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강지혁이었으니까!S 시에서 강지혁이 지금 혼인 신고하고 있다는 소식을 아는 사람은 단언컨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구청직원들뿐일 것이다.만약 이 사실이 매스컴에 알려지면 S 시 전체가 난리가 날 게 틀림없다.청장은 서류를 건네주며 강지혁과 결혼하게 될 여성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 것으로 보아 재벌가들의 딸은 아닌 듯했다.게다가 여성은 제 이름 하나 사인하는 것도 무척이나 느리고 힘들어 보였다. 부잣집 딸내미의 손가락이 이렇게 삐뚤빼뚤할 수는 없었다.청장이 속으로 가늠하고 있을 때 임유진은 두 번째 서류에 자신의 이름을 정성스럽게 기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메슥거림이 올라와 임유진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서둘러 화장실로 뛰어가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강지혁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임유진의 뒤를 쫓았다.그리고 구청 청장과 뒤에 있던 직원들도 뭔지 모르지만 일단 강지혁의 뒤를 쫓아갔다.접수번호를 받고 대기하던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이상한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녀리고 유약해 보이는 여자가 선두에서 뛰고 그 뒤로 잘생기고 훤칠한 남자가 뛰고 마지막으로 직원들이 헐레벌떡 뛰어갔다.정말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임유진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자 강지혁도 별다른 생각 없이 바로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하지만 그때 청장이 서둘러 그의 앞을 막아섰다.“강 대표님, 여기는... 여자 화장실입니다.”강지혁이 이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이 사실이 나중에 할 일 없는 인간들의 입방아에 오를 수 있다.청장은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에게 불똥이 튈 거라고 생각해 이해해 달라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입술을 꽉 깨물고 전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힘겹게 토하고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그때 그녀는 꼭 에너지를 다 뺏긴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비켜!”결국 그는 청장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끝 칸막이에서 흰색 원피스를 입은
청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 자신들이 화장실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기이한 눈빛으로 쳐다보았기 때문이다.그렇게 한숨 돌렸다 생각한 그때, 청장의 눈에 강지혁이 여자의 팔을 부축하고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힌 다음 바로 옆 자판기에서 물을 사 건네주는 모습이 보였다.강지혁이 물시중을 든다고?강지혁의 신분을 알고 있는 직원들과 청장의 얼굴은 말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강지혁은 이제껏 누군가의 물시중을 받았으면 받았지 들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임유진은 물을 받아든 후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그때 강지혁이 주머니를 뒤지더니 레몬 맛 캔디를 건네주었다.“이거 먹어. 입덧할 때 먹으면 좋대.”임유진은 그의 말대로 캔디를 입에 집어넣었다. 시큼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에 들어오자 위장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레몬 맛 캔디가 입덧에 좋다는 건 누구한테 들었어?”“고 비서.”“고 비서님? 고 비서님 결혼하셨어?”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녀가 여태 고이준이 솔로인 줄 알고 있었으니까.“아니. 고 비서 어머니가 고 비서를 임신했을 때 입덧이 심했는데 그때 의사의 권유로 레몬 맛 캔디를 먹게 됐대. 그 뒤로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라고.”“...”임유진은 덤덤한 얼굴로 얘기하는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았다.고이준과 둘이서 어쩌다 입덧 얘기까지 하게 된 거지? 그리고 그 얘기를 할 때 강지혁은 어떤 표정이었을까?잠깐 휴식한 후 임유진과 강지혁은 다시 서류를 작성하러 갔다.그리고 다 작성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청장이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표님, 요즘 혼인 신고하러 함께 오신 젊은 부부들은 다들 저쪽에 있는 포토 부스에서 사진을 찍으십니다. 휴대폰 카메라로 찍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요구하면 저희가 따로 기념으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죠. 어떻게, 두 분도 찍어드릴까요?”“그러지.”강지혁은 대답을 마친 후 임유진의 손을 잡고 포토 부스로 향했다.임유진은 그
두 사람이 연인이었을 당시 임유진은 강지혁의 눈가를 매만지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그거 알아? 너 웃을 때 정말 예쁘다는 거? 네가 그렇게 웃을 때면 꼭 너한테 홀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그러자 강지혁이 더 예쁘게 웃었다.“나는 네가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홀렸으면 좋겠는데?”두 눈을 마주한 채 요망한 말을 내뱉는 강지혁 때문에 임유진의 볼은 순식간에 빨개졌다.강지혁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해서 널 꼬실 거야. 네가 나한테 홀려서 어디 가지 못하게, 다른 사람한테 시선 한번 주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나를 사랑할 수 있게. 유진아, 내가 이렇게 웃어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임유진은 그때 그 말이 너무나도 달콤해 그대로 녹아버려도 좋을 것 같았다.그때는 그렇게나 달콤했었는데 지금은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강지혁과는 꼭 보이지 않는 벽을 두고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만약 이런 상태가 계속 지속 되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왜? 사진이 별로야?”강지혁이 묻자 임유진이 얼른 답했다.“아니, 잘 나왔어.”“그래. 사진을 액자에 넣어준다고 하니까 사진 줘.”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사진을 강지혁에게 건넸다. 그러다 옆 홀에서 젊은 부부들이 선서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도 한때는 누군가와 혼인 신고하러 올 때 눈앞에 있는 젊은 부부처럼 평생을 약속하고 싶었다.“옆 홀로 안내해드릴까요?”그때 청장이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아...”임유진이 망설이자 강지혁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할래!”그 말에 강지혁의 두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임유진은 자신을 빤히 바라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는 이내 뭔가 알아차린 듯 서둘러 말했다.“아, 네가 원하지 않으면 나는...”“‘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 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할 때나
임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의 말이 들려왔다.“이혼은 꿈도 꾸지 마. 이번 생에서 너는 내 강지혁의 와이프 여야만 하고 네 남편도 나여야만 해.”그 말에 임유진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그녀는 자기들 서약 차례가 될 때까지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러다 서약서를 읽을 때야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임유진은 옆에서 함께 서약서를 읽는 강지혁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부부의 연을 맺어 결혼에 책임을 다하며...”임유진은 서약서를 보며 강지혁과 함께 선서했다.이로써 이제 강지혁과는 완벽한 부부가 되었다.그녀는 드디어 자신만의 가정이 생긴 것이다.앞으로의 결혼생활에 위기와 고난이 닥쳐올 때 그걸 강지혁과 둘이 손잡고 헤쳐나갈 수 있을지, 정말 강지혁과 평생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지금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다.평생을 함께한다는 건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만큼 책임감이 따르고 무거운 말이기도 하니까.하지만 뭐가 됐는 그녀는 노력해볼 생각이다. 강지혁과의 결혼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유지하며 가정을 잘 꾸려나갈 생각이다.“이로써 선서를 마칩니다.”마지막 끝말이 두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서약이 끝난 후 사진 전담 직원이 두 사람의 사진이 들어있는 아크릴 액자를 임유진과 강지혁에게 각기 하나씩 건넸다.임유진이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자 강지혁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오늘부터 우리는 정식으로 부부가 된 거야.”“응.”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그때 아까 대기 의자에 앉아있을 때 임유진에게 말을 걸었던 여성도 지금 막 모든 것을 끝냈다. 그리고 이제 남편과 물건을 정리하고 가려는데 구청 청장과 직원들이 임유진과 강지혁을 배웅하고 있는 보습이 보였다.여성은 그 모습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정말 강지혁이 아닌 걸까?강지혁이 아니라 하기에는 구청 직원들의 태도나 반응이 너무나도 이상했다.“뭐 봐?”여성의 옆으로 남편으로 보이는 남성
“에이, 아닐 거야. 만약 강지혁이면 며칠 전부터 결혼한다는 기사가 줄줄이 나왔겠지. 그런데 하나도 없잖아.”여성의 친구가 웃으며 절대 아니라고 얘기했다.“아니면 네 계정은 왜 정지를 당한 건데? 그리고 너한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 그 남자랑 여자의 혼인신고서를 접수해준 사람, 구청 청장이었어. 직원들도 무슨 높은 사람 모시듯 항상 따라붙었고.”그 말에 전화기 너머의 친구가 침묵했다.그러다 한참 뒤에야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만약 정말 강지혁이면... S 시가 발칵 뒤집히겠는데? 그런데 강지혁이 직접 얘기하지 않는 이상 언론사에서는 함부로 기사를 내보내지 못할 거야...”여성의 친구는 통화하면서 컴퓨터에 있는 강지혁의 사진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이 결혼이라니... 강지혁과 결혼하게 될 여자는 대체 누굴까?’...임유진은 구청에서 나와 강지혁과 함께 차량 뒷좌석에 앉았다.“이제 집으로 가는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아니. 병원으로 갈 거야. 병원 쪽에는 이미 얘기해뒀어. 도착하면 너랑 아이한테 필요한 검사를 받게 될 거야. 전에 네가 쓰러졌을 때 했던 건 간단한 검사뿐이었으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신한 이상 몸 상태를 잘 체크해야만 했다.그녀는 자궁이 그렇게 된 후로 생리불순이 생겼다. 4개월째 생리를 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기에 이번에 3개월째 생리를 안 했을 때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생기 불순이겠거니 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런데 이번에는 생리불순 때문이 아니라 임신 때문이었다.물론 임유진은 그 사실을 몰랐었고 그래서 3개월이나 임신 초기에 해야 할 검사 같은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원래부터 마른 체형인 것도 있지만 요즘 제대로 먹지 않아 살이 점점 더 빠졌다. 그래서 그런지 복부도 전혀 임산부의 배 같지 않았다.임유진은 자신이 영양소를 골고루 챙겨 먹지 않은 것으로 아이한테 영향이 갔을까 봐 조금 두려웠다.한편 강지혁은
고이준이 강지혁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그러자 강지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고이준의 말대로 그는 어제 상당히 바빴고 그래서 메일함도 제대로 확인 못 했다.게다가 고이준에게서 메일을 받기로 한 건 기억이 나지만 어차피 오늘 다시 와서 검사할 테니 그전 병원에서 했던 검사지는 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세쌍둥이라니...강지혁의 눈빛이 임유진의 복부로 향했다.홀쭉하고 평평한 그녀의 뱃속에 한 명도 아닌 세 명이나 있다는 말이다.그때 임유진도 마찬가지로 깜짝 놀란 얼굴로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에 말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세쌍둥이?그녀는 임신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당연히 아이가 한 명일 줄 알았다. 하나라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으니까.그런데 하늘은 그녀에게 세 명이나 선물로 주었다.갑작스럽게 날아든 3인분의 행복에 임유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왜 울어?”임유진의 눈물을 본 강지혁이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너무... 흑... 너무 기뻐서...”임유진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답했다.“나 정말 세쌍둥이 임신한 거야? 정말?”“그래, 세쌍둥이 맞아.”강지혁은 고이준에게서 티슈를 건네받은 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많이 울면 아이한테 안 좋으니까 그만 울어.”말투는 딱딱하지 그지없지만 손길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그는 임유진이 눈물을 흘릴 때면 항상 손발이 차가워지고 어쩔 줄을 몰랐다.임유진은 그의 말에 서둘러 눈물을 멈추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에게 좋지 않은 일은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의사는 임유진에게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했다. 의사는 검사 결과를 확인할 때마다 항상 미간을 찌푸렸다.특히 초음파 검사할 때는 얼굴이 더더욱 심각해졌다.“선생님, 우리 아이들 괜찮은 거죠...?”임유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그녀는 자신의 건강보다는 아이들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이 아이들은 하늘이 그녀에게 준 희망이었으니까.“아이들은 괜찮습니다. 제가 걱정하고
“산모가 잘못될 가능성은요?”강지혁의 목소리에 일말의 긴장이 묻어 있었다.“산모가 잘못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만 수술 과정에서 가끔 출혈이 발생하거나 자궁내감염 또는 장기손상 등의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분의 현재 몸 상태로 볼 때 만약 유산하게 되면 다시 아이를 가질 확률이 매우 희박해집니다.”의사는 가능한 상황들을 다 설명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을 듣더니 표정이 심각해졌다.세쌍둥이를 낳는다는 것 자체도 위험이 큰데 지금은 한 명을 포기한다고 해도 여러 문제가 따라 진퇴양난인 상황이었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선택은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강지혁은 아이보다는 임유진이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애초에 임유진을 사랑하게 됐을 때부터 그는 이미 그녀가 임신이 힘들다는 사실과 어쩌면 둘 사이에는 영원히 아이가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때는 아예 상관이 없었고 지금은 살짝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자신이 원하는 게, 자신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그럼 한 명을 포기할게요.”“싫어!”강지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임유진이 반대했다.“나는 아이 포기하기 싫어.”그러자 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임유진을 노려보았다.“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알아! 하지만 어차피 한 명을 포기해도 세 명 다 유산하게 될 수도 있잖아. 그러면 차라리 세 명 다 살리는 방법으로 시도해보고 싶어.”만약 지금 아이를 한 명 포기하게 되면 임유진의 안전에는 어느 정도 보장이 생기지만 아이들이 위험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한 명도 포기하지 않고 낳으려고 하면 임유진과 아이들 모두 위험하게 된다.변호사라면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유리한지 알고 있어야 하는데 임유진은 지금 자신의 목숨으로 위험한 수를 던지려고 하고 있다.어쩌면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는 게, 자신만의 가정을 이루는 게 너무 간절한 탓일 수도 있다.임유진은 만약 여기서 한 명을 포기함으로써 나
“그럼, 당연하지.”이한이 헤실헤실 웃었다.“그런데 너는 다쳤으면 다쳤다고 왜 얘기를 안 하냐? 내가 네 일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야 해? 왜, 내가 있으면 유진 씨랑 감정을 쌓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았냐? 뭐가 됐든 그렇게 멋지게 구해줬는데 이번에야말로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겠지?”강현수는 시선을 내리고 그날 아침의 기억을 떠올렸다.대문에서 막 나왔을 때 임유진은 그 가녀린 몸으로 망설임 없이 차량 앞에 뛰어들었다.그때의 그녀는 창백하고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임에도 그를 만나겠다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오로지 곽동현을 위해!강현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불사할 수 있는데 그녀는 곽동현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임유진은 곽동현에게 유리한 증거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곽동현의 말을 조건 없이 믿어주었다.대체 곽동현이 뭐라고 그녀가 그렇게 한단 말인가!강현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또다시 질투와 분노가 피어올랐다.그는 이번 기회에 임유진에게 똑똑히 알려줄 생각이다. 곽동현은 파렴치한 인간이고 그녀는 처음부터 곽동현 같은 걸 믿어서는 안 됐다는 사실을!“너 그 표정 뭐야? 설마... 아직도 유진 씨 마음을 얻지 못한 거야? 왜? 유진 씨가 여전히 지혁이를 못 잊겠대?”이한의 말에 강현수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이한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하하, 야, 농담인 거 알지? 지혁이랑 유진 씨랑 헤어진 지가 언젠데. 그리고 전에 클럽에서도 분위기 장난 아니었어. 유진 씨한테 얼마나 싸늘하게 대하는지 내가 다 살 떨리더라니까? 유진 씨를 완전히 내려놓은 게 분명해.”이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휴대폰에 알림이 울렸다.그는 평소 SNS를 해도 중요한 친구들만 팔로우하기에 지금처럼 메시지가 왔다는 건 자주 연락하는 친구들이 메시지를 보냈다는 뜻이었다.이한은 친구가 또 어떤 메시지를 보냈나 싶어 흥미 가득한 얼굴로 메시지를 확인했다.하지만 메시지를 확인 한 지 3초도
“응, 안 아파.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여자아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하겸은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서서히 힘을 풀고 여자아이의 품에 몸을 맡겼다.“세상에! 너 또 싸웠니? 애들 얼굴 좀 봐. 네가 이랬어? 미친 망아지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니?”새엄마인 정가연이 다가와 눈을 부라리며 하겸을 노려보았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머리가 아플 만도 했다.하승찬은 엄마가 오자 바로 상황을 일러바치며 하겸이 어떻게 다른 아이들을 때려눕혔는지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주었다.여자아이는 정가연의 한마디로 시작된 사람들의 질책에 품에 있는 남자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괜찮아. 누나가 지켜줄게. 무서워하지 마.”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얼른 두 아이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막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강지혁이 아이 둘을 데리고 다급하게 그녀 앞으로 뛰어왔다.“유진아,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아. 김재호를 찾았어.”“뭐?”임유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김재호를 찾았다고?!”“그래. 고 비서가 확인했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김재호를 찾았다는 건 세쌍둥이 중 나머지 한 아이의 행방을 드디어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임유진은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강지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빨리... 빨리 가자!”“그래, 알았어.”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내려 아이 둘을 바라보았다.“엄마랑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당장 가봐야 해. 놀이공원은 다음에 다시 데려와 줄게.”강선율은 의젓한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현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떼 한번 쓰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놀이공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후 현이는 많이 궁금했던 건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엄마, 김재호가 누구야? 중요한 사람이야?”“응... 엄청 중요한 사람이야.”임유진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답해
“흠... 그럼 내가 심심하지 않게 바로 옆에 붙어만 있어 주면 안 돼? 나도 저기서 놀고 싶단 말이야.”여자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설득 방법을 바꿨다.“알았어.”남자아이는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게 무색할 만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곁에 있을게.”‘누나’라는 말에 임유진은 또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눈빛만 닮은 게 아니라 조금 아련한 목소리로 ‘누나’라고 부르는 것까지 강지혁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여자아이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 아까 바이킹 줄에서 봤던 승찬이라는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형들을 데리고 다가왔다.승찬은 손가락으로 겸이란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옆에 있는 형들에게 말했다.“내가 말했던 애가 바로 쟤야. 쟤가 진짜 싸움을 잘하거든. 여태 지는 걸 못 봤어. 아마 형들이라도 상대가 안 될걸?”“하승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여자아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왜? 내 말 맞잖아. 하겸 싸움 잘하는 거 맞잖아.”하승찬은 피식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답했다.누가 봐도 일부러 형들을 도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아니나 다를까 하승찬과 함께 온 아이들은 담방이라도 하겸과 싸울 듯 거리를 좁혀왔다.여자아이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얼른 하겸을 제 뒤에 숨기고 큰소리로 외쳤다.“내 동생은 싸움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우리는 놀러 온 거지 싸움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러니까 저리 가! 계속 다가오면... 그때는 내가 혼내줄 거야!”용기는 가상했지만 수적으로나 힘적으로나 우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여자아이의 협박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하승찬이 데리고 온 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큰 남자아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자아이를 옆으로 밀어버렸다.여자아이는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머리는 바로 옆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임유진은 반응조
점심이 되고 임유진 일행은 놀이공원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현이와 율이는 노느라 에너지를 많이 써서 식욕이 도는지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아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 먹은 뒤에는 금방 다시 키즈 코너로 가 놀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 애들 데리고 놀고 있을게.”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래.”강지혁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들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이다.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만약 임유진이 그를 떠난 이유가 정말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어서인 거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의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나?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강지혁의 눈빛에 일말의 어둠이 스쳐 갔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낸 후 입구 쪽 벤치에 앉아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현이와 율이는 이제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 됐지만 제법 남매 느낌이 많이 났다. 두 아이 모두 서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키즈 코너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멈췄다.아까 바이킹 줄을 섰을 때 봤었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여자아이는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무릎을 살짝 구부려 앞에 있는 남자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남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무척이나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영양 불균형인지 얼굴이 조금 노랗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너무나도 조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지나치게 예쁜 얼굴이어서일까, 임유진은 아이의 얼굴을 꼭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우리 현이는 어쩜 기억력도 좋아... 하하.”임유진은 어색하게 웃더니 곧바로 율이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런데 율아, 정말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 적 없어?”“네, 아빠랑 같이 간 적은 없어요.”강선율의 대답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랑 같이 안 가줬어?”“도우미들이 함께 가줬어.”“같이 가주지. 그러다 율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걱정도 안 됐어?”임유진은 자기가 다 서운한 듯 강지혁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며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놀이공원 자체가 즐거운 곳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걸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안 잃어버려.”강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야...”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에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놀이공원 전체를 하루 대관한 거라 사람이라고는 아이 한 명과 직원들, 그리고 율이 곁을 지켜주는 도우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지혁은 10명의 경호원을 아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기도 했다.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전은 확보가 됐지만 그런 식의 놀이공원이라면 줄을 설 때의 미묘한 기대감도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느낄 수 없게 된다.“율아, 놀이공원 갔을 때 어땠어? 좋았어?”임유진이 물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이는 고개를 저었다.“재미없었어요.”재미있어 보이던 놀이 기구도 두어 번 타보니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놀이공원이 얼마나 재미있는데!”강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나랑 엄마는 엄청 자주 갔어.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대관람차도 타고. 그런데 매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 같은 건 두 번 밖에 못 탔어...”현이는 말을 하다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재밌다고?’강선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고이준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해졌다.“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나간 후 강지혁은 의자에 힘없이 기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살아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지는 웃음소리와 반대로 그의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맺혀 올랐다. 그리고 그 눈물은 매끈한 볼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는 임유진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녀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 또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그리고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 덕에 배웠던 후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까지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하고 고통으로 사뭇 쳤다. 자신만 입을 닫고 진실을 감춰버리면 그녀는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고배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세상에는 영원히 발각되지 않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또한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기억을 되찾은 강지혁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게 꼭 꿈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게 꼭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일까, 그날 밤 이후부터 그는 임유진이 깊은 수면에 든 후면 어김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곤 했다.마치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날 싫어하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제발...”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일 밤 그들의 침실에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주말.임유진과 강지혁은 강선율과 강선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놀이공원에 가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어느 날 현이가
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부름으로 사무실에 왔다가 벌써 10분째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의 눈빛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혹시 사모님과 다투신 건가? 아니면 또 두통 때문에...?’강지혁은 계속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내 곁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뭔지, 정말 몰라?”고이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철렁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진애령 사건 때문에 도저히 날 용서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내 곁을 떠난 거라고, 너나 한 집사나 두 사람 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네, 그랬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추측일 뿐입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사모님밖에 모르시니까요...”고이준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희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년 만에 돌아오시고 나서 진애령 씨 사건에 관해 얘기했을 때 사모님은 회장님을 다 용서했다고 하셨거든요.”“용서?”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조금만 살이 맞닿아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토까지 했는데 그게 과연 용서한 사람의 행동일까?용서했다고 한 말도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자신이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해외에 있는 요셉 선생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유진이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요셉은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로 특히 기억 관련해서는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회장님 설마...’“혹시 기억을 완전히 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강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의 기억은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돌아온 상태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세세한 기억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하지만 박 선생도 전에 말했다시피 갑자기 모든 기억을 다 찾으려고 하면 회장님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할 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