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문이 열리고 강지혁이 뒷좌석에서 내렸다.강지혁은 차에서 내린 후 임유진을 보고는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부탁이 있어...”임유진이 힘겹게 말을 건넸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던 터라 목이 너무나도 말랐다.“나한테?”강지혁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기억력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거야? 내가 어제 분명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런데 하루도 못 넘기고 또 찾아왔네?”임유진은 강지혁과의 거리를 좁히고는 그의 팔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내 얼굴 꼴도 보기 싫은 거 알아. 아는데 제발 부탁이야... 4억만 빌려주면 안 될까? 갚을게! 이자까지 다 해서 꼭 갚을게! 나 정말 그 돈이 너무 필요해...”“4억?”그녀의 말에 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그의 입에서는 더욱더 신랄한 조롱이 쏟아져 나왔다.“강현수라면 4억 정도는 금방 줄 수 있을 텐데? 왜, 강현수가 못 주겠대? 그래서 나한테 부탁하러 온 거야?”임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가뜩이나 밤을 새운 것 때문에 안색이 좋지 않은데 그의 말을 듣자 더더욱 얼굴이 창백해졌다.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결국에는 다시 입을 닫았다.“내 말이 맞나 보네.”강지혁은 말을 하면서 임유진에게 잡힌 팔을 서서히 뺐다.“그런데 너는 뭘 믿고 나한테 찾아온 거야? 내가 너한테 순순히 돈을 빌려줄 것 같았어?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나?”강지혁의 팔이 완전히 그녀의 손에서 빠졌다.“임유진, 무릎까지 꿇으며 나한테 널 놓아달라고 했던 건 너야. 그날 너는 내 감정을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로 만들었어. 그리고 어제도 나한테 딱 잘라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고. 그랬으면, 그렇게 말을 했으면 미안해서라도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지.”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아무런 미련도 없이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강지혁의
여전히 쌀쌀맞은 태도에 고이준은 바로 입을 다물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이제는 정말 확실히 내려놓으시려는 거네.’하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리려던 찰나 강지혁이 서류를 훑어보며 고이준을 향해 말했다.“4억은 왜 빌리려고 하는 건지 한번 알아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그 말에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커다란 사무실에 혼자 남게 된 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고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건물 앞에 있는 여자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이 각도로는 사람들이 그저 한낱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강지혁은 어느 점이 임유진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임유진이라는 여자의 일에는 더 이상 상관하지 말라고 그렇게 되뇌어봐도 몸은 뇌의 통제를 벗어난 듯 제멋대로 움직였다.지금도 그저 창백했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뿐인데도 걱정이 멋대로 일었다.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대체 왜 이렇게 걱정되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임유진이 이곳으로 찾아온 건 강현수가 돈을 빌려주지 않아서이다.강현수에게 거절당해 어쩔 수 없이 찾아온 것뿐이다.강지혁은 자조하듯 웃으며 이마를 짚었다.차선책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그 강지혁이 언제부터 차선책으로 전락했던가.만약 강지혁이 4억을 빌려주지 못할 만한 사람이었다면 임유진은 애초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고 아까처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차선책조차도 아니었을 테고 말이다.지금도 강지혁은 임유진의 생각만 하고 있다. 임유진이라는 여자는 마치 그의 일부가 되기라도 한 듯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았던 유약한 몸, 간절히 부탁하던 얼굴, 그 모든 것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욱신거렸다.강지혁은 서서히 밀려드는 고통에 주먹을 쥐고 심장이 뛰는 쪽을 세게 두드렸다.최악의 모습으로 헤어져 놓고도 아직도 신경이 쓰이는 건 대체 왜지?강지혁의 검은색 눈동자가
반 시간 안에 이렇게나 많은 정보를 입수한 건 대단한 일이었다.강지혁은 보고를 전부 다 전해 듣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어젯밤 줄곧 강현수의 별장 앞에 서 있었다고?“대표님, 임유진 씨의 체력으로 볼 때 어젯밤부터 계속 서 있어서 곧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으로 보입니다.”고이준이 참지 못하고 임유진의 상태에 관해 얘기하자 강지혁이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보더니 몇 초 후 천천히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데리고 올라와.”“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그의 지시에 서둘러 대표이사실을 나섰다.강지혁은 역시 아직 임유진이라는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이준이 로비로 내려왔을 때 임유진의 몸은 이미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의지력이 아니었으면 아마 진작 쓰러졌을 것이다.“임유진 씨,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대표님께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고이준은 눈앞에 있는 만신창이가 된 여자를 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강지혁이 그녀를 이렇게 부른 건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그 대가가 무엇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네, 고마워요.”임유진은 침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한번 핥고는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옆에서 듣기에는 곧 쓰러질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임유진이 고이준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몇몇 직원들이 자리에 멈춰선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정체가 뭔지 추측하고 있는듯했다.그도 그럴 것이 아까 임유진이 밖에 서 있을 때부터 그녀에게는 이미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으니까.고이준은 임유진을 데리고 대표이사실 앞에 도착한 후 가볍게 노크를 했다. 그러고는 문을 열고 임유진에게 얘기했다.“들어가시죠.”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가볍게 두 손을 말아쥐었다.몇 번이나 온 적 있는 곳이지만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장되었다.대표이사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고이준이 밖에서 문을 닫았다.임유진은 창가 쪽에 몸에 기댄 채 서 있는 남자를 보며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그녀는 지금 무척
“응.”임유진은 강지혁이 돈을 빌리려는 이유를 알고 있는 것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친구 사랑 한번 대단하네. 한지영 때문에 강현수의 별장 앞에서 밤새 서 있은 거로도 모자라 이제는 나한테까지 찾아와서 또 한참을 서 있고.”강지혁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임유진의 몸이 움찔 떨렸다.하지만 그녀는 이내 용기라도 내려는 듯 두 손을 더 꽉 말아쥐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어떤 말을 해도 참아낼 생각이었다. 이 정도도 참아내지 못하면 한지영을 구해줄 수 없을 테니까.“뻔뻔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나한테는 그 돈이 정말 필요해. 지영이를 살리려면 어쩔 수가 없어. 돈을 빌려주면 네가 시키는 건 뭐든 할게. 약속해!”임유진은 한지영을 구할 수만 했다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다.제일 절망적이었을 때 앞길을 포기하고 손을 내밀어준 한지영을 이대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이 가볍게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네가 뭘 해줄 수 있는데? 왜, 내가 전처럼 또 내 옆에 있어 달라는 멍청한 소리를 할 것 같아? 아니면 너한테 하룻밤 상대라도 돼달라고 할 것 같아? 4억의 대가로? 임유진, 너는 아직도 내가 너 없으면 안 되는 등신으로 보여?”강지혁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임유진의 가슴을 무겁게 내리쳤다. 얼마나 세게 내리치는지 가슴에 통증까지 일었다.하지만 그녀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그의 말대로 지금의 그녀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으니까. 그와 동등하게 설 자격조차 없었으니까.임유진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향해 물었다.“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줘. 어떻게야 돈을 빌려줄 수 있는지 네가 얘기해줘.”지금의 그녀는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만약 강지혁이 정말 돈을 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으면 고이준을 시켜 날 여기로 부르지 않았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그렇게 임유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는 싸늘한 눈을 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때 네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네 발등
한지영의 목숨을 살리려면 4억이 필요하다. 하지만 강현수에게도 무시당하고 강지혁에게도 거절당한 지금 돈을 빌릴 방도가 다 사라져버렸다.이제 어떡하지?정말 한지영의 부모님이 집을 파는 걸 보고 있어야만 하나?만약 집을 팔아도 병원비가 모자라면?그러면 그때는 장기적인 치료를 하려고 해도 못할 텐데 그때는 어떡하지?임유진은 뭐라 얘기하려는 듯 떨리는 입술을 계속 움찔거렸다.하지만 막상 입을 열려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말이 튀어 나가지 않았다.강지혁에게 유일하게 내걸 수 있는 조건이 바로 자신이었는데 강지혁은 더 이상 그녀가 필요 없다고 했다. 이제는 완전히 끝이 나 버렸다.임유진의 얼굴에 비친 절망을 보자 강지혁의 가슴이 또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자기를 버린 여자 때문에 마음이 미어지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싫었다.잠시 후, 임유진이 드디어 입을 열고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정말... 안 빌려줄 거야?”강지혁은 심장이 아려오는 것을 애써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방금 했던 말들을 또다시 해줘야 해?”“아니... 아니... 잘 알겠어. 시간 뺏어서 미안해...”임유진은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그 말을 내뱉고는 뒤를 돌아 천천히 사무실 문 쪽으로 향했다.‘지영이 어떡하지...?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나는 왜 이렇게 쓸모가 없는 걸까...? 왜 이렇게...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걸까?’임유진의 지금 위치로부터 사무실 문까지는 고작 8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하지만 임유진은 한 보 내딛는 것조차도 힘에 부쳐 보였다.그렇게 어찌어찌 문 바로 앞까지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갑자기 머리가 땅 하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까매졌다.그리고 익숙한 누군가의 품에 쓰러진 것을 마지막으로 임유진은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한편, 강현수는 병원에서 몸 상태를 검사할 때 줄곧 넋을 놓고 있었다.오늘 아침 임유진이 차를 막아섰던 장면이 자꾸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그때의 임유진은 무척이나 유약해 보였고 그녀의 두 눈에는 간절함
“혹시 유진이 생각해요...? 이대로라면 나 때문에 유진이랑 사이가 안 좋아질 건데... 정말 괜찮겠어요?”배여진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아무리 유진이가 곽동현 때문에 열성적이어도 현수 씨는 유진이 좋아하잖아요. 이대로 안 봐도 정말 괜찮아요...?”“유진 씨와의 일은 내 문제니까 너는 상관하지 마. 넌 변호사랑 재판 준비나 해.”강현수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그러자 배여진이 갑자기 울먹거리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닦았다.“고마워요. 솔직히 현수 씨는 유진이를 좋아하니까 뭐든 유진이가 하자는 대로 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나한테... 곽동현에게 건 소를 취하하라고 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변호사도 바로 고용해주고... 정말 고마워요. 현수 씨는 예나 지금이나 정말 한결같네요.”배여진은 다정하게 ‘현수야’라고 부르려다가 전에 강현수가 얘기했던 것을 떠올리고 그만두었다.고작 호칭 하나 때문에 괜히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으니까.지금은 강현수와 임유진이 최대한 가까이하지 않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강현수는 배여진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말하는 게 다 진실이라면 나는 당연히 네 편을 들어줄 거야.”‘유진 씨한테는... 곽동현을 법으로 처리하고 나서 찾아가도 늦지 않아.’강현수는 임유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곽동현이라는 남자는 그녀가 그런 성의를 보일 가치가 없는 남자라는 것을 말이다!때가 되면 임유진도 사람을 잘못 믿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강현수는 그렇게 생각했다.다만 강현수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했다.지금 배여진의 편을 들어주는 게 정말 배여진을 위해 이러는 건지 아니면 임유진과 가까운 사이인 곽동현을 질투해서 이러는 것인지를 말이다....임유진은 지금 병원 VIP 병실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다.얼굴에 혈색 하나 돌지 않는 것이 지금 그녀가 덮고 있는 흰색 이불 색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임유진은 무슨 악몽이라도 꾸는 것인지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미간을 꾹 찌푸리고 있었다.의사는 병상 옆에
이제껏 강지혁의 아이를 가지기 위해, 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노력했던가.하지만 그들은 아이는 물론이고 강지혁의 옆에 가까이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그런데 임유진은 강지혁을 가진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아이까지 임신해버린 것이다.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임유진은 참 운이 좋은 여자라며 속으로 감탄했다.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의사에게 눈빛을 보낸 후 함께 병실에서 나갔다.지금 이 순간 강지혁이 원하는 것이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라는 걸 비서인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조용한 병실 안, 들리는 건 두 사람의 숨소리뿐이었다.강지혁은 손을 들어 이불을 사이에 둔 채 조심스럽게 임유진의 복부 쪽에 손을 올려놓았다.그는 전에 임유진과 사귀었을 당시 그녀와 함께 산부인과를 찾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녀의 자궁이 어떤 상황인지, 자연 임신을 하는 게 얼마나 가능성이 희박한 일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임유진과 헤어진 후 그녀가 토하는 모습을 봐도 임신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녀는 임신이 맞았고 지금 그녀의 뱃속에서 두 사람의 아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그들의 아이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강지혁의 손이 임유진의 복부에서 그녀의 얼굴 쪽으로 향했다.길고 큰 손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강지혁은 손끝에서 전해오는 그녀의 미세한 차가운 체온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는 네가 임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만약 너한테 선택하라고 한다면 너는 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겠지...”“하지만... 네 뱃속에는 지금 우리의 아이가 있어. 그러면 너는...”강지혁의 목소리가 멈췄다.많고 많은 감정들이 목구멍으로 밀려왔다.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잠시 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그런데도 넌 여전히 내 곁을 떠난다는 선택을 할까?”아쉽게도 그의 질문에 답해주는 이는 없었다....얼마나 잤을까, 임유진은 서서히
임유진은 화들짝 놀라 얼른 강지혁의 품에서 나오려고 했다.하지만 강지혁은 놓아주기는커녕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임유진의 향기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이제 다시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셨다.임유진의 영향력은 지대했다.강지혁은 그간 지켜왔던 것들이, 삶의 기준이라고 정해놨던 것들이 임유진이라는 여자 하나 때문에 산산이 깨부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금 만신창이인 사람은 분명히 임유진인데 강지혁은 오히려 자신이 넝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왜 이 여자 앞에만 서면 늘 이렇게 순순히 투항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걸까.강지혁은 임유진을 꽉 끌어안은 채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깊이 묻었다. 마치 이대로 생을 마감해도 좋다는 사람처럼...임유진은 그런 그의 행동에 조금 놀랐다.그녀느 강지혁이 자신을 얼마나 경멸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4억... 줄게.”강지혁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한지영이 더 좋은 병원에서 더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줄게. 그리고 앞으로의 재활 치료에 들 비용까지 내가 모두 낼게.”그 말에 임유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자신이 지금 듣고 있는 이 말이 진짜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정말 한지영을 구해준다는 게 맞나...?“저, 정말이야?”임유진의 목소리가 떨려왔다.강지혁이 희망을 줬다가 이내 다시 사실은 거짓말이었다고 할까 봐 무서운 모양이었다.“대신 조건이 있어. 나랑 결혼해.”강지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는 결혼하자는 얘기를 이렇게 거래하듯이 할 줄은 몰랐다.물론 가장 놀란 사람은 임유진이었다.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귀를 의심했다.결혼이라고?“나랑... 결혼하겠다고?”“한지영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럼 나랑 결혼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강지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너는 나 싫어하잖아. 더 이상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