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호는 붕대로 감싸져 있는 아들의 손가락을 보고는 혀를 찼다.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골절상을 입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그 여자를 찾을 수만 있다면 남은 손가락이 어떻게 되든, 심지어 손 하나가 부러져도 상관없어요.”“너!”강현수의 말에 강재호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이에 한은정이 그의 손을 잡아 분노를 잠재우고 아들을 향해 말했다.“너희 아버지 화나게 하지 마. 그리고 강지혁이 그 여자한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너는 그 흙탕물에 뛰어들고 싶니?”강지혁의 집안이 S 시에서 절대적인 존재는 맞지만 강현수의 집안도 꿀릴 건 없었다. 한은정은 강지혁의 집안과 마찰을 빚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러는 아들이 이해가 안 갈 뿐이다. 그것도 수년간 그토록 찾아 헤맨 여자아이도 아니고 이제 알고 지낸 지 1년도 채 안 된 여자를 말이다.솔직히 어렸을 때 강현수를 구해줬던 여자아이가 아니면 임유진의 자리를 대체할 사람은 많았다.멀리 갈 것도 없이 연예계에서 시선 한번 돌리면 널리고 널린 것이 미인들이다.그런데 왜 그 많은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필이면 강지혁의 여자를 탐내는 것일까.강현수는 한은정을 바라보며 그녀가 경악할 만할 얘기를 꺼냈다.“그 흙탕물에 뛰어들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미 임유진이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렸으니까요.”“뭐... 너 지금 뭐라고 했니?”한은정은 놀라움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이제껏 수많은 여자를 만나고도 좋아한다는 소리 한번 한 적 없는 강현수의 입에서 처음으로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저 임유진을 사랑해요. 그 여자가 아니고서는 안 되는 지경까지 와버렸습니다.”강현수는 단호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그러니 그 여자 옆에 있는 남자가 강지혁이라도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이미 강지혁에게 몇 번이고 양보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니 더 이상의 양
솔직히 눈 딱 감고 강지혁을 사랑하는 척해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렇게 하면 어쩌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척’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속일 거면 평생을 속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속았다는 것을 알아챈 그가 그때는 더 한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게다가 무엇보다 임유진 본인이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못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감정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저택 내부를 둘러보았다.저택은 무척이나 넓었고 위에는 다락방도 있었다. 마치 사극 드라마에서나 봤던 양반집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그리고 집 안에는 연꽃 모양의 물건들이 많이 놓여있었다.연꽃 모양의 도자기를 시작으로 나무 기둥과 벽에도 연꽃 그림이 있었고 가구에도 빠짐없이 연꽃이 그려져 있었다.심지어 뒷마당에는 연꽃이 피어있는 작은 연못도 있었다.연꽃이 필 계절은 이미 지났는데도 여기 있는 연꽃들은 너무 예쁘게 피어있어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집주인이 어지간히도 연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아니... 어쩌면 이곳에 갇혔던 여자가 연꽃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임유진도 연꽃을 좋아하고 있고 그 이유는 연꽃이 고귀함과 깨달음의 상징이라서이다.임유진은 구경을 마치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강지혁을 찾아다녔다.이 저택에 갇힌 것은 맞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런 제약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 즉 이 저택 안에서만큼은 그녀는 ‘자유’였다.긴 복도를 거닐던 그때 제일 끝쪽에 있는 방을 발견하고 임유진의 발걸음이 멈췄다.며칠 전 강지혁이 이 복도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본 적이 있다.방은 이것뿐이니 혹시 강지혁은 지금 이 방에 있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일단 가볍게 방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고 그녀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방안은 무척이나 깜깜하고 어두웠다.방은 크지 않았고 창문은 암막 커튼으로 전부 쳐져 있었다.그리고 방안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심플했다. 아니, 지나치게
“맞아. 그 두 사람이 널 찾으러 이곳에 온다고 해도 널 데려가지는 못해.”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고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이건 그녀의 것이 아니라 강지혁의 휴대폰이었다.다행히 임유진은 기억력이 좋았기에 한지영과 탁유미의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임유진은 먼저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지영은 전화기 너머로 임유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했다.“유진아, 너 지금 어디야?! 강지혁이 너 데려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강지혁 그 자식이 너한테 뭔 짓 한 거 아니지?! 그 개자식이 진짜! 이거 납치야, 납치! 범죄라고!”임유진은 한지영의 폭풍 욕설에 무척이나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전화를 걸기 전 강지혁은 그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하는 것을 요구했다. 즉 방금 한지영이 한 말을 강지혁이 전부 다 들었다는 소리였다.강지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눈길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임유진은 한지영의 말이 혹시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까 봐 서둘러 입을 열었다.“지영아, 나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그러니까 내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한 거야. 그리고 내가 유미 언니 양육권 소송 맡기로 했는데 지금은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말인데 만약 일주일 뒤에도 나한테서 연락이 없으면 그때는 백연신 씨한테 부탁해서 유미 언니한테 변호사 붙여줄 수 있어?”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이 다급하게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대체 어디 있는 건데! 일주일 뒤에 연락이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은 또 뭐고. 너 설마 지금 강지혁한테 감금이라도 당한 거야?”한지영의 연이은 질문에 임유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가 깊게 숨을 한번 들이견 후 최대한 침착하게 얘기했다.“지영아, 강지혁과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시간 날 때 유미 언니한테 신경 많이 써줘.”그 말을 끝으로 임유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그걸 본 강지혁이 그녀에
강지혁은 손을 내밀어 검을 꺼내 들었다.그 순간 임유진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저 거치대에 놓여있을 때와 달리 사람 손에 들리자 어쩐지 한층 더 오싹한 한기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전에 내가 너한테 얘기했지? 강씨 가문의 한 남자가 여자 한 명을 이곳에 가뒀다고. 그러다 그 여자가 자기를 가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됐다고. 하지만 그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야. 그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건 맞지만 이곳에서 그 남자를 찔렀어. 그래서 이 저택에서 나간 거야.”강지혁은 또다시 담담하게 얘기를 꺼냈다.임유진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 이야기에 이런 반전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전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 여자가 강씨 가문의 남자를 사랑하게 돼서, 그래서 남자와 함께 이곳을 떠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왜일까? 왜 찔렀을까? 자책감 때문에? 정혼자와 좋은 연인 관계였지만 결국 자기를 가둔 남자를 사랑하게 돼서? 그래서 그런 선택을 했던 건가?임유진은 다시 한번 검을 바라보았다.역시 날 위에 있는 검은색 반점은 녹이 슨 것이 아니었다.이건 남자를 찔렀을 당시 튀었던 피가 분명했다.“날에 피가 튄 것 때문에... 피의 방인 거야?”“그것 때문만이 아니야.”강지혁은 맞은편 벽으로 걸어가 검은색 천을 아래로 세게 끌어내렸다.그러자 천 뒤에 가려져 있던 벽이 임유진의 앞에 드러났다.이 벽은 다른 벽과 달랐다. 오랜 기간 그대로 방치되어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벽 위에는 이미 변색한 핏자국들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임유진은 순간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이 벽은 여전히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마치 오래된 증거처럼 그대로 남아 있었다.이 벽 때문에, 피 칠갑이 된 벽 때문에 이 방이 피의 방으로 불리게 된 걸까?“만약 너도 여기서 떠나고 싶으면 그 여자가 했던 것처럼 나를 찌르고 여기서 나가면 돼.”강지혁은 다시 임유진 쪽으로 걸어와 검의 손잡이 부분을 그녀 쪽으로 건넸다.“어떡할래?
임유진은 그의 말에 그저 끊임없이 뒷걸음질밖에 치지 못했다.다시 그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그의 확신이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강지혁은 남은 인생 전부를 걸겠다고 했다. 그러면 그녀는 무엇을 걸어야 하지?...탁유미는 한지영과의 통화로 그제야 강지혁이 임유진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어디로 사라졌는지, 언제 돌아오는지는 한지영도 몰랐다.다만 그녀의 말로는 임유진이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다는 건 적어도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지금은 이렇게밖에 얘기해 줄 게 없네요. 하지만 강지혁이 대체 유진이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계속해서 찾아볼 생각이에요. 그리고 언니, 소송 건은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유진이가 일주일 뒤에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때는 연신 씨한테 변호사 부탁해 볼게요.”“미안해요. 유진 씨 일도 있는데 괜히 내 일까지...”탁유미는 감사하기도 하면서 미안하기도 했다.“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요. 언니랑 윤이가 아무 일도 없으면 그거로 된 거예요.”한지영은 그녀를 안심시킨 후 전화를 끊었다.오후가 되고, 탁유미는 윤이를 데리러 유치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그녀의 머릿속은 임유진의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지혁이라는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일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생일날 헤어짐을 고하고는 얼마 안 가 다시 임유진에게 사랑을 갈구했다. 임유진은 그와 헤어진 뒤 많이 힘들어했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기도 벅차 보였다.그랬던 임유진인데 과연 지금 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그리고 몇 번이나 거절한 남자에게 데려가 졌는데 정말 전화 통화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정말 괜찮은 걸까?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유치원 입구였다. 탁유미는 서둘러 옷가지를 정돈하고 머리도 흐트러지지 않게 정리했다.매번 그녀는 윤이를 데리러 올 때 자신의 외모를 점검하곤 했다. 윤이에게 창피한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또래 엄마들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쁘게 꾸미지는 못하지만 적
“윤이 보러 왔어. 내 아들이잖아.”이경빈은 담담하게 말했다.탁유미는 지금 상당히 마음이 복잡했다.그녀가 낳은 아이는 필요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윤이가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반박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윤이 앞에서 다투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 탁유미는 속으로 화를 삼켰다.“윤아. 이제 집으로 가자.”그녀는 금방 일하러 가야 했기에 빨리 윤이를 엄마에게 데려다줘야 했다.“하지만 오늘은 아빠가 데려다준다고 했어요.”윤이의 말에 탁유미가 안된다고 하려는 찰나 이경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는 아빠가 데려다주는 게 좋아?”“네, 좋아요.”윤이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탁유미는 행복해 보이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는 결국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켜버렸다.그때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들이 전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양복 차림으로 멋을 낸 이경빈에 비하면 탁유미는 볼품없기 그지없었다. 고작 옷차림에서도 두 사람은 마치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탁유미는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이 싫었다. 이런 감정이 생긴 건 정확히 출소하고 나서부터였다. 윤이가 있었기에 옥살이한 경력이 있다는 것을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그럼 이만 갈까?”탁유미는 고개를 숙인 채 다급하게 말했다.이경빈은 그런 그녀를 힐끔 보더니 윤이를 품에 끌어안고 유치원 근처 주차장으로 향했다.기사는 세 사람을 발견하고는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이경빈은 윤이를 안은 채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탁유미는 타려다가 멈칫했다.“뭐해? 빨리 타.”이경빈의 말에 탁유미는 깊게 한번 숨을 들이켠 후 차량에 올라탔다.그와 단둘이라면 무척이나 어색했겠지만 다행히도 두 사람 사이에는 윤이가 있었다.윤이는 차에 앉은 순간부터 흥분 상태였다. 아이는 고개를 오른쪽 왼쪽으로 돌리며 탁유미를 한번 보고는 또다시 이경빈을 한번 보기를 반복했다.엄마와 아빠가 양옆에 있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한 모양이었다.“엄마, 아빠 정
“응, 지금 윤이 옆에 있는 사람 정말 윤이 아빠 맞아.”탁유미는 윤이에게 언젠가는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는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윤이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그때 다시 얘기해주려고 했었다.“왜 아빠는 이제야 하늘에서 내려온 거예요?”윤이는 이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이경빈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기침을 내뱉고는 탁유미를 힐끔 노려보았다.탁유미도 윤이가 설마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지 차마 이경빈 쪽을 보지 못했다.“아빠가 전에는 윤이가 있는 줄 몰라서 윤이 찾으러 못 왔던 거야.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제는 윤이 보러 자주 올 거야.”그는 차갑고 매정한 인간이지만 자기 핏줄 앞에서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솔직히 이경빈 본인도 자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이경빈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아이의 귀를 바라보았다.매번 윤이의 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다.이경빈의 아들이 장애라니.처음부터 원했던 아들은 아니지만 이경빈의 핏줄로 태어난 이상 윤이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줄 생각이다.윤이에게는 그 어떤 차별도 용납이 되지 않고 윤이는 모든 이가 떠받들어야 할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그럼 아빠 나 목마 태워줄 수 있어요?”윤이는 이경빈을 향해 활짝 웃으며 물었다.탁유미와 닮은 아이의 눈동자에는 갈망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윤이는 줄곧 아빠가 목마 태워주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탁유미에게도 목마 태워달라고 얘기해본 적 있지만 역시 아빠가 태워주기를 더 바랐다.지난번 곽동현이 목마를 태워줬을 때 윤이는 너무나도 기뻤다. 그래서 만약 자신에게도 아빠가 존재했으면 아마 이렇게 목마를 태워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그리고 지금 그토록 원하던 아빠가 바로 눈앞에 있다.이경빈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있어 생소한 부탁이 아닐 수 없었다.순간 부자간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그러니까... 윤이를 네 목에 태워주면 돼.”
윤이는 까르륵 웃으며 이 순간을 즐겼다.탁유미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윤이는 지금 정말 즐거워 보였다.윤이는 내성적인 아이라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보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아예 뒤로 숨어버리고 마음을 연 사람 앞에서만 활발해진다.그러나 지금처럼 흥분한 모습은 극히 드물었다.이경빈은 양복 차림으로 아이를 목에 태웠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다정함이 흘러나왔다.그는 윤이의 지시에 따라 오른쪽으로 움직이다가 또 왼쪽으로 움직였다.평소 냉랭하기 그지없는 이강 그룹 대표가 이런 이면이 있다는 것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탁유미는 순간 코가 시큰거렸다.부자 사이에도 연이 있는 것일까?이제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윤이가 4살이 될 때까지 이경빈은 한 번도 아이의 인생에 나타난 적이 없지만 윤이는 이경빈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였다.핏줄은 결국 핏줄이었다.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탁유미가 윤이를 향해 말했다.“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할머니 기다리시겠다.”윤이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이경빈의 목에서 내려왔다.아이를 탁유미에게 넘길 때 이경빈은 다시 원래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왔다.그걸 보고 탁유미는 쓰게 웃었다.그가 그녀에게 주는 건 언제나 이런 쌀쌀함과 냉랭함 뿐이었다.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그를 향한 감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윤이에게만 다정하면 되니까.탁유미는 아들을 데리고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윤이는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 이경빈을 바라보았다.“엄마, 아빠는 우리랑 같이 안 살아요?”아이가 물었다.윤이가 본 대부분의 아빠 엄마들은 모두 같은 집에 살았으니까.“응... 엄마랑 아빠는 오래전에 헤어졌어. 그래서... 같이 못 살아.”탁유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솔직히 얘기해주었다.그러자 윤이의 입에서 생각도 못 한 말이 튀어나왔다.“그럼 엄마랑 아빠는 이혼한 거예요?”“이혼?”탁유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정우네 엄마 아빠는 이혼했어요. 그래서 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