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임유진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아까 강지혁이 어떤 마음으로 그녀에게 후회하냐고 물어봤는지를 말이다.강지혁은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심장과 호흡이 이대로 멈추는 줄 알았다.임유진은 그의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지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더 이상의 후회는 안 돼. 물론 이제는 후회할 기회도 주지 않을 거지만. 앞으로 너는 나, 강지혁의 와이프 여야만 하는 거야. 알겠어?”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켠 후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후회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죽을 다 먹은 후 강지혁과 함께 2층 방으로 올라갔다.두 사람이 향한 곳은 전에 임유진이 썼던 바로 그 침실이었다.그리고 문을 하나 사이에 두고 바로 옆에는 여전히 강지혁의 방이 있었다.임유진은 익숙한 방을 삥 둘러보았다.방 내부는 전과 다를 거 하나 없었다. 심지어 그때 그녀가 놓고 갔던 옷가지들과 잡동사니들도 여전히 방 안에 있었다.“내 방으로 옮겨갈 거 있으면 얘기해. 이따 도우미가 알아서 옮겨줄 거야.”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유진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설마 우리가 각방이라도 쓸 줄 알았어?”임유진은 입술을 한번 깨물고 그를 향해 말했다.“결혼하게 되면 당연히 같이 자야지. 하지만 지금은 임신 중이니까 나는 따로 자면 안 될까? 아이 낳은 다음에 다시...”“싫다면?”강지혁이 말을 끊고 묻자 임유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하지만 아이가...”그녀는 그토록 고대했던 아이이기에 아이를 잃을지도 모르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아이 낳고 나서는 네 말대로 할게. 하지만 그전까지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안 될까?”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강지혁은 그녀가 이런 얼굴로 부탁할 때면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주고 싶게 된다.그녀는 한 번도 자신에게 그런 적 없지만 말이다.
밤이 되고 임유진은 원래 있었던 침실에서 잠을 청했다.내일 밤부터는 이제 강지혁의 방에서 그와 같이 자야만 한다.강지혁은 침대 옆에 걸터앉아 잠이 든 임유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창문 너머로 달빛이 그의 몸을 비추자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하지만 아름다운 외견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슬픔이 어려있었고 눈가에는 애절함이 담겨있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속눈썹이 살짝 움찔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임유진의 오른손 손등에 입을 맞췄다.고작 입맞춤일 뿐인데 그녀를 향한 지독한 애정이 저절로 느껴졌다.“임유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강지혁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임유진이 싫다고, 이제는 완전히 잊어버리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해봐도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이 감정을 결국 숨길 수는 없었다.그는 한시라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임유진은 강씨 저택에서 자는 건 오랜만이라 제대로 자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시계가 9시를 가리킬 때까지 그녀는 너무나도 잘 잤으니까.임유진은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눈을 떴다.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바로 앞에 보이는 도우미의 얼굴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심지어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도우미는 한 명이 아니었다. 여러 명의 도우미들이 그녀의 침대 곁에 서서 옷과 신발 액세서리와 메이크업 도구들을 한가지씩 들고 있었다“이게 무슨...”“대표님께서 사모님께서 일어나시는 대로 준비를 시켜드리라고 하셨습니다.”제일 나이가 있어 보이는 도우미의 말에 임유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사모님이라니, 이렇게 불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무척이나 어색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틀린 호칭은 아니었다.“내가 알아서 할게요. 물건들은 저쪽에 내려놓고 이만 나가보세요.”임유진의 말에 도우미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손에 든 것들을 내려놓고 침실을 빠져나갔다.임유진은 도우미들을 내보내고 바로 화장실로 가서 씻었다.그리고 도우미가 옷걸이에 걸어놓은 흰색 원
“네가 그렇게 보면 나는 네가 날 엄청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돼.”고개를 든 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에 임유진이 당황한 듯 말을 버벅거렸다.“나, 나는 그냥...”‘그냥 뭐? 그냥 바라본 것뿐이라고? 그냥 네가 오늘 엄청 잘생겼다고 생각한 것뿐이라고?’이중 어떤 대답을 해도 어색해질 게 분명했다.결국 임유진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그의 눈만 빤히 바라보았다.“날 사랑하는 게 아니면 다시는 아까 같은 눈으로 보지 마. 멋대로 오해하기 싫으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아예 시선을 내리고 밥을 먹었다.대체 그녀의 눈이 어땠길래 강지혁이 그런 말을 한 걸까?엄청 사랑하고 있다니, 대체 어땠길래......아침을 다 먹은 후 강지혁은 임유진과 함께 구청으로 향했다.오늘은 특별한 날이 아니었기에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임유진과 강지혁은 접수 번호를 받은 후 의자에 앉아 순서가 불리기를 기다렸다.그들 앞에는 3명이 더 있었다. 혼인 신고하러 온 건지 이혼 신고하러 온건인지는 모르지만...혼인신고와 이혼 신고하는 곳이 같다 보니 대기 의자에 앉아 가끔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면 상당히 민망했다.하지만 강지혁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솔직히 임유진은 강지혁이 이렇게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이 상당히 신기했다.평소에는 순서를 기다릴 필요 없이 부하직원이 알아서 다 해줬으니까.그런데 지금 그는 마치 일반 시민처럼 접수 번호를 받고 자신이 번호가 불리기 전까지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그때 임유진의 옆에 앉은 젊은 여성 한 명이 임유진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두 분 혼인 신고하러 오신 거죠?”“네.”“후후, 커플룩이라서 바로 눈치챘지 뭐예요. 그보다 남편분이 정말 잘생기셨네요. 연예인 뺨치는데요?”남편이라는 말에 임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하지만 그런 그녀와 달리 강지혁은 무척이나 태연해 보였다.“왜, 남편이라는 호칭이 불편해?”“그... 그런 거 아니야.
[몰라. 누군데? 역시 신인 남자 배우야?][배우는 무슨! 강지혁이잖아!][강지혁? 어떤 강지혁?][야, 내가 이렇게 흥분할 정도의 남자라면 딱 한사람밖에 더 있어?]친구의 말에 여성의 손이 멈칫했다.그리고 그때 마침 임유진의 접수번호가 들려오고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은 채 8번 창구로 향했다.여성은 강지혁의 뒷모습을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저 남자가 정말 GH 그룹의 대표 강지혁인 걸까?그때 휴대폰 알림이 또다시 울렸다.[그래서 어디서 봤냐니까?][구청.][구청? 강지혁이 구청에는 왜 갔지?]친구가 의문 가득한 이모티콘까지 붙이고 물었다.[아마... 혼인 신고 때문이 아닐까?]여성은 소문으로만 듣던 강지혁을 바로 옆에서 보게 된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했다.강지혁이 접수번호를 받고 웬 여자와 함께 커플룩을 입은 채 혼인 신고를 하려 하다니...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아, 그럼 강지혁이 아니겠네. 강지혁이랑 엄청 비슷한 남자인가 보다.]친구의 말에 여성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설사 강지혁이 혼인 신고하러 왔다고 한들 접수번호를 받고 기다릴 리가 없었다.그렇게 한시름을 놓으려던 그때 여성은 강지혁과 임유진의 혼인 신고접수를 도와주던 직원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지금은 몸을 벌벌 떨기까지 했다.그리고 잠시 후 구청 직원 5명 정도가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빠르게 그쪽으로 다가갔다.그중 제일 앞에 서 있는 남성은 나이가 조금 있었는데 그 남성은 유니폼이 아닌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여성은 구청으로 들어오는 길 바로 옆에 세워진 홍보 포스터를 떠올리고는 그 중년 남성이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해당 중년 남성은 바로 구청 청장이었다.청장이 왜 창구로 왔지?여성이 의문을 품던 그때 더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청장이 의자에 앉아 있던 직원을 물리더니 자신이 대신 의자에 앉은 것이다. 그러고는 직접 두 남녀의 접수를 도와주었다.이런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강지혁이었으니까!S 시에서 강지혁이 지금 혼인 신고하고 있다는 소식을 아는 사람은 단언컨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구청직원들뿐일 것이다.만약 이 사실이 매스컴에 알려지면 S 시 전체가 난리가 날 게 틀림없다.청장은 서류를 건네주며 강지혁과 결혼하게 될 여성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 것으로 보아 재벌가들의 딸은 아닌 듯했다.게다가 여성은 제 이름 하나 사인하는 것도 무척이나 느리고 힘들어 보였다. 부잣집 딸내미의 손가락이 이렇게 삐뚤빼뚤할 수는 없었다.청장이 속으로 가늠하고 있을 때 임유진은 두 번째 서류에 자신의 이름을 정성스럽게 기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메슥거림이 올라와 임유진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서둘러 화장실로 뛰어가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강지혁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임유진의 뒤를 쫓았다.그리고 구청 청장과 뒤에 있던 직원들도 뭔지 모르지만 일단 강지혁의 뒤를 쫓아갔다.접수번호를 받고 대기하던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이상한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녀리고 유약해 보이는 여자가 선두에서 뛰고 그 뒤로 잘생기고 훤칠한 남자가 뛰고 마지막으로 직원들이 헐레벌떡 뛰어갔다.정말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임유진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자 강지혁도 별다른 생각 없이 바로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하지만 그때 청장이 서둘러 그의 앞을 막아섰다.“강 대표님, 여기는... 여자 화장실입니다.”강지혁이 이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이 사실이 나중에 할 일 없는 인간들의 입방아에 오를 수 있다.청장은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에게 불똥이 튈 거라고 생각해 이해해 달라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입술을 꽉 깨물고 전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힘겹게 토하고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그때 그녀는 꼭 에너지를 다 뺏긴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비켜!”결국 그는 청장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끝 칸막이에서 흰색 원피스를 입은
“피고 임유진, 음주 운전으로 피해자 진애령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므로 징역 3년에 처한다!”“유진아, 미안한데, 그 일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널 반대하셔. 탓하고 싶으면 그 사고를 저지른 널 탓해. 그러게 왜 하필이면 진애령을 쳐 죽이냐고.”“진애령은 진화 그룹 큰딸이자 강지혁의 약혼녀였어. 너 강지혁 몰라? S시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없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우리 그만하자. 우리 집안까지 화를 입게 할 수는 없어.”“임유진 씨, 죄송하지만 당신은 이미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으므로 아무리 좋은 경력을 갖고 있더라도 채용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사건과 연루된 지라, 자격증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려울 겁니다. 죄송합니다.”“네가 무슨 낯짝으로 집에 기어들어 와? 그 일로 우리 집안이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알기나 해? 네 동생은 여주인공으로 데뷔할 수 있었는데, 너 하나 때문에 무산됐다고! 넌 네 여동생의 앞길을 망쳤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난 너 같은 범죄자를 딸로 둔 적 없어!”……유진은 꽁꽁 얼어붙은 손을 비볐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1월의 밤이었다.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의 살과 뼈를 파고들었다.노란 형광색의 환경미화원 복장을 입고 있는 유진의 청초한 얼굴은 찬바람을 맞아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예쁘고 맑은 두 눈 아래에 오뚝한 코와 빨간 입술, 긴 머리를 대충 질끈 묶어 올린 그녀의 모습은 온갖 풍파를 겪은 여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그녀의 얼굴만 보면 아마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 정도로 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젊음의 활기 대신 사회의 모든 풍파를 겪은 듯한 체념과 무기력함이 담겨 있었다.유진은 3년의 옥살이로 거칠거칠해진 자기 손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본래 새하얗고 보드라웠던 그녀의 손은 온데간데없었다.손에 감각이 돌아온 그녀는 계속해서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다가 돌연 그녀의 시선은 길 건너편의 검은 실루엣에 멈췄다.이른 아침, 그녀가 이 거리를 청소할 때
“혹시 갈 곳이 없으면 저랑 같이 갈래요?”임유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유진은 자기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충동적으로 낯선 남자를 집에 데려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어쩌면 이 남자가 아무런 공격성이 없어 보여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이 남자가 감옥에 있을 때의 자신과 너무 닮아서일 수도 있다.그도 아마 그녀와 똑같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보려 발버둥 치고 있는 그녀에 반해, 그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 같았다.“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괜찮으시다면 바닥에서 주무시겠어요? 이불 깔아 드릴게요.”유진은 침묵을 유지하는 상대에게 새 수건과 새 칫솔을 꺼내 건네주었다.“욕실은 저쪽이에요. 남자 옷이 없어서……, 최대한 옷이 젖지 않게 조심하세요.”남자가 욕실에 들어가자 유진은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여분의 이불을 꺼냈다.그녀가 살고 있는 그리 집은 크지 않은 원룸이다. 기껏해야 5평 남짓한 크기에 따로 주방도 없이 달랑 화장실 하나 있는 게 다였다. 때문에 평소에 요리를 해 먹을 때면 구비해 둔 인덕션을 사용하곤 했다.남자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여전히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는 물에 젖어있었다.유진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수건 하나를 꺼내 들고 몸을 일으켰다.“허리 좀 숙여 봐요.”남자는 허리를 숙이는 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물기를 닦아드리려고요. 머리가 너무 축축하잖아요, 안 말리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에요. 다른 뜻은 없어요.”여전히 유진을 빤히 쳐다보던 남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지금 나 걱정하는 거예요?”서늘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리만치 듣기 좋았다.“네.”유진은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제가 당신을 데려온 이상 걱정하는 건 당연하잖아요.”속눈썹이 살짝 떨리던 그는 이내 천천히 몸을 숙였다.그제야 유진은 수건을 그의 머리에 덮고 담담히 물기를 털어주었다.“이름이 뭐예요?”오랜 침묵 끝에 그의 입에서
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네, 원해요.”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좋아요.”이건 그녀가 처음 보는 남자의 미소였다. 매우 옅고 희미한 미소였지만 매우 아름다웠다.……출근해야 하는 유진은 그에게 5천원을 건네며 밥을 챙겨 먹으라고 했다.혁이 유진의 집에서 나오자 이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는 그를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대표님.”“가자.”강지혁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검은색 벤츠에 올라탄 지혁은 손에 쥐고 있던 5천 원짜리 지폐를 한참이나 바라봤다.‘오랜만에 용돈을 받아보네. 그것도 5천원을.’그는 생각할수록 웃음이 새어 나왔다.“강 대표님, 어제 대표님과 같이 있던 여성분은 환경위생과의 계약직 직원입니다. 한 달 전부터 이곳에서 월세로 지내고 계시고, 2달 전에 출소하신 걸로 확인됩니다.”오랫동안 지혁의 개인 비서였던 고이준이 차에 오르기 바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감옥?”“네. 이름은 임유진, 3년 전 음주 운전으로 진애령 씨를 죽인 장본인이자 소민준의 전 여자친구입니다. 그때 그 일로 3년 동안 징역을 살았고 변호사 자격까지 취소당했습니다.”이준은 지혁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지혁은 매년 이맘때면 남루한 차림으로 노숙자인 양 거리에 앉아있곤 했다.이는 지혁의 이상한 취미이자 꺼내면 안 될 금기에도 가깝다.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는 금기.심지어 그의 곁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이준마저 자기의 대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몰랐다. 이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루틴이자 꼭 치러야 할 의식이었다. 이미 모두가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일지 언정 매년 이 행동은 반복됐다.추운 겨울밤, 지혁은 홀로 거리에 머물렀다.이준이 할 수 있는 일은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밤 11시 35분만 되면 다시 그가 알던 강 대표님으로 돌아올 지혁을.하지만 모든 일에 예외가 있듯이, 어젯밤은 이변이 일어났다. 낯선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 것이었다. 게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