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얼굴이 빨개졌다.“난... 그건...”임유진은 문득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맞다’라고 하든 ‘아니다’라고 하든 다 잘못된 것 같았다!“아니라고 말하지 마!”강지혁은 터프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만약 내게 아이가 생긴다 해도 그건 오직 누나랑 내 아이일 거야. 그러니까... 누나도 엄마가 되고 싶다면 오직 내 아이의 엄마여야 해.”임유진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기 병원이야.”게다가 그들이 있는 곳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데 이렇게 감싸 안고 있으니 저절로 이목을 집중시켰다.“그게 뭐?”강지혁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귀와 목을 간지럽혔다.“누나, 아까 내가 한 말 이해했지?”그녀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의 목소리와 숨결은 마치 보이지 않는 유혹처럼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이게 했다.차에 탄 후에도 임유진은 여전히 두 볼이 빨갰다.강지혁이 운전했고 그녀는 조수석에 앉아서 몰래 그를 힐긋 쳐다봤다.옆모습을 보니 날카로운 턱선과 짙은 눈동자, 높고 또렷한 콧대까지 그는 일반 동양인보다 훨씬 더 입체적이었다. 이목구비와 턱선, 목선까지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만약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생각이 순간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내가 그렇게 좋아? 왜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데?”강지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임유진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넋 놓은 표정을 거두어들였다.그녀가 어쩔 바를 몰라서 속수무책 해하고 있을 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임유진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보았는데 절친 한지영의 전화였다.통화 버튼을 누르자 전화기 너머로 한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아, 지금 통화 가능해?”“응, 말해.”임유진은 난감한 분위기에서 자신을 구출한 한지영에게 고마워 마지않았다.“너 언제 시간 돼? 우리 같이 해성시로 다녀오자. 최대한 빨리 다녀오는 게 좋을 거야. 그해 증인이 지금 경찰서에 잡혀 있거든. 연신
“그래.”임유진이 대답했다.통화를 마치자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한지영 씨 전화야?”“응.”“왜? 지영 씨가 연신 씨한테 누나 그해 사건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대?”그가 되물었다.“다는 아니고.”임유진이 말을 이었다.“그냥 연신 씨한테 해성시에 있는 증인 한 명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증인이 지금 구치소에 갇혀있대. 그해 사건에 관한 일을 한번 캐볼 수 있을까 해서 내일 함께 해성시로 다녀오기로 했어.”어떤 방법으로 캐물을지 자세한 건 한지영도 말하지 않았지만 임유진은 전에 변호사 경력이 있어 일부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구치소에 갇혀있는 사람에게 지난 사건을 캐묻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한지영의 능력으론 아마 해낼 수 없을 것 같으니 백연신이 손을 쓴 게 틀림없다.다만 이건 분명 임유진에 관한 일인데 한지영은 또 한 번 백연신에게 신세를 지게 됐다.한지영은 대체 그녀를 위해 얼마나 더 헌신해야 하는가? 임유진은 이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까? 그녀는 문득 마음이 착잡해졌지만 강지혁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럼 내일 나랑 같이 가.”강지혁이 입을 열었다.“괜찮아, 너까지 번거롭게 굴 필요 없어. 지영이가 함께 가주기로 했어.”임유진이 말했다.“누난 내 여자친구야. 내가 함께 가주는 게 뭐가 번거로워? 그냥 내 말대로 해. 내일 나랑 같이 가.”강지혁은 단호하게 밀어붙이며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그는 이미 속으로 계략을 짜고 있었다....그날 밤 한지영이 전화상으로 임유진과 약속시간을 잡았다.“저기 지영아, 실은 혁이도... 강지혁도 함께 가겠대.”“뭐?”한지영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함께 간다고?”“응. 그래도 될까?”임유진이 물었다.“안 될 건 없지. 사람 한 명 더 늘어날 뿐이잖아. 그럼... 차 한 대로만 움직이자. 두 대면 서로 얘기 나누기 불편하잖아. 게다가 한 대로 가면 힘들 때 운전 교체해줄 수도 있고.”“좋아. 그럼 내가 강지혁한테 말할게.”임유진은
“내가 유진이한테 진실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강지혁이 무덤덤하게 물었지만 짙은 눈동자가 한없이 차가울 따름이었다.순간 고이준은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방금 보스의 금기를 건드렸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그해의 소송과 임유진에 관한 일은 절대 대표님께 묻지 말아야 할 영역이다.그는 순순히 대표님의 분부만 따르면 된다.“지금 바로 해성시에 다녀오겠습니다.”말을 마친 고이준은 서재를 나섰다.다만 이제 막 서재를 나오는데 임유진과 정면으로 마주쳤다.“유진 씨, 대표님 찾으러 오셨어요?”고이준이 공손하게 물었다. 예외가 아니면 눈앞의 그녀는 장차 강씨 저택의 안방마님으로 될 분이다.대표님이 처음엔 그녀에게 장난치는 듯한 감정일지 몰라도 이젠 여느 때보다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심지어 대표님이 한 여자에게 이토록 진지한 적은 아예 본 적이 없다. 그해 안방마님이 될 뻔한 진애령 씨한테도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대하진 않았다.그걸 해낸 여자가 바로 임유진이다. S 시에서 강지혁을 이렇게 만들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네.”임유진이 대답했다.“한밤중에 여긴 웬일이에요? 회사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요?”“네, 뭐 그렇게까지 급한 일은 아니고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고이준이 대답했다.“네, 조심히 가세요.”말을 마친 임유진은 서재 문 앞에 도착해 가볍게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고이준은 서재 문이 다시 닫힌 후에야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내일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진실을 얻지 못한다. 모든 진실은 깊게 파묻힐 것이다. 대표님은 이 사건을 주도한 장본인은 아니지만... 결국 수수방관하고 계신다.대표님은 아마 그해의 일을 후회하고 있겠지.고이준은 계단을 내려와 서둘러 강씨 저택을 떠났다. 오늘 밤 할 일이 남았으니까.임유진이 서재에 들어서자 창가 쪽에 서 있던 강지혁은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여긴 어쩐 일이야?”“내일 우리 지영이랑 함께 해성시로 가는 거면 지영이가 운전해서 우릴 데리러 올 거야. 차 한 대
“그냥 이렇게 누나 잠시 안고 싶어서.”그는 나지막이 속삭이며 그녀 목에 머리를 파묻고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지금처럼 꼭 안고만 있어도 무한한 애착 감이 드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이 아이처럼 느껴졌다. 어린아이가 소중한 장난감을 놓치기 싫어 꼭 끌어안는 것처럼, 그리고 그녀가 바로 그 장난감이었다.임유진은 팔을 벌려 그를 가볍게 안아주었다.그녀가 두 팔로 감싸 안는 순간 강지혁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그녀 귓가에 속삭였다.“누나가 이렇게 안아주니 너무 좋아. 좀 더 안고 있을래?”애교 섞인 말투에 그녀는 좀처럼 거절할 수 없었다.“그래.”임유진은 그를 꼭 끌어안고 흘러가는 시간에 둘만의 추억을 실었다......다음날 이른 아침, 한지영은 제때 강씨 저택 입구에 도착해 그들을 픽업했다. 백연신도 함께 왔고 운전도 그가 했다.그들은 한지영이 대충 끌고 다니는 차를 몰고 왔다.강씨 저택 대문 입구에서 백연신과 강지혁이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고 한지영은 임유진을 이끌고 차 뒷좌석에 앉아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임유진이 평상시 너무 바쁘다 보니 둘은 한 달에 기껏해야 한 번 만난다.“이따가 연신 씨가 운전해?”임유진이 물었다. 방금 올 때도 백연신이 운전했으니 말이다.“응.”한지영이 어깨를 들썩였다.“어차피 운전 같은 건 남자가 하면 되니까.”백연신은 원래 자신의 수십억짜리 고급 차를 몰고 오려 했는데 한지영이 구치소에 가는데 그런 차를 몰면 너무 과시하는 것 아니냐고 해서 그냥 관뒀다.게다가 중도에 기사를 바꿔 그녀가 고급 차를 운전하다가 만에 하나 어디 긁히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한편 그녀의 허름한 차는 운전하기도 편하고 진짜로 어딘가에 부딪힌다고 해도 수리비가 너무 많이 들진 않을 것이다!하여 기어코 제 차를 타고 오자고 고집했다.백연신도 더는 그녀와 이 문제로 갈등하지 않고 바로 그녀의 차를 끌고 왔다.“오늘 질문 유도할 중요한 질문들은 생각해놨어?”한지영이 물었다.“이거야말로 오늘의 가장 중요한 임무야.”임
전에 백연신이 그녀에게 사건 경위를 말했을 때 그녀는 심지어 아주 잘했다고 그 자리에서 백연신을 칭찬했다. 다만 이 일로 백연신은 유난을 떨며 그녀랑 스킨쉽하려고 애썼다.물론 한지영도 그의 스킨쉽은 싫지 않았고 되레... 호감으로 다가왔다.그녀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는데 결론은 백연신의 잘생긴 얼굴 때문이었다.그는 완전 한지영 스타일이라 외모에 반하니 더이상 헤어나올 수 없었다.인간은 원래 시각적 동물이니까.한편 차 밖에서 두 남자는 여전히 서로를 마주 봤고 공기 속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차 안의 두 여자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정반대였다.“강 대표님도 오늘 함께 가실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네요.”백연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유진이는 내 여자친구예요. 여자친구 일이니 당연히 따라가야죠.”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요? 그해 임유진 씨 때문에 죽은 분이 대표님 약혼녀 진애령 씨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대표님은 유진 씨가 유죄라고 생각해요, 무죄라고 생각해요?”강지혁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는 한없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백연신을 째려보며 말했다.“유진의 억울함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요.”그해 임유진을 해치려던 사람을 강지혁이 이대로 놓아줄 리는 없었다.“그래요?”백연신은 가볍게 웃을 뿐 더 묻지 않았다. 임유진의 사건에서 그는 단지 외부인이니까.다만 궁금한 것이 있다면 강지혁은 지금 그녀와 함께하면서도 왜 그녀를 도와 사건을 뒤집으려 하지 않는지, 혹시 진씨 일가와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바로 이런 문제점들이다.애초에 진애령은 임유진이 낸 교통사고로 죽었고 이는 의심의 여지 없는 팩트이다. 게다가 강씨 일가와 진씨 일가는 줄곧 돈독한 사이를 유지했다.“나도 백연신 씨가 내 여자친구를 도와줄 줄은 몰랐어요. 고마워요.”강지혁이 입꼬리를 씩 올리자 좀전의 싸늘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봄 햇살처럼 따뜻한 미소가 어렸다.“탈까요? 더 지체했다가 도착 시간이 늦어지겠어요.”“그래요, 얼른 타요.”백
이어 두 남자도 차에 탔다. 임유진과 한지영이 이미 뒷좌석에 앉아있었기에 백연신은 운전석에, 그리고 강지혁은 조수석에 앉았다.한지영은 갑자기 자신의 차가 꽤 값이 나가는 차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만약 사람들이 이 작은 차에 GH 그룹의 대표와 백선그룹의 대표가 앉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깜짝 놀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가는 길, 앞 좌석의 두 남자는 아무 말도 없었고 뒷좌석에 앉은 여자 두 명만이 오디오를 채우고 있었다. 그것도 물론 대부분은 한지영이 말을 하고 임유진은 듣고 있을 뿐이었지만."참, 요즘 그 드라마 엄청 핫 하잖아. ‘군주의 연인’이라고, 너 본 적 있어?"한지영이 묻자 임유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임유진은 낮에 일을 마치고 난 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서는 뉴스만 간간이 확인하고 금방 잠이 들어버린다."너무 재밌어. 스토리가 정말 기가 막힌다니까. 내가 이따 드라마 포스터 사진 보내줄게. 참, 이 드라마 남자 주인공, 네가 예전에 좋아했던 고주원이야."한지영은 최근 해당 드라마 때문에 다시 한번 고주원에게 푹 빠져있다. 물론 임유진이 고주원에게 한창 빠져있었을 당시 한지영도 좋아했었지만, 곧 다른 드라마에 빠져 그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을 더 좋아했었다. 한지영은 절대 지조 있는 팬이 아니었다.임유진은 고주원이라는 말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생각해보면 감방에 들어가기 전까지 꽤 고주원을 좋아했었다. 물론 엄청 열정적인 팬은 아니었고 고주원이 나오는 드라마를 꾸준히 챙겨보며 시청률에 일조하고 가끔 고주원이 모델로 있는 물건들을 사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또한, 임유진은 예전에 종종 한지영에게 먼저 고주원이 출연하는 드라마를 소개하곤 하며 얼굴도 준수하고 연기도 잘하는 것이 분명 기회만 잘 잡으면 대박 날 것이라고 했었다.한지영이 고주원 얘기를 꺼낸 덕에 임유진도 간만에 옛날 기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고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마음이 오늘은 많이 풀어진 것 같기도 했다. 분명히 중요한 일을 처리하러 가는 길인
화가 난건 한지영의 관심이 온통 고주원에게 쏠려 있어서이고, 어이가 없는 건 자신이 한지영이라는 여자를 좋아하는 이상 앞으로도 이런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백연신이 고압적인 수단을 취하면 한지영은 바로 꼬리를 내렸고 잘해주면 바로 의기양양해졌다.다만 아까 임유진도 전에 고주원의 팬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백연신은 갑자기 전처럼 화가 그렇게 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거에 위로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가는 길, 강지혁과 백연신은 적당한 타이밍에 나눠서 운전했고 네 사람이 해성시의 구치소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9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백연신이 미리 안배해둔 덕에 네 사람은 직원의 안내 아래 접견실 옆에 있는 방에 들어갔다. 방에는 모니터 여러 대가 놓여 있었는데 제일 중앙에 있는 모니터에는 접견실 화면이 띄워져 있었고 대화 소리도 들렸다.얼마 안 가 중재인도 해당 방에 도착했고 임유진은 미리 생각해뒀던 의문점들을 중재인에게 보여주며 서로 어떻게 질문할 것인지 얘기를 나눴다. 역시 이쪽 전문가여서 그런지 중재인은 임유진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고 예리한 질문들을 바로 적어냈다.임유진은 백연신이 유능한 사람을 찾아준 덕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중재인은 임유진과 나눈 얘기들을 다 정리해 넣은 후 옆에 있는 접견실로 들어가 대기했다. 그러자 얼마 안 가 경찰이 갈씨 성을 가진 증인 갈민수를 데리고 접견실로 들어왔다.증인의 얼굴이 보이자 임유진은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녀는 이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법정에서 그녀가 술을 먹었다고 증언한 사람이 바로 갈민수였고 임유진이 억울하다고 다시 한번 잘 기억해보라고 했을 때도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의 기억이 틀림없다고 말하며 생동감 넘치게 사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었다.똑같은 증언을 한 사람은 갈민수를 제외하고도 여럿 있었고 그들의 증언과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들이 모두 완벽하게 그녀를 지목했기에 당시 임유진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왜..
그 말에 갈민수는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가 다시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고 말했다."합법 맞죠, 그럼. 난 지금까지 뒤 구린 일 같은 건 해본 적 없어요.""참, 어제 민수 씨 부모님을 찾아가서 얘기를 좀 나눠봤는데 부모님께서 S 시 쪽 억양이 강하시더라고요. 두 분 고향이 혹시 S 시인가요?"중재인이 다시 화제를 돌렸다."네, 두 분 모두 S 시에서 태어나셨어요.""그럼 민수 씨도 S 시에서 사신 적 있겠네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 해성시에 정착할 생각을 하셨어요? S 시가 해성시보다 훨씬 크고 좋잖아요."중재인은 가벼운 대화로 갈민수의 경계를 풀었다."아무래도 큰 도시이다 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더라고요. 여기는 작긴 해도 마음은 편해요.""그렇긴 하죠."중재인은 피식 웃으며 다시 화제를 돌렸다."아참, 민수 씨를 신고한 사람 말인데요. 얼마 전 저한테 당장 2억을 배상하지 않으면 진씨 가문 아가씨 일을 자기가 다 까발리겠다면서 민수 씨에게 전해주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그러자 갈민수의 얼굴이 삽시에 하얗게 질려서는 애써 당황한 얼굴을 감추려고 했다."글쎄요... 뭘 까발리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제가 한 사건의 증인으로 섰던 적이 있었어요. 그 사건에서 죽은 사람이 S 시에서 유명한 부잣집 아가씨였는데 성이 진 씨였어요.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안타깝게 됐죠. 당시 어떤 여자가 음주운전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끔찍한 사고도 벌어지지 않았겠지만요."갈민수는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문득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런데 그날 저와 다퉜던 사람이 왜 진씨 가문 아가씨 사건을 그 쪽에게 얘기한 거죠?""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민수 씨가 여기서 나가게 되면 그때 상대방과 직접 만나 물어보는 게 어때요?"중재인은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며 답했다.그렇게 얼마간 더 얘기를 나눠봤지만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고 결국 중재인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옆 방으로 넘어와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미안합니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