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였을 당시 임유진은 줄곧 그녀의 기세를 짓누르고 로펌에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각광 받았으니 정한나는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인제 드디어 임유진을 제대로 ‘각광 받게’ 해줄 수 있다. 로펌 직원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지. 여신 아우라를 내뿜던 변호사가 지금 어떤 꼴이 됐는지 말이다.다들 전에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없었는지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다!정한나는 꼭 이렇게 해야만 마음속에 쌓였던 불만이 가셔질 것 같았다.이때 마침 다른 간호사가 지나갔고 정한나와 얘기 나누던 그 동료는 곧장 간호사에게 물었다.“저 초음파 검사실은 아까 병원 측에서 건강검진 받는 환자는 접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좀 전에 간호사가 건강검진 받는 환자를 데리고 들어갔죠?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아 네, 그분은 아마 우리 병원 VIP 건강검진 고객일 겁니다.”간호사가 대답했다.“VIP 건강검진 고객이요?”그 동료는 흠칫 놀라더니 곧장 캐물었다.“VIP 건강검진은 비용이 얼마나 되는데요?”“패키지에 따라 가격이 다 달라요. 제일 저렴한 패키지는 몇백만 원 좌우 할 테고 비싼 건 몇천만 원 짜리도 있어요. 상세하게 알고 싶다면 여기 6층에 안내데스크가 있으니 거기로 가서 문의하시면 됩니다.”말을 마친 간호사는 자리를 떠났다.그 동료는 충격에 휩싸인 채 머리를 돌리고 똑같이 간호사의 말에 충격받은 정한나를 쳐다봤다.“한나 씨, 그 선배 진짜 배달 일만 하는 거 맞아요?”제일 저렴한 패키지도 몇백만 원 한다는데 일반인들이 퍽이나 감당할까?“말도 안 돼!”정한나가 비명을 지르며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걔가 어떻게 VIP 고객이야?”“하지만 이미 저 초음파 검사실로 들어갔잖아요.”동료가 말했다.그 시각 줄 서 있던 로펌 동료들도 정한나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정한나는 그제야 감정조절이 안 된 걸 깨닫고 황급히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동료에게 말했다.“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다만 속으론 여전히 내켜하지 않
그 시기가 그녀에겐 가장 침울한 시기이다. 살아갈 의욕을 잃었고 한지영이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의사가 한숨을 내쉬었다.“이따가 검사보고 나오면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한번 보이세요. 뭔가 보완책을 구할 수도 있잖아요.”“보완책이요?”임유진이 놀란 듯이 물었다.“진짜 또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유진 씨는 아직 젊어서 아예 기회가 없다고 단정 짓기는 일러요. 게다가 의학적으로 절대적인 일은 원래 존재하지 않아요.”임유진은 저도 몰래 마음속에서 또다시 일말의 희망이 생겨났다. 매우 아득할지라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만약... 진짜 보완책이 있다면... 그녀는 자신만의 아이를 가질 수도 있을 텐데!여기까지 생각한 임유진은 불쑥 강지혁의 얼굴이 떠올랐다.만약 진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애 아빠는...“다 됐어요, 일어나시면 됩니다.”의사의 말에 그녀는 사색에서 빠져나왔다.임유진은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옷매무새를 정리하면서 요동치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방금 그 순간의 생각 때문에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그녀는 강지혁과 아이를 낳고 싶은 걸까?임유진은 간호사와 함께 초음파 검사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검진보고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따가 모든 결과서가 나오면 담당 의사가 받아가고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각 과실 전문의에게 진찰받으면 되니까.그녀가 초음파 검사실에서 나오자 아직도 줄 서 있던 정한나가 또다시 쪼르르 달려오며 큰소리로 외쳤다.“VIP 건강검진 패키지 샀어요, 혹시? 유진 씨 고작 배달 일 하면서 무슨 돈으로 그 비싼 패키지를 다 사요?”임유진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한나는 마치 판사를 방불케 했다. 묻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이다.“그건 내 사생활 같은데 굳이 한나 씨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임유진이 비난 조로 쏘아붙였다.정한나도 그제야 자신의 말투가 조금 거칠었다는 걸 알아채고 얼른 자세를 낮추는 척했다.
말을 마친 임유진도 더는 정한나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 옆에 있는 간호사를 부르며 다음 검사를 받으러 갔다.정한나는 제자리에 서서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몸을 돌리니 로펌의 뭇사람들이 한창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축 처진 채로 다시 대오에 돌아갔다.그러니까 한바탕 애를 쓴 후에도 결국 임유진이 무슨 돈으로 VIP 패키지를 샀는지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모든 검사를 마친 임유진은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갔다.“다 했어?”강지혁이 물었다.“응, 어떤 결과서는 빨라도 오후에 나온대.”임유진이 대답했다.“그럼 일단 가서 아침부터 먹자. 누나 아침밥 못 먹었잖아.”“그래.”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병원을 나섰다.“뭐 먹고 싶어?”강지혁이 물었다.“이 근처에서 아무거나 먹자.”이제 겨우 9시다 보니 근처에 토스트 가게가 아직도 장사하고 있었다.“그래.”강지혁은 가볍게 웃으며 선뜻 그녀의 손을 잡고 병원 근처의 토스트 가게로 향했다.임유진은 메뉴판의 종류 다양한 토스트를 보더니 군침이 돌았다.“그냥 여기서 먹자. 나 아침 안 먹었더니 배고프네.”강지혁은 머리를 끄덕였다.임유진은 주문을 마치고 또다시 강지혁에게 물었다.“넌 뭐 먹을래?”“누나랑 같은 거로.”그는 임유진의 입맛이 궁금했다.야채 토스트와 키위 주스 한 잔까지, 아침 식사로 아주 푸짐한 한 상이었다. 다만 요 몇 년 사이에 물가가 폭등해 이 한 세트에 1만5천 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임유진은 금방 출소하고 토스트 가게를 지날 때마다 사 먹지 않았다.그 당시 그녀에게 1만5천 원을 주고 아침을 사 먹는 건 사치였으니까. 편의점에서 대충 5천 원 이내로 아침밥을 해결하기가 일쑤였다.“아 참, 오늘 건강검진 마치고 나랑 함께 월세방 가줄 수 있어?”임유진이 불쑥 물었다.“거긴 왜?”강지혁이 되물었다.“거기 있는 물건들 좀 정리하고 집주인이랑 상의해서 방 빼려고.”그 집을 계속 그대로 놔두는 것도 해결책이 아니니까.
임유진도 그러면 될 것 같아 머리를 끄덕였다.“그래.”그녀는 계속 토스트를 맛있게 먹었고 강지혁은 흐뭇한 얼굴로 그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토스트를 크게 한 입 먹고 주스를 한 모금 마시는 모습이 귀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긴 생머리는 포니테일로 묶고 이마를 훤히 드러냈으며 수려한 미모에 영롱한 두 눈, 오뚝한 코와 핑크빛 입술까지 그의 눈엔 모든 게 예뻐 보였다.그 언젠가 한 여자를 이토록 사랑할 거라고 생각이나 해봤을까? 하지만 정작 또 사랑에 빠지고 보니 이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을.임유진은 맛있게 먹다가 우연히 고개 들어 강지혁의 그윽한 눈빛과 마주쳤다. 순간 그녀는 짙은 그의 눈동자에 머리가 백지장이 돼버렸다.“왜... 그렇게 봐?”임유진이 우물쭈물하며 물었다.“그냥, 누나가 진짜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서.”강지혁이 대답했다.임유진은 몹시 난감했다. 그가 본 미인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요 몇 년 동안 그녀는 관리도 제대로 못 받아 대충 봐줄 만한 정도이지 ‘엄청 예쁘다’라는 건 뻔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하필 강지혁의 눈빛과 표정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사랑의 콩깍지가 제대로 씌였나 보다. 임유진이 재빨리 말했다.“너도... 얼른 먹어. 식으면 맛없어.”강지혁은 가볍게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한 후 토스트를 먹기 시작했다.그는 조촐하게 토스트로 아침을 해결할 뿐인데 주스를 마시는 제스처나 토스트를 먹는 모습까지 전부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건 마치 광고를 보는 듯한 기분이랄까.진정 예쁜 사람은 바로 강지혁이었다.그는 S 시를 쥐락펴락하는 사람인데 지금 이런 구멍가게에서 토스트나 먹고 있다니,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임유진이 그와 연애하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이지만 이 또한 현재진행형으로 발생하고 있는 일이다.만약 이후에 그녀와 강지혁 사이에 정말 아이가 생긴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임유진은 강지혁을 향한 마음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깊어졌다...
“식기 그릇이랑 이불까지 이따가 중고품 상가로 가져가서 다 팔아버릴래. 이 옷들이랑 신발은 더 입을 수 있으니까 집에 가져갈 거야.”강지혁은 그녀가 가져가겠다는 옷과 신발을 살펴보았는데 조금 바랜 옷들이었다. 비록 퀄리티는 좋아도 올드하고 색이 바랬다.아마도 그녀가 감방에 들어가기 전에 산 옷인 듯싶다.강지혁은 바로 알아챘지만 뭐라 말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돈도 쓰고 싶고 이 낡은 물건들을 전부 좋은 거로, 새것으로 바꿔주고 싶지만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니까.너무 성급하게 몰아붙였다가 괜히 그녀를 놀래게 할까봐 걱정이었다. 이제 겨우 강지혁에 대한 경계를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했으니 말이다.“여기서 나 잠깐만 기다려줄래? 금방 갔다 올게.”임유진이 막 다 싼 짐보따리를 들고 중고품 상가에 다녀오려는데 강지혁이 선뜻 물건을 챙겼다.“내가 할게. 문 열어줘 누나.”“응.”그녀는 서둘러 문을 열어주었다.강지혁은 한 손에 식기 그릇을, 다른 손엔 이불과 담요를 들고 문밖을 나섰다.임유진도 문을 꼭 닫고 그를 따라갔다.“나 하나 줘. 내가 들게.”그가 무거운 짐을 가득 들고 있으니 임유진은 살짝 미안해졌다.“아니야. 누난 앞에서 길만 잘 안내해주면 돼.”강지혁이 대답했다.그가 단호하게 말하자 임유진은 어쩔 수 없이 앞에서 걸으며 은근슬쩍 뒤돌아보기도 했다.지금 강지혁의 모습은 마치 설 연휴에 부모님 뵈러 본가로 돌아오는 아들처럼 짐보따리를 가득 이고 있는데 하필 양복을 입고 잘생긴 얼굴을 내비치고 있으니 이 상황과 너무 안 어울렸다.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아예 없는 듯싶다.드디어 중고품 상가에 도착했고 임유진은 가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더니 재빨리 달려갔다.“사장님, 식기 그릇이랑 이불 담요 가져왔는데 가게에서 받나요?”“당연하죠.”사장님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하지만 멋있게 차려입은 강지혁이 ‘중고품들’을 들고 오는 모습에 적잖게 놀란 눈치였다.사장님은 물건들을 하나둘씩 확인하며 뭐라 중얼거리더니 임유진을 끌
강지혁은 대뜸 걸음을 멈추고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임유진은 의아한 듯 물었다.“왜?”“속인다면?”그가 물었다.임유진은 흠칫 머뭇거리더니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그를 진지하게 바라봤다.“혁아, 난 거짓말하는 사람 싫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래도록 잘 지내려면 반드시 진솔해야 해. 거짓말을 안 하는 건 가장 기본이야.”강지혁은 침묵한 채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봤다.“너 나 속일 거야?”그녀는 물으면서도 가슴이 불안해졌다. 강지혁이 진짜 그럴 거라고 대답할까 봐, 두 사람은 서로 안 맞다고 결론이 날까 봐 너무 불안했다.이 점에서도 서로 의견이 안 맞으면 둘은 과연 계속 함께할 수 있을까?강지혁은 옆에 내린 손을 슬쩍 거두어들이고 천천히 대답했다.“안 속여.”임유진은 가슴을 짓눌렀던 큰 돌덩어리를 내려놓은 것처럼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강지혁은 그녀를 속이지 않겠다고 한다.“왜? 내 대답이 누나를 실망시킬까 봐?”그는 마치 그녀의 표정에서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본 듯이 물었다.“조금.”임유진은 뻘줌한 듯 코를 쓰다듬었다.“아무튼 난 너 속이는 일 없어. 그러니까 너도 나 속이지 마.”“알았어.”강지혁은 나지막이 대답했다.“근데 만약 내가 아까 속이겠다고 대답하면 누난 어쩔 생각이었어?”강지혁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의 해답을 듣고 싶었다. 이 해답이 자신을 더 두렵게 만들지라도.임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꼭 깨물고 힘겹게 말했다.“아마... 헤어지겠지.”만약 기본이 되어야 할 마인드가 안 맞으면 오래가기 힘들다. 지금은 간신히 버텨낼 수 있겠지만 앞으로 분명 트러블이 생길 텐데 애초에 감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바로 끝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듯싶다.그녀는 이미 누군가에게 속은 적이 있어 두 번은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소민준도 전에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꼭 지켜줄 거라고 맹세했고 교통사고가 났을 때도 제일 유명한 변호사를 찾아주겠다고 했다.그
강지혁은 그제야 팔에 힘을 풀었지만 여전히 그녀를 안고 있었다.“누나, 헤어지자는 말 영원히 하지 마. 그래 줄 수 있어?”그는 고개 숙여 짙은 눈동자로 임유진을 쳐다봤다. 그 눈빛 속엔 그녀가 전혀 본 적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차 있었다.마치 그녀가 이별을 고하면 어쩔 바를 몰라서 당혹감에 빠질 것만 같았다.강지혁에게 그녀는 정말 이토록 중요한 존재일까? 만약에라도 헤어지잔 말을 못 할 정도로?!임유진은 가슴이 꽉 막힐 것처럼 괴로웠다. 그녀는 저도 몰래 천천히 손을 들어 강지혁을 가볍게 안아주었다.“그래, 혁아. 영원히 헤어지잔 말 안 할게.”‘영원’이라는 다짐은 이렇게 그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그녀는 심지어 이 다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지금은 단지 그의 이런 표정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왜냐하면... 그녀도 마음이 괴로우니까....오후에 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건강검진 보고서가 나왔는데 중요한 문제점은 예전에 남은 상처들이었다. 비록 지금 다 나았지만 날씨가 흐리고 습해지면 관절이 시큰거렸다.의사 말로는 장기적으로 치료하면 다 나을 거라고 한다.제일 큰 골칫거리는 역시 그때 자궁을 다친 일이었다.병원 산부인과 전문의들의 건의는 일단 몸조리를 하다가 어느 정도 상태가 좋아지면 다시 수술해서 자궁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때 다시 임신을 고려해도 아예 가망이 없는 건 아니다.“나 진짜 아이 가질 수 있어요?”임유진은 흥분에 겨웠다. 줄곧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던 사치스러운 염원이었으니까.그런데 지금 이 염원이 현실로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그건 조리 후의 상황을 봐야 해요. 현재로선 확률이 30퍼센트입니다.”전문의가 말했다.30퍼센트란 다른 사람들에겐 아주 낮은 확률일지 몰라도 임유진에겐 엄청난 숫자였다.“그럼 우선 몸조리부터 할게요.”결국 강지혁이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병원에서 약 처방을 받은 후 임유진과 강지혁은 나란히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얼굴이 빨개졌다.“난... 그건...”임유진은 문득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맞다’라고 하든 ‘아니다’라고 하든 다 잘못된 것 같았다!“아니라고 말하지 마!”강지혁은 터프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만약 내게 아이가 생긴다 해도 그건 오직 누나랑 내 아이일 거야. 그러니까... 누나도 엄마가 되고 싶다면 오직 내 아이의 엄마여야 해.”임유진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기 병원이야.”게다가 그들이 있는 곳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데 이렇게 감싸 안고 있으니 저절로 이목을 집중시켰다.“그게 뭐?”강지혁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귀와 목을 간지럽혔다.“누나, 아까 내가 한 말 이해했지?”그녀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의 목소리와 숨결은 마치 보이지 않는 유혹처럼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이게 했다.차에 탄 후에도 임유진은 여전히 두 볼이 빨갰다.강지혁이 운전했고 그녀는 조수석에 앉아서 몰래 그를 힐긋 쳐다봤다.옆모습을 보니 날카로운 턱선과 짙은 눈동자, 높고 또렷한 콧대까지 그는 일반 동양인보다 훨씬 더 입체적이었다. 이목구비와 턱선, 목선까지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만약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생각이 순간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내가 그렇게 좋아? 왜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데?”강지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임유진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넋 놓은 표정을 거두어들였다.그녀가 어쩔 바를 몰라서 속수무책 해하고 있을 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임유진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보았는데 절친 한지영의 전화였다.통화 버튼을 누르자 전화기 너머로 한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아, 지금 통화 가능해?”“응, 말해.”임유진은 난감한 분위기에서 자신을 구출한 한지영에게 고마워 마지않았다.“너 언제 시간 돼? 우리 같이 해성시로 다녀오자. 최대한 빨리 다녀오는 게 좋을 거야. 그해 증인이 지금 경찰서에 잡혀 있거든. 연신
“내가 누나야. 아까도 봐. 아빠가 엄마한테 누나라고 했잖아!”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했던 누나라는 소리를 자신들의 관계에도 적용하려는 아이의 말에 진땀이 다 났다.1층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2층 서재에서는 강지혁의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박건태는 강지혁에게서 두통이 시작된 계기와 통증의 정도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말로 과거의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사실 박건태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강지혁에게서 거실에 있던 여자가 바로 그의 사망한 아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매스컴은 물론이고 S 시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S 시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여성이 될 테고 강지혁의 옆자리를 노리던 여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되겠지.“그럼 만약 앞으로도 그 여자가 예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얘기를 하게 되면 또다시 오늘처럼 기억이 자극을 받아 두통이 일 거라는 소린가?”강지혁이 물었다.“그렇다고 봐야죠. 애초에 회장님의 두통이 시작된 계기도 사모님과의 짤막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사모님께서 돌아온 지금, 더더욱 그 기억이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그럼 내 기억이 완전히 다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강지혁이 또 한 번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다만...”박건태가 말을 흐렸다.“다만 뭐지?”“다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회장님은 매번 고통스러울 겁니다. 오늘도 고작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것만으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사모님과 점점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렇게 되면 두통의 빈도도 커질 테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박건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사람마다 체질
여동생에게 안기면 이런 느낌인 건가?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양녀로 들어온 또 다른 여동생과 많이 달랐다. 소안나는 매번 그를 보면 잘 보이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멀리 떨어진 채 가까이 다가오는 걸 무서워했는데 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그의 손을 덥석 잡는 것도 모자라 엄마처럼 그를 꼭 끌어안아 주기까지 했다.강선율은 아까 임유진도 밀쳐내지 못하더니 이번에는 여동생의 포옹도 밀쳐내지 못하고 있었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이 꼭 끌어안은 채 감정을 나누는 모습에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강선율이 워낙 과묵하고 애어른 같은 면이 있는 아이라 조금 걱정이 됐는데 수다쟁이에 애교쟁이인 딸이 먼저 가까이 다가가 주니 둘 사이에 밸런스가 맞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었다.게다가 강선율의 반응을 보면 현이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잠시 후, 의사인 박건태가 저택에 도착했다.서둘러 소파로 다가온 박건태는 임유진과 강지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강지혁의 몸 상태를 살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서서히 두 눈을 뜨며 말했다.“이제 괜찮아졌어. 아까처럼 아프지 않아.”박건태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전에는 한번 아프면 적어도 몇 시간은 아팠었으니까. 그런데 집사에게서 전화를 받고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고작 20분밖에 안 됐는데 전과 달리 정말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전혀 아픈 얼굴이 아니었다.‘증상이 전보다 괜찮아진 건가...?’“그래도 검사는 한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박건태의 노파심에 강지혁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2층으로 올라가 검사를 받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올라간 뒤 집사를 향해 물었다.“혁이 저러는 거 자주 있는 일이에요?”“그게... 사모님께서 곁에 없으신 뒤로 자주 두통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셨어요. 근 2년간은 그래도 전보다 아프다고 하신 빈도가 줄었는데 오늘 갑자기 또 두통이 도졌네요. 아마 사모님을 봬서 두통이 재발한 것 같아요.”집사가 자신의 추측을 얘기했다.그리고
‘누나’라는 두 글자가 나왔을 때 임유진과 강지혁의 몸이 동시에 움찔했다.임유진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듣는 ‘누나’라는 소리에 조금 벙찐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당시의 강지혁은 그녀와 연인이 되어서도 가끔 둘만 있을 때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다.그에게는 그녀가 단지 ‘사랑하는 여자’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강지혁은 그녀를 누나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은 외롭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임유진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나머지 한 손을 들어 가볍게 그의 앞머리를 위로 젖힌 후 그의 관자놀이를 주물러주었다.“혁아, 나 여기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편히 누워있어.”강지혁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 때문에 상당히 놀란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인 놀람으로 머리가 아픈 것까지 다 잊어버렸다.왜 그녀를 누나라고 부른 거지?또한 처음 부르는 호칭일 텐데 왜 이토록 몇백 번이나 불러봤던 것처럼 익숙하고 또 자연스럽게 입에서 뱉어지는 거지?“너...”강지혁이 뭔가 물으려는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머리 아플 때 자꾸 말하려고 하면 더 아플 거야. 이따 괜찮아지면 뭐든 대답해 줄 테니까 지금은 가만히 있어.”임유진이 그의 말을 끊고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그리고 손 좀 풀어줘. 내가 마사지해줄게. 그러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서서히 눈을 감고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었다.임유진의 손목은 빨갛게 손자국이 나서야 드디어 그에게서 해방되었다.임유진은 분명히 그에게 잡힌 손목이 아플 텐데도 마치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적절히 힘을 조절해 가며 그가 아플 것 같은 곳을 세심하게 마사지해주었다.임유진의 몸은 마사지를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강지혁의 몸 가까이 기울어졌고 이에 강지혁은 마치 그녀의 숨결에 몸이 포근히 감싸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손길 때문인지 아니
“원해. 혁아, 나는 널 원해.”그리고 이건 임유진의 목소리였다.강지혁은 강선율을 꼭 끌어안고 있는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한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었다. 그는 지금 마치 머리가 날카로운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팠다.“그럼 내 곁에서 떠나지 마. 평생 내 곁에만 있어.”“혁아, 난 널 떠나지 않아. 약속해.”“유진아... 유진아...”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임유진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게 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또 중요했던 일인 것처럼 말이다.대체 이 대화들은 뭐지? 5년 전에 그와 그녀가 나눴던 대화인 건가?“윽...”“혹시 또 머리가 아프세요?!”집사가 강지혁의 상태를 눈치채고 서둘러 다가왔다.강지혁은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전에도 머리가 아픈 적이 간혹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아픈 것 같았다.강선율을 안고 있던 임유진은 집사의 말에 아이를 놓아주고 서둘러 강지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혁아, 왜 그래? 어디 아파?!”강지혁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질려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으며 두 눈에는 고통이 가득 서려 있었다.“아무래도 또다시 두통이 도진 것 같아요. 지금 당장 박 선생님을 부를게요.”집사는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 들고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고통스러워하는 강지혁을 보다가 탁자 위에 있는 티슈를 뽑아 그의 땀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그런데 이마에 티슈가 닿기도 전에 강지혁의 손에 의해 막혀버리고 말았다.“뭐... 하는 거야...”강지혁의 입에서 힘겹게 말이 뱉어져 나왔다. 두통이 심한 탓인지 목소리까지 덜덜 떨려있었다.“너 땀 닦아주려고 그래.”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잡힌 손목이 무척이나 아팠지만 아프다는 걸 티 내지는 않았다.“혁아, 많이 아프면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을 하면 할 수록 점점 더 아파질 거야. 그리고 조금만 참아. 의사
혹시 집사나 고이준이 얘기해줬나?임유진은 그 생각에 고개를 돌려 집사와 고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에 두 사람은 그녀에게 자신들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아빠랑 함께 엄마 성묘하러 갔을 때 묘비 옆에 놓인 엄마 사진을 봤어요.”강선율이 답했다.임유진은 아들의 말에 이번에는 정말 사레에 들리고야 말았다.그녀는 시선을 홱 돌려 태연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는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를 데리고 내 성묘하러 까지 갔어? 아니 뭐... 혁이는 내가 죽었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왜 엄마 성묘하러 간 거야? 그리고 왜 묘비 옆에 엄마 사진이 있어?”그때 강선현이 궁금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엄마가 돌아가셨으니까.”강선율이 대답했다.“엄마 살아 있는데?”“다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어.”“아니야. 엄마 안 죽었어.”아이들은 임유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관해 열띤 토론을 펼쳤고 임유진은 이에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두 아이 사이에 끼어들었다.“그만! 엄마는 보다시피 이렇게 잘 살아 있고 죽었다는 건... 오해야! 율아, 엄마 돌아왔어. 그간 율이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절대 율이 곁에서 떠나지 않을게.”임유진의 눈가는 어느새 빨갛게 물들어있었고 목소리는 잔뜩 메어있었다.그녀는 세쌍둥이가 그녀의 뱃속에서 힘차게 발길질을 하던 순간을 지금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전에는 기억을 잃어 현이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이렇게 율이까지 만나게 되었다.다만 잔뜩 격앙된 임유진과 달리 강선율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마치 엄마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아이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엄마라는 존재가 그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강선율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떠나도 괜찮아요.”강선율이 입을 열었다. 아이는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라 말하는 말투까지 강지혁과 똑 닮아 있었다.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더더욱 눈시울이 빨개졌다.5년이라는 시간 동안
“당시의 내가 어떻게 널 사랑하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네가 뭐라고 내가 다시 널 사랑해야 하지?”강지혁은 마음의 동요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 톤을 높였다.하지만 목소리가 커진 탓에 어깨에 늘어져 있던 아이가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현이는 비몽사몽 한 채로 눈을 뜨더니 고개를 살짝 들고 강지혁에게 말했다.“아빠, 시끄러워. 현이 잘 거니까 조용히 해.”아이는 그렇게 말을 하고 다시 강지혁의 볼에 뽀뽀를 했다.그리고 강지혁은 아이의 행동에 또다시 몸이 경직되었고 얼굴은 부자연스럽게 변했다.“현아, 엄마랑 같이 방에 가서 자자. 아빠 일해야 해.”임유진은 그제야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현이에게 말했다.이에 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임유진에게로 팔을 활짝 열었다.임유진은 조심스럽게 강지혁의 품에서 현이를 안아 들며 자신의 어깨에 아이의 머리를 기대게 했다.아이가 임유진에게로 넘어간 후 강지혁은 순간 몸의 일부가 사라진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빨리 아이를 떼어내고 싶었는데 막상 임유진이 아이를 안아가자 이상하게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아니, 오늘 대체 왜 이러는 거지?강지혁이 느낀 모든 이상한 느낌은 전부 다 눈앞에 있는 두 모녀 때문이었다.“우리는 이만 나갈게. 마저 일해.”임유진은 다시 잠이 들려고 하는 현이를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몸을 뒤로 돌렸다. 그녀는 나가기 위해 서재의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다 뭔가 할 말이 남은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혁아, 나 죽은 거 아니니까 우리는 아직 부부고 나는 아직 네 와이프 맞지? 그런 거면 네가 다시 날 사랑하길 바라는 것도 당연한 거 아닌가?”임유진은 이 말을 남긴 후 그의 답변은 듣지도 않은 채 서재를 나가버렸다.그리고 강지혁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당연하다고?5년 전에 멋대로 떠나버린 여자에게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듣는 게 달가울 리가 없다.하지만 분명히 심기가 불편해야 하는
그리고 강지혁은 아이를 품에 안아 든 채 마치 동상처럼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왜 네가 들어와?”“어차피 누구든 현이만 데리고 나가면 되는 거잖아. 그래서 고 비서님 대신 내가 왔어.”임유진은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 강지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아까 고이준은 그녀가 죽은 후 강지혁이 그녀의 유골함을 품에 끌어안고 이성을 잃고 절규했다고 하며 거의 미쳐버리기 직전까지 갔었다고 했다.그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임유진은 그저 그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며 아파 났다.이 남자는 대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던 것일까.강지혁은 그때 그녀에게 자신의 목숨도 줄 수 있다고 했고 실제로 그녀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고도 했다.자신의 목숨과 그녀의 목숨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했던 그 날, 그는 망설임 없이 유언을 남기고 자신이 죽는 것을 택했으니까.강지혁은 정말 목숨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녀에 관한 건 추억도 감정도 뭐든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하지만 살아있으니 그것으로 됐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면 된다. 그래서 그가 다시 한번 그녀를 사랑하게 하면 된다.임유진은 강지혁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현이가 너 엄청 좋아하나 보네. 현이는 싫은 사람한테 안기거나 안겨서 자거나 하지 않아.”강지혁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더니 이내 다시 말을 내뱉었다.“애 데리고 나가.”임유진은 그 말에 딸을 안아가는 것이 아닌 한 걸음 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사실은 혁이 너도 현이 좋아하잖아. 안 그래?”그녀가 알고 있는 강지혁은 정말 싫으면 상대가 아무리 아이라도 절대 안아주지 않을뿐더러 자기 몸에 찰싹 달라붙게 하지 않는다.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왜 그렇게 확신하지?”“그야 너는 누가 네 목에 손대는 걸 쉽게 허락
현이는 강지혁의 목을 끌어안던 팔을 풀고 이번에는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매만지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자연스러운 아이의 터치에 순간 임유진의 얼굴이 떠올랐다.모녀라 그런지 얼굴뿐만이 아니라 스스럼없이 그를 만지는 것 역시 아주 똑 닮아 있었다.강선현은 아까부터 계속 아래에서만 보다가 드디어 아빠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지금 이 순간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다.그리고 이렇게 바로 앞에서 바라보니 아빠는 생각보다 사진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아빠는 현이 아빠니까 앞으로는 현이도 아빠를 엄마처럼 좋아할 거야. 하지만 자꾸 울면 안 돼. 남자는 많이 우는 거 아니라고 그랬어. 그리고 자꾸 울면 애들이 현이 아빠가 울보라는 걸 알게 되고 말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울지 마.”강지혁은 자신을 창피해하는 듯한 아이의 말에 기가 막히고 또 웃기기도 했다. 이제껏 그 누구도 그를 창피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눈앞에 있는 이 콩알만 한 딸이 진심으로 그에게 창피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현이는 말을 마친 후 하품을 크게 했다. 아빠 품이라 그런지 조금의 불편한 느낌 없이 잠이 솔솔 밀려오기 시작했다.현이는 손으로 눈을 한번 비비적거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얼굴을 잡고 볼에 ‘쪽’하고 뽀뽀를 했다.말캉한 작은 입술이 볼에 닿자마자 강지혁의 몸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하지만 굳어버린 몸과 달리 아이의 입술이 닿은 볼은 점차 뜨거워 나며 심장은 사르르 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게 바로 아이에게 뽀뽀 받는 느낌인 건가?돌이켜보면 강선율과는 한번도 이런 식의 스킨십을 한 적이 없다. 아들에게 요구한 적도 없거니와 아들 쪽에서 먼저 해주려는 낌새도 없었으니까.강지혁과 김선율의 사이는 애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사이가 아닌 말 하자면 지극히 담백한 부자 사이였다. 강지혁은 아들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는 자상한 아빠면서도 아들에게 친밀한 행동 같은 건 먼저 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강선율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심지어 강지혁은 강선율이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몇 분 전.현이는 자신을 챙기던 도우미에게서 강지혁이 서재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서재가 어디인지 물은 후 곧바로 그곳으로 뛰어갔다.하고 싶은 얘기가 가득했기에 아이는 한시라도 빨리 강지혁이 보고 싶었다.“누가 함부로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강지혁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는 평소에도 혼자 조용히 서재에 있는 것을 즐기는 편이라 타인의 방해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특히 지금은 임유진에 관해 생각하고 있던 터라 마침 그녀의 얼굴을 그대로 복사하고 붙여놓은 듯한 아이의 얼굴이 보이자 더더욱 심기가 불편해졌다.구체적으로 그게 왜 심기가 불편한지는 그조차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아이가 턱을 치켜들며 당돌하게 말했다.“아빠 얼굴 제대로 보고 싶어서 현이가 멋대로 들어왔어. 아빠도 현이 얼굴 제대로 잘 봐. 현이는 이제부터 아빠 딸이니까 절대 현이 얼굴 잊어버리면 안 돼!”현이는 아까 경찰서 앞에서 한눈에 강지혁이 아빠라는 걸 알아본 것에 상당히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누가 아빠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지?”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이에 아이는 임유진과 똑 닮은 두 눈을 깜빡이며 또박또박 대꾸했다.“엄마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는데? 아빠 사진 보여주면서 현이 아빠라고 했어. 아빠 만나기 전에 아빠 사진이 찢어져서 속상했는데 엄마가 아빠 만나면 마음껏 사진 찍을 수 있다고 했어. 참, 내 이름은 강선현이야. 원래는 임현이었고 지금도 임현이 더 좋은데 엄마가 이제부터는 강선현이라고 했어. 그리고 나는...”아이는 자그마한 입술로 좋아하는 음식과 좋아하는 색상, 그리고 좋아하는 이야기까지 미주알고주알 쉴 틈 없이 그에게 얘기해주었다.그리고 강지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어이가 없기도 하고 또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과묵한 아들인 강선율과 달리 딸인 강선현은 상당한 수다쟁이였으니까.그리고 사진이라니, 그는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임유진이라는 여자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딸에게 멋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말을 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