임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굴 바로 앞에 강지혁이 있었기에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도 몰랐다."좀... 민망해.""뭐가 민망해."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자신의 가슴팍을 만지게 했다."여기, 어제 누나가 다 보고 만진 곳이잖아. 누나도 나를 사랑하고 나도 누나를 사랑해. 그러니까 누나가 나를 바라보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야. 아니면 내가 누나한테 썩 매력적이지 않다거나.""그렇지 않아!"임유진은 거의 본능적으로 외쳤다. 그러고는 또다시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물론 그녀가 한 말은 모두 진심이지만 여전히 너무 쑥스러웠다.그녀의 손끝에서 그의 체온이 느껴진다."다행이네. 그럼 나 좀 더 봐봐. 난 누나가 날 봐주는 게 좋아."그는 이제 애교까지 부렸다. 그리고 그녀는 강지혁의 목소리에 마치 홀린 듯 시선을 그에게서 뗄 수 없었다.그는 정말 완벽한 몸을 가지고 있다.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강지혁은 씩 웃더니 다시 몸을 일으켜 그녀의 앞에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또한,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하고 있었다.임유진은 계속 눈을 맞춰오는 그의 시선에 차마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수도 없었다.그렇게 강지혁이 옷을 전부 갈아입었을 때 임유진의 얼굴을 빨갛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옷장으로 가서 그녀의 옷을 가져오더니 자연스럽게 옷을 갈아입혀 주기 시작했다."내, 내가 할게."임유진이 당황한 듯 말했다."내가 입
시간이 흐르면서 흉터가 점점 옅어지기는 했어도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었다.물론 흉터 제거 수술로 없애버리면 그만이지만 강지혁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 흉터가 꼭 필요한 사람처럼 보였다.그의 이런 불안이 어머니로부터 온 거라면 임유진은? 그녀도 불안한 사람이었다. 소민준에게 배신당한 후 사랑을 두려워하며 앞으로 혼자 사는 것까지 각오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고 그녀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하게끔 만든 건 강지혁이다."왜 그래? 왜 그렇게 봐?"강지혁은 고개를 들다 마침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동정과 연민 그리고 복합적인 감정들이 마구 섞여 있었다.임유진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내가 너 많이 사랑하는구나 싶어서."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숙이더니 양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혁아, 내가 잘할게. 앞으로도 쭉 내가 더 잘할게."만약 그가 불안해하면 임유진은 기꺼이 그에게 사랑을 더 쏟아부을 것이다. 마치 추운 겨울날 서로 체온을 나누는 사람들처럼 말이다.갑작스러운 그녀의 고백에 강지혁은 몸을 흠칫 떨더니 칠흑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예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약속한 거야."...임유진이 강지혁의 벤틀리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은 직원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얼마 전 강지혁이 이미 가게에 얼굴을 비춘 적이 있었기에 직원들도 이제는 임유진이 돈 많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고 있다.다만 그들은 아직 이 돈 많은 남자친구가 S 시에서 제일 유명한 강지혁이라는 사실은 모른다.탁유미는 오늘 많이 피곤해 보였고 다크서클도 생긴 것이 제대로 잠을 못 잔 듯 보였다."언니, 혹시 제대로 못 잤어요? 혹시 이경빈 씨 때문에?"임유진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탁유미가 쓴웃음을 지었다."아마도요. 출소하고 나서 혹시라도 다시 만나게 될까 봐 항상 도망만 다녔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 평화가 깨질 것 같아 조금 두려
하지만 지금은 임유진도 강지혁을 많이 사랑하는 듯 보인다. 할 말은 많았지만 탁유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유진도 그녀 못지않은 기구한 운명으로 그녀가 고려하는 문제를 임유진은 아마 진작에 고려했을 것이다.탁유미는 지금은 그저 임유진에게 좋을 결말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신과는 다르게...오후 브레이크 타임, 한지영은 지금 임유진과 카톡으로 일상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러다 자신의 친구가 고주원이 주연인 영화 시사회를 갔다 온 걸 알고는 한차례 감탄을 내뱉었다.그러고는 고주원을 만났을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 같이 사진은 찍었는지 등등 쉴 틈 없이 질문을 퍼부어댔다.임유진은 어제 강지혁이 찍어준 고주원과의 사진을 한지영에게 보내주었다. 그리고 사인과 고주원이 직접 선물한 영화 포스터와 화보집은 집에 돌아가서 보내주겠다고 했다.「너무 부럽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고주원을 보다니. S 시에서 로드쇼도 한다고 하던데, 그때는 나도 얼굴을 볼 수 있을까?!」한지영이 부러움을 쏟아냈다.「백연신 씨에게 한번 부탁해 보는 건 어때?」백연신도 백씨 일가 오너로서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연신 씨...?」한지영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됐어.」백연신은 한지영이 고주원의 영상을 볼 때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녀에게 갖은 눈치를 다 줬다. 물론 고주원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아이돌들, 무릇 성별이 ‘남자’이기만 하면 그는 얼굴을 구겨댔다.그래서 지금 그녀는 덕질도 몰래 할 수밖에 없었다.‘가짜’ 연애이기에 망정이지 만약 진짜 연애였다면 한지영의 인생에서 덕질은 앞으로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지영은 정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날, 뭐에 씐 듯 눈이 돌아간 그 날로 되돌아가고 싶었다.만약 당시 술기운만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임유진은 한지영이 보내온 우는 표정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여전히 백연신이 복수를 위해 한지영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복수를 위해
"두 장 더 남았어."임유진이 말했다."내가 찍어줄게."강지혁은 그녀에게서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화보집 남은 두 장을 대충 찍은 후 빠르게 한지영에게 보냈다.임유진이 찍는 것보다 자신이 찍는 게 더 나았다."됐어?"임유진은 그의 속도에 감탄하며 물었다."응, 됐어. 두 장일 뿐인데 뭐 얼마나 오래 찍겠어."강지혁이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보낸 화보 사진을 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음, 카메라가 많이 흔들렸네. 지영이만 괜찮으면 상관은 없지만... 역시 이따가 내가 다시 찍어 보내야겠다.’임유진은 핸드폰 앨범에 들어가더니 어제 강지혁이 찍어준 사진 중에 제일 잘 나온 사진을 골라 인화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연예인과의 사진이라 뭐라도 기념하고 싶으니까."왜 아직도 봐?"질투의 화신이 질문했다."아, 인화할 사진을 고르는 중이야. 앨범에 넣어두려고."임유진이 사진을 고르며 대답했다."고주원이 그렇게 예뻐?"그의 말투에는 질투가 잔뜩 묻어있었다.임유진은 흠칫 놀라더니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강지혁의 질투 가득한 얼굴을 마주한 그녀는 속으로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강지혁이 질투의 화신이라는 걸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예쁜 건 맞아. 하지만..."임유진은 강지혁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너보다는 아니야. 난 우리 혁이가 제일 예뻐."‘우리 혁이’라는 말은 임유진이 그를 달래주기 위해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나 네 거야?"강지혁이 물었다."응, 넌 내 거야."임유진은 자신이 생각해도 점점 뻔뻔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쑥스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니 말이다.강지혁은 피식하고 웃더니 언제 질투했냐는 듯 예쁜 미소를 띠었다."듣기 좋네. 나는 네 거고, 너는 내 거야.""응, 그러니까 질투하지마."임유진이 말을 이었다."고주원 씨는 그저 팬으로서 좋아하는 것뿐이야. 게다가 한 배우만 바라보는 열렬한 팬도 아니고. 그리고 나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하는 배우를 좋아할 뿐이지 그 연예인이 사적으로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
“네, 자극을 차단하면 기억을 회복하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박건태가 말했다.사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그에게 약을 처방해 주려 했을 때도 오늘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다만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그럼 약 처방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지.”“네?”박건태가 조금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약 처방을 받지 않겠다고? 그렇다는 건...’“기억을 되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 오래 잊어버리고 살았으니 이제 찾을 때도 됐지.”강지혁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번 더 심한 통증이 일 테고 그 통증으로 인해 회장님 몸이...”박건태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회장님, 사람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그 한계선을 벗어나게 되면 어떤 상태가 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강지혁의 기억은 일반 기억상실 환자들과 달리 기억을 되찾을 때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만약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라도 생기면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웃는 듯 마는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한번 보고 싶네. 기억을 회복할 때의 통증이 더 강한지 내 몸이 더 단단한지 말이야.”박건태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랐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S 시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고 또 대단한 남자다. 즉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S 시 전체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이 남자는 자기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억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분명히 4년 전에는 ‘그런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약 처방해.’라고 했으면서 말이다.‘갑자기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혹시... 아까 봤던 살아 돌아온 사모님 때문인가? 하지만 정말...?
“내가 누나야. 아까도 봐. 아빠가 엄마한테 누나라고 했잖아!”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했던 누나라는 소리를 자신들의 관계에도 적용하려는 아이의 말에 진땀이 다 났다.1층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2층 서재에서는 강지혁의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박건태는 강지혁에게서 두통이 시작된 계기와 통증의 정도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말로 과거의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사실 박건태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강지혁에게서 거실에 있던 여자가 바로 그의 사망한 아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매스컴은 물론이고 S 시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S 시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여성이 될 테고 강지혁의 옆자리를 노리던 여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되겠지.“그럼 만약 앞으로도 그 여자가 예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얘기를 하게 되면 또다시 오늘처럼 기억이 자극을 받아 두통이 일 거라는 소린가?”강지혁이 물었다.“그렇다고 봐야죠. 애초에 회장님의 두통이 시작된 계기도 사모님과의 짤막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사모님께서 돌아온 지금, 더더욱 그 기억이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그럼 내 기억이 완전히 다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강지혁이 또 한 번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다만...”박건태가 말을 흐렸다.“다만 뭐지?”“다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회장님은 매번 고통스러울 겁니다. 오늘도 고작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것만으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사모님과 점점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렇게 되면 두통의 빈도도 커질 테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박건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사람마다 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