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은... 강현수?!그는 흰 셔츠에 베이지색 긴바지를 착장하여 살짝 캐쥬얼한 분위기를 냈다. 검은 머리는 살짝 헝클어졌고 건장한 체구와 정교한 이목구비가 차가운 달빛에 드리워 은은하게 빛났다.그는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는데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평소의 차분한 분위기와는 달리 좀 더 아련해 보였다.임유진은 그 눈빛이 조금 불편했고 그녀를 훤히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강현수는 그녀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는데 순간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확 퍼졌다.“술 마셨어요?”그녀가 물었다.“네, 조금요.”강현수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를 더 그윽하게 바라봤다.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너무 늦은 시각이라 난 이만 돌아가야 해요, 안녕히 계세요.”그녀는 말하면서 자리를 떠나려 했다.다만 걸음을 내딛자마자 강현수가 덥석 그녀를 잡아당겨 품에 끌어안았다.임유진은 한없이 넓은 품에 안겨 독한 술 냄새를 맡았다. 방금 서 있을 때보다 더 강렬하게 코를 찔렀다.‘이건 절대 조금 마신 게 아니야! 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이거 놔요!”임유진이 소리쳤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말해. 대체 어떻게 해야 널 찾을 수 있어?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찾았는데 왜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거야? 못 찾겠다고, 도저히 못 찾겠단 말이야...”임유진은 몸이 움찔거렸다. 강현수는 지금 그녀를 딴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 걸까? 그녀에게 하는 말 같지는 않은데...“강현수 씨, 일단 이거 놔요. 많이 취하셨어요.”임유진이 몸부림쳤지만 그가 너무 꽉 끌어안아서 꼼짝할 수 없었다.이럴 때 보면 남자와 여자는 힘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취해? 진짜 취했으면 좋겠어. 내가 얼마나 취하고 싶은지 알아?”강현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청량한 그의 목소리에 아픔이 살짝 담겨 있었다.“날 누구로 착각했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이거 좀 놔요. 안 놓으면...”“안 놓으면 뭐?”그가 고개 숙여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둘의 콧등이 거의 닿
이 눈물은 그녀도 전에...순간 그녀는 바늘로 콕콕 찌르듯이 머리가 아파 났다.“그거 알아? 난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너무너무 보고 싶어.”강현수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그녀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고 입술이 곧 그녀 입술에 닿을 것만 같았다.찰싹!청아한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임유진의 오른손 손바닥이 뜨거운 열기와 함께 저릿해졌다. 그녀는 방금 너무 심하게 강현수의 뺨을 내리쳤다.강현수는 머리가 한쪽 옆으로 기울어졌고 주변 공기마저 차갑게 얼어붙었다.둘 사이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그는 한참 후에야 서서히 고개 돌려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좀전의 아련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전보다 훨씬 맑은 눈빛이었다.그녀를 구속했던 두 손도 천천히 놓아주고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걸음을 휘청거리며 근처의 차에 올라탔다.임유진은 그제야 손을 들어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 안았다.방금 강현수가 눈물 흘리는 모습에 왜 머리가 이토록 아픈 걸까? 마치 무언가에 자극받은 것처럼 마음속 깊숙이 괴로움이 솟구쳤다.‘왜, 대체 왜 이렇게 괴로운 거야? 내 몸이 본능적으로 강현수가 우는 걸 못 견디겠다고 말해주는 것 같잖아.’임유진도 이 느낌을 대체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그 시각 멀지않은 음침한 모퉁이에서 임유라가 이를 악물고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임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오늘 그녀는 줄곧 강현수를 따라다녔는데 그는 마을에선 바보같이 멍하니 몇 시간이나 서서 산을 바라봤고 그녀도 다리가 저리도록 뒤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이어서 강현수는 마을의 식당에 가서 술을 마셨다. 한잔, 두잔, 마치 취하려고 작정한 듯이 술을 퍼마셨는데 그녀는 그런 강현수의 모습을 처음 봤다.그때까지도 임유라는 내심 흐뭇했다. 오늘 밤 강현수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면 그녀에게 좋은 기회가 차려질 거라고 김칫국부터 마셨다.기회를 봐서 그에게 다가가면 오늘 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게 될지도 모른다.그런데 강현수는 결국 이리로, 임유진을 찾아왔다.심지어
임유진은 문득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이렇게 묵묵히 강지혁을 바라보는 것도 안구 정화되는 흐뭇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지금처럼 지낼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일할 때의 강지혁은 고도로 집중하여 빨리 수중의 서류를 훑어보는 동시에 펜으로 끊임없이 체크하며 빠른 속도로 검토한다. 게다가 노트북 너머의 임원에게 후속 업무를 분부하는 것도 잊지 않고 일사천리로 해결한다.그런 강지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임유진은 문득 감개무량해졌다. 전에 누군가가 남자는 일할 때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했는데 지금 보니 정말 그런 듯싶다.모두가 알다시피 강지혁은 상업계의 빅 보스이다. 강씨 일가는 백 년을 대물림받은 재벌가이지만 그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보스는 아니다. 막강한 집안 세력을 보유한 건 사실이지만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강씨 일가가 현재까지도 승승장구하고 있고 강지혁 본인의 지위도 끄떡없는 건 전부 그가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이다.임유진은 그의 옆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봤다. 그녀의 각도에서 보면 강지혁의 날카로운 콧날과 선명한 얼굴 윤곽, 섹시한 입술과 날렵한 턱선이 유난히 매력적이었다.강지혁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긴 속눈썹이 드리워져 예쁜 음영을 주었다.그의 눈은 유달리 예뻤다. 그 두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땐 영롱한 빛이 반짝이고 마치 애틋한 감정이 한가득 쌓여있는 것처럼 자꾸만 더 보고 싶게 만든다.“눈이 참 예뻐.”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이 말이 스쳐 지나갔다!화들짝 놀란 임유진은 머리가 또다시 지끈거렸다. 이건 그녀가 누구한테 해줬던 말일까?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강현수의 흐느끼던 얼굴이 뜬금없이 나타났다.‘헐, 내가 왜 강현수를 생각하고 있지!’그녀는 힘껏 머리를 내저으며 강현수의 얼굴을 애써 지우려 했다.“왜 그래? 머리를 왜 그렇게 흔드는 건데?”이때 강지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임유진이 고개를 번쩍 들자 강지혁이 어느새 그녀 앞
“나 우는 거 보고 싶으면 바로 울어 줄게.”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공기 속에 울렸다.임유진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울겠다고 하는 건가?“왜 그래?”강지혁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너 방금...”“누나가 보고 싶다면 바로 해줄게. 누나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만족시켜줄 거야.”그는 말하면서 천천히 몸을 기울여 잘생긴 얼굴을 그녀 앞에 갖다 댔다.임유진은 바로 코앞에 닿은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도 칠흑같이 어두운 그의 두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강지혁은 미소 짓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이 말을 내뱉었다. 마치 그녀가 원한다면 바로 눈물을 흘려줄 것처럼 말이다.“원해?”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소곤거리는 나른한 말투가 그녀의 심장을 간지럽혔다.임유진은 머리를 내저으며 대답했다.“아니.”그녀의 대답을 들은 강지혁은 되레 눈가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왜?”“내가 속상하니까. 네가 운다는 건 슬프다는 걸 의미하잖아. 난 너 슬퍼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그녀가 대답했다.그녀의 말은 따뜻한 전류가 되어 강지혁의 두 귀에 흘러 들어갔고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였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큰코다치길 바라고 있을까? 친구들은 그에게 공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태도이고 아버지는 전에 어머니를 너무 사랑해 그에게 준 사랑이 아주 적다. 어머니는 그를 이용수단으로 써먹었을 뿐이고 결국 그 빌미로 순조롭게 재벌가에 발을 들였다.나중에 강지혁이란 이용수단이 아무런 작용도 못 일으키자 어머니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매정하게 그를 떠났다.할아버지 눈엔 그가 단지 강씨 일가를 이끄는 유일한 상속자일 뿐이다. 그의 몸에 흐르는 피가 아버지의 피이니까. 다만 나머지 절반은 어머니 유전이라 할아버지는 줄곧 그를 싫어한다.그래서 매번 손자를 바라보는 눈빛에 혐오가 섞여 있다.여태껏 살아오면서 강지혁은 항상 자신에게 무조건 강해져야 한다고 되뇌었다.
심지어 그는 수년간 상대를 찾아 헤맸지만 여전히 찾지 못했다.그 소녀가 그리운 만큼 후회도 더 했다.어제 술을 많이 마셨더니 줄곧 마음을 짓눌렀던 후회가 파도처럼 일렁여 그를 잠식해버렸다.이 식당까지 어떻게 찾아왔는 지도 모를 지경으로 머릿속엔 오직 그 소녀 생각으로 가득 찼었다. 꼭 한 번 그녀를 보고 싶었다. 얼굴이라도 봐야만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았다.그리고 결국 임유진을 만났고 현실 속 임유진과 기억 속 그 소녀를 착각해 그런 추태를 부리게 됐다.애석하게도 어제 그토록 술을 많이 마셨건만 그녀에게 했던 모든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다른 여자라면 전혀 신경 쓰지 않겠지만 임유진은 달랐다.그녀가 강지혁의 여자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상상 속의 그 소녀가 어른이 된 후의 모습과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다.임유진이 설사 그 소녀가 아닐지라도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는 않았다.“뭐 그렇게 큰일까진 아니고, 우리 서로 퉁 친 거예요.”임유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제 그녀는 강현수의 뺨을 내리쳤으니까.퉁 쳐... 강현수는 왠지 이 말이 살짝 기분 나쁘게 들렸다.“어젯밤에 내가 왜 그랬는지는 안 물어봐요?”“그럴 필요 없어요.”이건 단지 강현수의 사정이지 그녀가 굳이 궁금해야 할 부분이 아니니까.“강현수 씨가 더이상 술에 취해 어제 같은 행동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어제 일은 서로 없던 거로 해요.”강현수는 저 자신을 비웃으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정말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나 보다.카운터에서 기계음 소리가 들려왔다.“주문이 들어왔습니다.”임유진은 이 소리를 듣고 배달 준비에 나섰는데 강현수가 덥석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그에게 쏘아붙였다.“강현수 씨, 이 손 놓죠!”“강지혁을 알기 전이라면 나랑 함께했을 거야?”그는 문득 그녀의 생각이 궁금했다.임유진은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난 그저 이 답안이 듣고 싶었을 뿐이에요. 왜요? 만약이란 가설인데도 대답하기 어렵나요? 아니
토요일 오후는 임유진이 쉬는 날이라 한지영에게 끌려 영화 로드쇼 행사장으로 갔다.“내가 이 티켓 두 장 얼마나 힘들게 구한 줄 알아? 오늘 로드쇼 행사에 고주원도 온대. 너 알아볼 수도 있으니까 그때 가서 아는 척 좀 해줘. 나랑 함께 사진도 찍어줄 수 있게 말이야.”한지영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마치 고주원을 위해서라면 이까짓 시련쯤은 다 감당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왜 연신 씨랑 함께 안 왔어?”임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백연신과 함께 오면 그녀보다 훨씬 수월하게 도와줄 텐데.한지영은 입을 삐죽거렸다. 이 일은 백연신에게 아직 비밀이니까!백연신이 만약 그녀가 고주원이 나오는 영화 로드쇼 행사에 참석한 걸 알면 낯빛이 어두워지다 못해 재가 될 것이다.저번에 고주원의 화보 일로 백연신은 그녀에게 강제로 술을 먹였고 결국 그녀는 술에 취해 부모님께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들었다.물론 백연신은 그녀에게 딱 한 잔만 강요했을 뿐 그 뒤론 그녀 스스로 술이 너무 달아 과음하게 됐다.“됐다 그래. 연신 씨랑 함께 오면 내가 고주원 볼 수나 있겠냐고!”한지영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임유진은 그런 그녀 때문에 실소를 터트렸다.“너 덕질하는 거 반대해?”“글쎄 그런다니까. 내가 덕질할 때마다 꼭 마치 본인한테 엄청난 빚이라도 진 것처럼 굴어. 이게 말이 돼?”한지영이 투덜댔다.“질투하는 걸 수도 있잖아.”임유진이 말했다. 혁이도 그녀가 고주원의 팬이란 걸 알고 한바탕 질투했으니까.한편 한지영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연신 씨가 질투를 해? 기껏해야 내게 복수하기 전까지 내 마음속에 딴 남자가 생기는 걸 원치 않을 뿐이야.”그녀가 말없이 떠났다고 복수에 눈이 멀어 그녀를 괴롭히는 거겠지. 소심한 남자는 다 이런 식일까? 한지영이 속으로 구시렁댔다.임유진도 더 말하지 않았다. 감정이란 건 스스로 겪어봐야 하는 법이니까.임유진과 한지영은 입장한 후 한지영이 구매한 좌석표대로 비교적 앞자리인 세
임유진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의 게스트가 임유라일 줄은 미처 예상치도 못했다.로드쇼 행사는 현장에 참석한 관중들에게 이벤트를 하는 차원에서 가끔 게스트를 초대하는 경우가 있다.다만 이런 부류의 게스트들은 대부분 대스타인데 임유라가 웬 말인가? 그녀는 강현수의 여자친구이기 전까지 연예계에서 삼류배우일 뿐이라 인지도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그녀의 인기는 온전히 강현수가 푸시업한 덕분이다. 그동안 강현수 덕분에 임유라는 자원이 끊이질 않았다.다만 일부 광고 외에는 영화나 노래, 어느 하나 제대로 출시된 게 없다.하여 그녀는 현재 대표작도 없는데 게스트로 나온다는 건 결국 강현수 덕분이다.한지영이 고개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며 뻘쭘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유진아 미안, 오늘 게스트가 임유라일 줄은 몰랐어.”알았더라면 이번 로드쇼 티켓을 사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이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왜 미안해? 네 탓도 아닌데. 게다가 우린 고주원 보러 온 거지 임유라 보러 온 게 아니잖아.”한지영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지 영화가 상영될 때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임유라가 게스트로 나온 것만 신경 쓰였다.영화가 끝나자 한지영은 임유진에게 고주원과 사진 찍게 해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가자 인제.”“사진 안 찍게?”임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나중에.”한지영이 어깨를 들썩거렸다.“가, 시도는 해봐야지.”임유진은 그녀가 오늘 고주원의 친필사인과 함께 사진 찍는 순간만을 학수고대한 걸 잘 알기에 임유라 따위 때문에 절친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혁아, 고주원 씨 연락처 알아봐 줄 수 있어? 매니저 연락처라도 돼. 나 지금 지영이랑 같이 있는데 고주원 씨랑 함께 사진 찍고 싶대. 시간 많이 끌지 않을테니까... 그래, 알았어.”임유진이 통화를 마친 후 기대 어린 친구의 눈빛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혁이가 대신 연락해주겠대. 이따가 전화 올 테니까 연락만 기다리래.”“우와, 대박!”한지영
백연신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넌 지금 내 여자친구야. 감히 고주원과 팬과 아이돌 그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기만 해. 그땐 고주원을 연예계에서 확 매장해버리는 수가 있어. 다시는 TV에서 고주원 못 볼 줄 알아.”딴 사람이라면 농담이거니 하고 넘겼겠지만 백연신이라면... 한지영은 소심한 그가 진짜 고주원을 매장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그래서 연락처는 포기했고 그냥 함께 사진 찍고 사인만 받으면, 그리고 화보도 몇 장 받으면 더없이 만족할 것이다.잠시 후 한 젊은 여자가 두 사람 앞으로 재빨리 걸어왔다.“임유진 씨, 안녕하세요.”그녀는 고주원의 현장 매니저였다. 임유진은 저번에도 고주원 옆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다.“안녕하세요.”“두 분 저 따라오세요.”상대가 길을 안내하며 직원 전용 통로로 향했고 임유진과 한지영은 그녀를 따라갔다.하지만 뜻밖에도 직원 통로에 들어서니 임유라와 마주쳐버렸다.임유라는 매니저와 한창 얘기 중이었다.임유진은 그녀를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임유라가 바로 알아보고 선뜻 말을 꺼냈다.“어머, 언니. 언니가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임유진은 의아한 듯 실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평소라면 임유라는 공개석상에서 그녀와 자매사이란 걸 공개하기 꺼린다. 감방에 다녀온 언니가 실로 창피했으니까.그런 그녀가 오늘은 정반대로 나왔다.임유진 옆에서 길을 안내하던 조수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이 자매사이란 걸 예상치 못한 듯싶었다.“여긴 직원 전용 통로인데 언니가 여기 온 건... 혹시 고주원 씨 보려고?”임유라는 그녀 옆에 서 있는 고주원의 현장 매니저를 알아봤다. 고주원이 오늘 이 현장 매니저를 데리고 행사장에 참석했기 때문이다.“임유진 씨랑 친구분이 고주원 씨와 함께 사진 찍고 사인받겠다고 하셨습니다.”현장 매니저가 대신 설명했다.그도 그럴 것이 임유라의 말투가 너무 거슬렸으니 현장 매니저 해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긴 직원 통로로 입구에 다다르는 구역이기에 많은 팬들이 이곳에 모여있다. 혹여나 이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