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지금 윤이 옆에 있는 사람 정말 윤이 아빠 맞아.”탁유미는 윤이에게 언젠가는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는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윤이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그때 다시 얘기해주려고 했었다.“왜 아빠는 이제야 하늘에서 내려온 거예요?”윤이는 이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이경빈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기침을 내뱉고는 탁유미를 힐끔 노려보았다.탁유미도 윤이가 설마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지 차마 이경빈 쪽을 보지 못했다.“아빠가 전에는 윤이가 있는 줄 몰라서 윤이 찾으러 못 왔던 거야.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제는 윤이 보러 자주 올 거야.”그는 차갑고 매정한 인간이지만 자기 핏줄 앞에서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솔직히 이경빈 본인도 자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이경빈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아이의 귀를 바라보았다.매번 윤이의 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다.이경빈의 아들이 장애라니.처음부터 원했던 아들은 아니지만 이경빈의 핏줄로 태어난 이상 윤이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줄 생각이다.윤이에게는 그 어떤 차별도 용납이 되지 않고 윤이는 모든 이가 떠받들어야 할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그럼 아빠 나 목마 태워줄 수 있어요?”윤이는 이경빈을 향해 활짝 웃으며 물었다.탁유미와 닮은 아이의 눈동자에는 갈망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윤이는 줄곧 아빠가 목마 태워주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탁유미에게도 목마 태워달라고 얘기해본 적 있지만 역시 아빠가 태워주기를 더 바랐다.지난번 곽동현이 목마를 태워줬을 때 윤이는 너무나도 기뻤다. 그래서 만약 자신에게도 아빠가 존재했으면 아마 이렇게 목마를 태워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그리고 지금 그토록 원하던 아빠가 바로 눈앞에 있다.이경빈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있어 생소한 부탁이 아닐 수 없었다.순간 부자간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그러니까... 윤이를 네 목에 태워주면 돼.”
윤이는 까르륵 웃으며 이 순간을 즐겼다.탁유미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윤이는 지금 정말 즐거워 보였다.윤이는 내성적인 아이라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보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아예 뒤로 숨어버리고 마음을 연 사람 앞에서만 활발해진다.그러나 지금처럼 흥분한 모습은 극히 드물었다.이경빈은 양복 차림으로 아이를 목에 태웠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다정함이 흘러나왔다.그는 윤이의 지시에 따라 오른쪽으로 움직이다가 또 왼쪽으로 움직였다.평소 냉랭하기 그지없는 이강 그룹 대표가 이런 이면이 있다는 것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탁유미는 순간 코가 시큰거렸다.부자 사이에도 연이 있는 것일까?이제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윤이가 4살이 될 때까지 이경빈은 한 번도 아이의 인생에 나타난 적이 없지만 윤이는 이경빈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였다.핏줄은 결국 핏줄이었다.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탁유미가 윤이를 향해 말했다.“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할머니 기다리시겠다.”윤이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이경빈의 목에서 내려왔다.아이를 탁유미에게 넘길 때 이경빈은 다시 원래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왔다.그걸 보고 탁유미는 쓰게 웃었다.그가 그녀에게 주는 건 언제나 이런 쌀쌀함과 냉랭함 뿐이었다.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그를 향한 감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윤이에게만 다정하면 되니까.탁유미는 아들을 데리고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윤이는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 이경빈을 바라보았다.“엄마, 아빠는 우리랑 같이 안 살아요?”아이가 물었다.윤이가 본 대부분의 아빠 엄마들은 모두 같은 집에 살았으니까.“응... 엄마랑 아빠는 오래전에 헤어졌어. 그래서... 같이 못 살아.”탁유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솔직히 얘기해주었다.그러자 윤이의 입에서 생각도 못 한 말이 튀어나왔다.“그럼 엄마랑 아빠는 이혼한 거예요?”“이혼?”탁유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정우네 엄마 아빠는 이혼했어요. 그래서 정우
그저 한 여자가 옛사랑을 잊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사랑과 배신이 있는 그런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하지만 오늘 이 이야기의 진짜 결말을 듣게 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그 여자는 자신을 가둔 남자를 결국 사랑하게 됐으면서 왜 그를 찌르는 선택을 했던 걸까.사랑이라는 감정은 느꼈지만 그 감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걸까?정혼자를 버리고 사랑한 게 고작 자신을 가둔 남자라서?그 여자는 그 후 어떻게 됐을까? 이 저택에서 나가고 난 뒤 다시 옛사랑을 찾아갔을까?아니면 홀로 인생을 마감했을까?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뒷이야기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호기심 가득할 나이는 이미 지났을 텐데 강지혁이 들려준 이야기 속의 여자는 너무나도 궁금했다.동병상련이라서 일까? 지금 자신도 이 저택에 갇혀 있는 신세라 그래서 궁금한 걸까?임유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 쪽으로 간 다음 커튼을 열었다.그녀의 방에서는 뒷마당의 연못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연꽃으로 가득한 연못은 낮에는 따뜻한 햇볕 때문에 예뻤고 저녁에는 달빛 때문에 예뻤다.하지만 지금 그 예쁜 연못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고 그 누군가는 연못에 있는 연꽃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달빛이 강지혁의 몸에 드리워지자 어쩐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벌써 새벽 1시간 넘어가는데 대체 강지혁은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임유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이대로 다시 커튼을 닫고 침대로 돌아가야 하는데 도무지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그때 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강지혁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똑같이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은은한 달빛이 그의 얼굴에 내리자 차가운 인상이 조금은 부드러워 보였고 낮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그의 이마에는 자연스럽게 앞머리가 내려졌고 뚜렷한 눈썹 아래에는 예쁘다는 말로는 형용이 안 될 두 눈동자가 있었다. 그리고 오뚝한
강지혁이 서 있는 자세가 아까 커튼을 닫았을 때 마지막으로 봤던 자세와 똑같았다.그는 2시간이 넘도록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계속 그녀가 있는 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임유진은 순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빠르게 방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우산이 어디 있는지 몰라 헤매다 눈에 보이는 담요를 들고 머리에 쓴 채 비를 뚫고 연못으로 향했다.담요를 썼다고는 하지만 머리 부분만 가려질 뿐 팔과 다리는 여전히 비를 맞고 있었다.차가운 물방울들이 피부를 때렸다.임유진은 서둘러 강지혁 앞까지 다가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말을 내뱉었다.“비 오는데 여기 왜 서 있어. 빨리 집으로 들어가자.”하지만 강지혁은 망부석처럼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왜 나왔어?”그의 목소리가 비를 뚫고 들려왔다.강지혁의 몸은 비로 다 젖어있었고 머리는 물론이고 얼굴까지 물방울들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오로지 임유진만 보고 있었다.“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임유진은 그를 집 안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고집스러운 그의 발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왜 나왔냐고 묻잖아.”강지혁은 방금 했던 질문을 다시 건넸다.임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그럼 네가 이렇게 계속 비 맞고 있는 거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내가 비 맞고 있어서 속상해?”“...”임유진은 그를 노려보았다.비는 점점 더 거세졌고 강지혁은 언제 온 건지도 모를 비를 이미 잔뜩 맞았으니 이대로 가다가 정말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주변에는 온통 빗소리뿐이었다.임유진은 몇 분 후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 속상했다고 쳐. 이제 들어갈 거야?”강지혁이 정말 아프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특히 이 저택에는 단둘밖에 없으니 만약 강지혁이 아프면 병간호는 오로지 그녀의 몫이 된다. 그러면 곤란하다. 그러니 속상한 게 아니라 곤란할까 봐 이러는 것이다.임유진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이런 생각들을 되뇌었다.하지만 정말 속상하지 않은 걸까?마음속 깊
임유진은 강지혁이 샤워할 동안 그의 방 안에서 기다렸다.기다리지 않으려 해도 어차피 이 저택은 그의 것이고 그녀가 갈 곳이라고는 그녀의 방밖에 없으니 따로 도망칠 공간도 없었다.그러니 괜히 힘 뺄 필요가 없다.강지혁의 방은 그녀의 방과 크기가 비슷했다. 가구 역시 나무색으로 되어 있었다. 다만 그의 방 한 벽면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이 벽도 설마 ‘피의 방’처럼 피로 물들어 있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소름이 돋은 채로 벽을 향해 다가갔다. 무서운 마음도 있었지만 솔직히 열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인테리어용일 지도 모른다.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샤워를 마친 강지혁이 안에서 걸어서 나왔다.그는 허리춤에 타올 하나만 달랑 두르고 있었고 그 덕에 근육질의 다부진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그리고 그의 두 눈은 나오자마자 임유진을 쫓았다.임유진은 순간 포식자 앞에 선 소동물이 된 느낌이 들었다.강지혁은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향해 다가왔고 임유진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발이 뭔가에 걸려 몸 전체가 뒤로 넘어가게 되었다.“꺄!”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는 본능적으로 옆에 있는 커튼을 아래로 끌어내렸다.커튼이 아래로 흘러내린 동시에 강지혁의 팔이 넘어지는 그녀의 몸을 덥석 받아냈다.임유진과 강지혁의 두 눈이 마주쳤다.“고... 마워.”깜짝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후 그녀는 어색하게 몸을 바로 세우며 그의 시선을 피하고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그러다 옆에 있는 벽을 보는 순간 다시 몸이 굳어버렸다. 임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서히 나머지 커튼도 열어젖혔다.벽에는 사진들이 빼곡히 붙여져 있었고 그 사진 속의 주인공은 오직 한 사람, 임유진이었다.“내 사진이 왜...”“왜 저기 붙어 있냐고?”강지혁은 그녀 대신 말을 이으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임유진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임유진은 그의 시선을 받고는 목이 타며 입술이 바싹 말라왔다.강지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 이렇게 임유진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임유진은 그가 기댄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지금 몸무게의 절반 정도 되는 무게를 전부 다 그녀의 어깨에 실었다.강지혁은 마치 피곤이 극에 달한 사람처럼 어디 편히 기댈 곳을 찾고 있는 듯했다. 잠깐이어도 좋으니 기대기만 해도 좋다는 것처럼 말이다.그리고 임유진은 지금 그의 기댈 곳이 되었고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을 통틀어 그녀가 유일한 기댈 곳인 것 같았다. 만약 이대로 그를 밀어내면 강지혁은 망망대해에 버려진 아이처럼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세상에.임유진은 자기가 생각하고도 말도 안 된다며 스스로를 비웃었다.강지혁의 유일한 기댈 곳이 그녀일 리가 없다. 지금 그는 단지 피곤함 때문에 이러는 것뿐이다.“그럼 쉬어. 나는 이만 방으로 돌아갈게.”임유진은 천천히 그를 밀어내고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막 한걸음 내디디려는 찰나 갑자기 몸이 뒤로 넘어가더니 강지혁에 의해 순식간에 침대와 그의 몸 사이에 갇혀버렸다.“이거 놔!”임유진이 화들짝 놀라 서둘러 그를 밀어냈지만 강지혁은 그럴수록 더 세게 안아왔다.“아무 짓도 안 해. 그냥... 이렇게 안고만 있을게.”강지혁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은 채 그녀의 숨결과 체온을 느꼈다.이렇게 해야만 비어있는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고 나아가 안심하고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자신을 강제로 취하기라도 할까 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의 말대로 그저 꼭 끌어안고 있기만 했다.다만 지금 그의 두 팔은 마치 애착 인형이라도 품에 끌어안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를 다시 밀어내보려고도 생각해봤지만 그랬다가는 그가 정말 어떻게 할지도 몰라 임유진은 그저 그의 품에 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그녀의 몸은 여전히 굳어 있었고 두 손은 강지혁의 가슴팍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까 샤워하고 나온 뒤 그가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잠든 그는 평소와 달리 날카로워 보이지도 않았고 압박감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기도 했고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다만 지금 그는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유약해 보였다.유약하다고?임유진은 바로 실소를 터트렸다.그러고는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의 품에서 완전히 몸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강지혁이 무의식중에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이윽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에 놀란 임유진이 서둘러 손을 빼려고 하자 강지혁은 점점 더 세게 조여오기 시작했다. 마치 간신히 손에 넣은 보물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처럼 말이다.임유진은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아무리 움직여도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설마 이대로 함께 자야 하는 건가?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다시 한번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그러기를 몇 번, 임유진은 이쯤 되니 강지혁이 사실 이미 깬 건 아닌지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물론 깨어있을 때처럼 힘이 셌지만 그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고 그저 손을 꽉 잡는 것 외에 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결국 임유진은 스스로와 타협하기로 했다.강지혁과 한 침대에서 잔 것이 처음도 아니니 문제 될 건 없다고 말이다.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다 옆에 있는 이불을 끌어와 서로에게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최대한 그와 거리를 벌려 침대 끝쪽 자리로 갔다.오늘은 어쩌면 제대로 자지 못할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그런 걱정과는 달리 임유진은 금방 잠이 들었고 심지어 해가 중천에 걸려서야 눈을 떴다.그녀는 눈을 비스듬히 뜬 채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다.지금이 몇 시지? 그리고 여기는 또 어디지?임유진은 아직 몽롱한 채로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고 했다.하지만 그때 오른팔이 뻣뻣한 느낌과 함께 누군가에게 잡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앞에 강지혁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의
“내가 여기서 나갈 수 있기는 하고?”임유진이 되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열 때문인지 그 웃음마저 허약해 보였다.“아니. 내 동의 없이 넌 여기서 못 나가.”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이런 말을 할 때인가?“그래서 약은? 너 지금 얼굴 불덩이야. 당장 약 먹어야 한다고.”이렇게 된 건 다 밤새 비를 맞고 있어서일 것이다.“없어.”강지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럼 너 휴대폰 어디 있어? 고 비서님한테 연락해서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겠다고 전해.”“병원 안 가도 돼. 며칠 쉬면 괜찮아 질 거야.”“그러면 해열제라도 사 오라고 해.”강지혁은 이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불을 열어젖히더니 침대에서 내려왔다.“너 설마 약 먹기 무서워서 그래?”그저 한번 해본 말이었는데 강지혁은 몸을 흠칫하더니 꽤 복잡한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빨개진 얼굴이 지금은 한층 더 빨개진 것 같기도 했다.설마 진짜 약 먹기 무서웠던 건가?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전에 약을 사다 줬을 그는 잘만 받아먹었다.“너 나 사랑해?”강지혁이 대뜸 자기를 사랑하냐고 물어왔다.임유진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지만 그래도 순순히 대답해주었다.“아니.”그 대답에 강지혁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더니 자조하듯 웃어다.“그런데 내 걱정은 왜 해? 내가 이렇게 열이 나는 게 너한테는 속 시원하고 좋은 거 아니야?”“내가 속 시원해지길 바란다면 날 여기서 내보내 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을 이를 꽉 깨물더니 그녀를 세게 노려보았다.“날 사랑하기 전까지 넌 여기서 못 나가. 나갈 생각 같은 거 꿈도 꾸지 마.”임유진은 어쩐지 강지혁이 마치 떼쓰는 아이 같아 보였다. 그것도 어지간히 고집부리는 3살짜리 아이 말이다.열 때문인 걸까?강지혁은 말을 마치고는 욕실로 걸어갔다.이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너 지금 네가 얼마나...”