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할게. 너한테서 멀리 도망가지 않을게."다정한 그녀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퍼지더니 불안해하는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인 후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정말이지?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그럼 정말이지."임유진은 이토록 자신에게 사랑의 감정을 뿜어내는 강지혁이 자신을 상처 주는 일을 할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경빈이 아니니까, 임유진은 그들 사이가 절대 이경빈과 탁유미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그럼 날 사랑한다고 말해. 날 하루라도 안 보면 미칠 것 같다고 말해."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임유진을 향한 갈망이 잔뜩 어려 있었다.가끔 그의 눈빛은 임유진을 압도했고 그녀를 놀라게 했다. 지금처럼 이런 눈빛으로 그녀를 볼 때면 임유진은 마치 강지혁의 세상에 자신밖에 없다고 착각하게 될 것 같았다.그는 대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 거지?임유진은 두 사람이 막 연인이 됐을 때 그의 사랑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확신할 수 있다."사랑해."임유진은 손으로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강지혁이 대체 왜 이토록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혹시 어린 시절 트라우마 때문에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이러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그녀는 그의 두려움을 없애 주고 싶었다."널 하루라도 안 보면 미칠 것 같아."그녀의 말이 끝나자 강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따뜻한 그녀의 입술에 반해 그의 입술은 차가웠다.차가울수록 따뜻함을 더욱더 갈망하게 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강지혁은 자신의 숨결과 체온 그리고 그의 모든 걸 지금 그녀에게 각인시키려고 하고 있다.임유진은 그의 키스에 정신을 못차렸다. 그때 강지혁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침대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에 눕힌 후 두 손으로 그녀를 가두더니 욕망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다 그녀의 손을 들더니 자신의 볼로
"나한테는 소중한 일자리야. 내가 가치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거든."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눈을 반짝이더니 이내 씩 하고 웃었다."데려다줄게."그러고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한 다음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아!"임유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스킨십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직도 쑥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강지혁은 귀엽다는 듯 웃었다."왜, 싫어?"그는 걸어가다 말고 다시 몸을 돌리고는 자신의 두 팔로 그녀를 가두어 버렸다.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그에게 갇혀버리고 만 임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굴 바로 앞에 강지혁이 있었기에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도 몰랐다."좀... 민망해.""뭐가 민망해."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자신의 가슴팍을 만지게 했다."여기, 어제 누나가 다 보고 만진 곳이잖아. 누나도 나를 사랑하고 나도 누나를 사랑해. 그러니까 누나가 나를 바라보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야. 아니면 내가 누나한테 썩 매력적이지 않다거나.""그렇지 않아!"임유진은 거의 본능적으로 외쳤다. 그러고는 또다시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물론 그녀가 한 말은 모두 진심이지만 여전히 너무 쑥스러웠다.그녀의 손끝에서 그의 체온이 느껴진다."다행이네. 그럼 나 좀 더 봐봐. 난 누나가 날 봐주는 게 좋아."그는 이제 애교까지 부렸다. 그리고 그녀는 강지혁의 목소리에 마치 홀린 듯 시선을 그에게서 뗄 수 없었다.그는 정말 완벽한 몸을 가지고 있다.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강지혁은 씩 웃더니 다시 몸을 일으켜 그녀의 앞에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또한,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하고 있었다.임유진은 계속 눈을 맞춰오는 그의 시선에 차마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수도 없었다.그렇게 강지혁이 옷을 전부 갈아입었을 때 임유진의 얼굴을 빨갛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옷장으로 가서 그녀의 옷을 가져오더니 자연스럽게 옷을 갈아입혀 주기 시작했다."내, 내가 할게."임유진이 당황한 듯 말했다."내가 입
시간이 흐르면서 흉터가 점점 옅어지기는 했어도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었다.물론 흉터 제거 수술로 없애버리면 그만이지만 강지혁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 흉터가 꼭 필요한 사람처럼 보였다.그의 이런 불안이 어머니로부터 온 거라면 임유진은? 그녀도 불안한 사람이었다. 소민준에게 배신당한 후 사랑을 두려워하며 앞으로 혼자 사는 것까지 각오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고 그녀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하게끔 만든 건 강지혁이다."왜 그래? 왜 그렇게 봐?"강지혁은 고개를 들다 마침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동정과 연민 그리고 복합적인 감정들이 마구 섞여 있었다.임유진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내가 너 많이 사랑하는구나 싶어서."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숙이더니 양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혁아, 내가 잘할게. 앞으로도 쭉 내가 더 잘할게."만약 그가 불안해하면 임유진은 기꺼이 그에게 사랑을 더 쏟아부을 것이다. 마치 추운 겨울날 서로 체온을 나누는 사람들처럼 말이다.갑작스러운 그녀의 고백에 강지혁은 몸을 흠칫 떨더니 칠흑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예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약속한 거야."...임유진이 강지혁의 벤틀리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은 직원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얼마 전 강지혁이 이미 가게에 얼굴을 비춘 적이 있었기에 직원들도 이제는 임유진이 돈 많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고 있다.다만 그들은 아직 이 돈 많은 남자친구가 S 시에서 제일 유명한 강지혁이라는 사실은 모른다.탁유미는 오늘 많이 피곤해 보였고 다크서클도 생긴 것이 제대로 잠을 못 잔 듯 보였다."언니, 혹시 제대로 못 잤어요? 혹시 이경빈 씨 때문에?"임유진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탁유미가 쓴웃음을 지었다."아마도요. 출소하고 나서 혹시라도 다시 만나게 될까 봐 항상 도망만 다녔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 평화가 깨질 것 같아 조금 두려
하지만 지금은 임유진도 강지혁을 많이 사랑하는 듯 보인다. 할 말은 많았지만 탁유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유진도 그녀 못지않은 기구한 운명으로 그녀가 고려하는 문제를 임유진은 아마 진작에 고려했을 것이다.탁유미는 지금은 그저 임유진에게 좋을 결말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신과는 다르게...오후 브레이크 타임, 한지영은 지금 임유진과 카톡으로 일상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러다 자신의 친구가 고주원이 주연인 영화 시사회를 갔다 온 걸 알고는 한차례 감탄을 내뱉었다.그러고는 고주원을 만났을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 같이 사진은 찍었는지 등등 쉴 틈 없이 질문을 퍼부어댔다.임유진은 어제 강지혁이 찍어준 고주원과의 사진을 한지영에게 보내주었다. 그리고 사인과 고주원이 직접 선물한 영화 포스터와 화보집은 집에 돌아가서 보내주겠다고 했다.「너무 부럽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고주원을 보다니. S 시에서 로드쇼도 한다고 하던데, 그때는 나도 얼굴을 볼 수 있을까?!」한지영이 부러움을 쏟아냈다.「백연신 씨에게 한번 부탁해 보는 건 어때?」백연신도 백씨 일가 오너로서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연신 씨...?」한지영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됐어.」백연신은 한지영이 고주원의 영상을 볼 때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녀에게 갖은 눈치를 다 줬다. 물론 고주원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아이돌들, 무릇 성별이 ‘남자’이기만 하면 그는 얼굴을 구겨댔다.그래서 지금 그녀는 덕질도 몰래 할 수밖에 없었다.‘가짜’ 연애이기에 망정이지 만약 진짜 연애였다면 한지영의 인생에서 덕질은 앞으로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지영은 정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날, 뭐에 씐 듯 눈이 돌아간 그 날로 되돌아가고 싶었다.만약 당시 술기운만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임유진은 한지영이 보내온 우는 표정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여전히 백연신이 복수를 위해 한지영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복수를 위해
"두 장 더 남았어."임유진이 말했다."내가 찍어줄게."강지혁은 그녀에게서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화보집 남은 두 장을 대충 찍은 후 빠르게 한지영에게 보냈다.임유진이 찍는 것보다 자신이 찍는 게 더 나았다."됐어?"임유진은 그의 속도에 감탄하며 물었다."응, 됐어. 두 장일 뿐인데 뭐 얼마나 오래 찍겠어."강지혁이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보낸 화보 사진을 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음, 카메라가 많이 흔들렸네. 지영이만 괜찮으면 상관은 없지만... 역시 이따가 내가 다시 찍어 보내야겠다.’임유진은 핸드폰 앨범에 들어가더니 어제 강지혁이 찍어준 사진 중에 제일 잘 나온 사진을 골라 인화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연예인과의 사진이라 뭐라도 기념하고 싶으니까."왜 아직도 봐?"질투의 화신이 질문했다."아, 인화할 사진을 고르는 중이야. 앨범에 넣어두려고."임유진이 사진을 고르며 대답했다."고주원이 그렇게 예뻐?"그의 말투에는 질투가 잔뜩 묻어있었다.임유진은 흠칫 놀라더니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강지혁의 질투 가득한 얼굴을 마주한 그녀는 속으로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강지혁이 질투의 화신이라는 걸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예쁜 건 맞아. 하지만..."임유진은 강지혁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너보다는 아니야. 난 우리 혁이가 제일 예뻐."‘우리 혁이’라는 말은 임유진이 그를 달래주기 위해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나 네 거야?"강지혁이 물었다."응, 넌 내 거야."임유진은 자신이 생각해도 점점 뻔뻔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쑥스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니 말이다.강지혁은 피식하고 웃더니 언제 질투했냐는 듯 예쁜 미소를 띠었다."듣기 좋네. 나는 네 거고, 너는 내 거야.""응, 그러니까 질투하지마."임유진이 말을 이었다."고주원 씨는 그저 팬으로서 좋아하는 것뿐이야. 게다가 한 배우만 바라보는 열렬한 팬도 아니고. 그리고 나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하는 배우를 좋아할 뿐이지 그 연예인이 사적으로
그녀는 얼굴을 가까이 기대고 먼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내 눈엔 네가 제일 예뻐. 연예인은 연예인일 뿐 너야말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지만 연예인은 아니야. 그러니까 질투 같은 거 하지 마.”만약 그가 불안에 떨고 있다면 그녀는 원하는 만큼 안정감을 줄 것이다!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그는 멍하니 넋 놓고 말았다. 그녀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곤 전혀 예상 못했으니까.마음속에 따뜻한 전류가 흐르는 것만 같았고 심장 박동에 따라 그 따뜻함이 온몸으로 퍼졌다. 눈앞의 그녀는 그가 제일 사랑하는 오직 그만의 여자 임유진이다.“나도 널 위해서라면 목숨도 선뜻 내놓을 수 있어!”비록 가볍게 내뱉은 말이지만 그 무엇보다 무게감이 느껴졌다.이건 강지혁이 평생을 걸고 그녀에게 한 맹세이다.이 여자는 어느샌가 그의 인생에 스며들었고 심지어... 그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그 시각 한지영은 싱글벙글 웃으며 친구가 보내온 사진을 감상했다.‘으악, 잘생겼어! 역시 고주원이야. 연예계에서 고주원보다 잘생기고 연기 잘하는 남자 배우는 없다고.’새로 상영한 영화에서 바보 같은 헤어스타일을 해도 그의 잘생긴 외모를 가릴 수 없으니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게다가 절친이 보내온 화보들은 한정판이라 수량이 극히 적다. 고주원이 팬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었고 추첨을 통해 획득하는 형식이다.그런 한정판 화보를 유진이가 전부 갖고 있으니 한지영은 이가 저절로 뿌드득거렸다.‘유진이랑 상의해서 한 장이라도 달라고 할까? 상반신 노출 사진이 유난히 마음에 드는데, 저 완벽한 근육질 몸매 좀 봐. 어떻게 안 반할 수 있냐고!’“뭔데 그렇게 푹 빠져 있어?”이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한지영의 손에 든 휴대폰이 누군가에 의해 덥석 빼앗겨버렸다.“악!”한지영은 나지막이 비명을 지르며 맞은편에 앉은 백연신을 바라봤다.‘이 자식이 감히 내 휴대폰을 뺏어가?!’“아니에요 아무것도. 얼른 돌려줘요.”
그도 분명 잘생기고 그녀에게 엄청 잘해주는데 왜 연예인 덕질하는 열정을 그에게 퍼붓진 못하는 걸까? 휴대폰에 그의 사진을 찾아보려 해도 그림자조차 없다.“방금 고주원 본 거야?”그는 한지영의 휴대폰을 뒤져보다가 그녀가 임유진과 채팅하는 걸 발견했는데 화보는 바로 임유진이 보내준 사진이었다. 그리고 채팅창에 한지영이 쓴 글을 보니... 색마가 따로 없었다!백연신은 볼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대체 누가 남자친구인지 제대로 한번 알려줘야 할 듯싶다!“맞아요.”한지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유진이는 운이 좋아서 강지혁 씨가 고주원 영화 시사회에 데리고 갔대요. 고주원을 직접 봤고 이 화보들도 전부 고주원이 선물해줬대요.”“고작 영화배우의 화보일 뿐인데 무슨 쓸모가 있다고.”백연신이 투덜대자 한지영은 기분이 확 언짢아졌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쏘아붙였다.“어머? 지금 영화배우 무시하는 거예요?”백연신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지고 한없이 짙은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왜? 걔 편이라도 들게?”차갑고 싸늘한 목소리에서 위압감이 흘러넘쳤고 가슴이 움찔거린 한지영은 바로 머리를 숙였다. 덕질이 아무리 좋아도 일단 제 목숨은 지켜야 하니까!“그게... 나도 그냥 한번 해본 말이잖아요.”그녀가 주눅 들어서 대답했다.“그래?”백연신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어디 한번 말해봐. 대체 고주원을 얼마만큼 좋아하는 거지?”“그냥 그래요.”한지영이 바보가 아닌 이상 솔직하게 제 마음을 털어놓을 리가 있을까? 게다가 그녀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어디 한두 명도 아니고 말이다.“그럼 난? 난 얼마만큼 좋아해?”백연신이 되물었다.한지영은 허리를 곧게 펴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난 인제 연신 씨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매일 연신 씨 못 볼 때마다 보고 싶고 그래요.”이런 거짓말쟁이!백연신이 속으로 구시렁댔다. 그녀의 표정만 봐도 지금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그가 백씨 일가의 오너가 되기 전에도 그에
한지영은 하마터면 음식 먹다가 사레들릴 뻔했다. 겨우 입안의 음식을 다 넘기고 머리 들어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한없이 짙은 그의 눈빛이 그녀를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그건...”한지영은 입술을 꼭 깨물고 힘겹게 변명을 둘러댔다.“연신 씨가 가끔 너무 차갑게 느껴지고... 또 마치... 마치 아름다운 장미 같아서 가시 박힌 장미는 감상만 할 뿐 만지면 가시에 찔리잖아요. 그래서... 저기 그러니까... 연신 씨랑 스킨쉽 하는 것도 망설여진 거예요.”그녀는 말하면서 마음이 가차 없이 찔렸다. 그 당시 그와 뜨거운 관계를 나눴더니 정작 그녀에게 어떤 결말이 차려졌던가. 이젠 흑심을 품었다 해도 두 번 다시 그럴 엄두가 안 난다!‘퉤! 흑심이라니. 난 그저 앞으로 더이상 연신 씨랑 귀찮게 엮이고 싶지 않을 뿐이야.’“근데 너 예전엔 날 전혀 안 피했잖아. 피하긴커녕 네가 먼저 덮쳤으면서.”백연신이 쓴웃음을 지었다.한지영은 숨이 확 막혔다. 그해 실수가 지금의 결과를 가져올 걸 미리 알았더라면 때려죽여도 술에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땐 내가 취해서 인사불성이었잖아요. 연신 씨도 내 주량 알면서. 나 술 마시면 바로 취하고 일단 취하기만 하면 말이나 행동 모두 절제할 수 없다는 거 잘 알면서 왜 그래요. 그때 그 일은 술김에 그런 거지 절대 본심이 아니었다고요...”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서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마지막엔 침에 사레들릴 지경이었다.“하긴, 진심이었다면 다음 날 말 없이 떠나가지도 않았겠지.”백연신이 말했다.“...”한지영은 순간 또 한 번 폭격을 당한 것만 같았다.백연신은 종업원을 불러와 와인 한 병을 주문한 후 바로 병을 따서 그녀에게 한 잔 부었다.한지영은 두 눈을 깜빡이며 와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사람이 설마...“마셔.”백연신이 담담하게 말했다.“나 금방 취해요.”한지영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나 취하면 또 어떻게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