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영의 목숨을 살리려면 4억이 필요하다. 하지만 강현수에게도 무시당하고 강지혁에게도 거절당한 지금 돈을 빌릴 방도가 다 사라져버렸다.이제 어떡하지?정말 한지영의 부모님이 집을 파는 걸 보고 있어야만 하나?만약 집을 팔아도 병원비가 모자라면?그러면 그때는 장기적인 치료를 하려고 해도 못할 텐데 그때는 어떡하지?임유진은 뭐라 얘기하려는 듯 떨리는 입술을 계속 움찔거렸다.하지만 막상 입을 열려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말이 튀어 나가지 않았다.강지혁에게 유일하게 내걸 수 있는 조건이 바로 자신이었는데 강지혁은 더 이상 그녀가 필요 없다고 했다. 이제는 완전히 끝이 나 버렸다.임유진의 얼굴에 비친 절망을 보자 강지혁의 가슴이 또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자기를 버린 여자 때문에 마음이 미어지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싫었다.잠시 후, 임유진이 드디어 입을 열고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정말... 안 빌려줄 거야?”강지혁은 심장이 아려오는 것을 애써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방금 했던 말들을 또다시 해줘야 해?”“아니... 아니... 잘 알겠어. 시간 뺏어서 미안해...”임유진은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그 말을 내뱉고는 뒤를 돌아 천천히 사무실 문 쪽으로 향했다.‘지영이 어떡하지...?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나는 왜 이렇게 쓸모가 없는 걸까...? 왜 이렇게...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걸까?’임유진의 지금 위치로부터 사무실 문까지는 고작 8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하지만 임유진은 한 보 내딛는 것조차도 힘에 부쳐 보였다.그렇게 어찌어찌 문 바로 앞까지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갑자기 머리가 땅 하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까매졌다.그리고 익숙한 누군가의 품에 쓰러진 것을 마지막으로 임유진은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한편, 강현수는 병원에서 몸 상태를 검사할 때 줄곧 넋을 놓고 있었다.오늘 아침 임유진이 차를 막아섰던 장면이 자꾸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그때의 임유진은 무척이나 유약해 보였고 그녀의 두 눈에는 간절함
“혹시 유진이 생각해요...? 이대로라면 나 때문에 유진이랑 사이가 안 좋아질 건데... 정말 괜찮겠어요?”배여진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아무리 유진이가 곽동현 때문에 열성적이어도 현수 씨는 유진이 좋아하잖아요. 이대로 안 봐도 정말 괜찮아요...?”“유진 씨와의 일은 내 문제니까 너는 상관하지 마. 넌 변호사랑 재판 준비나 해.”강현수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그러자 배여진이 갑자기 울먹거리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닦았다.“고마워요. 솔직히 현수 씨는 유진이를 좋아하니까 뭐든 유진이가 하자는 대로 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나한테... 곽동현에게 건 소를 취하하라고 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변호사도 바로 고용해주고... 정말 고마워요. 현수 씨는 예나 지금이나 정말 한결같네요.”배여진은 다정하게 ‘현수야’라고 부르려다가 전에 강현수가 얘기했던 것을 떠올리고 그만두었다.고작 호칭 하나 때문에 괜히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으니까.지금은 강현수와 임유진이 최대한 가까이하지 않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강현수는 배여진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말하는 게 다 진실이라면 나는 당연히 네 편을 들어줄 거야.”‘유진 씨한테는... 곽동현을 법으로 처리하고 나서 찾아가도 늦지 않아.’강현수는 임유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곽동현이라는 남자는 그녀가 그런 성의를 보일 가치가 없는 남자라는 것을 말이다!때가 되면 임유진도 사람을 잘못 믿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강현수는 그렇게 생각했다.다만 강현수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했다.지금 배여진의 편을 들어주는 게 정말 배여진을 위해 이러는 건지 아니면 임유진과 가까운 사이인 곽동현을 질투해서 이러는 것인지를 말이다....임유진은 지금 병원 VIP 병실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다.얼굴에 혈색 하나 돌지 않는 것이 지금 그녀가 덮고 있는 흰색 이불 색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임유진은 무슨 악몽이라도 꾸는 것인지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미간을 꾹 찌푸리고 있었다.의사는 병상 옆에
이제껏 강지혁의 아이를 가지기 위해, 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노력했던가.하지만 그들은 아이는 물론이고 강지혁의 옆에 가까이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그런데 임유진은 강지혁을 가진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아이까지 임신해버린 것이다.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임유진은 참 운이 좋은 여자라며 속으로 감탄했다.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의사에게 눈빛을 보낸 후 함께 병실에서 나갔다.지금 이 순간 강지혁이 원하는 것이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라는 걸 비서인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조용한 병실 안, 들리는 건 두 사람의 숨소리뿐이었다.강지혁은 손을 들어 이불을 사이에 둔 채 조심스럽게 임유진의 복부 쪽에 손을 올려놓았다.그는 전에 임유진과 사귀었을 당시 그녀와 함께 산부인과를 찾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녀의 자궁이 어떤 상황인지, 자연 임신을 하는 게 얼마나 가능성이 희박한 일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임유진과 헤어진 후 그녀가 토하는 모습을 봐도 임신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녀는 임신이 맞았고 지금 그녀의 뱃속에서 두 사람의 아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그들의 아이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강지혁의 손이 임유진의 복부에서 그녀의 얼굴 쪽으로 향했다.길고 큰 손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강지혁은 손끝에서 전해오는 그녀의 미세한 차가운 체온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는 네가 임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만약 너한테 선택하라고 한다면 너는 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겠지...”“하지만... 네 뱃속에는 지금 우리의 아이가 있어. 그러면 너는...”강지혁의 목소리가 멈췄다.많고 많은 감정들이 목구멍으로 밀려왔다.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잠시 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그런데도 넌 여전히 내 곁을 떠난다는 선택을 할까?”아쉽게도 그의 질문에 답해주는 이는 없었다....얼마나 잤을까, 임유진은 서서히
임유진은 화들짝 놀라 얼른 강지혁의 품에서 나오려고 했다.하지만 강지혁은 놓아주기는커녕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임유진의 향기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이제 다시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셨다.임유진의 영향력은 지대했다.강지혁은 그간 지켜왔던 것들이, 삶의 기준이라고 정해놨던 것들이 임유진이라는 여자 하나 때문에 산산이 깨부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금 만신창이인 사람은 분명히 임유진인데 강지혁은 오히려 자신이 넝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왜 이 여자 앞에만 서면 늘 이렇게 순순히 투항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걸까.강지혁은 임유진을 꽉 끌어안은 채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깊이 묻었다. 마치 이대로 생을 마감해도 좋다는 사람처럼...임유진은 그런 그의 행동에 조금 놀랐다.그녀느 강지혁이 자신을 얼마나 경멸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4억... 줄게.”강지혁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한지영이 더 좋은 병원에서 더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줄게. 그리고 앞으로의 재활 치료에 들 비용까지 내가 모두 낼게.”그 말에 임유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자신이 지금 듣고 있는 이 말이 진짜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정말 한지영을 구해준다는 게 맞나...?“저, 정말이야?”임유진의 목소리가 떨려왔다.강지혁이 희망을 줬다가 이내 다시 사실은 거짓말이었다고 할까 봐 무서운 모양이었다.“대신 조건이 있어. 나랑 결혼해.”강지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는 결혼하자는 얘기를 이렇게 거래하듯이 할 줄은 몰랐다.물론 가장 놀란 사람은 임유진이었다.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귀를 의심했다.결혼이라고?“나랑... 결혼하겠다고?”“한지영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럼 나랑 결혼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강지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너는 나 싫어하잖아. 더 이상 내
그 말에 임유진의 몸이 살짝 움찔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강지혁의 예쁜 두 눈을 바라보았다.그의 두 눈은 전에 사귀었을 때처럼 부드럽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마치 까만 어둠처럼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강지혁과는 더 이상 엮일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도치 않는 방식으로 다시 엮여버렸다.강지혁과의 아이, 강지혁의 핏줄...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알았어. 결혼해.”...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한지영이 있는 병원 앞에 멈춰 섰다.고이준은 운전석에서 내린 후 예의를 갖춰 뒷좌석 문을 열었다.“대표님께서 임유진 씨는 현재 몸이 허약한 상태라 장시간 이곳에 있는 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지영 씨가 병원을 옮기는 일은 아마 내일쯤 처리될 겁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차에서 내린 후 바로 중환자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고이준은 그런 그녀의 바로 뒤에서 따라갔다.임유진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앞으로 강씨 가문과 그룹을 잇게 될 후계자일 지도 모르니 그녀의 안전에 특히 더 유의해야만 했다.중환자실 쪽에 도착하자 한씨 부부가 전처럼 유리 너머의 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두 사람은 한지영이 지금 의식이 없는 상태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 기적이 일어날까 싶어, 또 혹시 수술하기도 전에 증세가 악화하면 어쩌나 싶어 눈을 떼지 못했다.그러다 임유진이 또다시 이곳에 나타난 것을 발견하고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여긴 또 왜 왔어?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지영이 옆에 맴돌고 있을 거야! 너는 방해밖에 안 돼! 알아? 가! 당장 가!”이해영이 히스테리를 부렸다.그녀는 병상에 누워있는 한지영과 경제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그러다 마지막 이성의 끈이 임유진의 얼굴을 본 순간 끊어져 버렸고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마구마구 쏟아져나왔다.이해영이 임유진을 세게 밀칠 각오로 달려든 그때, 고이준이 임유진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제지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임유진은 강지혁과의 결혼하겠다고 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니까.한지영을 위해서도 그렇고 아이를 위해서도 그렇고 말이다.다만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목소리 하나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그럼 나는? 강지혁과 결혼하는 게 나 자신한테는 최선이 맞을까? 강지혁을 향한 나의 마음은 정말 완전히 사라진 걸까? 아니면 계속 마음속 깊이 있는 걸까?’임유진과 고이준이 떠난 후 한씨 부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아까 고이준이 그들 부부에게 한지영에 관해 얘기한 후 은근슬쩍 임유진이 강지혁과 결혼하게 된다는 정보도 흘렸기 때문이었다.임유진이 강지혁과 결혼하게 될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강지혁은 S 시의 최고 재벌이고 일반인이 눈조차 마주치기 어려운 그럼 남자였으니까.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한종훈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다음에 유진이를 만나게 되면 화내지 말고 차분하게 대화하자. 우리한테 큰 도움을 준 애야. 사람 보는 눈은 지영이가 우리보다 낫네.”한종훈은 임유진과 강지혁이 왜 갑자기 결혼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왠지 모르게 그 이유 중에 자기 딸이 관계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이해영은 자괴감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에 지영이 보러 또 오게 되면 그때는 사과부터 할게요. 내가 했던 말들이 있으니까...”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한지영 쪽을 바라보았다.“우리 지영이, 이제는 아무 문제 없는 거겠죠? 무사히 깨어나겠죠...?”한종훈은 울먹거리는 이해영의 등을 토닥여주었다.“그래. 이제는 다 괜찮아 질 거야. 지영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깨어날 거야. 연신이와 결혼하는 걸 그렇게 고대했으니까 그것 때문에라도 꼭 깨어날 거야!”...고이준은 병원에서 나온 후 임유진을 강씨 저택까지 데려다주었다.임유진은 차량에서 내린 후 눈앞에 보이는 저택을 보고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이
따뜻한 불빛 덕일까? 차갑던 그의 얼굴이 지금은 조금 부드러워진 듯했다.부드러워졌다니... 임유진은 자기가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쓰게 미소를 지었다.강지혁이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자신과 결혼하려는 건 단지 자신의 뱃속에 그의 핏줄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왔어? 병원은 가봤고?”강지혁이 손에든 책을 옆에 내려놓으며 물었다.“응.”임유진은 대답한 후 시선을 소파 위에 있는 책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책 이름을 보고 하마터면 헛기침을 내뱉을 뻔했다.강지혁이 보고 있던 건 [행복한 임산부가 되는 방법]이라는, 임산부를 위한 책이었다.강지혁이 이런 책을 보고 있었다고?임유진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도우미한테 죽을 끓이라고 했으니까 다 되면 먹어. 병원에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도우미에게 죽을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그다지 먹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홑몸이 아닌 배 속에 또 다른 생명이 있기에 뭐든 먹어야 했다.임유진은 전에 바쁘다는 핑계로 끼니를 거르거나 가끔은 편의점 음식으로 때웠던 나날들이 이제 와서 후회되기 시작했다.그리고 차 사고가 났는데도 무사히 뱃속에 있어 준 아이가 너무나도 고마웠다.이건 정말 행운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잠시 후, 도우미가 죽을 들고 와 임유진의 앞에 내려놓았다.임유진은 눈앞에 놓인 죽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지혁은 그녀가 먹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임유진은 그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져 죽을 먹다 말고 분위기도 풀 겸 그를 보며 물었다.“죽 맛있는데, 너는 안 먹어?”“응.”강지혁의 짤막한 한마디가 끝이 난 후 분위기는 다시 싸해졌다.임유진은 결국 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묵묵히 죽을 먹었다.그렇게 거의 다 먹어갈 때쯤 강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내일 혼인 신고하러 가자.”그 말에 임유진은 하마터면 입속에 있던 죽을 뱉어낼
아마 임유진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아까 강지혁이 어떤 마음으로 그녀에게 후회하냐고 물어봤는지를 말이다.강지혁은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심장과 호흡이 이대로 멈추는 줄 알았다.임유진은 그의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지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더 이상의 후회는 안 돼. 물론 이제는 후회할 기회도 주지 않을 거지만. 앞으로 너는 나, 강지혁의 와이프 여야만 하는 거야. 알겠어?”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켠 후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후회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죽을 다 먹은 후 강지혁과 함께 2층 방으로 올라갔다.두 사람이 향한 곳은 전에 임유진이 썼던 바로 그 침실이었다.그리고 문을 하나 사이에 두고 바로 옆에는 여전히 강지혁의 방이 있었다.임유진은 익숙한 방을 삥 둘러보았다.방 내부는 전과 다를 거 하나 없었다. 심지어 그때 그녀가 놓고 갔던 옷가지들과 잡동사니들도 여전히 방 안에 있었다.“내 방으로 옮겨갈 거 있으면 얘기해. 이따 도우미가 알아서 옮겨줄 거야.”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유진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설마 우리가 각방이라도 쓸 줄 알았어?”임유진은 입술을 한번 깨물고 그를 향해 말했다.“결혼하게 되면 당연히 같이 자야지. 하지만 지금은 임신 중이니까 나는 따로 자면 안 될까? 아이 낳은 다음에 다시...”“싫다면?”강지혁이 말을 끊고 묻자 임유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하지만 아이가...”그녀는 그토록 고대했던 아이이기에 아이를 잃을지도 모르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아이 낳고 나서는 네 말대로 할게. 하지만 그전까지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안 될까?”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강지혁은 그녀가 이런 얼굴로 부탁할 때면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주고 싶게 된다.그녀는 한 번도 자신에게 그런 적 없지만 말이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
“지혁아, 아무리 그래도 너랑 우리랑은 사돈이 될 뻔했던 집안이잖냐. 그간의 정도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진기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진가원 프로젝트는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야. 너희가 가져가봤자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굳이 왜 그걸 가져가려고 해.”“진화 그룹도 이제는 슬슬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잔뜩 긴장한 진기태와 달리 그는 아주 여유롭다 못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우리 그간 사업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잘 이어왔잖아. 뭐 서운한 거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얘기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그럼 진화 그룹과 진화 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를 다 저한테로 넘기세요.”강지혁의 말에 진기태의 얼굴이 한순간에 변했다.모든 회사를 다 넘기라니, 그건 헐벗고 거지가 되라는 말과도 같았다.“너...!”진기태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설마...”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몇 초도 안 돼 아무리 강지혁이 미친놈이라고는 해도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멀쩡한 가문 하나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하지만 그거 말고는 강지혁이 갑자기 이러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임유진이 감옥에 간 일밖에 없으니까.“너 혹시... 임유진 때문은 아니지?”진기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강지혁은 아주 빠르게 인정했다.“허...!”진기태는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 하나 때문에 이런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하, 하지만 그 일은 그때 세령이가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일전 진세령은 임유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지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서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
탁유미는 차갑게 말을 내뱉은 후 이경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옷을 반대로 잡아당겼다.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겨도 도저히 잡아당겨 지지를 않았다.이경빈은 이대로 그녀의 옷을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손이 하얘질 때까지 꽉 쥐고 놓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경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놔. 손 다치고 싶지 않으면.”경호원은 그녀의 눈빛에 얼른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의 옷을 꽉 잡고 있는 이경빈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이경빈은 경호원의 엄청난 손아귀 힘에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나 원망하는 거 알아. 당연해. 네가 날 싫어하는 것도, 날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내 말 좀 들어줘. 너랑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난 너랑 할 얘기 없어.”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이경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옷을 꽉 잡은 손이 경호원의 힘으로 하나둘 펴지며 서서히 고통이 일고 있는데도,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이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꺾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옷을 놓아주지 않았다.이대로 놓아주면 다시는 그녀 가까이 갈 수조차 없을까 봐, 그녀와는 이로써 모든 게 다 끝이 날까 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탁유미는 제 옷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그를 보며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너는 항상 이런 식이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너는 네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었다면 억지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짓은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항상 네 기분만 중요하고 네 생각만 중요한 사람이었어! 존중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마치 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크나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손아귀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탁유미는 옷을 정
이경빈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인수로만 놓고 보면 이경빈 쪽이 훨씬 우세였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의 경호원들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특정 인원들의 출입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라는 강지혁의 명령을 받았으니까.“비켜드릴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긴장감이 흐르고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탁유미가 걸어 나왔다.강지혁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소란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경빈 대표님은 저희가 금방 되돌려보내겠습니다.”그들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며 경계태세를 갖췄다.탁유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달리 깔끔한 차림이기는 했으나 턱 쪽에 수염이 까끌까끌 나 있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으며 다크서클은 물론이고 눈가도 엄청 빨개 있었다.이제껏 줄곧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세팅하고 다니던 남자였는데 말이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부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며칠 만에 보는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더 야위어 있었으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유독 더 힘이 없어 보였다.게다가 이마에는 까진 상처가 있었는데 복도 조명 때문에 더 잘 보였다.이경빈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심장에 마치 칼에 찔린 듯한 고통이 일었다.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는 그날 그의 명령으로 머리가 조아려졌을 때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그렇게도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는 억지로 그녀의 무릎을 꿇리고 강제로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이경빈은 그날 경호원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박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왜 바보같이 그녀에게 그런 수모를 줬을까.왜 등신처럼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고 공수진에게 사과하게 했을까.이경빈이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던 그때 탁유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은 시간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왜,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