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쌀쌀맞은 태도에 고이준은 바로 입을 다물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이제는 정말 확실히 내려놓으시려는 거네.’하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리려던 찰나 강지혁이 서류를 훑어보며 고이준을 향해 말했다.“4억은 왜 빌리려고 하는 건지 한번 알아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그 말에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커다란 사무실에 혼자 남게 된 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고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건물 앞에 있는 여자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이 각도로는 사람들이 그저 한낱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강지혁은 어느 점이 임유진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임유진이라는 여자의 일에는 더 이상 상관하지 말라고 그렇게 되뇌어봐도 몸은 뇌의 통제를 벗어난 듯 제멋대로 움직였다.지금도 그저 창백했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뿐인데도 걱정이 멋대로 일었다.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대체 왜 이렇게 걱정되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임유진이 이곳으로 찾아온 건 강현수가 돈을 빌려주지 않아서이다.강현수에게 거절당해 어쩔 수 없이 찾아온 것뿐이다.강지혁은 자조하듯 웃으며 이마를 짚었다.차선책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그 강지혁이 언제부터 차선책으로 전락했던가.만약 강지혁이 4억을 빌려주지 못할 만한 사람이었다면 임유진은 애초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고 아까처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차선책조차도 아니었을 테고 말이다.지금도 강지혁은 임유진의 생각만 하고 있다. 임유진이라는 여자는 마치 그의 일부가 되기라도 한 듯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았던 유약한 몸, 간절히 부탁하던 얼굴, 그 모든 것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욱신거렸다.강지혁은 서서히 밀려드는 고통에 주먹을 쥐고 심장이 뛰는 쪽을 세게 두드렸다.최악의 모습으로 헤어져 놓고도 아직도 신경이 쓰이는 건 대체 왜지?강지혁의 검은색 눈동자가
반 시간 안에 이렇게나 많은 정보를 입수한 건 대단한 일이었다.강지혁은 보고를 전부 다 전해 듣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어젯밤 줄곧 강현수의 별장 앞에 서 있었다고?“대표님, 임유진 씨의 체력으로 볼 때 어젯밤부터 계속 서 있어서 곧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으로 보입니다.”고이준이 참지 못하고 임유진의 상태에 관해 얘기하자 강지혁이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보더니 몇 초 후 천천히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데리고 올라와.”“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그의 지시에 서둘러 대표이사실을 나섰다.강지혁은 역시 아직 임유진이라는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이준이 로비로 내려왔을 때 임유진의 몸은 이미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의지력이 아니었으면 아마 진작 쓰러졌을 것이다.“임유진 씨,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대표님께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고이준은 눈앞에 있는 만신창이가 된 여자를 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강지혁이 그녀를 이렇게 부른 건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그 대가가 무엇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네, 고마워요.”임유진은 침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한번 핥고는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옆에서 듣기에는 곧 쓰러질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임유진이 고이준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몇몇 직원들이 자리에 멈춰선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정체가 뭔지 추측하고 있는듯했다.그도 그럴 것이 아까 임유진이 밖에 서 있을 때부터 그녀에게는 이미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으니까.고이준은 임유진을 데리고 대표이사실 앞에 도착한 후 가볍게 노크를 했다. 그러고는 문을 열고 임유진에게 얘기했다.“들어가시죠.”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가볍게 두 손을 말아쥐었다.몇 번이나 온 적 있는 곳이지만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장되었다.대표이사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고이준이 밖에서 문을 닫았다.임유진은 창가 쪽에 몸에 기댄 채 서 있는 남자를 보며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그녀는 지금 무척
“응.”임유진은 강지혁이 돈을 빌리려는 이유를 알고 있는 것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친구 사랑 한번 대단하네. 한지영 때문에 강현수의 별장 앞에서 밤새 서 있은 거로도 모자라 이제는 나한테까지 찾아와서 또 한참을 서 있고.”강지혁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임유진의 몸이 움찔 떨렸다.하지만 그녀는 이내 용기라도 내려는 듯 두 손을 더 꽉 말아쥐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어떤 말을 해도 참아낼 생각이었다. 이 정도도 참아내지 못하면 한지영을 구해줄 수 없을 테니까.“뻔뻔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나한테는 그 돈이 정말 필요해. 지영이를 살리려면 어쩔 수가 없어. 돈을 빌려주면 네가 시키는 건 뭐든 할게. 약속해!”임유진은 한지영을 구할 수만 했다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다.제일 절망적이었을 때 앞길을 포기하고 손을 내밀어준 한지영을 이대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이 가볍게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네가 뭘 해줄 수 있는데? 왜, 내가 전처럼 또 내 옆에 있어 달라는 멍청한 소리를 할 것 같아? 아니면 너한테 하룻밤 상대라도 돼달라고 할 것 같아? 4억의 대가로? 임유진, 너는 아직도 내가 너 없으면 안 되는 등신으로 보여?”강지혁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임유진의 가슴을 무겁게 내리쳤다. 얼마나 세게 내리치는지 가슴에 통증까지 일었다.하지만 그녀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그의 말대로 지금의 그녀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으니까. 그와 동등하게 설 자격조차 없었으니까.임유진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향해 물었다.“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줘. 어떻게야 돈을 빌려줄 수 있는지 네가 얘기해줘.”지금의 그녀는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만약 강지혁이 정말 돈을 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으면 고이준을 시켜 날 여기로 부르지 않았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그렇게 임유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는 싸늘한 눈을 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때 네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네 발등
한지영의 목숨을 살리려면 4억이 필요하다. 하지만 강현수에게도 무시당하고 강지혁에게도 거절당한 지금 돈을 빌릴 방도가 다 사라져버렸다.이제 어떡하지?정말 한지영의 부모님이 집을 파는 걸 보고 있어야만 하나?만약 집을 팔아도 병원비가 모자라면?그러면 그때는 장기적인 치료를 하려고 해도 못할 텐데 그때는 어떡하지?임유진은 뭐라 얘기하려는 듯 떨리는 입술을 계속 움찔거렸다.하지만 막상 입을 열려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말이 튀어 나가지 않았다.강지혁에게 유일하게 내걸 수 있는 조건이 바로 자신이었는데 강지혁은 더 이상 그녀가 필요 없다고 했다. 이제는 완전히 끝이 나 버렸다.임유진의 얼굴에 비친 절망을 보자 강지혁의 가슴이 또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자기를 버린 여자 때문에 마음이 미어지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싫었다.잠시 후, 임유진이 드디어 입을 열고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정말... 안 빌려줄 거야?”강지혁은 심장이 아려오는 것을 애써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방금 했던 말들을 또다시 해줘야 해?”“아니... 아니... 잘 알겠어. 시간 뺏어서 미안해...”임유진은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그 말을 내뱉고는 뒤를 돌아 천천히 사무실 문 쪽으로 향했다.‘지영이 어떡하지...?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나는 왜 이렇게 쓸모가 없는 걸까...? 왜 이렇게...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걸까?’임유진의 지금 위치로부터 사무실 문까지는 고작 8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하지만 임유진은 한 보 내딛는 것조차도 힘에 부쳐 보였다.그렇게 어찌어찌 문 바로 앞까지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갑자기 머리가 땅 하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까매졌다.그리고 익숙한 누군가의 품에 쓰러진 것을 마지막으로 임유진은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한편, 강현수는 병원에서 몸 상태를 검사할 때 줄곧 넋을 놓고 있었다.오늘 아침 임유진이 차를 막아섰던 장면이 자꾸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그때의 임유진은 무척이나 유약해 보였고 그녀의 두 눈에는 간절함
“혹시 유진이 생각해요...? 이대로라면 나 때문에 유진이랑 사이가 안 좋아질 건데... 정말 괜찮겠어요?”배여진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아무리 유진이가 곽동현 때문에 열성적이어도 현수 씨는 유진이 좋아하잖아요. 이대로 안 봐도 정말 괜찮아요...?”“유진 씨와의 일은 내 문제니까 너는 상관하지 마. 넌 변호사랑 재판 준비나 해.”강현수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그러자 배여진이 갑자기 울먹거리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닦았다.“고마워요. 솔직히 현수 씨는 유진이를 좋아하니까 뭐든 유진이가 하자는 대로 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나한테... 곽동현에게 건 소를 취하하라고 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변호사도 바로 고용해주고... 정말 고마워요. 현수 씨는 예나 지금이나 정말 한결같네요.”배여진은 다정하게 ‘현수야’라고 부르려다가 전에 강현수가 얘기했던 것을 떠올리고 그만두었다.고작 호칭 하나 때문에 괜히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으니까.지금은 강현수와 임유진이 최대한 가까이하지 않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강현수는 배여진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말하는 게 다 진실이라면 나는 당연히 네 편을 들어줄 거야.”‘유진 씨한테는... 곽동현을 법으로 처리하고 나서 찾아가도 늦지 않아.’강현수는 임유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곽동현이라는 남자는 그녀가 그런 성의를 보일 가치가 없는 남자라는 것을 말이다!때가 되면 임유진도 사람을 잘못 믿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강현수는 그렇게 생각했다.다만 강현수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했다.지금 배여진의 편을 들어주는 게 정말 배여진을 위해 이러는 건지 아니면 임유진과 가까운 사이인 곽동현을 질투해서 이러는 것인지를 말이다....임유진은 지금 병원 VIP 병실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다.얼굴에 혈색 하나 돌지 않는 것이 지금 그녀가 덮고 있는 흰색 이불 색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임유진은 무슨 악몽이라도 꾸는 것인지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미간을 꾹 찌푸리고 있었다.의사는 병상 옆에
이제껏 강지혁의 아이를 가지기 위해, 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노력했던가.하지만 그들은 아이는 물론이고 강지혁의 옆에 가까이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그런데 임유진은 강지혁을 가진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아이까지 임신해버린 것이다.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임유진은 참 운이 좋은 여자라며 속으로 감탄했다.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의사에게 눈빛을 보낸 후 함께 병실에서 나갔다.지금 이 순간 강지혁이 원하는 것이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라는 걸 비서인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조용한 병실 안, 들리는 건 두 사람의 숨소리뿐이었다.강지혁은 손을 들어 이불을 사이에 둔 채 조심스럽게 임유진의 복부 쪽에 손을 올려놓았다.그는 전에 임유진과 사귀었을 당시 그녀와 함께 산부인과를 찾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녀의 자궁이 어떤 상황인지, 자연 임신을 하는 게 얼마나 가능성이 희박한 일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임유진과 헤어진 후 그녀가 토하는 모습을 봐도 임신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녀는 임신이 맞았고 지금 그녀의 뱃속에서 두 사람의 아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그들의 아이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강지혁의 손이 임유진의 복부에서 그녀의 얼굴 쪽으로 향했다.길고 큰 손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강지혁은 손끝에서 전해오는 그녀의 미세한 차가운 체온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는 네가 임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만약 너한테 선택하라고 한다면 너는 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겠지...”“하지만... 네 뱃속에는 지금 우리의 아이가 있어. 그러면 너는...”강지혁의 목소리가 멈췄다.많고 많은 감정들이 목구멍으로 밀려왔다.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잠시 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그런데도 넌 여전히 내 곁을 떠난다는 선택을 할까?”아쉽게도 그의 질문에 답해주는 이는 없었다....얼마나 잤을까, 임유진은 서서히
임유진은 화들짝 놀라 얼른 강지혁의 품에서 나오려고 했다.하지만 강지혁은 놓아주기는커녕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임유진의 향기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이제 다시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셨다.임유진의 영향력은 지대했다.강지혁은 그간 지켜왔던 것들이, 삶의 기준이라고 정해놨던 것들이 임유진이라는 여자 하나 때문에 산산이 깨부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금 만신창이인 사람은 분명히 임유진인데 강지혁은 오히려 자신이 넝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왜 이 여자 앞에만 서면 늘 이렇게 순순히 투항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걸까.강지혁은 임유진을 꽉 끌어안은 채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깊이 묻었다. 마치 이대로 생을 마감해도 좋다는 사람처럼...임유진은 그런 그의 행동에 조금 놀랐다.그녀느 강지혁이 자신을 얼마나 경멸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4억... 줄게.”강지혁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한지영이 더 좋은 병원에서 더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줄게. 그리고 앞으로의 재활 치료에 들 비용까지 내가 모두 낼게.”그 말에 임유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자신이 지금 듣고 있는 이 말이 진짜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정말 한지영을 구해준다는 게 맞나...?“저, 정말이야?”임유진의 목소리가 떨려왔다.강지혁이 희망을 줬다가 이내 다시 사실은 거짓말이었다고 할까 봐 무서운 모양이었다.“대신 조건이 있어. 나랑 결혼해.”강지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는 결혼하자는 얘기를 이렇게 거래하듯이 할 줄은 몰랐다.물론 가장 놀란 사람은 임유진이었다.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귀를 의심했다.결혼이라고?“나랑... 결혼하겠다고?”“한지영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럼 나랑 결혼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강지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너는 나 싫어하잖아. 더 이상 내
그 말에 임유진의 몸이 살짝 움찔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강지혁의 예쁜 두 눈을 바라보았다.그의 두 눈은 전에 사귀었을 때처럼 부드럽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마치 까만 어둠처럼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강지혁과는 더 이상 엮일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도치 않는 방식으로 다시 엮여버렸다.강지혁과의 아이, 강지혁의 핏줄...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알았어. 결혼해.”...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한지영이 있는 병원 앞에 멈춰 섰다.고이준은 운전석에서 내린 후 예의를 갖춰 뒷좌석 문을 열었다.“대표님께서 임유진 씨는 현재 몸이 허약한 상태라 장시간 이곳에 있는 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지영 씨가 병원을 옮기는 일은 아마 내일쯤 처리될 겁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차에서 내린 후 바로 중환자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고이준은 그런 그녀의 바로 뒤에서 따라갔다.임유진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앞으로 강씨 가문과 그룹을 잇게 될 후계자일 지도 모르니 그녀의 안전에 특히 더 유의해야만 했다.중환자실 쪽에 도착하자 한씨 부부가 전처럼 유리 너머의 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두 사람은 한지영이 지금 의식이 없는 상태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 기적이 일어날까 싶어, 또 혹시 수술하기도 전에 증세가 악화하면 어쩌나 싶어 눈을 떼지 못했다.그러다 임유진이 또다시 이곳에 나타난 것을 발견하고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여긴 또 왜 왔어?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지영이 옆에 맴돌고 있을 거야! 너는 방해밖에 안 돼! 알아? 가! 당장 가!”이해영이 히스테리를 부렸다.그녀는 병상에 누워있는 한지영과 경제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그러다 마지막 이성의 끈이 임유진의 얼굴을 본 순간 끊어져 버렸고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마구마구 쏟아져나왔다.이해영이 임유진을 세게 밀칠 각오로 달려든 그때, 고이준이 임유진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제지했다.“안녕하세요. 저는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우리 현이는 어쩜 기억력도 좋아... 하하.”임유진은 어색하게 웃더니 곧바로 율이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런데 율아, 정말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 적 없어?”“네, 아빠랑 같이 간 적은 없어요.”강선율의 대답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랑 같이 안 가줬어?”“도우미들이 함께 가줬어.”“같이 가주지. 그러다 율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걱정도 안 됐어?”임유진은 자기가 다 서운한 듯 강지혁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며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놀이공원 자체가 즐거운 곳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걸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안 잃어버려.”강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야...”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에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놀이공원 전체를 하루 대관한 거라 사람이라고는 아이 한 명과 직원들, 그리고 율이 곁을 지켜주는 도우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지혁은 10명의 경호원을 아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기도 했다.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전은 확보가 됐지만 그런 식의 놀이공원이라면 줄을 설 때의 미묘한 기대감도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느낄 수 없게 된다.“율아, 놀이공원 갔을 때 어땠어? 좋았어?”임유진이 물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이는 고개를 저었다.“재미없었어요.”재미있어 보이던 놀이 기구도 두어 번 타보니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놀이공원이 얼마나 재미있는데!”강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나랑 엄마는 엄청 자주 갔어.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대관람차도 타고. 그런데 매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 같은 건 두 번 밖에 못 탔어...”현이는 말을 하다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재밌다고?’강선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고이준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해졌다.“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나간 후 강지혁은 의자에 힘없이 기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살아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지는 웃음소리와 반대로 그의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맺혀 올랐다. 그리고 그 눈물은 매끈한 볼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는 임유진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녀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 또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그리고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 덕에 배웠던 후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까지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하고 고통으로 사뭇 쳤다. 자신만 입을 닫고 진실을 감춰버리면 그녀는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고배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세상에는 영원히 발각되지 않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또한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기억을 되찾은 강지혁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게 꼭 꿈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게 꼭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일까, 그날 밤 이후부터 그는 임유진이 깊은 수면에 든 후면 어김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곤 했다.마치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날 싫어하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제발...”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일 밤 그들의 침실에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주말.임유진과 강지혁은 강선율과 강선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놀이공원에 가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어느 날 현이가
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부름으로 사무실에 왔다가 벌써 10분째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의 눈빛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혹시 사모님과 다투신 건가? 아니면 또 두통 때문에...?’강지혁은 계속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내 곁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뭔지, 정말 몰라?”고이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철렁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진애령 사건 때문에 도저히 날 용서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내 곁을 떠난 거라고, 너나 한 집사나 두 사람 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네, 그랬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추측일 뿐입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사모님밖에 모르시니까요...”고이준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희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년 만에 돌아오시고 나서 진애령 씨 사건에 관해 얘기했을 때 사모님은 회장님을 다 용서했다고 하셨거든요.”“용서?”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조금만 살이 맞닿아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토까지 했는데 그게 과연 용서한 사람의 행동일까?용서했다고 한 말도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자신이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해외에 있는 요셉 선생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유진이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요셉은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로 특히 기억 관련해서는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회장님 설마...’“혹시 기억을 완전히 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강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의 기억은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돌아온 상태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세세한 기억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하지만 박 선생도 전에 말했다시피 갑자기 모든 기억을 다 찾으려고 하면 회장님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할 겁
소민아는 그런 그녀의 아부가 싫지 않았기에 이름이 알려진 뒤로 심심풀이용으로 하던 라이브에 문혜진을 포함한 상류층 사람들을 부르며 인기몰이를 했다. 다들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새벽에 연락해도 흔쾌히 나와주었다.부자들이 나오는 컨텐츠는 수요가 많았기에 소민아는 라이브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자신만의 작은 회사까지 차리며 계속해서 라이브로 수익을 벌어 들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매일같이 아부하며 스케줄을 물어보던 친구들은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고 라이브에 와주기로 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거절을 해왔다.그리고 이제는 제일 만만하고 항상 개처럼 따르던 문혜진조차도 그녀의 초대를 단칼에 거절해버렸다.강씨 가문의 안주인 후보가 아닌 소민아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옆에 있던 비서는 소민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럼 오늘 라이브는 어떻게...”“뭘 어떻게 해요? 지금 당장 스케줄 가능한 연예인 쪽으로 연락 돌리세요. 인기 없는 애들 말고 지금 한창 핫한 애들로요.”소민아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라이브 못할 줄 알아? 두고봐.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네, 알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소민아는 의자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화를 억누르다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앨범을 한번 훑어보았다.많고 많은 사진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한정판 드레스에 예쁜 루비 목걸이를 하고 강지혁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임유진의 사진이었다.해당 사진은 누군가가 SNS에 업데이트한 사진으로 소민아는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자신의 앨범에 저장했다.소민아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또다시 분노를 터트렸다.“드레스도 내가 먼저 고른 거고 루비 목걸이도 내가 먼저 발견한 건데 왜 다 이 여자한테 가 있는 거야!”임유진이 나타나기 전, 한창 사모님 기분을 내며 쇼핑하던 어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인데 뭐하러.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을 때 나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 있었어. 아침에 박 선생한테 연락해봤는데 큰 문제는 아니래. 그리고 일전에 박 선생이 처방해준 약도 아직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괜찮아.”임유진은 괜찮다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나 정말 괜찮아. 큰 상처도 아니고. 며칠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5년 전에 내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 정말 기억이 안 나?”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이었다.다른 기억은 다 돌아왔지만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만 마치 누가 잘라놓기라도 한 듯 아주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사실 기억을 찾고 싶은 건 강지혁뿐만이 아니라 임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절벽에서 그렇게 떨어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현이만 곁에 있었는지, 그리고 나머지 한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임유진은 손을 뻗어 강지혁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어젯밤에... 사실은 많이 아팠던 거지?”강지혁은 아주 잠시만 아팠다고 했지만 그랬다면 이런 깊은 상처들이 생겼을 리가 없다.“지금은 안 아파.”“만약 앞으로 또 통증이 찾아오면 내가 자고 있더라도 깨워.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하지 마.”임유진은 강지혁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속상했다.“나도 알아. 너 아플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 없다는 거. 하지만 우리는 부부잖아. 그때 혼인신고하고 나올 때 아플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함께 있자고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든 얘기해줘. 너 혼자 아파하지 마.”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유진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괴롭게 토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의 곁을 떠난 게 분명히 그럴
하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강지혁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 이제 안 아파.”“그래.”임유진은 안도한 듯 웃으며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왜? 뭐 할 말 있어?”강지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거 말이야. 정말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거 확실해?”“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리고 말했잖아.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임유진은 당시 절벽에서의 일을 얘기해 주면 강지혁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올까 봐 오늘도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너도 알다시피 난 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임유진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그럼 앞으로 내가 틈틈이 우리가 함께했을 때 얘기를 해줄게. 계속 듣다 보면 네 기억도 점점 돌아오게 될 거야.”“너는 내가 기억을 다 찾았으면 좋겠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당연하지. 하지만 내 바람이 그렇다고 괜히 조바심낼 필요는 없어. 나는 네 기억이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돌아왔으면 좋겠으니까.”‘천천히... 하지만 내 기억은 이미...’강지혁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손이 풀리자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막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여버렸다.강지혁은 재빠르게 임유진을 받아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고마...”임유진은 몸을 바로 세운 후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강지혁의 손등을 보고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고운 손에 시퍼런 멍이 한가득했기 때문이다.“너 손이 왜 이래?”임유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강지혁은 재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