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외숙모는 큰삼촌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 시각 무슨 말을 하든 임유진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병상에 누워있는 외할머니를 바라보고 있다.유진이 신경 쓰는 것은 외할머니뿐이다.갑자기 외할머니의 입이 움직이는 것 같았으며 혼수상태에서 무엇인가 말하는 것 같았다.유진이 머리를 외할머니의 입가에 대자 흠칫 놀랐다. 외할머니는 큰삼촌, 둘째 삼촌, 셋째 이모의 이름을 말했다.유진은 덤덤하게 병실을 나섰다. 그때 큰 숙모와 둘째 숙모가 유진을 따라 나오더니 무조건 사건 철회를 약속하라고 했다.유진이 차갑게 말했다.“왜 제가 사건을 철회해야 해요? 먼저 날 가족으로 여기지 않은 건 당신들이에요. 그런데 제가 왜 당신들을 가족으로 여겨야 해요?”“이 양심도 없는 기집애야, 할머니에게 미안하지도 않아?”큰숙모가 화를 내며 말했다.“할머니에게 미안하든 말든 제 일이에요. 적어도 난 당신들에게 미안한 일은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당신들의 남편, 아들이 나한테 미안한 짓을 했죠. 그렇지 않으면 지금 그들이 경찰서에 있지 않았겠죠!”큰숙모는 너무 화가 나 말을 잇지 못했다.유진이 곧바로 병원을 떠나려던 순간 큰숙모가 쫓아오려 했지만 둘째 숙모가 막았다.“유진이를 건드리지 마요. 유진이를 보호하는 대단한 가문이 있는데 만약 유진이를 화나게 해 형벌을 가중하면 어떻게 해요?”“감히!”큰숙모가 노발대발했다.“휴, 유진이가 그럴 능력이 있든 말든 말할 필요 없어요. 그럼 필사적으로 달려들 거예요? 그러면 형님까지 체포돼요!”둘째 숙모가 말했다.큰숙모는 그 말을 듣더니 흠칫 놀랐다. 화가 났지만 두려워 더 이상 유진을 쫓아가지 못했다.유진은 택시를 타고 다시 S시로 돌아갔다. 하룻밤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길에 허비했다. S시에 도착하자 날이 거의 밝았다.유진은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 5시에 또 도로 청소를 시작했다.“유진 씨, 어제 제대로 못 잤어? 컨디션이 안 좋은 거 같아.”서미옥이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임유진은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그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어볼 수밖에 없다.통화연결음만 하염없이 들리고 받는 사람이 없다.유진은 포기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걸었다…….한편 GH그룹 대표실에는 지금 여러 임원이 조용하게 그 싸구려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다.회사의 임원들은 대표가 평소 핸드폰을 두 개 갖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는 평소 대표님이 쓰는 핸드폰이고 하나는 싸구려 구형 핸드폰이다.그리고 그 핸드폰의 출처에 대해서는 아마 대표의 비서인 고이준만 알고 있다. 그들이 너무 궁금하여 고 비서에게 여러 번 물었지만, 고이준은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여 임원들은 사석에서 서로 그 핸드폰에 대해 많은 추측을 했다. 이전이라면 강 대표님은 핸드폰이 울리는 동시에 전화를 받았다.하지만 오늘 핸드폰이 여러 번 울렸지만 강 대표님은 바라만 볼 뿐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잘생긴 얼굴은 아주 차가웠다.하여 임원들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고이준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강지혁의 옆에 서 있던 고이준도 울리는 핸드폰을 보면서 걱정하기 시작했다.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유진 혼자일 것이다.그리고 그날 유진이 그렇게 지혁을 거절했다. 고이준은 보스의 곁을 오랫동안 따라다녔기에 그날 이후 강 대표님의 기분이 아주 나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그리고 유진이 갑자기 전화를 걸었지만 강 대표님은 받지 않았다. 이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강 대표님은 더 이상 유진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일까?아니, 고이준은 강 대표님이 자신의 짐작보다 유진을 더 신경 쓴다고 생각했다.만약 정말 유진을 잊었다면 이 핸드폰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 대표님은 여전히 그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고 있다. 강 대표님이 유진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정말 의외이다.강 대표님 같은 남자가 유진을 원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하필 유진이 거절했다.15분 뒤, 드디어 핸드폰이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지혁은 그제야 나른
오후에 GH그룹 사무실 건물에 가도 강지혁을 만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곳에 가는 것 외에는 어디로 가야 지혁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생각해 보니 임유진은 지혁에 대해 너무 모른다. 심지어 지혁이 어디에 사는지조차 모른다!오후에 유진이 GH그룹에 도착한 뒤 지혁은커녕 경비원에게 제지당해 문조차 들어갈 수 없었다.그리고 유진이 지혁을 만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유진을 비웃었다.“강 대표님을 만나고 싶으면 만날 수 있다면 강 대표님은 바빠 죽을 거예요! 당신처럼 강 대표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매일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다른 사람은 강 대표님을 만나기 전에 꾸미기라도 하는데 당신의 옷차림으로 강 대표님을 안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싸구려 노점상의 옷이라 아주 투박했다.이 경비원들의 눈에는 단지 일자리를 찾으러 온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그리고 유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다. 유진은 패딩을 입은 채 GH그룹 건물 옆에 서 있었다.겨울의 찬 바람이 쌩쌩 불자 찬바람이 패딩 사이로 들어와 너무 추웠다.유진은 손을 비비며 건물 입구를 바라보았다. 유진은 지혁이 나오기를 간절하게 바랐다.물론 유진은 빌딩의 출입구가 여기 한 곳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출구를 지키는 것일 뿐이다.그때 유진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고이준이 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가려 했다.“고 비서님!”유진이 다급히 소리 질렀다. 유진은 지혁의 주변 사람이라고는 고 비서밖에 모른다.이준이 소리를 따라 보자 유진이 눈에 들어와 다소 의외인 듯 흠칫 놀랐다.“임유진 씨,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예요?”이준이 유진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말했다.“저는…….”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초조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강지혁 씨를 만나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고 비서님, 저를 데리고 강지혁 씨를 만나
임유진이 들어가자 고이준이 문을 가볍게 닫았다.유진을 데리고 들어간 것은 유진의 말 몇 마디 때문이 아니라 강지혁이 유진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아마 강 대표님은 단지 유진이 마음을 돌리기를 바랄 수도 있다. 방금 유진의 난처한 얼굴을 보니 강 대표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여기까지 생각하니 이준의 기분이 자기도 모르게 좋아졌다.그 시각 비서실에 있던 비서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이준에게 물었다.“고 비서님, 방금 대표실로 들어간 여자는 누구예요?”여자의 옷차림으로 보아 대표실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그때 이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알 필요 없어요. 알아야 할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예요.”그전에는 함부로 혀를 놀리면 강 대표의 금기를 범하는 것이다.…….사무실 안, 유진은 불안한 모습으로 서서 책상 앞에서 서류를 보고 있는 지혁을 바라보고 있다. 아주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이전에 유진은 입버릇처럼 지혁의 곁에 있는 것을 거절했고 유진은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 말을 번복하는 시기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유진은 또 지혁의 앞에 섰다.다만 지금의 지혁은 유진이 처음 보는 모습이다.이렇게 큰 사무실에서 지혁은 네이비 색상의 정장을 입고 앞머리를 반듯하게 빗어 포만한 이마를 드러냈다. 긴 속눈썹에 복숭아꽃 눈동자로 열심히 서류를 보고 있다.라인이 아름다운 목에는 하늘색 넥타이가 있다.지혁의 긴 손가락은 검은색 사인펜을 쥐고 있었으며 펜을 잡고 서류에 서명하는 모습이 아주 우아했다.순간 지혁의 목소리가 고요한 분위기를 깼다.“누나는 그렇게 계속 날 보려고 온 거야?”유진은 지혁이 아직도 누나라는 호칭을 부를 줄은 생각지도 못해 흠칫 놀랐다.유진은 그 호칭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유진은 아주 순진하게 지혁을 집으로 데려와 동생으로 여겼다.“할 말이 있어.”유진은 메마른 입술을 핥고 말했
“난 단지 경찰이 그들을 풀어주기를 바랄 뿐이야. 네 말 한마디면 가능한 일이잖아.”임유진이 급하게 말했다.“말 한마디로 가능한 일이 맞아. 그런데?”유진의 초조한 모습과 달리 강지혁은 아주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 유진은 주먹을 꽉 쥐더니 한숨을 쉬고는 지혁을 바라보았다.“그럼 어떻게 해야 그들을 풀어줄 거야?”지혁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잡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천천히 유진에게 다가갔다.지혁은 가볍게 유진의 손을 잡았다.“누나, 손이 아주 차가워.”유진의 몸이 굳었다. 지혁의 손과 비교하니 유진의 손은 아주 차가웠다.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유진의 손을 잡더니 손을 녹여주었다.아주 능숙한 동작이었다.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동작이 마치 아끼는 보물을 다루는 것 같았다.‘맙소사!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유진은 자신에게 잡생각을 하지 말라고 외쳤다.그때 지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손이 따뜻해진 거 같아?”“응…… 좀 따뜻해졌어.”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려고 했지만, 지혁이 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피하지 마. 조금 더 따뜻하게 해줄게.”지혁이 말했다.유진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지혁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냉담한 모습과 지금의 부드러운 모습은 마치 두 사람인 것 같다.손은 점점 따뜻해졌지만 유진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지는 것 같았다.“어떻게 해야 그들을 풀어줄 거야?”유진은 견디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누나는 왜 갑자기 그들을 풀어주겠다고 생각을 바꾼 거야?”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외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외할머니가 더 이상 이 일로 걱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유진이 사실대로 말했다.“그래? 누나는 할머니가 아주 중요한가 봐. 불과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할머니 때문에 나한테 찾아와서 부탁하네.”지혁은 마치 첼로를 연주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말했다.유진은 공기에 온통 지혁의 숨결인 것 같았으며 온몸의 피가 지혁이 잡고 있는 두 손으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처럼 오만한 남자가 어떻게 허락할까?“그러니 날 만나준 게 내가 뭘 부탁하든 거절하기 위함이지. 맞지?”임유진은 아주 씁쓸하게 말했다.강지혁은 순간 입꼬리를 씩 올리고는 유진의 머리를 귀 뒤로 가볍게 넘겨주었다.“그때 네가 내 곁에 남지 않겠다고 했어. 내가 네 운명을 바꿔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어…….”지혁의 동작은 그토록 우아하고 목소리는 그토록 부드럽다.지혁은 허리를 굽히고 유진의 귓가에 가볍게 말했다.유진의 귓가와 목에는 온통 지혁의 숨결뿐이다.그러나 유진은 몸이 뻣뻣해지고 무거운 돌멩이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내가 누나를 만난 것은 단지 누나가 그때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려주기 위함이야.”지혁이 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그 순간 유진은 얼음 속으로 뛰어 들어간 것 같았다.…….그렇다, 정말 우습다.유진은 자신이 어떻게 지혁의 사무실에서 나왔는지조차 기억이 안 났다.처음부터 지혁은 유진의 요구에 응할 생각이 없었고 유진은 지혁에게 요구할 자격도 없었다.이번 만남은 자기를 모욕한 것과 마찬가지이다.이튿날 출근할 때도 유진은 신경이 온통 할머니한테 있었다. 엄마 쪽 친척이 외할머니의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고 했다. 비록 정신을 차렸지만 대부분 기억이 없고 하루 종일 큰삼촌을 만나겠다고 했다.의사가 알츠하이머라고 말했다. 게다가 외할머니는 발병이 매우 빠르고 다른 사람은 몇 년 사이에 이 정도에 이르지만 외할머니는 단번에 이렇게 변했다. 아마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유진은 그 말을 듣자 마음이 무거워졌다.유진에게 더 최악의 상황만 있는 것 같았다.“유진아, 의사도 말했어. 가능한 빨리 할머니에게 큰삼촌을 보여줘야 한대. 그게 할머니의 병세에 도움을 준대. 넌 그들을 얼마나 더 가둘 생각이야!”친척은 하마터면 곧바로 유진을 양심이 없다고 꾸짖을 뻔했다.유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유진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퇴근할 시간이 되자 유진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 전날 밤새 자지 못한 데다 어제 할머니 일 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여 임유진은 붕붕 떠다니는 것 같았다.한참을 걸다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쳐 곧바로 바닥에 넘어졌다.다행히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 별로 아프지 않다.유진이 일어나려고 할 때, 한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유진에게 달려가 유진을 부축했다.유진이 고개를 들자 생각지도 못한 곽동현이었다.“어떻게…….”“길가에 차를 세웠으니 제가 데려다줄게요.”동현이 말했다. 방금 유진이 집에 데려다주는 걸 거절했지만 걱정이 되어 운전을 하고 유진의 뒤를 따랐다.“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유진이 말했다.“방금 행인과 어깨를 살짝 스쳤을 뿐인데 넘어졌잖아요. 어떻게 걱정이 안 돼요? 길가에 차를 세웠으니 이렇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나랑 같이 가요. 경찰에게 발견되면 주차위반 딱지가 붙고 벌금을 물게 될 거예요.”동현이 말했다.동현이 고집을 부리자 유진은 한숨을 쉬며 차에 올랐다.동현은 운전을 하고 유진의 월세방으로 갔다.“사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집에 데려다준다고 해서 유진 씨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유진 씨의 전 남자친구와 비교가 안 된다는 걸 알아요.”동현이 진지하게 말했다.“단지 가다가 사고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어 데려다주는 거예요.”“고마워요.”유진이 말했다. 사실 유진에게 과거는 이제 꿈과 같다.이제는 어울리지 않는 그 사람이 유진이다. 그 어떤 사람이 감옥살이를 한 여자와 결혼하려고 할까?“이틀 전 유진 씨가 포르쉐에 타는 걸 봤어요.”동현은 조금 망설였다.“유진 씨가 진짜 좋은 상대를 찾는다면 저도 기뻐할 거예요. 하지만…… 유진 씨가 속을까 봐 걱정돼요. 그래도 잘 알아보고…….”“그 사람은 제 남자친구가 아니에요.”유진이 동현의 말을 끊었다.“단지 그 사람의 물건을 주워 나한테 식사를 대접한 거예요.”“그렇군요.”동현은 순간 희망이 생긴 표정을 지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유진의 월세방 앞에 도착했다.“동현 씨는
발걸음을 내디디며 천천히 몸을 돌린 임유진은 차가 멀어져 점점 작은 검은 점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아마도 앞으로 이렇게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유진이 감옥살이를 한 신분을 싫어하지도 않았다. 단지…… 유진은 그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그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던 유진은 몸을 돌려 천천히 동네로 들어갔다.그 순간 유진은 멀지 않은 길가에 검은색 벤틀리 차 한 대가 세워져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차 안의 사람은 시큰둥하게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입가에 있는 듯 없는 듯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마치 방금 무슨 재미있는 장면을 본 것처럼 말이다.그러나 앞줄에 앉은 고이준은 간담이 서늘한 채 백미러를 통해 상사를 바라보았다. 강 대표님의 지금 이 모습은…… 당장이라도 화를 낼 기세였다!이준은 참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유진을 탓하기 시작했다. 돌아오면 그냥 돌아올 것이지 남자가 집까지 데려다줬으니 강 대표님이 오해하지 않겠는가!강 대표님이 유진과 만나도록 한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지금 이준은 유진의 일로 강 대표님이 자신에게 화를 내지 말아 달라고 기도해야 할 뿐이다.“강 대표님, 이게…… 임유진 씨께서 무슨 일이 있어서 다른 사람이 데려다준 걸 거예요.”이준은 차 안의 적막을 깨뜨렸다.강지혁은 눈을 들어 상대방을 바라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유진을 대신해 변명하고 싶어?”이준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져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어쩔 수 없다. 보아하니 기도해야 할 사람은 유진인 것 같다.그리고 이때, 유진은 오피스텔로 돌아가 불을 켜고 아파트 단지 내 식당에서 산 1600원짜리 패스트푸드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후 욕실로 들어가 두 손을 씻었다.이 두 손은 매일 궂은일을 하고 있는데, 이미 지난 날의 그 가늘고 하얀 모습이 아니었다.오늘 유진의 이런 말들이 곽동현에게 큰 타격을 주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유진은 속으로 생각하고 또 살며시 웃었다. 만약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