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어요. 사귀어요.”한지영은 수긍한 듯 대답했다. 어차피 복수 당해야 하지만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그러면... 음, 휴대전화 좀 돌려줘요.”그녀는 자신이 그와 함께 별장에 온 목적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돌려받는 거란 걸 잊지 않았다.백연신은 한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였던 휴대전화를 그녀에게 던져줬다.“아!”그녀는 놀란 듯 소리를 지르며 아슬아슬하게 휴대전화를 받았다. 그 휴대전화는 그녀가 큰마음 먹고 무려 200만 원을 써서 산 것이다. 만약 바닥에 떨어뜨린다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리고 혹시 액정이라도 깨진다면 적어도 40만 원은 들 것이다.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혹시라도 정말 액정이 깨진다면 백연신에게 배상해 달라고 할 용기도 없었다.한지영은 휴대전화를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9시가 넘는 시간이었고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있었다. 모두 부모님에게서 걸려 온 전화라 그녀는 이내 다시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측에서 전화를 받았다. 이내 안에서 아버지의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저녁에 집에 와서 밥 안 먹으면 미리 연락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연락해도 받지 않고 뭐 하자는 거야? 아니면 어제처럼 경찰서에 가서 신고라도 했으면 좋겠어?”한지영은 진땀을 뺐다.“저... 저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지금 당장 갈게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고 어느샌가 곁으로 온 백연신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큰 목청이라면 조금 전 혼났던 것도 전부 다 들었을 것이다.“그, 다른 일 없으면 난 먼저 가볼게요.”한지영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바래다줄게.”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은 재빨리 말했다.“아뇨, 아뇨.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그리고... 나 어제 그 주차장에 가서 차 끌고 가야 해요.”그런데 백연신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고 강압적으로 말했다.“내가 바래다줄게. 지금부터 우리는 사귀는 사이니까.”“...”‘그래, 뭐. 데려다준다니
금사빠인 한지영은 오늘은 이 아이돌을 좋아하고 내일엔 다른 아이돌을 좋아하는, 마음이 갈대 같은 팬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 모두에게 진심이었다.한 아이돌을 좋아하면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그에게 충실한 팬이었다. 심지어 돈을 써서 그의 콘서트와 팬 사인회에도 갔었다.가끔 그들이 팬 미팅을 열면 거기에도 갔었다.물론 그중 대부분은 임유진에게 일이 생기기 전의 일이었다. 임유진이 그런 일을 겪은 뒤 한지영은 아이돌을 향한 열정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출근할 때를 제외하고 그녀는 임유진을 도와 사건을 조사하는데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그래서 콘서트에서, 팬 사인회에서, 팬 미팅에서 찍었던 영상들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추억이었다.그런데 그런 추억들을 전부 삭제해 버리다니.“내가 팬 사인회에서 찍었던 영상들은요?”한지영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려 운전하는 백연신을 노려보았다.“삭제했어.”백연신은 아주 솔직하게 대답했다.“그걸... 삭제했다고요?”한지영은 기절할 것만 같았다. 만약 그가 휴대전화를 돌려주지 않았더라면, 휴대전화 속의 것들 역시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지영에게 휴대전화를 돌려주긴 했지만, 그녀의 소중한 영상들은 다 삭제해 버렸다.“응. 아주 철저히 삭제했어. 네가 전문적으로 휴대전화를 수리해 주는 곳에 찾아간다고 해도 영상은 복구하지 못할 거야.”백연신이 계속해 말했다.한지영은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그거 다 내 추억이라고요!”“추억?”백연신은 차갑게 코웃음 치더니 갑자기 핸들을 돌려 차를 갓길에 세웠다. 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내가 그 영상들을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무슨 생각을 했는데요?”갑자기 가까워진 그의 잘생긴 얼굴에 한지영은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니 세월마저 그를 비껴간 듯했다.백연신은 그녀보다 두 살 더 많았지만, 그의 얼굴은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듯 앳되고 젊어 보였다.‘뭐야, 나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한지영은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렇게 백연신과 사귀게 된다니. 예전에는 어떤 방식으로 백연신에게 복수 당할지 꽤 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이런 건 예상 밖이었다.한지영은 누군가와 사귄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백연신에게 맞출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정 안 되면 드라마를 참고할 생각이었다.그러나 문제는, 백연신이 바라는 것이 한지영이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내가 백연신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 가서 날 차버릴 생각인 걸까?’한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정 안 되면 그와 몇 달 사귀고 난 뒤에 그를 사랑하게 된 척 연기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백연신이 그녀를 차버린다면 아주 슬픈 척하면서 이 일을 끝내버릴 생각이었다.거기까지 생각한 한지영은 참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누군가와 사귀는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전개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하지만 한지영이 상상했던 것처럼 그녀의 집안을 풍비박산 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이래서 남자는 괜히 건드리면 안 된다니까. 특히 먹고 버리는 건 더 안 돼. 이렇게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한지영의 부모님은 한지영이 저녁을 집에서 먹지 않을 생각이었으면서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를 추궁하고 있었다.한지영은 눈을 흘겼다. 그녀의 부모님들은 그들의 집이 하마터면 풍비박산 날 뻔했다는 걸 몰랐다. 한지영은 자기 몸으로 집안을 지킨 셈이었다.“시간관념이 이렇게 없어서야 되겠어? 나 김 선생님이랑 약속도 잡았어. 다음 주에 너 선봐야 해.”한지영의 어머니가 말했다.한지영은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그녀는 이제 막 백연신과 사귀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선을 보라고 한다.‘게다가 김 선생님이라니...’그녀는 남들 이어주는 걸 아주 좋아하는 걸로 동네에 소문이 났다. 그리고 그중 몇 쌍은 성공적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한지영의 어머니는 그녀와 꽤 가깝게 지내며 그녀가 좋은 상대를 소개해 주길 바랐다.“엄마... 제
또 한 번 면접을 본 회사에서 돌아왔을 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어떤 회사에서는 배달 기사는 기본 월급이 없다고 했는데도 그녀는 기회만 있으면 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거절당했다.임유진은 점심때가 거의 되자 길가의 작은 가게로 들어가 4,000원짜리 칼국수를 주문했다. 그것은 그 가게에서 가장 싼 메뉴였다.가게 안에는 구식 TV가 놓여 있었고 TV 안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뉴스는 어제의 뉴스를 재방송하는 것이었지만 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뉴스를 들었다. 그러다 익숙한 회사의 이름이 들리자, 그녀는 고개를 홱 들었다.그것은 임유진이 처음 배달 기사 면접을 봤던 그 회사였다. 그리고 그 회사의 대표가 강지혁에게 연락해서 그녀의 면접에 관해 얘기했었다.당시 강지혁은 그 회사를 제명할 거라고 했다.그런데 지금 그 회사는 자금줄이 끊겼고, 투자하기로 했던 자금도 갑자기 취소되어 어제부터 그 회사의 민간 자금 조달에 참여한 시민들이 회사의 입구를 막고 돈을 내놓으라고 시위하고 있다고 한다.뉴스에서 기자가 찍은 화면은 아주 혼란스러웠다.임유진은 그 장면을 보고 내심 놀랐다.‘설마 강지혁이 한 짓인가? 겨울 며칠 사이에 전도유망하던 기업을 이렇게 만들 수 있다고?’정말 그런 거라면 강지혁의 수완이 상당하다는 걸 의미했다.‘하지만 강지혁이 한 짓이 아니라면...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칼국수를 먹으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종아리를 잡는 게 느껴져 고개를 숙여 보니 3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입은 옷은 조금 더러웠지만 생김새가 아주 예쁘장했다. 정교한 이목구비에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 그리고 앳된 아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통통한 젖살은 한 번 꼬집어 보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다. 아이는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로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아이를 이상하게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
“아뇨, 전혀요. 아드님이 아주 귀여운데요.”임유진이 말했다.“그런데 이 칼국수를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칼국수를 아주 뚫어져라 쳐다보던데요.”“진짜 먹으라고 주면 오히려 안 먹을 수도 있어요. 얘는 그냥 남들 따라 하는 걸 좋아해서 그래요.”여자는 말하면서 남자아이 앞에서 두 손을 움직였다.임유진은 당황했지만 이내 깨달았다. 여자는 수어를 하고 있었다.“이 아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여자가 대답했다.“듣질 못해요. 수어는 조금 할 줄 알아서 간단한 수어로 얘기하면 알아들을 수 있어요.”여자는 말하면서 계속해 입으로 천천히 말했다.“이모한테 사과해야지.”그녀는 말하는 동시에 수어를 했다.곧이어 임유진은 남자아이가 사과하듯 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걸 보았다.임유진은 참지 못하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나 어린데 듣지 못하다니. 이 아이에게는 이 세상의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여자는 아이를 안고 떠났고 임유진은 계속해 칼국수를 먹었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칼국수를 다 먹고 가게를 떠나려는데, 임유진은 곁눈질로 가게 입구에 직원을 구한다는 글을 보았다.그리고 거기에는 가게의 배달을 맡을 배달부를 찾는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임유진은 곧바로 몸을 돌리더니 계산대로 향하여 사장에게 물었다.“혹시 배달부 필요하세요?”“네.”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저 면접 볼 수 있을까요?”임유진이 물었다.사장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아가씨가 배달부를 한다고요?”“안 되나요?”“아뇨. 젊어 보여서요. 이 나이대 여자들은 배달부처럼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잖아요.”사장이 말했다.“저에겐 일자리가 있는 것만으로 다행인걸요. 전...”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솔직히 얘기했다.“전 전과가 있어요. 교통사고로 사람을 숨지게 해서 일자리를 찾는 게 아주 어려워요. 가능하다면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어요.”임유진이 전과가 있다고 했을 때 사장의 눈동자가 살
“참, 전 탁유미라고 해요. 앞으로 언니라고 부르면 돼요. 아가씨는 이름이 뭐예요?”사장이 물었다.“임유진이라고 합니다. 유진이라고 부르시면 돼요.”임유진이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를 물들였던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진 듯했다.임유진을 바라보는 탁유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임유진은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남긴 뒤 떠났고, 잠시 뒤 50대로 보이는 여자가 탁유미의 곁에 섰다.“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우리 가게에서 배달부를 하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내일부터 출근할 거예요.”탁유미가 말했다.“저 나이에 배달부를 한다고? 설마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저 나이대 여자애들은 보통 사무실에서 일하려고 하잖아.”가게 배달부는 월급이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 요즘 찾아온 사람들도 대부분 50대 정도로 나이가 꽤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월급이 적고 일하는 시간이 길다고 결국엔 하지 않으려 했다.“전과가 있대요. 차를 운전하다가 사람을 치어 죽였대요.”탁유미가 말했다.“그런데 사람은 꽤 좋아 보여요. 조금 전에 우리 윤이에게도 잘해줬어요.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그 교통사고도 어쩌면 뜻밖의 사고였을지도 모르죠.”“너도 참!”탁유미의 어머니는 결국 참지 못하고 혼을 냈다.“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니? 이렇게 쉽게 사람을 믿다니! 그냥 눈으로 봐서 좋은 사람인 걸 알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있겠어? 전과가 있는 사람은 절대 안 돼. 혹시나 배달할 때 또 누구를 치어 죽이면 어떡해? 그러다가 우리가 배상해 줘야 할 수도 있다고!”탁유미는 한숨을 쉬었다.“엄마, 전 그냥 기회를 한번 주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리고 정말 이 일이 아주 간절해 보였다고요.”“기회? 다른 사람은 언제 너한테 기회를 줬니? 윤이도 이제 귀를 치료해야 해서 돈도 부족한데 말이야!”탁유미의 어머니가 화를 내며 말했다.탁유미는 쓴웃음을 지었다.“아무도 저에게 기회를 준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녀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예요
임유진은 강지혁이 그 작은 식당에 손을 댈 것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의 눈에 전도가 유망한 신예 회사는 모두 그의 손아귀에서 미래가 불확실하고 제거될 가능성이 큰데, 작은 식당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유미 언니의 식당이 자신 때문에 곤란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유미 언니는 괜찮은 사람 같았고, 게다가 청각장애가 있는 아들까지 있으니 생활 부담이 클 것이다.“없으면 됐고. 그럼, 일단 여기서 편하게 지내.”강지혁은 웃으며 말했다.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두 손을 잡고 자기 얼굴에 갖다 댔다.“꼭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하니 일단은 알겠어. 하지만 매일 밤 아무리 늦게 돌아와도 나한테 굿나잇 인사는 해야 해. 알겠지?”임유진은 약간 어리둥절했다. 강지혁이 이런 요구를 할 줄은 몰랐다.셋방에서 지낼 때 그녀는 매일 강지혁에게 굿나잇 인사를 했다. 그때 강지혁은 그녀의 가족이었고, 그녀가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 강지혁은 그녀의 가족일까?강지혁은 자신의 볼에 닿은 여자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살며시 감고 입꼬리를 올리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다음날, 임유진은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약속대로 식당에 도착했다. 탁유미는 신분 등록을 마치고 임유진에게 간단히 설명하고는 축전지차까지 내주었다.“출퇴근할 때 이걸 타고 다녀도 대요. 참, 혹시 탈 줄 알아요?”탁유미는 갑자기 떠올라 물었다.“알아요, 전에 타본 적은 있는데 몇 년 안 타서 이따가 조금만 연습하면 될 것 같아요.”임유진은 사실대로 말했다.“그럼 이따가 연습해요. 전에 교통사고 난 적이 있으니 절대 과속하지 말고 조심해요. 늦더라도 안전이 제일이죠. 유진 씨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조심히 운전해요.”임유진은 탁유미를 보며 대답했다.“네, 알겠어요. 과속하지 않고 안전하게 운전할게요.”탁유미는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월급은 매월 15일에
탁유미가 말했다.“미안해요. 윤이가 평소에는 이렇지 않은데 유진 씨랑 친해지고 싶나 봐요.”“괜찮아요. 저도 윤이 좋아요.”임유진은 말하면서 윤이를 안아 올렸다.윤이는 그제야 발버둥 치지 않고 고분고분하더니 임유진에게 안긴 후, 그녀를 보며 씩 웃었다.약간 주눅들고 조심스러운 웃음이라 임유진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윤아, 안녕?”임유진은 인사를 건네고 손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만졌다.다만 아이는 그녀의 목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옆에 있던 탁유미는 아들과 임유진의 모습을 보고 눈 밑에는 어둠이 스쳤다.‘윤이가 유진 씨를 그 사람으로 착각했나? 그래서 오늘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나? 아쉽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단다, 윤아.’“언니, 나중에 수화 좀 가르쳐줄 수 있어요? 윤이와 간단한 교류를 하고 싶어요.”임유진은 탁유미를 보며 말했다.탁유미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네, 물론이죠.”임유진은 아이와 잠시 놀았지만, 수화를 할 수 없었기에 서로 대화가 원활하지 않아 탁유미가 옆에서 도와야 했다.점심때가 되자 임유진은 배달을 시작했다.틈틈이 축전지차를 연습해 보았더니 큰 문제는 없었다. 축전지차는 자전거처럼 일단 배우기만 하면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타도 곧 손에 익을 수 있었다.하지만 배달할 때 임유진은 최대한 속도를 조절하며 적응하려고 노력했다.식당은 점심 타임에 배달이 많고, 오후 1시 30분이 지나면 배달 주문량이 줄어들었다.임유진은 오후 2시가 조금 넘었을 때 겨우 시간이 비어서 점심을 먹었다.“힘들어요?”탁유미가 물었다.“괜찮아요.”임유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현재의 그녀는 돈을 벌어야 했기에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가끔 너무 바쁘면 밥 먹는 시간이 많이 늦어지곤 해요.”사실 탁유미도 임유진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비어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참, 윤이 몇 살이에요? 유치원 안 가요?”임유진은 옆에서 과일을 먹고 있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