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으로 인해 회사 건물 앞에는 현재 이상한 풍경이 펼쳐졌다.임유진은 나무 아래서 토를 하고 있었고 회사 경비원은 그런 그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며 강지혁은 멀지 않은 곳에서 그대로 멈춰선 채 무표정한 얼굴로 임유진이 토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그리고 고이준과 기사들, 그리고 몇몇 회사 임원들은 차례대로 강지혁의 뒤에 서 있었다.임유진은 더 이상 토할 것이 없어진 후에야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고개를 들고나서야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사람들의 시선을 가득 받으며 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리고 그 시선 중에는 강지혁의 시선도 있었다.강지혁은 오늘 검은색 정장 셋업에 안에는 차가운 컬러의 목티를 입고 있었다.옷 색깔 때문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차가워 보였다.임유진은 민망한 마음에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하지만 막 발걸음을 떼려고 보니 버스 정류장으로 가려면 강지혁을 지나쳐 가야만 했다.이에 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가방에서 티슈를 뽑아 입가를 닦은 다음 빠른 걸음으로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강지혁은 미동도 없이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시선을 계속해서 임유진을 쫓고 있었다.임유진은 그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머리를 더 푹 숙였다.그렇게 빠르게 강지혁을 지나쳐 가려는데 갑자기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웩...”임유진은 참지 못하고 또다시 허리를 숙인 채 토를 하기 시작했다.강지혁의 뒤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얼굴이 사색이 된 채 바라보았고 동시에 머릿속으로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이 여자는 곧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말이다.그도 그럴 것이 임유진은 강지혁의 앞에서 토한 것도 모자라 자기 토사물을 강지혁의 신발에 튀게까지 했다.하지만 다들 임유진을 안타깝게 생각할 때 고이준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그 이유는 아까 임유진이 참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을 때 강지혁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는데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강지혁은 확실히 임유진
임유진은 강지혁의 신발 위에 튀었던 토사물을 말끔히 처리한 후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이러면 될까?”그녀의 얼굴은 지금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혈색 하나 돌지 않는 것이 무척이나 유약해 보였다.강지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언짢음이 밀려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임유진은 한참을 기다려도 그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머쓱하게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그러고는 뒤에 있는 경비를 바라보며 말했다.“빗자루랑 쓰레받기 좀 빌려주실래요? 걸레도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청소해야 할 것 같아서요.”경비는 임유진의 말에 넋을 잃은 듯 계속 멍하니 있다가 고이준의 시선을 받고는 그제야 헐레벌떡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아, 네! 잠시만요.”그러고는 빠르게 다시 밖으로 나와 청소도구들을 임유진에게 건넸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토사물을 청소하기 시작했다.그리고 강지혁은 그런 그녀의 옆에 서서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임원들은 강지혁을 내버려 두고 먼저 갈 수는 없었기에 마찬가지로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임유진이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바닥을 쓸고 있는 임유진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환경미화원으로 일했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그때도 마른 편이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말라 있었고 바람이 불면 이대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쓰러지든, 각혈하든, 이제는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한다는 것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하지만 그의 시선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그녀를 쫓았다. 꼭 그의 시선은 원래부터 그녀만 향해야만 한다고 세팅된 사람처럼 말이다.강지혁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미간은 점점 더 세게 찌푸려졌다.강지혁의 바로 옆에 있던 고이준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그때 한창 청소를 하던 임유진의 발이 꼬이고 뭐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몸은 그대로
엘리베이터는 대표이사실 층에 멈췄다.문이 열리자 강지혁은 성큼성큼 발을 내디디며 임유진을 데리고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다.“이거 놔. 대체 왜 이러는 건데!”임유진이 소리를 쳤다.강지혁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몸 주위로는 위험하고 서늘한 기운마저 느껴졌다.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비서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일에 집중했다.그러다 강지혁이 임유진을 사무실 안까지 데리고 들어가고 나서야 깜짝 놀란 얼굴로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비서들은 임유진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한때는 임유진이라면 어쩌면 정말 강지혁과 결혼까지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이 그토록 관심을 쏟은 여자는 임유진이 처음이었으니까.하지만 어느 새부턴가 임유진이라는 이름은 회사의 금기어가 되어버렸다. 언젠가 한 번 비서 중 입이 가벼운 한 명이 무심결에 임유진의 이름을 꺼냈다가 그다음 날 바로 회사에서 잘린 적도 있었다.그 일이 있고 난 후, 고이준은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비서들에게 따로 주의까지 주었다.이에 비서들은 그제야 임유진과 강지혁이 완전히 헤어졌다고 확신하며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오늘, 두 번 다시 보게 되지 못할 것 같았던 여자의 얼굴이 또다시 이곳에 나타났다.대표이사실.“강지혁, 이것 좀 놓으...!”임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이 갑자기 손을 놓았다.그 반동에 임유진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가 다시 빠르게 중심을 잡았다.“당연히 놓을 거야.”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했다.“그 전에 하나 물어보자. 무릎까지 꿇으며 놔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대체 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는데?”무서운 기세로 압박하듯 다가오는 강지혁에 임유진은 숨을 헙하고 들이켜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그건... 우연이야. 일부러 네 앞에 나타난 거 아니야.”“하, 우연?”강지혁이 그녀의 말을 비
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의 머릿속으로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강현수에게 어릴 때의 여자아이가 자신이라고 얘기했지만 강현수는 믿지 않았다. 전에 너무나도 많이 아니라고 부인했으니까.그리고 그렇게 부인하게 만든 원인이 바로 지금 눈앞에 있다.임유진은 자조하듯 웃더니 이내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 입을 열었다.“강지혁, 나랑 강현수 사이의 일은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리고 나 너 찾아온 것도 아니야. 전에 분명히 확실하게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그 말에 강지혁의 눈이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임유진의 턱을 꽉 잡았다.“악!”임유진은 턱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강지혁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가더니 코가 거의 맞닿을 거리에서 멈췄다.“임유진.”강지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임유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한 번이라도 후회한 적 있어? 그때 나한테 놓아달라고 했던 말, 한 번이라도 후회한 적 있어?”임유진의 몸이 굳어버렸다.후회?만약 그때 강지혁의 앞에서 무릎 꿇고 놓아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두 사람은 지금쯤 전처럼 다시 사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 집에서 강지혁이 무릎을 꿇고 발등에 입을 맞추며 사랑을 속삭였을 때 임유진은 그에게 설레었고 가슴이 뛰었으니까.하지만 그렇게 다시 사귀게 됐다고 해도 두 사람은 여전히 같은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 것이다.“후회한 적 없어.”그 말이 끝나자마자 강지혁이 무서운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 어쩐지 오한이 서려 임유진은 몸을 움찔 떨었다.“그러면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때는 오늘처럼 이렇게 쉽게 넘어가 주지 않을 거니까!”강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대표이사실에 울려 퍼졌다....집으로 돌아온 임유진은 에너지를 다 뺏긴 사람처럼 소파에 축 늘어졌다.오늘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곽동현의 일, 배여진의 일, 강현수의 일, 그리고... 강지혁의 일, 하나하나가 무거운 돌덩이처럼 임유진의 머리에 쌓였다.강지혁
임유진은 서둘러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무슨 일인지 한지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뒤로 몇 통을 더 걸었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임유진은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왜 전화를 안 받지...?”임유진은 초조한 얼굴로 다시 포털사이트로 들어가 백연신에 관한 뉴스를 검색했다. 혹시 한지영과 관련된 뉴스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하지만 오직 백연신이 실종됐다는 얘기만 실려 있을 뿐 한지영에 관한 얘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백연신에 관한 기사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그도 그럴 것이 백연신은 연예인이 아닌 단지 재계 인물 중 한 명일 뿐이었으니까. 사람들의 이목을 확 끌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임유진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한지영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문자에 카톡, 그리고 DM까지 보냈다.하지만 연락이 닿을 만한 일은 뭐든 다 해봤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아무것도 없었다.“대체 어디 있는 거야, 지영아... 걱정되니까 제발, 제발 전화 좀 받아...”그때 임유진의 머릿속으로 누군가가 떠올랐다.한지영의 부모님.임유진은 아직 한지영 부모님의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있다. 감방살이하게 된 후로는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전화번호를 말이다.한지영의 부모는 임유진을 싫어했다. 한지영이 임유진 때문에 학업도 포기하고 귀국해서 작은 디자인 숍에 취직했으니까.임유진은 전화번호를 보고 잠깐 머뭇거리다가 결국에는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두어 번 가고 이내 멈추더니 전화기 너머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임유진은 이해영의 목소리에 잠깐 흠칫하다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아줌마. 저... 임유진이에요...”이해영은 임유진이라는 말을 듣더니 대뜸 화를 내기 시작했다.“임유진? 네가 염치가 있으면 나한테 전화를 하면 안 되지! 재수 없게 하필이면 이런 때...! 앞으로 우리 지영이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전화도 하지 마! 알겠니?!”말을 마친 이해영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임유진은 끊긴 전화를 보며 한숨
병원에 도착한 후 한지영이 확실히 병원에 실려 온 게 맞다는 것을 확인한 임유진은 완전히 굳어버렸다.크게 다쳐 응급실에 실려 왔다가 지금은 중환자실에 있으며 위험한 시기를 벗어나야만 일반 병실로 이실 될 수 있다고 한다.임유진은 간호사의 설명을 듣고는 눈앞이 다 깜깜해졌다.떨리는 다리를 애써 부여잡고 중환자실 쪽으로 가보자 이해영과 한종훈이 유리 벽에 기대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4년 만이었다.임유진은 4년 만에 한지영의 부모를 뵙는 곳이 설마 중환자실 앞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지영이는... 지영이는 지금... 어떤 상태인 거지? 괜찮은 거 맞나?’임유진은 한지영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고 싶으면서도 또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병상에 누워있는 한지영이 어떤 모습일지 차마 보기 두려웠다.하지만 그럼에도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몇 미터 안되는 거리인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다.잠시 후, 임유진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드디어 유리 벽 앞에 멈춰 섰다. 유리 벽 너머로 한지영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 나왔다.정말 한지영이 맞나...?머리에 두꺼운 붕대가 감긴 채 산소호흡기를 달고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사람이 정말 한지영이 맞나?병상 옆에 있는 기계 모니터 속에서 숫자가 움직이고 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죽은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S 시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무척이나 활기찬 모습이었는데, 돌아오면 맛집으로 가 맛있는 것도 먹고 백화점으로 가 쇼핑도 하자고 약속까지 했는데... 대체 왜 이런 꼴로 돌아온 걸까?백연신은 왜 실종된 거고 한지영은 왜 이렇게 크게 다친 걸까?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지영이가 왜...”임유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녀의 목소리에 한씨 부부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이해영은 시선 끝에 있는 임유진을 보더니 화풀이라도 하듯 큰소리로 외쳐댔다.“네가 왜 여기 있어? 내
한종훈은 말을 마친 후 임유진 쪽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지영이 상황이 어떤지 너도 이제 봤으니 이만 돌아가. 지금 우리 두 사람 모두 제정신이 아니라 험한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어. 물론 지영이가 이렇게 된 게 네 탓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네 얼굴을 보면 자꾸 그때 지영이가 너를 위해서 포기했던 것들이 생각나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구나.”“네, 잘... 알고 있어요.”임유진은 단 한 번도 한씨 부부를 원망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이 화를 내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임유진만 아니면 한지영은 학업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고 해외에서 발전하며 지금쯤 더 잘 나갔을지도 모르니까.그때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와 한씨 부부를 향해 말했다.“한지영 씨 보호자 되시죠?”“네.”“한지영 씨는 앞으로 두 번 정도 더 수술을 받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중환자실에서 당분간 경과를 지켜봐야 하고요. 입원비용과 중환자실 비용, 그리고 수술비용까지 합하면... 대략 2억 정도 될 거예요.”억대 병원비에 한씨 부부가 깜짝 놀랐다.2억이라니!일반 서민 가정에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돈이 아니었다.“그... 그렇게나 많습니까?”한종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자세한 건 의사 선생님 소견에 따라 다르겠지만... 2억은 최소한의 돈입니다. 이후 집중치료로 들어가면 더 많이 들지도 모르고요.”간호사가 떠난 후 한씨 부부는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어떡하죠? 2억이라니...”이해영이 손을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한지영 집의 자산으로는 턱도 없는 숫자였다. 여기저기 끌어다 모은다고 해봤자 1억도 채 되지 않는다.하지만 만약 병원비를 납부하지 못하게 되면 병원에서는 치료를 중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지영은 목숨만 간신히 붙어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사랑하는 딸이 그런 모습이 되는 걸 달가워할 부모는 없었다.한종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결심을 내린 듯 이해영을 바라보았다.“괜찮아. 정 안되면 집을 팔면
강현수에게 있어 2억이라는 돈은 보잘것없는 돈일지도 모르지만 한지영에게는 목숨값이다.임유진은 휴대폰을 꺼내 강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에 임유진은 재일 병원으로 달려가 강현수의 병실로 향했다. 하지만 병실 안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간호사에게 물어보니 강현수는 오늘 오후 퇴원 수속하고 나갔다고 한다.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어디로 가면 강현수를 만날 수 있지?그때 임유진의 머릿속으로 전에 강현수가 자신은 평소 본가가 아닌 개인별장에서 지낸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그리고 강현수의 개인별장은 이미 인터넷에 공개된 적이 있다.가십거리를 즐기는 사람들이 강현수의 집을 끈질기게 추적해서 자랑하듯 인터넷에 올린 탓에 말이다.물론 집 주소를 안다고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집은 아니었다. 최첨단 보안 시스템과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었으니까.임유진은 택시를 잡은 후 바로 강현수의 집 주소를 얘기했다.그러자 택시 기사가 그녀를 만류했다.“그거 강현수 집 주소죠? 혹시 아가씨도 강현수 그 남자 눈에 들어보겠다고 지금 이러는 거예요? 아서요. 내가 아가씨 같은 사람을 처음 보는 게 아니거든. 거기로 가봤자 경비원에게 바로 막혀버리고 말 거예요.”“출발해주세요.”임유진의 단호한 태도에 기사를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결국 차에 시동을 걸었다.가는 길, 기사는 운전하면서 전에 강현수의 별장으로 가달라고 했던 여자들을 많이 태워봤다며 그 여자들 모두 경비원 쪽에서 막혀 들어가지 못했다고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담을 넘어 들어가려던 사람들은 바로 경찰서에 연행되었다고도 했다.“왜 이렇게 다들 비이성적으로 구는지 모르겠네. 부자랑 결혼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현실적으로 가능한 꿈을 꿔야지. 강현수가 아무리 여자친구를 많이 사귀었다고 해도 그 눈에 일반인이 차겠냐고, 쯧쯧.”기사는 임유진이 강현수와 어떻게 해보려는 여자 중 한 명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한편 임유진은 머릿속이 온통 한지영이라 기사의 말 따위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
강지혁은 꼭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체 뭘?혹시 진기태와 연관이 있는 건가?아까 진기태는 분명...임유진은 순간 뭔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은 또다시 굳어졌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졌다.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정답인가 보네.’강지혁은 지금 진기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하긴 아까 엄청 세게 화를 내기는 했지.’강지혁은 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진기태를 협박했다.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건드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화 안 낼 거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정말...? 정말 화 안 내?”“응. 안 내.”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진 회장이 너 찾아온 거 진가원 프로젝트 때문이지? 네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이러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 사람 말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강지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인간이 했던 말, 정말 신경 안 써?”“응. 그때는 너도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잖아. 그때의 나는 그저 너한테 네 약혼녀를 차로 죽인 사람일 뿐이었어.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더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원망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사실 너랑 사귀고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됐던 순간부터 나는 그 일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웠어. 그리고 너도 그랬잖아. 만약 조금만 더 빨리 나를 알게 됐으면 절대 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그가 무서워하는 게 그저 그 이유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관한 것으로 여태 이렇게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
“지혁아, 아무리 그래도 너랑 우리랑은 사돈이 될 뻔했던 집안이잖냐. 그간의 정도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진기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진가원 프로젝트는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야. 너희가 가져가봤자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굳이 왜 그걸 가져가려고 해.”“진화 그룹도 이제는 슬슬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잔뜩 긴장한 진기태와 달리 그는 아주 여유롭다 못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우리 그간 사업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잘 이어왔잖아. 뭐 서운한 거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얘기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그럼 진화 그룹과 진화 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를 다 저한테로 넘기세요.”강지혁의 말에 진기태의 얼굴이 한순간에 변했다.모든 회사를 다 넘기라니, 그건 헐벗고 거지가 되라는 말과도 같았다.“너...!”진기태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설마...”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몇 초도 안 돼 아무리 강지혁이 미친놈이라고는 해도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멀쩡한 가문 하나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하지만 그거 말고는 강지혁이 갑자기 이러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임유진이 감옥에 간 일밖에 없으니까.“너 혹시... 임유진 때문은 아니지?”진기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강지혁은 아주 빠르게 인정했다.“허...!”진기태는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 하나 때문에 이런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하, 하지만 그 일은 그때 세령이가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일전 진세령은 임유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지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서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