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디지?’한지영은 당황했다. 이내 머릿속에 예전 광경이 떠오른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내가... 또 술을 마셨어. 그것도 취할 정도로!’“일어났어?”들려오는 목소리에 한지영은 몸이 굳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역시나 백연신이 침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소파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일... 일어났어요...”한지영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침대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멀쩡히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아마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한지영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내가 취해서 뭔 짓 하지는 않았죠?”“한 일이 하도 많아서 어떤 걸 가리키는지 모르겠네.”백연신이 나른하게 물었고 한지영은 입이 떡 벌어졌다.‘많은 일... 내,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하필 이번에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예전과는 달리 깨어난 뒤에 뭘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내...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요?”한지영은 갑자기 침이 고여 침을 꿀꺽 삼키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백연신은 무엇 때문인지 얼굴을 붉혔다.한지영은 그의 붉어진 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백연신의 그런 모습은 어쩐지 그녀가 기억하는 과거의 그와 닮아있었다.“설마... 내가 뭔가를 강요하지는 않았죠?”한지영은 생각 없이 말했다. 이내 백연신은 얼굴이 더 빨개지더니 쑥스러운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한지영은 자신을 때려죽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세상에! 설마 내가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고?’깨어난 뒤에 옷을 멀쩡히 입고 있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닌 듯했다.“그... 내가 어떻게 강요했는데요?”한지영은 뭐든 똑똑히 알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어봤고 혹시라도 자신이 뭔가 만회할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됐어!”백연신은 괜히 짜증스레 대꾸했다. 그는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은 건 지 조금 전처럼 얼굴이 빨갛지 않았다.조금 전 한지영이 질문할 때 그의 머릿속에는 그가
“알겠어요. 사귀어요.”한지영은 수긍한 듯 대답했다. 어차피 복수 당해야 하지만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그러면... 음, 휴대전화 좀 돌려줘요.”그녀는 자신이 그와 함께 별장에 온 목적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돌려받는 거란 걸 잊지 않았다.백연신은 한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였던 휴대전화를 그녀에게 던져줬다.“아!”그녀는 놀란 듯 소리를 지르며 아슬아슬하게 휴대전화를 받았다. 그 휴대전화는 그녀가 큰마음 먹고 무려 200만 원을 써서 산 것이다. 만약 바닥에 떨어뜨린다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리고 혹시 액정이라도 깨진다면 적어도 40만 원은 들 것이다.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혹시라도 정말 액정이 깨진다면 백연신에게 배상해 달라고 할 용기도 없었다.한지영은 휴대전화를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9시가 넘는 시간이었고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있었다. 모두 부모님에게서 걸려 온 전화라 그녀는 이내 다시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측에서 전화를 받았다. 이내 안에서 아버지의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저녁에 집에 와서 밥 안 먹으면 미리 연락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연락해도 받지 않고 뭐 하자는 거야? 아니면 어제처럼 경찰서에 가서 신고라도 했으면 좋겠어?”한지영은 진땀을 뺐다.“저... 저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지금 당장 갈게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고 어느샌가 곁으로 온 백연신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큰 목청이라면 조금 전 혼났던 것도 전부 다 들었을 것이다.“그, 다른 일 없으면 난 먼저 가볼게요.”한지영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바래다줄게.”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은 재빨리 말했다.“아뇨, 아뇨.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그리고... 나 어제 그 주차장에 가서 차 끌고 가야 해요.”그런데 백연신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고 강압적으로 말했다.“내가 바래다줄게. 지금부터 우리는 사귀는 사이니까.”“...”‘그래, 뭐. 데려다준다니
금사빠인 한지영은 오늘은 이 아이돌을 좋아하고 내일엔 다른 아이돌을 좋아하는, 마음이 갈대 같은 팬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 모두에게 진심이었다.한 아이돌을 좋아하면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그에게 충실한 팬이었다. 심지어 돈을 써서 그의 콘서트와 팬 사인회에도 갔었다.가끔 그들이 팬 미팅을 열면 거기에도 갔었다.물론 그중 대부분은 임유진에게 일이 생기기 전의 일이었다. 임유진이 그런 일을 겪은 뒤 한지영은 아이돌을 향한 열정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출근할 때를 제외하고 그녀는 임유진을 도와 사건을 조사하는데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그래서 콘서트에서, 팬 사인회에서, 팬 미팅에서 찍었던 영상들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추억이었다.그런데 그런 추억들을 전부 삭제해 버리다니.“내가 팬 사인회에서 찍었던 영상들은요?”한지영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려 운전하는 백연신을 노려보았다.“삭제했어.”백연신은 아주 솔직하게 대답했다.“그걸... 삭제했다고요?”한지영은 기절할 것만 같았다. 만약 그가 휴대전화를 돌려주지 않았더라면, 휴대전화 속의 것들 역시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지영에게 휴대전화를 돌려주긴 했지만, 그녀의 소중한 영상들은 다 삭제해 버렸다.“응. 아주 철저히 삭제했어. 네가 전문적으로 휴대전화를 수리해 주는 곳에 찾아간다고 해도 영상은 복구하지 못할 거야.”백연신이 계속해 말했다.한지영은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그거 다 내 추억이라고요!”“추억?”백연신은 차갑게 코웃음 치더니 갑자기 핸들을 돌려 차를 갓길에 세웠다. 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내가 그 영상들을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무슨 생각을 했는데요?”갑자기 가까워진 그의 잘생긴 얼굴에 한지영은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니 세월마저 그를 비껴간 듯했다.백연신은 그녀보다 두 살 더 많았지만, 그의 얼굴은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듯 앳되고 젊어 보였다.‘뭐야, 나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한지영은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렇게 백연신과 사귀게 된다니. 예전에는 어떤 방식으로 백연신에게 복수 당할지 꽤 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이런 건 예상 밖이었다.한지영은 누군가와 사귄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백연신에게 맞출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정 안 되면 드라마를 참고할 생각이었다.그러나 문제는, 백연신이 바라는 것이 한지영이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내가 백연신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 가서 날 차버릴 생각인 걸까?’한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정 안 되면 그와 몇 달 사귀고 난 뒤에 그를 사랑하게 된 척 연기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백연신이 그녀를 차버린다면 아주 슬픈 척하면서 이 일을 끝내버릴 생각이었다.거기까지 생각한 한지영은 참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누군가와 사귀는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전개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하지만 한지영이 상상했던 것처럼 그녀의 집안을 풍비박산 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이래서 남자는 괜히 건드리면 안 된다니까. 특히 먹고 버리는 건 더 안 돼. 이렇게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한지영의 부모님은 한지영이 저녁을 집에서 먹지 않을 생각이었으면서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를 추궁하고 있었다.한지영은 눈을 흘겼다. 그녀의 부모님들은 그들의 집이 하마터면 풍비박산 날 뻔했다는 걸 몰랐다. 한지영은 자기 몸으로 집안을 지킨 셈이었다.“시간관념이 이렇게 없어서야 되겠어? 나 김 선생님이랑 약속도 잡았어. 다음 주에 너 선봐야 해.”한지영의 어머니가 말했다.한지영은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그녀는 이제 막 백연신과 사귀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선을 보라고 한다.‘게다가 김 선생님이라니...’그녀는 남들 이어주는 걸 아주 좋아하는 걸로 동네에 소문이 났다. 그리고 그중 몇 쌍은 성공적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한지영의 어머니는 그녀와 꽤 가깝게 지내며 그녀가 좋은 상대를 소개해 주길 바랐다.“엄마... 제
또 한 번 면접을 본 회사에서 돌아왔을 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어떤 회사에서는 배달 기사는 기본 월급이 없다고 했는데도 그녀는 기회만 있으면 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거절당했다.임유진은 점심때가 거의 되자 길가의 작은 가게로 들어가 4,000원짜리 칼국수를 주문했다. 그것은 그 가게에서 가장 싼 메뉴였다.가게 안에는 구식 TV가 놓여 있었고 TV 안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뉴스는 어제의 뉴스를 재방송하는 것이었지만 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뉴스를 들었다. 그러다 익숙한 회사의 이름이 들리자, 그녀는 고개를 홱 들었다.그것은 임유진이 처음 배달 기사 면접을 봤던 그 회사였다. 그리고 그 회사의 대표가 강지혁에게 연락해서 그녀의 면접에 관해 얘기했었다.당시 강지혁은 그 회사를 제명할 거라고 했다.그런데 지금 그 회사는 자금줄이 끊겼고, 투자하기로 했던 자금도 갑자기 취소되어 어제부터 그 회사의 민간 자금 조달에 참여한 시민들이 회사의 입구를 막고 돈을 내놓으라고 시위하고 있다고 한다.뉴스에서 기자가 찍은 화면은 아주 혼란스러웠다.임유진은 그 장면을 보고 내심 놀랐다.‘설마 강지혁이 한 짓인가? 겨울 며칠 사이에 전도유망하던 기업을 이렇게 만들 수 있다고?’정말 그런 거라면 강지혁의 수완이 상당하다는 걸 의미했다.‘하지만 강지혁이 한 짓이 아니라면...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칼국수를 먹으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종아리를 잡는 게 느껴져 고개를 숙여 보니 3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입은 옷은 조금 더러웠지만 생김새가 아주 예쁘장했다. 정교한 이목구비에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 그리고 앳된 아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통통한 젖살은 한 번 꼬집어 보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다. 아이는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로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아이를 이상하게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
“아뇨, 전혀요. 아드님이 아주 귀여운데요.”임유진이 말했다.“그런데 이 칼국수를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칼국수를 아주 뚫어져라 쳐다보던데요.”“진짜 먹으라고 주면 오히려 안 먹을 수도 있어요. 얘는 그냥 남들 따라 하는 걸 좋아해서 그래요.”여자는 말하면서 남자아이 앞에서 두 손을 움직였다.임유진은 당황했지만 이내 깨달았다. 여자는 수어를 하고 있었다.“이 아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여자가 대답했다.“듣질 못해요. 수어는 조금 할 줄 알아서 간단한 수어로 얘기하면 알아들을 수 있어요.”여자는 말하면서 계속해 입으로 천천히 말했다.“이모한테 사과해야지.”그녀는 말하는 동시에 수어를 했다.곧이어 임유진은 남자아이가 사과하듯 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걸 보았다.임유진은 참지 못하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나 어린데 듣지 못하다니. 이 아이에게는 이 세상의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여자는 아이를 안고 떠났고 임유진은 계속해 칼국수를 먹었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칼국수를 다 먹고 가게를 떠나려는데, 임유진은 곁눈질로 가게 입구에 직원을 구한다는 글을 보았다.그리고 거기에는 가게의 배달을 맡을 배달부를 찾는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임유진은 곧바로 몸을 돌리더니 계산대로 향하여 사장에게 물었다.“혹시 배달부 필요하세요?”“네.”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저 면접 볼 수 있을까요?”임유진이 물었다.사장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아가씨가 배달부를 한다고요?”“안 되나요?”“아뇨. 젊어 보여서요. 이 나이대 여자들은 배달부처럼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잖아요.”사장이 말했다.“저에겐 일자리가 있는 것만으로 다행인걸요. 전...”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솔직히 얘기했다.“전 전과가 있어요. 교통사고로 사람을 숨지게 해서 일자리를 찾는 게 아주 어려워요. 가능하다면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어요.”임유진이 전과가 있다고 했을 때 사장의 눈동자가 살
“참, 전 탁유미라고 해요. 앞으로 언니라고 부르면 돼요. 아가씨는 이름이 뭐예요?”사장이 물었다.“임유진이라고 합니다. 유진이라고 부르시면 돼요.”임유진이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를 물들였던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진 듯했다.임유진을 바라보는 탁유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임유진은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남긴 뒤 떠났고, 잠시 뒤 50대로 보이는 여자가 탁유미의 곁에 섰다.“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우리 가게에서 배달부를 하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내일부터 출근할 거예요.”탁유미가 말했다.“저 나이에 배달부를 한다고? 설마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저 나이대 여자애들은 보통 사무실에서 일하려고 하잖아.”가게 배달부는 월급이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 요즘 찾아온 사람들도 대부분 50대 정도로 나이가 꽤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월급이 적고 일하는 시간이 길다고 결국엔 하지 않으려 했다.“전과가 있대요. 차를 운전하다가 사람을 치어 죽였대요.”탁유미가 말했다.“그런데 사람은 꽤 좋아 보여요. 조금 전에 우리 윤이에게도 잘해줬어요.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그 교통사고도 어쩌면 뜻밖의 사고였을지도 모르죠.”“너도 참!”탁유미의 어머니는 결국 참지 못하고 혼을 냈다.“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니? 이렇게 쉽게 사람을 믿다니! 그냥 눈으로 봐서 좋은 사람인 걸 알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있겠어? 전과가 있는 사람은 절대 안 돼. 혹시나 배달할 때 또 누구를 치어 죽이면 어떡해? 그러다가 우리가 배상해 줘야 할 수도 있다고!”탁유미는 한숨을 쉬었다.“엄마, 전 그냥 기회를 한번 주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리고 정말 이 일이 아주 간절해 보였다고요.”“기회? 다른 사람은 언제 너한테 기회를 줬니? 윤이도 이제 귀를 치료해야 해서 돈도 부족한데 말이야!”탁유미의 어머니가 화를 내며 말했다.탁유미는 쓴웃음을 지었다.“아무도 저에게 기회를 준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녀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예요
임유진은 강지혁이 그 작은 식당에 손을 댈 것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의 눈에 전도가 유망한 신예 회사는 모두 그의 손아귀에서 미래가 불확실하고 제거될 가능성이 큰데, 작은 식당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유미 언니의 식당이 자신 때문에 곤란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유미 언니는 괜찮은 사람 같았고, 게다가 청각장애가 있는 아들까지 있으니 생활 부담이 클 것이다.“없으면 됐고. 그럼, 일단 여기서 편하게 지내.”강지혁은 웃으며 말했다.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두 손을 잡고 자기 얼굴에 갖다 댔다.“꼭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하니 일단은 알겠어. 하지만 매일 밤 아무리 늦게 돌아와도 나한테 굿나잇 인사는 해야 해. 알겠지?”임유진은 약간 어리둥절했다. 강지혁이 이런 요구를 할 줄은 몰랐다.셋방에서 지낼 때 그녀는 매일 강지혁에게 굿나잇 인사를 했다. 그때 강지혁은 그녀의 가족이었고, 그녀가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 강지혁은 그녀의 가족일까?강지혁은 자신의 볼에 닿은 여자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살며시 감고 입꼬리를 올리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다음날, 임유진은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약속대로 식당에 도착했다. 탁유미는 신분 등록을 마치고 임유진에게 간단히 설명하고는 축전지차까지 내주었다.“출퇴근할 때 이걸 타고 다녀도 대요. 참, 혹시 탈 줄 알아요?”탁유미는 갑자기 떠올라 물었다.“알아요, 전에 타본 적은 있는데 몇 년 안 타서 이따가 조금만 연습하면 될 것 같아요.”임유진은 사실대로 말했다.“그럼 이따가 연습해요. 전에 교통사고 난 적이 있으니 절대 과속하지 말고 조심해요. 늦더라도 안전이 제일이죠. 유진 씨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조심히 운전해요.”임유진은 탁유미를 보며 대답했다.“네, 알겠어요. 과속하지 않고 안전하게 운전할게요.”탁유미는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월급은 매월 15일에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