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그의 말에 그저 끊임없이 뒷걸음질밖에 치지 못했다.다시 그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그의 확신이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강지혁은 남은 인생 전부를 걸겠다고 했다. 그러면 그녀는 무엇을 걸어야 하지?...탁유미는 한지영과의 통화로 그제야 강지혁이 임유진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어디로 사라졌는지, 언제 돌아오는지는 한지영도 몰랐다.다만 그녀의 말로는 임유진이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다는 건 적어도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지금은 이렇게밖에 얘기해 줄 게 없네요. 하지만 강지혁이 대체 유진이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계속해서 찾아볼 생각이에요. 그리고 언니, 소송 건은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유진이가 일주일 뒤에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때는 연신 씨한테 변호사 부탁해 볼게요.”“미안해요. 유진 씨 일도 있는데 괜히 내 일까지...”탁유미는 감사하기도 하면서 미안하기도 했다.“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요. 언니랑 윤이가 아무 일도 없으면 그거로 된 거예요.”한지영은 그녀를 안심시킨 후 전화를 끊었다.오후가 되고, 탁유미는 윤이를 데리러 유치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그녀의 머릿속은 임유진의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지혁이라는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일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생일날 헤어짐을 고하고는 얼마 안 가 다시 임유진에게 사랑을 갈구했다. 임유진은 그와 헤어진 뒤 많이 힘들어했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기도 벅차 보였다.그랬던 임유진인데 과연 지금 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그리고 몇 번이나 거절한 남자에게 데려가 졌는데 정말 전화 통화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정말 괜찮은 걸까?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유치원 입구였다. 탁유미는 서둘러 옷가지를 정돈하고 머리도 흐트러지지 않게 정리했다.매번 그녀는 윤이를 데리러 올 때 자신의 외모를 점검하곤 했다. 윤이에게 창피한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또래 엄마들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쁘게 꾸미지는 못하지만 적
“윤이 보러 왔어. 내 아들이잖아.”이경빈은 담담하게 말했다.탁유미는 지금 상당히 마음이 복잡했다.그녀가 낳은 아이는 필요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윤이가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반박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윤이 앞에서 다투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 탁유미는 속으로 화를 삼켰다.“윤아. 이제 집으로 가자.”그녀는 금방 일하러 가야 했기에 빨리 윤이를 엄마에게 데려다줘야 했다.“하지만 오늘은 아빠가 데려다준다고 했어요.”윤이의 말에 탁유미가 안된다고 하려는 찰나 이경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는 아빠가 데려다주는 게 좋아?”“네, 좋아요.”윤이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탁유미는 행복해 보이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는 결국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켜버렸다.그때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들이 전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양복 차림으로 멋을 낸 이경빈에 비하면 탁유미는 볼품없기 그지없었다. 고작 옷차림에서도 두 사람은 마치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탁유미는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이 싫었다. 이런 감정이 생긴 건 정확히 출소하고 나서부터였다. 윤이가 있었기에 옥살이한 경력이 있다는 것을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그럼 이만 갈까?”탁유미는 고개를 숙인 채 다급하게 말했다.이경빈은 그런 그녀를 힐끔 보더니 윤이를 품에 끌어안고 유치원 근처 주차장으로 향했다.기사는 세 사람을 발견하고는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이경빈은 윤이를 안은 채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탁유미는 타려다가 멈칫했다.“뭐해? 빨리 타.”이경빈의 말에 탁유미는 깊게 한번 숨을 들이켠 후 차량에 올라탔다.그와 단둘이라면 무척이나 어색했겠지만 다행히도 두 사람 사이에는 윤이가 있었다.윤이는 차에 앉은 순간부터 흥분 상태였다. 아이는 고개를 오른쪽 왼쪽으로 돌리며 탁유미를 한번 보고는 또다시 이경빈을 한번 보기를 반복했다.엄마와 아빠가 양옆에 있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한 모양이었다.“엄마, 아빠 정
“응, 지금 윤이 옆에 있는 사람 정말 윤이 아빠 맞아.”탁유미는 윤이에게 언젠가는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는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윤이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그때 다시 얘기해주려고 했었다.“왜 아빠는 이제야 하늘에서 내려온 거예요?”윤이는 이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이경빈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기침을 내뱉고는 탁유미를 힐끔 노려보았다.탁유미도 윤이가 설마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지 차마 이경빈 쪽을 보지 못했다.“아빠가 전에는 윤이가 있는 줄 몰라서 윤이 찾으러 못 왔던 거야.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제는 윤이 보러 자주 올 거야.”그는 차갑고 매정한 인간이지만 자기 핏줄 앞에서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솔직히 이경빈 본인도 자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이경빈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아이의 귀를 바라보았다.매번 윤이의 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다.이경빈의 아들이 장애라니.처음부터 원했던 아들은 아니지만 이경빈의 핏줄로 태어난 이상 윤이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줄 생각이다.윤이에게는 그 어떤 차별도 용납이 되지 않고 윤이는 모든 이가 떠받들어야 할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그럼 아빠 나 목마 태워줄 수 있어요?”윤이는 이경빈을 향해 활짝 웃으며 물었다.탁유미와 닮은 아이의 눈동자에는 갈망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윤이는 줄곧 아빠가 목마 태워주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탁유미에게도 목마 태워달라고 얘기해본 적 있지만 역시 아빠가 태워주기를 더 바랐다.지난번 곽동현이 목마를 태워줬을 때 윤이는 너무나도 기뻤다. 그래서 만약 자신에게도 아빠가 존재했으면 아마 이렇게 목마를 태워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그리고 지금 그토록 원하던 아빠가 바로 눈앞에 있다.이경빈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있어 생소한 부탁이 아닐 수 없었다.순간 부자간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그러니까... 윤이를 네 목에 태워주면 돼.”
윤이는 까르륵 웃으며 이 순간을 즐겼다.탁유미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윤이는 지금 정말 즐거워 보였다.윤이는 내성적인 아이라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보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아예 뒤로 숨어버리고 마음을 연 사람 앞에서만 활발해진다.그러나 지금처럼 흥분한 모습은 극히 드물었다.이경빈은 양복 차림으로 아이를 목에 태웠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다정함이 흘러나왔다.그는 윤이의 지시에 따라 오른쪽으로 움직이다가 또 왼쪽으로 움직였다.평소 냉랭하기 그지없는 이강 그룹 대표가 이런 이면이 있다는 것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탁유미는 순간 코가 시큰거렸다.부자 사이에도 연이 있는 것일까?이제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윤이가 4살이 될 때까지 이경빈은 한 번도 아이의 인생에 나타난 적이 없지만 윤이는 이경빈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였다.핏줄은 결국 핏줄이었다.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탁유미가 윤이를 향해 말했다.“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할머니 기다리시겠다.”윤이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이경빈의 목에서 내려왔다.아이를 탁유미에게 넘길 때 이경빈은 다시 원래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왔다.그걸 보고 탁유미는 쓰게 웃었다.그가 그녀에게 주는 건 언제나 이런 쌀쌀함과 냉랭함 뿐이었다.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그를 향한 감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윤이에게만 다정하면 되니까.탁유미는 아들을 데리고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윤이는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 이경빈을 바라보았다.“엄마, 아빠는 우리랑 같이 안 살아요?”아이가 물었다.윤이가 본 대부분의 아빠 엄마들은 모두 같은 집에 살았으니까.“응... 엄마랑 아빠는 오래전에 헤어졌어. 그래서... 같이 못 살아.”탁유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솔직히 얘기해주었다.그러자 윤이의 입에서 생각도 못 한 말이 튀어나왔다.“그럼 엄마랑 아빠는 이혼한 거예요?”“이혼?”탁유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정우네 엄마 아빠는 이혼했어요. 그래서 정우
그저 한 여자가 옛사랑을 잊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사랑과 배신이 있는 그런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하지만 오늘 이 이야기의 진짜 결말을 듣게 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그 여자는 자신을 가둔 남자를 결국 사랑하게 됐으면서 왜 그를 찌르는 선택을 했던 걸까.사랑이라는 감정은 느꼈지만 그 감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걸까?정혼자를 버리고 사랑한 게 고작 자신을 가둔 남자라서?그 여자는 그 후 어떻게 됐을까? 이 저택에서 나가고 난 뒤 다시 옛사랑을 찾아갔을까?아니면 홀로 인생을 마감했을까?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뒷이야기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호기심 가득할 나이는 이미 지났을 텐데 강지혁이 들려준 이야기 속의 여자는 너무나도 궁금했다.동병상련이라서 일까? 지금 자신도 이 저택에 갇혀 있는 신세라 그래서 궁금한 걸까?임유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 쪽으로 간 다음 커튼을 열었다.그녀의 방에서는 뒷마당의 연못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연꽃으로 가득한 연못은 낮에는 따뜻한 햇볕 때문에 예뻤고 저녁에는 달빛 때문에 예뻤다.하지만 지금 그 예쁜 연못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고 그 누군가는 연못에 있는 연꽃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달빛이 강지혁의 몸에 드리워지자 어쩐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벌써 새벽 1시간 넘어가는데 대체 강지혁은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임유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이대로 다시 커튼을 닫고 침대로 돌아가야 하는데 도무지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그때 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강지혁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똑같이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은은한 달빛이 그의 얼굴에 내리자 차가운 인상이 조금은 부드러워 보였고 낮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그의 이마에는 자연스럽게 앞머리가 내려졌고 뚜렷한 눈썹 아래에는 예쁘다는 말로는 형용이 안 될 두 눈동자가 있었다. 그리고 오뚝한
강지혁이 서 있는 자세가 아까 커튼을 닫았을 때 마지막으로 봤던 자세와 똑같았다.그는 2시간이 넘도록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계속 그녀가 있는 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임유진은 순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빠르게 방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우산이 어디 있는지 몰라 헤매다 눈에 보이는 담요를 들고 머리에 쓴 채 비를 뚫고 연못으로 향했다.담요를 썼다고는 하지만 머리 부분만 가려질 뿐 팔과 다리는 여전히 비를 맞고 있었다.차가운 물방울들이 피부를 때렸다.임유진은 서둘러 강지혁 앞까지 다가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말을 내뱉었다.“비 오는데 여기 왜 서 있어. 빨리 집으로 들어가자.”하지만 강지혁은 망부석처럼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왜 나왔어?”그의 목소리가 비를 뚫고 들려왔다.강지혁의 몸은 비로 다 젖어있었고 머리는 물론이고 얼굴까지 물방울들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오로지 임유진만 보고 있었다.“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임유진은 그를 집 안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고집스러운 그의 발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왜 나왔냐고 묻잖아.”강지혁은 방금 했던 질문을 다시 건넸다.임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그럼 네가 이렇게 계속 비 맞고 있는 거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내가 비 맞고 있어서 속상해?”“...”임유진은 그를 노려보았다.비는 점점 더 거세졌고 강지혁은 언제 온 건지도 모를 비를 이미 잔뜩 맞았으니 이대로 가다가 정말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주변에는 온통 빗소리뿐이었다.임유진은 몇 분 후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 속상했다고 쳐. 이제 들어갈 거야?”강지혁이 정말 아프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특히 이 저택에는 단둘밖에 없으니 만약 강지혁이 아프면 병간호는 오로지 그녀의 몫이 된다. 그러면 곤란하다. 그러니 속상한 게 아니라 곤란할까 봐 이러는 것이다.임유진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이런 생각들을 되뇌었다.하지만 정말 속상하지 않은 걸까?마음속 깊
임유진은 강지혁이 샤워할 동안 그의 방 안에서 기다렸다.기다리지 않으려 해도 어차피 이 저택은 그의 것이고 그녀가 갈 곳이라고는 그녀의 방밖에 없으니 따로 도망칠 공간도 없었다.그러니 괜히 힘 뺄 필요가 없다.강지혁의 방은 그녀의 방과 크기가 비슷했다. 가구 역시 나무색으로 되어 있었다. 다만 그의 방 한 벽면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이 벽도 설마 ‘피의 방’처럼 피로 물들어 있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소름이 돋은 채로 벽을 향해 다가갔다. 무서운 마음도 있었지만 솔직히 열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인테리어용일 지도 모른다.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샤워를 마친 강지혁이 안에서 걸어서 나왔다.그는 허리춤에 타올 하나만 달랑 두르고 있었고 그 덕에 근육질의 다부진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그리고 그의 두 눈은 나오자마자 임유진을 쫓았다.임유진은 순간 포식자 앞에 선 소동물이 된 느낌이 들었다.강지혁은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향해 다가왔고 임유진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발이 뭔가에 걸려 몸 전체가 뒤로 넘어가게 되었다.“꺄!”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는 본능적으로 옆에 있는 커튼을 아래로 끌어내렸다.커튼이 아래로 흘러내린 동시에 강지혁의 팔이 넘어지는 그녀의 몸을 덥석 받아냈다.임유진과 강지혁의 두 눈이 마주쳤다.“고... 마워.”깜짝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후 그녀는 어색하게 몸을 바로 세우며 그의 시선을 피하고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그러다 옆에 있는 벽을 보는 순간 다시 몸이 굳어버렸다. 임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서히 나머지 커튼도 열어젖혔다.벽에는 사진들이 빼곡히 붙여져 있었고 그 사진 속의 주인공은 오직 한 사람, 임유진이었다.“내 사진이 왜...”“왜 저기 붙어 있냐고?”강지혁은 그녀 대신 말을 이으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임유진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임유진은 그의 시선을 받고는 목이 타며 입술이 바싹 말라왔다.강지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 이렇게 임유진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임유진은 그가 기댄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지금 몸무게의 절반 정도 되는 무게를 전부 다 그녀의 어깨에 실었다.강지혁은 마치 피곤이 극에 달한 사람처럼 어디 편히 기댈 곳을 찾고 있는 듯했다. 잠깐이어도 좋으니 기대기만 해도 좋다는 것처럼 말이다.그리고 임유진은 지금 그의 기댈 곳이 되었고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을 통틀어 그녀가 유일한 기댈 곳인 것 같았다. 만약 이대로 그를 밀어내면 강지혁은 망망대해에 버려진 아이처럼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세상에.임유진은 자기가 생각하고도 말도 안 된다며 스스로를 비웃었다.강지혁의 유일한 기댈 곳이 그녀일 리가 없다. 지금 그는 단지 피곤함 때문에 이러는 것뿐이다.“그럼 쉬어. 나는 이만 방으로 돌아갈게.”임유진은 천천히 그를 밀어내고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막 한걸음 내디디려는 찰나 갑자기 몸이 뒤로 넘어가더니 강지혁에 의해 순식간에 침대와 그의 몸 사이에 갇혀버렸다.“이거 놔!”임유진이 화들짝 놀라 서둘러 그를 밀어냈지만 강지혁은 그럴수록 더 세게 안아왔다.“아무 짓도 안 해. 그냥... 이렇게 안고만 있을게.”강지혁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은 채 그녀의 숨결과 체온을 느꼈다.이렇게 해야만 비어있는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고 나아가 안심하고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자신을 강제로 취하기라도 할까 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의 말대로 그저 꼭 끌어안고 있기만 했다.다만 지금 그의 두 팔은 마치 애착 인형이라도 품에 끌어안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를 다시 밀어내보려고도 생각해봤지만 그랬다가는 그가 정말 어떻게 할지도 몰라 임유진은 그저 그의 품에 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그녀의 몸은 여전히 굳어 있었고 두 손은 강지혁의 가슴팍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까 샤워하고 나온 뒤 그가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내가... 그렇게도 싫어?”이경빈은 속으로 그녀가 아니라고 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의 귓가에 들려온 말은...“응. 더 이상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만약... 그날 내가 너를 병원으로 끌고 가지 않고 너를 공수진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시키지 않았으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었을까? 너한테 용서를 빌 기회가 있었을까...?”잔뜩 잠긴 그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하지만 탁유미의 얼굴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네가 겪은 수모와 고통... 내가 돌려받을게. 내가 다 돌려받을 테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 아니, 최소한 내 간을 거절하지는 말아줘!”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차가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탁유미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내려다보았다.설마 이경빈이 이렇게도 쉽게 무릎을 꿇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사람들이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 밖에서 말이다.하지만 이내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이경빈이 무릎을 꿇은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기 때문이다.한 번, 두 번, 세 번....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주민들은 두 사람 근처를 지나가다가 이경빈이 머리를 조아린 것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추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탁유미는 아직도 머리를 조아리는 이경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솔직히 놀랍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처럼 자존심이 강한 남자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는 아니니까.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것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얼마나 세게 머리를 박은 건지 처음에는 그저 이마 쪽에 스치듯 껍질이 까지기만 했는데 이제는 슬슬 피가 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기까지 했다.탁유미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이런다고 내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아. 나한테 정말 미안하다면
그 모든 것들이 다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당시의 이경빈은 몰랐다.“유미야, 사랑해.”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는 드디어 줄곧 마음속에 품어왔던 마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탁유미는 힘껏 반항하다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마치 인형처럼 그의 품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에 이경빈은 더욱더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마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사랑해. 줄곧 사랑하고 있었어. 이제야 전해서 미안해. 그때 네가 유리 파편을 네 복부에 찔러넣었을 때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어. 피를 흘리는 게 네가 아닌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너무 무서웠어.”사실 그는 그때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어야 했다.“복수 때문에 눈이 멀어서 너를 향한 내 마음이 얼마나 큰지 몰랐어. 앞으로는 잘할게. 내 모든 걸 걸고 너를 지켜줄게! 네 억울함도 풀어주고 내 간도 너한테 줄게! 한 번으로 안 된다면 될 때까지 너한테 간을 기증할게!”이경빈은 탁유미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멀쩡하게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해주고 싶었다.탁유미는 간 얘기에 조금 흠칫했다.‘...다 알고 온 거네.’사실 그녀도 이경빈에게 희망을 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면 이라는 기대를 아주 조금은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으로 그건 잘못된 기대고 잘못된 희망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나 이제 너 안 사랑해.”차가운 목소리가 이경빈의 귓가에 들려왔다.그 말을 듣는 순간 이경빈은 온몸이 굳어지며 심장 고동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경빈, 나 너 안 사랑해.”탁유미는 두 손으로 이경빈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이경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은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너는 그때 복수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척했어. 그리고 지금은 네 목숨을 구해줬다고 또다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어. 네 기분 하나로 쉽게 바뀔 사랑을 내가 원할 거라고 생각해?”이경빈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했다.“아니야...
탁유미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경빈의 모습이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모든 걸 망쳐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날 때려도 돼. 욕해도 돼. 벌을 줘도 돼. 네가 주는 벌이라면 달갑게 받을게. 과거의 내 행동과 언행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나한테 그럴 기회를 줘. 그리고 널 곁에서 지켜주줄 수 있는 기회도...”“그만!”탁유미가 이경빈의 말을 끊었다.“이경빈, 네가 인간이면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공수진을 밀지 않았다고 내가 몇백 번을 말했는데도 너는 결국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 들어주려고 하지도 않았지.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골수를 기증해준 게 공수진이 아닌 나라는 걸 알아서야. 만약 널 구한 게 정말 공수진이었으면 너는 지금도 여전히 나한테 죄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잖아. 내 말이 틀려?”이경빈은 그 말에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이경빈,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야. 나한테 사과라도 해야 네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아? 난 너 용서 안 해. 네가 날 감옥에 보낸 것도 그 일로 감옥에서 감기에 걸려 어쩔 수 없이 감기약을 먹어 윤이가 청력을 잃은 것도, 나는 용서할 생각이 없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은 휘청이며 옆에 있는 벽을 짚었다.당시 그녀를 감옥에 보낸 건 그에게는 그저 간단한 복수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고난의 시작이었다.게다가 그 일 때문에 윤이의 청력이 사라진 거라니...‘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보상하겠다고 했지? 아니, 넌 보상 못 해.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하는 사과도 나한테는 그저 역겨울 뿐이야!”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그를 지나쳐 빠르게 걸어갔다.하지만 얼마 못 가 이경빈에게 팔이 잡혀 그대로 그의 품속에 안기고 말았다.탁유미는 그의 냄새가 코를 확 덮치는 순간 마치 그에게 꽁꽁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놓아
지금의 그는 탁유미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를 몰랐다....탁유미는 김수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후 강지혁이 붙여준 경호원 두 명에게 집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이만 가봐도 된다고 했다.작은 집이라 건장한 남성 두 명까지 들이게 되면 집이 꽉 찰 테니까.경호원 두 명이 떠난 후 김수영은 창밖을 힐끔 바라보았다.“저거 설마...”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이경빈의 차량에 미간을 찌푸렸다.“저거 이경빈 차 아니야? 기어이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엄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여기서 밤을 새우든 말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요.”탁유미의 태도는 무척이나 태연했다.“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 갑자기 왜 저래? 뭐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김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공수진이 유산한 게 네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해도 사과하려고 이렇게까지 할 인간은 아니잖아.”공수진 일은 비단 인터넷에서만 뜨거운 일이 아니었기에 가십거리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김수영도 공수진과 주원호 일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되었다.“그것도 그거지만 아마 몇 년 전에 골수를 기증해준 게 나라는 걸 알게 돼서 저러는 걸 거예요.”“뭐?!”김수영은 그 말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이경빈이었어? 네가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너한테서 받을 건 다 받아놓고 간 기증 좀 해달라니까 딱 잘라 거절한 인간이 쟤라고? 뭐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이 다 있어?!”김수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이경빈에게 따지려는 듯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엄마!”그러자 탁유미가 서둘러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난 괜찮으니까 그러지 마세요. 기증하겠다고 한 건 나예요.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요. 이경빈이 간 기증을 거절했다고 한들 배신감이 들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간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꼭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수술을 받고 또다시 재발해 수명이 오히려 단축된 케이스도 많아요.”탁유
이경빈은 이제야 그날 탁유미가 웃으며 고맙다고 했던 말의 의미가 뭔지 알아챘다.아주 조금의 감정마저 남지 않게 만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하고 그로 인해 그를 완전히 내려놓게 된 게 틀림없었다.정말 그는 너무나도 멍청한 사람이었다!차량이 멈춘 후 기사는 이경빈에게 도착했다고 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대표님, 입술에 피가...!”이경빈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더니 기사의 시선을 따라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얼마나 세게 깨물었던 건지 입술에 피가 흥건했다.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으로 피를 닦아내더니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입원 병동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탁유미와 김수영, 그리고 일전 그녀의 병실을 지켰던 경호원 두 명이 함께 병동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경호원들의 손에 짐이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퇴원하려는 것 같았다.이경빈은 서둘러 그들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에게 물었다.“퇴원하려고? 벌써?”탁유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경호원들이 빠르게 그를 제지했다.탁유미는 이경빈의 얼굴을 보고는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그날 알아듣게 얘기한 것 같은데 왜 또 여기 있는 거야?’“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비켜.”“하지만 네 몸은 아직 입원해있는 게...!”이경빈은 말을 끝까지 하려다가 멈칫했다.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안색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 이 이상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녀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며칠 더 입원해있는 게 좋지 않을까? 치료도 안 끝났을 것 같은데.”이경빈은 억지로 말을 끝마쳤다.“필요 없어. 내 몸이 어떤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탁유미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후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잘 안다고? 그런 사람이 이렇게 빨리 퇴원하려고 해? 너 정말 이대로 죽고 싶기라도 한 거야?!”이경빈이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으려 하자 경호원들이 더 빨리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탁유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 의아한 눈으로 이경빈을 바라보더니 이내
철썩.둔탁한 마찰음 소리에 공수진은 휘청거리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옆으로 힘껏 돌아간 그녀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그대로 나 있었다.하지만 공수진은 아픔을 못 느끼는 건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그 여자 결백을 찾아주고 싶지?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을 거야. 네가 찾아주기도 전에 저세상으로 가버릴 테니까!”이경빈은 그 말에 눈을 부릅뜨고 공수진을 노려보았다.“유미가 병에 걸린 걸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공수진은 이경빈의 얼굴을 보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하하하하. 이경빈 너 진짜 등신이구나? 너 정말 그 여자 좋아하는 거 맞아? 그런데 어떻게 나보다 더 몰라?”그녀의 말대로 이경빈은 등신이 맞다. 누가 진정한 은인인지도 모르는데 등신이 아니고 뭘까?그래서 지금 벌을 받는 것이다. 멍청했던 대가를 이제야 받고 있는 것이다.“그래, 나 등신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너희 집안은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공수진의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성큼성큼 차로 다가갔다.공수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외쳐댔다.“이경빈, 탁유미가 죽는 날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내가 꼭 지켜볼 거야! 네가 어떤 말로는 맞이하는...”탁.이경빈은 평소보다 세게 차 문을 닫으며 공수진의 목소리를 차단했다.그는 천천히 눈을 감은 후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병원으로 가지.”“네, 대표님.”차량에 시동이 걸리자 그는 시트에 등을 기댔다.“간암 3기예요. 현재로서는 간이식 수술을 받는 것밖에 언니 목숨을 살릴 길이 없어요. 만약 언니한테 사죄하고 싶다면 언니한테 이경빈 씨 간 일부를 기증해주세요.”임유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간 일부를 기증하라고? 탁유미를 위해서라면 그는 간 전부를 기증할 수도 있다.간암 3기가 어떤 상태인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경빈은 알고 있다.그간 탁유미가 보였던 고통을 참는 듯한 증상은 모두 간에 암이 퍼지고 있는 신호였다.
공한철은 이경빈의 기에 눌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경빈 씨, 혹시 아직도 화 나 있는 거예요? 기증 일은 내가 거짓말한 게 맞지만 그건 다 경빈 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경빈 씨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부터 쭉 경빈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무릅쓰고 내가 기증해줬다고 한 거예요! 내가 경빈 씨를 속인 건 맞지만... 그게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잖아요...”공수진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이에 이경빈은 시선을 돌려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내가 아닌 우리 집안을 사랑하는 거겠지. 더 정확히는 우리 집 재산을. 공수진, 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망가졌어!”“거짓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공수진은 전과 같은 유약한 얼굴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나 정말 경빈 씨 사랑해요. 경빈 씨 속상하게 만든 거 내가 다 잘못했어요. 탁유미 씨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과할게요. 보상도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잘해봐요. 나 정말 경빈 씨 없으면 못살아요!”“사랑이라고?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까지 주면서? 탁유미를 범죄자로 몰아가 결국 감방에까지 보낸 게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야? 탁유미만 사라지면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쉬울 것 같았어? 그래?!”이경빈은 공수진을 턱을 으스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공수진은 자신의 턱뼈가 이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경빈이 그때 당시의 진상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에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어떻게 된 거지? 이경빈이 그때 일을 다 알아버렸다고?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소거했는데?! 그래, 그냥 추측일 뿐일 거야. 실질적인 증거는 없는 게 분명해!’“오, 오해예요.”공수진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탁유미 씨를 범죄자로 몰아간 적 없어요. 나는
네티즌들은 공수진과 주원호에게 각종 비난과 욕을 해댔고 대대적으로 기사가 난 탓에 병원 관계자들도 공수진의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공수진은 그들의 눈빛에 제대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고 이를 깨물며 하루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드디어 다가온 퇴원하는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 기자들이었다.“공수진 씨,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강 그룹 대표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데 이경빈 씨는 동영상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유산한 아이가 이경빈 씨의 아이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분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탁유미 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밀쳐진 척 넘어져 유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연이은 날카로운 질문에 공수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공씨 부부는 공수진이 지나갈 수 있게 고용한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기자들을 뚫고 간신히 차에 오른 후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탁유미 때문에 이게 뭐야!”만약 탁유미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그녀는 모든 걸 다 탁유미 탓으로 돌렸다.“일단 S 시를 떠나는 게 좋겠다. 며칠 뒤에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경빈이 불러서 얘기하는 거로 해.”공한철의 말에 차량은 고속도로로 향했다.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검은 차들이 거리를 바짝 좁혀오며 공수진네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끼익.“뭐야, 저것들은!”공한철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차된 앞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공씨 일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이 내리자 검은 차에서 내린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공수진 일가를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경, 경빈 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