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분명 잘생기고 그녀에게 엄청 잘해주는데 왜 연예인 덕질하는 열정을 그에게 퍼붓진 못하는 걸까? 휴대폰에 그의 사진을 찾아보려 해도 그림자조차 없다.“방금 고주원 본 거야?”그는 한지영의 휴대폰을 뒤져보다가 그녀가 임유진과 채팅하는 걸 발견했는데 화보는 바로 임유진이 보내준 사진이었다. 그리고 채팅창에 한지영이 쓴 글을 보니... 색마가 따로 없었다!백연신은 볼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대체 누가 남자친구인지 제대로 한번 알려줘야 할 듯싶다!“맞아요.”한지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유진이는 운이 좋아서 강지혁 씨가 고주원 영화 시사회에 데리고 갔대요. 고주원을 직접 봤고 이 화보들도 전부 고주원이 선물해줬대요.”“고작 영화배우의 화보일 뿐인데 무슨 쓸모가 있다고.”백연신이 투덜대자 한지영은 기분이 확 언짢아졌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쏘아붙였다.“어머? 지금 영화배우 무시하는 거예요?”백연신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지고 한없이 짙은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왜? 걔 편이라도 들게?”차갑고 싸늘한 목소리에서 위압감이 흘러넘쳤고 가슴이 움찔거린 한지영은 바로 머리를 숙였다. 덕질이 아무리 좋아도 일단 제 목숨은 지켜야 하니까!“그게... 나도 그냥 한번 해본 말이잖아요.”그녀가 주눅 들어서 대답했다.“그래?”백연신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어디 한번 말해봐. 대체 고주원을 얼마만큼 좋아하는 거지?”“그냥 그래요.”한지영이 바보가 아닌 이상 솔직하게 제 마음을 털어놓을 리가 있을까? 게다가 그녀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어디 한두 명도 아니고 말이다.“그럼 난? 난 얼마만큼 좋아해?”백연신이 되물었다.한지영은 허리를 곧게 펴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난 인제 연신 씨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매일 연신 씨 못 볼 때마다 보고 싶고 그래요.”이런 거짓말쟁이!백연신이 속으로 구시렁댔다. 그녀의 표정만 봐도 지금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그가 백씨 일가의 오너가 되기 전에도 그에
한지영은 하마터면 음식 먹다가 사레들릴 뻔했다. 겨우 입안의 음식을 다 넘기고 머리 들어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한없이 짙은 그의 눈빛이 그녀를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그건...”한지영은 입술을 꼭 깨물고 힘겹게 변명을 둘러댔다.“연신 씨가 가끔 너무 차갑게 느껴지고... 또 마치... 마치 아름다운 장미 같아서 가시 박힌 장미는 감상만 할 뿐 만지면 가시에 찔리잖아요. 그래서... 저기 그러니까... 연신 씨랑 스킨쉽 하는 것도 망설여진 거예요.”그녀는 말하면서 마음이 가차 없이 찔렸다. 그 당시 그와 뜨거운 관계를 나눴더니 정작 그녀에게 어떤 결말이 차려졌던가. 이젠 흑심을 품었다 해도 두 번 다시 그럴 엄두가 안 난다!‘퉤! 흑심이라니. 난 그저 앞으로 더이상 연신 씨랑 귀찮게 엮이고 싶지 않을 뿐이야.’“근데 너 예전엔 날 전혀 안 피했잖아. 피하긴커녕 네가 먼저 덮쳤으면서.”백연신이 쓴웃음을 지었다.한지영은 숨이 확 막혔다. 그해 실수가 지금의 결과를 가져올 걸 미리 알았더라면 때려죽여도 술에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땐 내가 취해서 인사불성이었잖아요. 연신 씨도 내 주량 알면서. 나 술 마시면 바로 취하고 일단 취하기만 하면 말이나 행동 모두 절제할 수 없다는 거 잘 알면서 왜 그래요. 그때 그 일은 술김에 그런 거지 절대 본심이 아니었다고요...”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서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마지막엔 침에 사레들릴 지경이었다.“하긴, 진심이었다면 다음 날 말 없이 떠나가지도 않았겠지.”백연신이 말했다.“...”한지영은 순간 또 한 번 폭격을 당한 것만 같았다.백연신은 종업원을 불러와 와인 한 병을 주문한 후 바로 병을 따서 그녀에게 한 잔 부었다.한지영은 두 눈을 깜빡이며 와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사람이 설마...“마셔.”백연신이 담담하게 말했다.“나 금방 취해요.”한지영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나 취하면 또 어떻게
발그스름한 두 볼과 반쯤 감은 두 눈, 머리는 그의 어깨에 기대고 차 안에 온통 짙은 술 냄새를 풍겼다.그녀는 취했지만 백연신은 정신이 아주 맑았다.가끔은 그도 한지영처럼 쉽게 취하고 많은 생각을 제쳐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문득 백연신의 몸이 굳었다. 한지영이 작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꼼지락대기 시작했다.이 여자는 술에 취해서도 얌전히 있는 법이 없다.“한지영,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백연신이 묻다가 저 자신이 우스웠다. 술에 취한 여자에게 물어봤자 뭔 소용일까? 그녀는 인사불성이 되어 있는데 말이다.그런데 이때 한지영이 대답했다.“뭐하긴요. 연신 씨 만지고 있죠...”다 알고 있다니, 백연신은 쓴웃음을 지었다.“술 깨면 또 후회할 텐데?”말은 그렇게 하지만 가슴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을 내려놓기 싫었다.한지영은 그런 그를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 꼼지락대며 뭐라 중얼거렸는데 잠시 후 고개를 살짝 들어 애써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연신아... 나 비밀 하나 알려줄게.”백연신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비밀이라니? 술에 취한 여자가 무슨 비밀을 얘기한다고...“너... 가까이 좀 와봐. 비밀은 귀에 대고 속삭이는 거야...”그녀가 계속 중얼대며 미간을 구겼다.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 기분이 언짢은 듯싶었다.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그녀를 쳐다본 후 몸을 기울이고 그녀의 입가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술기운과 그녀의 체취가 어우러졌는데 이상하게도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백연신은 술 냄새가 밴 여자를 제일 싫어하고 역겨워하는데 한지영은 예외였다.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한지영의 입술이 무심결에 그의 귓가에 닿았다. 순간 백연신은 몸을 움찔거리며 그녀가 겨우 내뱉는 말에 집중했다.“사실 난... 네 몸매가 고주원보다 훨씬 좋아... 걔는... 너랑 비교가 안 돼.”쿵쾅쿵쾅!백연신의 심장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건 그녀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의 심장 소리도 있었다.“그리고 있잖아 연신아... 나 너 좋
‘잠깐! 뭐라고? 내가 술을 마셔?!’한지영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눈을 떠보았는데 방안의 천장이 훤히 보였다. 그녀는 어젯밤 기억을 조금씩 되새겼다.어젠 백연신과 함께 야식을 먹었고 와인을 꽤 많이 마셨고... 그렇게 술에 취한 듯싶었다.그 뒤론...머릿속 기억들이 퍼즐처럼 하나씩 맞춰졌는데 백연신 차에 탔고 차 안에서 그를 만지작댔던 기억이 났다!그 뒤론... 백연신에게 뭐라 말한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아무리 애써도 생각나지 않았다!한지영은 결국 포기하고 생각을 접었다.부디 백연신을 욕하는 내용만 아니기를, 속 좁은 백연신이 또 그녀에게 복수하려고 애를 쓸 테니까.한지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는데 부모님과 정면으로 마주쳤다.“너는 여자애가 돼서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 어제 연신이가 너 데려왔으니 망정이지 그 만취 상태로 나쁜 사람이라도 마주쳤으면 어쩔 뻔했어!”그녀의 엄마가 딸을 보자마자 한없이 나무랐다.“연신이가 적게 마시라는데 기어코 과음했다며. 여자애가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 아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참!”그녀의 아빠도 잔소리 행렬에 가담했다.한지영은 쉴 새 없이 머리를 끄덕이며 잘못을 반성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론 백연신만 원망했다. 어제 그녀에게 술을 권한 건 바로 부모님이 말하는 백연신이니까.아쉽게도 백연신은 이미 그녀의 부모님께 잘 보여서 무한대로 믿으신다! 매번 백연신이 그녀 집으로 찾아올 때마다 부모님이 하도 열정적으로 반겨주셔서 누가 친자식인지 의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한지영은 이후에 백연신과 이별하면 부모님이 받을 충격이 얼마나 클지 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겨우 화장실로 도망친 그녀는 거울 속 제모습을 들여다봤는데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피부가 좋은 편이지만 이목구비가 고만고만하여 봐줄 만한 외모일 뿐 절세미인은 아니었다.어려서부터 연애란 걸 못 해봤고 백연신과는 조금은 수상한 연애를 하고 있지만 나름대로 첫 연애였다.이후에 또 연애하게 된다면 그땐 아마
연예계 바닥은 조금만 이상한 낌새를 맡아도 말도 안 되게 부풀려서 외부에 퍼뜨리는 법이다.요즘 그녀와 강현수가 오랫동안 공개석상에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제작팀에서 소문이 파다한데 다들 그녀가 버림받은 거라고 추측하는 눈치이다.하여 임유라는 빨리 강현수와 함께 공개석상에 모습을 내비쳐서 이 소문들을 잠재워야 한다.하지만... 강현수의 모습조차 볼 수 없으니 애가 탈 지경이다.“장 비서님, 한 번만 더 얘기해줄 순 없나요? 나 진짜 일 있어서 꼭 만나야 해요.”임유라가 자세를 낮추고 비서에게 부탁했다.“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만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비서는 그녀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임유라는 상대의 눈빛에 담긴 야유와 깔보는 듯한 경멸의 뜻까지 느낄 수 있었다.장 비서는 그녀가 강현수에게 버림받고 너덜너덜해질 걸 이미 예상이라도 했을까?! 임유라는 속으로 별생각이 다 들었고 여기 계속 남아있어봤자 본인 자존심도 못 챙긴다는 걸 잘 알고 있다.그녀는 마지못해 일단 자리를 떠났다. 로비 주차장 근처에 차 댈 곳을 찾아놓고 주차한 후 여기서 강현수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예정이다.오늘 그녀는 제작팀에 일부러 하루 휴가 내고 강현수를 만나러 왔다.한편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주 잠깐 사이에 강현수의 차가 바로 나타났고 그녀는 재빨리 뒤따라갔다.강현수는 20분 동안 질주하더니 전혀 멈출 기미가 없이 아예 고속도로를 향해 달렸다.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임유라는 의아해하며 그를 따라 한 시간 남짓 달렸고 끝내 작은 산 부근에서 차를 세웠다.강현수에게 들킬까 봐 그녀는 조금 멀리 주차했다.지금 도착한 이 마을은 임유진의 외할머니가 살던 마을이라 임유라도 어릴 때 아빠 따라 두 번 와봤다.강현수가 왜 여기에... 임유라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강현수는 저 멀리 작은 산 앞에서 꿈쩍 않고 서 있었다.저 산... 무슨 특별한 점이라도 있나? 임유라는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불쑥 걸음을 멈추고 온몸이 돌
저 사람은... 강현수?!그는 흰 셔츠에 베이지색 긴바지를 착장하여 살짝 캐쥬얼한 분위기를 냈다. 검은 머리는 살짝 헝클어졌고 건장한 체구와 정교한 이목구비가 차가운 달빛에 드리워 은은하게 빛났다.그는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는데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평소의 차분한 분위기와는 달리 좀 더 아련해 보였다.임유진은 그 눈빛이 조금 불편했고 그녀를 훤히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강현수는 그녀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는데 순간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확 퍼졌다.“술 마셨어요?”그녀가 물었다.“네, 조금요.”강현수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를 더 그윽하게 바라봤다.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너무 늦은 시각이라 난 이만 돌아가야 해요, 안녕히 계세요.”그녀는 말하면서 자리를 떠나려 했다.다만 걸음을 내딛자마자 강현수가 덥석 그녀를 잡아당겨 품에 끌어안았다.임유진은 한없이 넓은 품에 안겨 독한 술 냄새를 맡았다. 방금 서 있을 때보다 더 강렬하게 코를 찔렀다.‘이건 절대 조금 마신 게 아니야! 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이거 놔요!”임유진이 소리쳤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말해. 대체 어떻게 해야 널 찾을 수 있어?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찾았는데 왜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거야? 못 찾겠다고, 도저히 못 찾겠단 말이야...”임유진은 몸이 움찔거렸다. 강현수는 지금 그녀를 딴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 걸까? 그녀에게 하는 말 같지는 않은데...“강현수 씨, 일단 이거 놔요. 많이 취하셨어요.”임유진이 몸부림쳤지만 그가 너무 꽉 끌어안아서 꼼짝할 수 없었다.이럴 때 보면 남자와 여자는 힘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취해? 진짜 취했으면 좋겠어. 내가 얼마나 취하고 싶은지 알아?”강현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청량한 그의 목소리에 아픔이 살짝 담겨 있었다.“날 누구로 착각했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이거 좀 놔요. 안 놓으면...”“안 놓으면 뭐?”그가 고개 숙여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둘의 콧등이 거의 닿
이 눈물은 그녀도 전에...순간 그녀는 바늘로 콕콕 찌르듯이 머리가 아파 났다.“그거 알아? 난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너무너무 보고 싶어.”강현수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그녀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고 입술이 곧 그녀 입술에 닿을 것만 같았다.찰싹!청아한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임유진의 오른손 손바닥이 뜨거운 열기와 함께 저릿해졌다. 그녀는 방금 너무 심하게 강현수의 뺨을 내리쳤다.강현수는 머리가 한쪽 옆으로 기울어졌고 주변 공기마저 차갑게 얼어붙었다.둘 사이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그는 한참 후에야 서서히 고개 돌려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좀전의 아련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전보다 훨씬 맑은 눈빛이었다.그녀를 구속했던 두 손도 천천히 놓아주고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걸음을 휘청거리며 근처의 차에 올라탔다.임유진은 그제야 손을 들어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 안았다.방금 강현수가 눈물 흘리는 모습에 왜 머리가 이토록 아픈 걸까? 마치 무언가에 자극받은 것처럼 마음속 깊숙이 괴로움이 솟구쳤다.‘왜, 대체 왜 이렇게 괴로운 거야? 내 몸이 본능적으로 강현수가 우는 걸 못 견디겠다고 말해주는 것 같잖아.’임유진도 이 느낌을 대체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그 시각 멀지않은 음침한 모퉁이에서 임유라가 이를 악물고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임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오늘 그녀는 줄곧 강현수를 따라다녔는데 그는 마을에선 바보같이 멍하니 몇 시간이나 서서 산을 바라봤고 그녀도 다리가 저리도록 뒤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이어서 강현수는 마을의 식당에 가서 술을 마셨다. 한잔, 두잔, 마치 취하려고 작정한 듯이 술을 퍼마셨는데 그녀는 그런 강현수의 모습을 처음 봤다.그때까지도 임유라는 내심 흐뭇했다. 오늘 밤 강현수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면 그녀에게 좋은 기회가 차려질 거라고 김칫국부터 마셨다.기회를 봐서 그에게 다가가면 오늘 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게 될지도 모른다.그런데 강현수는 결국 이리로, 임유진을 찾아왔다.심지어
임유진은 문득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이렇게 묵묵히 강지혁을 바라보는 것도 안구 정화되는 흐뭇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지금처럼 지낼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일할 때의 강지혁은 고도로 집중하여 빨리 수중의 서류를 훑어보는 동시에 펜으로 끊임없이 체크하며 빠른 속도로 검토한다. 게다가 노트북 너머의 임원에게 후속 업무를 분부하는 것도 잊지 않고 일사천리로 해결한다.그런 강지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임유진은 문득 감개무량해졌다. 전에 누군가가 남자는 일할 때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했는데 지금 보니 정말 그런 듯싶다.모두가 알다시피 강지혁은 상업계의 빅 보스이다. 강씨 일가는 백 년을 대물림받은 재벌가이지만 그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보스는 아니다. 막강한 집안 세력을 보유한 건 사실이지만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강씨 일가가 현재까지도 승승장구하고 있고 강지혁 본인의 지위도 끄떡없는 건 전부 그가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이다.임유진은 그의 옆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봤다. 그녀의 각도에서 보면 강지혁의 날카로운 콧날과 선명한 얼굴 윤곽, 섹시한 입술과 날렵한 턱선이 유난히 매력적이었다.강지혁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긴 속눈썹이 드리워져 예쁜 음영을 주었다.그의 눈은 유달리 예뻤다. 그 두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땐 영롱한 빛이 반짝이고 마치 애틋한 감정이 한가득 쌓여있는 것처럼 자꾸만 더 보고 싶게 만든다.“눈이 참 예뻐.”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이 말이 스쳐 지나갔다!화들짝 놀란 임유진은 머리가 또다시 지끈거렸다. 이건 그녀가 누구한테 해줬던 말일까?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강현수의 흐느끼던 얼굴이 뜬금없이 나타났다.‘헐, 내가 왜 강현수를 생각하고 있지!’그녀는 힘껏 머리를 내저으며 강현수의 얼굴을 애써 지우려 했다.“왜 그래? 머리를 왜 그렇게 흔드는 건데?”이때 강지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임유진이 고개를 번쩍 들자 강지혁이 어느새 그녀 앞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
“네, 자극을 차단하면 기억을 회복하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박건태가 말했다.사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그에게 약을 처방해 주려 했을 때도 오늘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다만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그럼 약 처방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지.”“네?”박건태가 조금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약 처방을 받지 않겠다고? 그렇다는 건...’“기억을 되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 오래 잊어버리고 살았으니 이제 찾을 때도 됐지.”강지혁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번 더 심한 통증이 일 테고 그 통증으로 인해 회장님 몸이...”박건태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회장님, 사람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그 한계선을 벗어나게 되면 어떤 상태가 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강지혁의 기억은 일반 기억상실 환자들과 달리 기억을 되찾을 때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만약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라도 생기면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웃는 듯 마는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한번 보고 싶네. 기억을 회복할 때의 통증이 더 강한지 내 몸이 더 단단한지 말이야.”박건태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랐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S 시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고 또 대단한 남자다. 즉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S 시 전체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이 남자는 자기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억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분명히 4년 전에는 ‘그런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약 처방해.’라고 했으면서 말이다.‘갑자기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혹시... 아까 봤던 살아 돌아온 사모님 때문인가? 하지만 정말...?
“내가 누나야. 아까도 봐. 아빠가 엄마한테 누나라고 했잖아!”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했던 누나라는 소리를 자신들의 관계에도 적용하려는 아이의 말에 진땀이 다 났다.1층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2층 서재에서는 강지혁의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박건태는 강지혁에게서 두통이 시작된 계기와 통증의 정도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말로 과거의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사실 박건태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강지혁에게서 거실에 있던 여자가 바로 그의 사망한 아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매스컴은 물론이고 S 시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S 시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여성이 될 테고 강지혁의 옆자리를 노리던 여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되겠지.“그럼 만약 앞으로도 그 여자가 예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얘기를 하게 되면 또다시 오늘처럼 기억이 자극을 받아 두통이 일 거라는 소린가?”강지혁이 물었다.“그렇다고 봐야죠. 애초에 회장님의 두통이 시작된 계기도 사모님과의 짤막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사모님께서 돌아온 지금, 더더욱 그 기억이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그럼 내 기억이 완전히 다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강지혁이 또 한 번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다만...”박건태가 말을 흐렸다.“다만 뭐지?”“다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회장님은 매번 고통스러울 겁니다. 오늘도 고작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것만으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사모님과 점점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렇게 되면 두통의 빈도도 커질 테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박건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사람마다 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