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우는 거 보고 싶으면 바로 울어 줄게.”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공기 속에 울렸다.임유진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울겠다고 하는 건가?“왜 그래?”강지혁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너 방금...”“누나가 보고 싶다면 바로 해줄게. 누나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만족시켜줄 거야.”그는 말하면서 천천히 몸을 기울여 잘생긴 얼굴을 그녀 앞에 갖다 댔다.임유진은 바로 코앞에 닿은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도 칠흑같이 어두운 그의 두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강지혁은 미소 짓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이 말을 내뱉었다. 마치 그녀가 원한다면 바로 눈물을 흘려줄 것처럼 말이다.“원해?”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소곤거리는 나른한 말투가 그녀의 심장을 간지럽혔다.임유진은 머리를 내저으며 대답했다.“아니.”그녀의 대답을 들은 강지혁은 되레 눈가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왜?”“내가 속상하니까. 네가 운다는 건 슬프다는 걸 의미하잖아. 난 너 슬퍼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그녀가 대답했다.그녀의 말은 따뜻한 전류가 되어 강지혁의 두 귀에 흘러 들어갔고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였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큰코다치길 바라고 있을까? 친구들은 그에게 공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태도이고 아버지는 전에 어머니를 너무 사랑해 그에게 준 사랑이 아주 적다. 어머니는 그를 이용수단으로 써먹었을 뿐이고 결국 그 빌미로 순조롭게 재벌가에 발을 들였다.나중에 강지혁이란 이용수단이 아무런 작용도 못 일으키자 어머니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매정하게 그를 떠났다.할아버지 눈엔 그가 단지 강씨 일가를 이끄는 유일한 상속자일 뿐이다. 그의 몸에 흐르는 피가 아버지의 피이니까. 다만 나머지 절반은 어머니 유전이라 할아버지는 줄곧 그를 싫어한다.그래서 매번 손자를 바라보는 눈빛에 혐오가 섞여 있다.여태껏 살아오면서 강지혁은 항상 자신에게 무조건 강해져야 한다고 되뇌었다.
심지어 그는 수년간 상대를 찾아 헤맸지만 여전히 찾지 못했다.그 소녀가 그리운 만큼 후회도 더 했다.어제 술을 많이 마셨더니 줄곧 마음을 짓눌렀던 후회가 파도처럼 일렁여 그를 잠식해버렸다.이 식당까지 어떻게 찾아왔는 지도 모를 지경으로 머릿속엔 오직 그 소녀 생각으로 가득 찼었다. 꼭 한 번 그녀를 보고 싶었다. 얼굴이라도 봐야만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았다.그리고 결국 임유진을 만났고 현실 속 임유진과 기억 속 그 소녀를 착각해 그런 추태를 부리게 됐다.애석하게도 어제 그토록 술을 많이 마셨건만 그녀에게 했던 모든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다른 여자라면 전혀 신경 쓰지 않겠지만 임유진은 달랐다.그녀가 강지혁의 여자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상상 속의 그 소녀가 어른이 된 후의 모습과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다.임유진이 설사 그 소녀가 아닐지라도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는 않았다.“뭐 그렇게 큰일까진 아니고, 우리 서로 퉁 친 거예요.”임유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제 그녀는 강현수의 뺨을 내리쳤으니까.퉁 쳐... 강현수는 왠지 이 말이 살짝 기분 나쁘게 들렸다.“어젯밤에 내가 왜 그랬는지는 안 물어봐요?”“그럴 필요 없어요.”이건 단지 강현수의 사정이지 그녀가 굳이 궁금해야 할 부분이 아니니까.“강현수 씨가 더이상 술에 취해 어제 같은 행동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어제 일은 서로 없던 거로 해요.”강현수는 저 자신을 비웃으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정말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나 보다.카운터에서 기계음 소리가 들려왔다.“주문이 들어왔습니다.”임유진은 이 소리를 듣고 배달 준비에 나섰는데 강현수가 덥석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그에게 쏘아붙였다.“강현수 씨, 이 손 놓죠!”“강지혁을 알기 전이라면 나랑 함께했을 거야?”그는 문득 그녀의 생각이 궁금했다.임유진은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난 그저 이 답안이 듣고 싶었을 뿐이에요. 왜요? 만약이란 가설인데도 대답하기 어렵나요? 아니
토요일 오후는 임유진이 쉬는 날이라 한지영에게 끌려 영화 로드쇼 행사장으로 갔다.“내가 이 티켓 두 장 얼마나 힘들게 구한 줄 알아? 오늘 로드쇼 행사에 고주원도 온대. 너 알아볼 수도 있으니까 그때 가서 아는 척 좀 해줘. 나랑 함께 사진도 찍어줄 수 있게 말이야.”한지영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마치 고주원을 위해서라면 이까짓 시련쯤은 다 감당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왜 연신 씨랑 함께 안 왔어?”임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백연신과 함께 오면 그녀보다 훨씬 수월하게 도와줄 텐데.한지영은 입을 삐죽거렸다. 이 일은 백연신에게 아직 비밀이니까!백연신이 만약 그녀가 고주원이 나오는 영화 로드쇼 행사에 참석한 걸 알면 낯빛이 어두워지다 못해 재가 될 것이다.저번에 고주원의 화보 일로 백연신은 그녀에게 강제로 술을 먹였고 결국 그녀는 술에 취해 부모님께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들었다.물론 백연신은 그녀에게 딱 한 잔만 강요했을 뿐 그 뒤론 그녀 스스로 술이 너무 달아 과음하게 됐다.“됐다 그래. 연신 씨랑 함께 오면 내가 고주원 볼 수나 있겠냐고!”한지영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임유진은 그런 그녀 때문에 실소를 터트렸다.“너 덕질하는 거 반대해?”“글쎄 그런다니까. 내가 덕질할 때마다 꼭 마치 본인한테 엄청난 빚이라도 진 것처럼 굴어. 이게 말이 돼?”한지영이 투덜댔다.“질투하는 걸 수도 있잖아.”임유진이 말했다. 혁이도 그녀가 고주원의 팬이란 걸 알고 한바탕 질투했으니까.한편 한지영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연신 씨가 질투를 해? 기껏해야 내게 복수하기 전까지 내 마음속에 딴 남자가 생기는 걸 원치 않을 뿐이야.”그녀가 말없이 떠났다고 복수에 눈이 멀어 그녀를 괴롭히는 거겠지. 소심한 남자는 다 이런 식일까? 한지영이 속으로 구시렁댔다.임유진도 더 말하지 않았다. 감정이란 건 스스로 겪어봐야 하는 법이니까.임유진과 한지영은 입장한 후 한지영이 구매한 좌석표대로 비교적 앞자리인 세
임유진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의 게스트가 임유라일 줄은 미처 예상치도 못했다.로드쇼 행사는 현장에 참석한 관중들에게 이벤트를 하는 차원에서 가끔 게스트를 초대하는 경우가 있다.다만 이런 부류의 게스트들은 대부분 대스타인데 임유라가 웬 말인가? 그녀는 강현수의 여자친구이기 전까지 연예계에서 삼류배우일 뿐이라 인지도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그녀의 인기는 온전히 강현수가 푸시업한 덕분이다. 그동안 강현수 덕분에 임유라는 자원이 끊이질 않았다.다만 일부 광고 외에는 영화나 노래, 어느 하나 제대로 출시된 게 없다.하여 그녀는 현재 대표작도 없는데 게스트로 나온다는 건 결국 강현수 덕분이다.한지영이 고개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며 뻘쭘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유진아 미안, 오늘 게스트가 임유라일 줄은 몰랐어.”알았더라면 이번 로드쇼 티켓을 사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이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왜 미안해? 네 탓도 아닌데. 게다가 우린 고주원 보러 온 거지 임유라 보러 온 게 아니잖아.”한지영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지 영화가 상영될 때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임유라가 게스트로 나온 것만 신경 쓰였다.영화가 끝나자 한지영은 임유진에게 고주원과 사진 찍게 해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가자 인제.”“사진 안 찍게?”임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나중에.”한지영이 어깨를 들썩거렸다.“가, 시도는 해봐야지.”임유진은 그녀가 오늘 고주원의 친필사인과 함께 사진 찍는 순간만을 학수고대한 걸 잘 알기에 임유라 따위 때문에 절친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혁아, 고주원 씨 연락처 알아봐 줄 수 있어? 매니저 연락처라도 돼. 나 지금 지영이랑 같이 있는데 고주원 씨랑 함께 사진 찍고 싶대. 시간 많이 끌지 않을테니까... 그래, 알았어.”임유진이 통화를 마친 후 기대 어린 친구의 눈빛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혁이가 대신 연락해주겠대. 이따가 전화 올 테니까 연락만 기다리래.”“우와, 대박!”한지영
백연신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넌 지금 내 여자친구야. 감히 고주원과 팬과 아이돌 그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기만 해. 그땐 고주원을 연예계에서 확 매장해버리는 수가 있어. 다시는 TV에서 고주원 못 볼 줄 알아.”딴 사람이라면 농담이거니 하고 넘겼겠지만 백연신이라면... 한지영은 소심한 그가 진짜 고주원을 매장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그래서 연락처는 포기했고 그냥 함께 사진 찍고 사인만 받으면, 그리고 화보도 몇 장 받으면 더없이 만족할 것이다.잠시 후 한 젊은 여자가 두 사람 앞으로 재빨리 걸어왔다.“임유진 씨, 안녕하세요.”그녀는 고주원의 현장 매니저였다. 임유진은 저번에도 고주원 옆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다.“안녕하세요.”“두 분 저 따라오세요.”상대가 길을 안내하며 직원 전용 통로로 향했고 임유진과 한지영은 그녀를 따라갔다.하지만 뜻밖에도 직원 통로에 들어서니 임유라와 마주쳐버렸다.임유라는 매니저와 한창 얘기 중이었다.임유진은 그녀를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임유라가 바로 알아보고 선뜻 말을 꺼냈다.“어머, 언니. 언니가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임유진은 의아한 듯 실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평소라면 임유라는 공개석상에서 그녀와 자매사이란 걸 공개하기 꺼린다. 감방에 다녀온 언니가 실로 창피했으니까.그런 그녀가 오늘은 정반대로 나왔다.임유진 옆에서 길을 안내하던 조수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이 자매사이란 걸 예상치 못한 듯싶었다.“여긴 직원 전용 통로인데 언니가 여기 온 건... 혹시 고주원 씨 보려고?”임유라는 그녀 옆에 서 있는 고주원의 현장 매니저를 알아봤다. 고주원이 오늘 이 현장 매니저를 데리고 행사장에 참석했기 때문이다.“임유진 씨랑 친구분이 고주원 씨와 함께 사진 찍고 사인받겠다고 하셨습니다.”현장 매니저가 대신 설명했다.그도 그럴 것이 임유라의 말투가 너무 거슬렸으니 현장 매니저 해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긴 직원 통로로 입구에 다다르는 구역이기에 많은 팬들이 이곳에 모여있다. 혹여나 이
한편 그녀가 물러선 곳엔 계단이 세 개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계단에 넘어져 괴로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언니! 난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려던 건데 꼭 이렇게까지 날 밀쳐야겠어?”임유라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고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그 모습이 실로 가여울 따름이었다.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입구에 있던 팬들도 이곳으로 시선이 몰렸고 다들 하나둘씩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임유진은 싸늘한 눈길로 임유라를 쳐다봤다.“내가 밀었는지 아닌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언니,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 그래, 나 다 알아... 언니가 감방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이 불공평하게 느낄 수도 있어. 하지만 난... 난 전혀 마음에 새겨두지 않는다고.”임유라가 뭇사람들 앞에서 가여운 여동생 코스프레이가 한창이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유진이 감방 다녀온 일까지 떠벌였다.가십거리에 진심인 팬들에게 이보다 더 흥미진진한 소스는 없었다.한지영이 옆에서 발끈했다.“임유라, 너 진짜 비겁해!”다만 임유라는 끝까지 속상한 척 말을 이어갔다.“욕해도 좋아. 언니도 우리 언니 친구잖아. 언니한테 바라는 건 딱 하나야. 제발 우리 언니 잘 타일러줘. 자꾸 제 삶을 궁지로 몰아가지 말라고 말이야. 이번에 나 밀친 건 하나도 원망 안 해. 하지만 다음에 딴 사람을 밀치면 그 사람들은 절대 이렇게 쉽게 안 넘어갈 거야.”한지영은 임유라의 착한 여동생 연기가 너무 역겨워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뻔뻔스러운 년을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까지 파렴치한 건 난생처음이었다.임유라의 매니저가 황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좀 어때요? 심하게 다쳤어요?”임유라는 입술을 꼭 깨물고 미간을 구기며 대답했다.“발을 삐끗한 것 같아요... 너무 아파요...”매니저는 씩씩거리며 임유진에게 삿대질했다.“아니, 언니라는 사람이 동생한테 어떻게 이래요? 동생이 연예인 됐다고, 강현수 씨 여자친구라고 배 아파하는 거예요? 질투심이
하지만... 대체 왜? 강현수는 임유라의 남자친구잖아. 지금 그 눈빛은 임유라가 아닌 임유진에게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강현수가 천천히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뭐라고 얘기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매니저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아까 유라 씨가 좋은 마음으로 언니분을 데리고 고주원 씨를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언니분이 유라 씨를 갑자기 밀쳤어요. 그것 때문에 유라 씨는 발목까지 접질렸고요."그 말인즉슨 강현수에게 임유라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려 임유진을 어떻게 해달라는 것이었다.임유라는 눈가에 눈물이 가득 맺혀서는 가녀린 모습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현수 씨... 아니에요. 언니도... 언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을 거예요.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한 내 잘못이죠."임유라가 이렇게 말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의 눈에는 임유진이 악독한 언니로, 임유라는 착해서 말도 못 하는 동생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임유라는 지금 팬들과 여론으로 임유진을 완전히 매장해 버리려고 하고 있다. 임유진을 대놓고 괴롭힌 것이 아니기에 강지혁이 알게 된다고 해도 뭐라고 나설 명분이 없게 만들 작정인 것이다.완벽한 설계에 임유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힘없이 당하면서도 바보같이 임유진을 위해 변호까지 해주는 착한 동생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고 있으니까 말이다.하지만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강현수의 눈동자가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임유라를 쏘아보았고 임유라는 제 얄팍한 수를 그에게 다 읽혀버린 것 같은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여자친구라고 해도 그녀는 항상 강현수와의 사이에서 이유 모를 벽을 느꼈었다. 아무리 다가가도 그가 그은 선 안으로는 영원히 들어올 수 없다는 무형의 압박이 있었으니까.그때 드디어 굳게 닫혀 있던 강현수의 입술이 열리더니 더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당신이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해서 넘어졌겠죠."그의 말은 임유라의 마음을 세게 후벼팠다. 그녀는 문득 그날 밤 윤이 식당 앞에서 강현수가 임유
임유진과 한지영은 현장 매니저의 안내에 따라 고주원의 대기실에 도착했다.고주원은 시종일관 친절한 태도로 먼저 사진도 찍어주고 웃으면서 얘기도 했다."두 분, 앞으로도 제가 주연인 영화 티켓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매니저한테 보내드리라고 할게요."그러고는 한지영에게 자신의 번호를 덥석 넘겼다.강지혁이 직접 한지영은 임유진의 친한 친구라고 얘기했기에 그녀에게 호감을 사서 나쁜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고주원은 생각했다. 이 바닥은 인맥이 넓으면 넓을수록 더 좋으니까.그러나 웬일인지 한지영은 고주원이 직접 번호를 넘겼음에도 전혀 좋아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전의 그녀였으면 아마 기뻐서 입이 귀에 걸렸을 것인데 지금은 그저 예의상 가볍게 고맙다는 인사만 할 뿐이었다.심지어는 고주원의 사인과 화보를 받고는 이만 가보겠다는 얘기도 먼저 꺼냈다."오늘 실례가 많았어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선물 감사해요!"그러고는 임유진의 손을 잡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대기실을 나온 후, 한지영이 더 머무르려고 할 줄 알았던 임유진은 의외라는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왜 이렇게 빨리 나와? 설마 너 지금 부끄럼이라도 타는 거야?""아니거든!"한지영은 임유진을 째려보며 말했다."너를 여기로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임유라 때문에?"임유진이 물었다."아까 걔 팬들 앞에서 그런 거 너 엿 먹이려고 그런 거야. 인터넷에서 너를 또 얼마나 악독한 년으로 몰아갈지."한지영은 연예계 쪽으로 빠삭했기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시나리오들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마음대로 떠들라고 해."임유진은 어깨를 들썩이면서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언비어에 일희일비할 시기는 진작에 지났으니까. 예전의 그녀는 항상 남들 눈을 의식해 왔고 어떻게 하면 좋은 인상을 심어줄지 연구해왔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남들 눈을 의식하면 할수록 비참해지고 상처받는 건 자기뿐이라는 걸 깨달았다.만약 출소 후 계속 예전 마인드로 살았다면 그녀는 진작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목매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